한국전쟁 당시 거제도 신현읍(현 고현동) 독봉산 아래에는 엄청난 숫자의 전쟁포로를 수용한 대규모 포로수용소가 자리했다. 전쟁의 쉼표와 함께 포로수용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흔적만이 희미하게 남은 옛터는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으로 다시 태어나 쓰라린 역사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
이한나 편집위원
흥남철수작전 당시 모습 그대로
거제시청 건물을 지나 고현중학교 왼쪽 편으로 옛 건물 잔해가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입구다. 이곳은 유동 인구가 제법 많아 적막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뼈아픈 전쟁의 역사를 담고 있어서인지 조금은 무거운 기운이 감돈다.
공원 초입에 넓게 펼쳐진 주차장을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한국전쟁 참전 16개국의 국기가 게양돼 있는 분수광장이 방문객을 맞는다. 매표소를 거치면 가장 먼저 발길이 머무는 곳은 흥남철수작전기념비공원. 피난민의 애환을 담은 가요'굳세어라 금순아'가 공원 전체에 울려 퍼진다.
1950년 12월 23일 흥남철수 당시 1만4000명의 피난민을 태워 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배로 기네스북에 오른'메러디스 빅토리호'. 고철용으로 1996년 중국에 팔려 분해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곳에서 모형으로나마 당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물을 기어오르거나 사다리를 타고 필사적으로 배 위에 오르는 피난민들의 모습을 재현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영화 '국제시장'을 봤다면 더욱 실감할 수 있다. 배 모형 뒤편에는 철수작전 때 통역장교 현봉학 교수, 김백일 장군, 포니 대령, 알몬드 장군, 라루 선장 등 당시 영웅들의 업적을 새겨놓았다.
당시 포로 생활상 테마별 전시
유적공원 곳곳에 조성된 디오라마관, 포로생활관, 포로폭동 체험관 등 20여개의 크고 작은 전시실에서는 당시 포로들의 애환과 발자취를 볼 수 있다.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기하급수로 늘어난 공산군 포로를 관리하기 힘들어지자 1950년 11월 거제도 신현읍, 연초면, 남부면 일대에 1190여만㎡ 규모의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이곳에 30여명의 여자 포로를 포함해 17만 3000여명의 포로를 수용했다. 당시 거제에 주민 10만명, 피난민 15만명, 포로 17만여명 등 42만여명이 거주했다고 하니, 현재 거제 인구수 25만명과 비교하면 당시의 혼란상을 짐작할 수 있다.
공원 관람로를 따라 가장 먼저 보이는 '디오라마관'은 수용소가 1953년 휴전협정으로 폐쇄되기까지 3년 동안 포로들의 생활 전반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보급품을 지급받는 모습, 식사하는 모습, 목욕하는 장면까지 영상과 모형을 이용해 재현한다. 폭격을 맞은 건물의 외관을 재현한 모습의 '6·25역사관'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16개국의 현황과 피해현황, 전쟁 속 주민들의 살림살이 등을 소상히 보여준다.
폭동장면 첨단 기법으로 재현
공원 전체가 역사교육장이다. 가로수가 죽 이어진 관람로를 따라 걷다보면 한국전쟁 발발부터 정전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아픈 역사를 간접 경험할 수 있다. 기습 남침한 북한군과 전선을 사수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국군, 대동강철교를 타고 목숨을 걸고 피난길에 오르는 피난민들의 처참한 모습 등 한국전쟁의 여러 조각들을 실감나는 조형물로 제작해 관람로 곳곳에 전시했다.
계곡 사이를 가로지르는 30m 길이의 MP다리는 포로 출입관문으로 포로와 피난민의 경계이기도 하다. 이곳을 건너 포로들의 생활 속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간다. 거제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은 당시 유엔의 제네바협정에 의해 전장의 국군들보다 더 나은 생활을 했지만, 그들은 그 안에서 극심한 이념갈등을 겪으며 급기야 살상까지 벌였다.
포로폭동체험관에서는 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들 간의 갈등을 최첨단 연출기법으로 재현해 긴박감과 위기감을 생생히 전한다. 당시 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간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했고,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사령관 돗드 준장이 포로에게 납치되는 등 냉전시대 이념갈등의 축소 현장이었다.
유적박물관 호국영상물 상영
동선을 따라 뼈아픈 역사의 현장을 경험하다보면 어느새 가슴이 갑갑해진다. 다행히 폭동체험관에서 나오면 소나무 숲입구가 보인다. 푸른 소나무로 우거진 작은 숲 속에 놓인 널찍한 벤치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잠시 쉬어간다. 이처럼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역사의 교훈과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곳이다.
소나무 숲 옆으로 길게 조성된 데크를 따라 가면 포로수용소 유적박물관을 만난다. 포로수용소에 대한 각종 기록물과 영상자료, 포로들의 이송·수송·투쟁·송환 등 전반적인 사항과 각종 사건들에 대한 실물 기록을 전시한 박물관이다.
영화 상영실에서는 호국정신을 계승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기 위한 영상물을 상영한다.
박물관에서 나와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 한국전쟁 참전국을 기리는 청동조형물이 놓인 철모광장이 조성돼있다. 철모를 둘러싼 철조망을 걷어내는 국군과 북한군의 모습은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사용한 헬리콥터와 장갑차, 탱크 등 실제 군수장비와 무기들도 전시돼 있다.
평화파크는 어린이 체험시설
영화 '흑수선'의 촬영 장소로 유명한 포로수용소 야외막사는 사진 촬영 장소로 인기다. 당시 포로들이 생활한 막사와 감시 초소, 취사장과 화장실 등에서 쓰인 작은 생활도구까지 완벽하게 재현한 공간이다.
유적공원 한편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체험시설인 포로수용소 평화파크가 있다. 한국전쟁 관련 영화를 입체적으로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는 4D영화관, 전쟁놀이를 해보며 평화의 중요성을 깨닫는 평화탐험체험관 등 볼거리·즐길거리로 구성돼 있다.
거제포로수용소 폐쇄 이후 잔존 건물만이 남은 옛터는 한국전쟁의 참상을 말해주는 민족역사교육장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1983년 12월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99호로 지정됐다.
거제시는 잔존 시설을 보수해 지난 1999년 10월 거제시 계룡로 61(고현동) 6만4224㎡의 부지에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개관하고, 점차 평화파크 등 방문객 체험시설을 확충해나가면서 현재 모습을 갖췄다.
입장료는 어른 7000원, 청소년·군인 5000원, 어린이·경로3000원이다. 단체 입장객에게는 한명당 어른 5000원, 청소년·군인 3500원, 어린이·경로 2000원을 적용한다. 거제시민은 어른 3000원, 청소년·군인 2500원이다.
통영 용초도·추봉도에도
포로수용소 1년여 운영
거제포로수용소에 가려서일까, 통영 앞바다 2개의 섬에도 포로수용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통영시 한산면 용초도와 추봉도가 그곳이다. 이 두 섬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한 것은 늘어나는 포로들로 거제도 수용소가 수용한계에 도달한 데다 친공포로들의 폭동이 잦아지면서 다루기 힘든 포악한 포로들을 좀 더 외딴 섬으로 격리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1년여 전인 1952년 5월부터 두 섬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용초도에 8000여명, 추봉도에 9000여명을 수용했다고 한다. 수용소 설치 당시 두섬 주민들은 밖으로 쫓겨났다가 휴전이 되고나서도 3년여가 지난 1956년 3월에야 폐허가 된 섬에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은 사람이 사는 여느 섬과 같이 마을이 형성돼 있지만 당시 주민들은 망가진 옛집과 터전을 다시 일구며 질곡의 삶을 살아왔다. 용초도 용초마을 뒷산과 추봉도 추원·예곡 마을 일대에는 당시 포로수용소 흔적이 밭 언덕, 수풀 사이에 어렴풋이 남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아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