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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 카시노 전투에 투입된 독일 공수부대원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다룬 영화로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 : 1998 )이나 "지상 최대의 작전(the Longest Day : 1962 ) 이 있고, 상륙 후에 대규모 공수 작전으로 시작되는 연합군의 야심찬 마켓가든 작전을 영화화한 "머나 먼 다리"(Bridge Too Far : 1977 )가 있습니다. 또 안지오 전투와 벌지 전투조차 영화화되었는데 몬테 카시노 전투는 헐리우드에서 영화화된 적이 없습니다. 사실 위의 다른 영화들 못지않게 처절한 전투였지만 그런 면에서 좀 아쉬울 정도로 이 전투는 양진영의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끝을 맺은 전투였습니다.
(위키피디아에서 발췌한 몬테 카시노 전투의 규모. 양진영
함쳐서 7만5천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전투는 4개월하고 1일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앞 글에서 1944년 1월 22일에 안지오 상륙작전의 실패에 관해서 설명드렸습니다. 원래 연합군 지휘부의 작전 계획대로 맞아 떨어졌다면 1월 17일 최초의 몬테 카시노 전투가 개시된 후 불과 5일만에 독일군의 뒤통수를 때리는 격인 후방의 안지오 해안으로 연헙군 제 6 군이 상륙하면, 독일군은 부랴 부랴 몬테 카시노 방어 전력의 상당수를 안지오로 보낼 것이고, 그러면 안지오에서 전투가 벌어진 동안에 약화된 전력의 몬테 카시노 방어 독일군은 연합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무너질 것이다라는 예상이었습니다.
(몬테 카시노 방어의 주력 중에 하나인 독일 공수부대원들(팔쉬름예거)는
히틀러가 특히 아끼는 정예부대로써 이미 스칸디나비아 침공과 동부전선
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비록 1944년에 물자 보급은 연합군에
비해서 비교가 안될 만큼 부족한 독일군이었지만 이런 백전노장의 강병들이
있었기에 이제 막 참전한 미육군에게는 악몽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몬테 카시노를 공격하기 위해서 남쪽에서 올라온 미군과 영국군울 포함한 수많은 연합군들이 자신들이 상대하는 독일군들이 얼마나 강력한 상대인가를 몰랐던 것입니다. 안지오 상륙 소식을 접한 독일 방어군의 사령관 케슬링 원수는 연합군의 바램대로 상당수의 자신의 병력을 안지오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남은 병력만으로도 연합군의 몬테 카시노 공격을 큰 어려움 없이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1월 17일에 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비교적은 작은 규모의 영국군과 미군 부대들의 공격이었고 일부는 전진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이 공격의 실패함에 따라 성공한 병력 조차도 현 위치에서 참호를 파고 발이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연합군 지휘부는 1월 20일 미 36사단이 라피도 강에 수많은 보트를 띄우고 본격적으로 도강을 시도하는데 규모로 봤을 때 이 공격이 최초의 대공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은 유리한 위치에서 강을 건너오는 미군들을 향해 집중 포화를 쏟아부었고 대부분의 미군 병력들은 도하를 포기하고 후퇴하거나 강 한가운데서 익사하여 시체조차 찾지 못하는 끔찍한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일부 간신히 도하에 성공한 병사들조차 더이상의 전진은 엄두도 못내는 신세였습니다. 게다가 강변에 곳곳에 묻어놓은 지뢰들은 간신히 살아서 육지로 기어 올라온 병사들을 한순간에 산산조각 내버렸습니다.
(마틴 블루멘슨 著 "Bloody River"는 2차대전 중 미군이
겪은 최악의 패전 중에 하나로 기록되는 1944년 1월 20일에
라피도 강 도하 작전의 실패를 다룬 책입니다.
작가는 36사단의 패전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휘관의
무능한 리더쉽을 들고 있습니다.)
(미 36사단 기념 박물관 웹사이트에 있는 라피도 도하 작전
상황을 재현한 그림. 36사단은 원래 미국 텍사스 주 방위군
소속 부대로써 2차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본래의 임무인
국내 방어가 아닌 유럽 전투에 투입되게 되었습니다. 라피도
전투의 결과 천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강물에 휩쓸려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연합군의 야심찬 라피도 강 도하 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작전 개시 이틀만에 36사단은 1,000명이 넘는 전사자와 행방불명 (사실상 전사), 그리고 부상자를 합하면 무려 2,100명의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1월 22일에 시작된 안지오 상륙 작전도 이미 설명 드렸듯이 몬테 카시노를 방어하는 독일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얻지 못하였고, 라피도 도하 작전이 실패로 끝난 후에 1월 24일 이번에는 미 2군단에 편성된 미 육군 34 보병 사단과 자유 프랑스군 부대(프랑스 망명 정부의 부대로써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 병사들도 함께 편성되었음.)가 함께 공격을 시작합니다. 2월 11일까지 어어진 처참한 전투의 결과 독일측 프랑크 장군이 지휘하는 44 보병 사단을 밀어내고 드디어 몬테 카시노 산 초입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성과를 얻게 됩니다.
(몬테 카시노 첫번째 공세의 작전 지도입니다. 지도에서 보듯이 구스타프 라인과 함께 가로지르는 라피도 강은 연합군의 공격에 엄청난 장애물이었습니다.)
특히 산의 우측 경로로 진격했던 자유 프랑스군은 독일 링겔 장군 휘하의 제5 산악 사단에 타격을 가하면서 전진을 하게 되는데 1월 31일까지 이어진 공방전에서 프랑스 사단은 무려 2,500명의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엄청난 피해를 입은 프랑스 군에 뒤를 이어서 미 36사단의 잔여 병력과 합쳐진 미육군 34 사단은 추가 전진의 임무를 받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산악 지대에 진입한 34 사단은 온통 돌 투성이의 척박한 지형에서 전차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이 유리한 위치의 독일군과의 전투를 시작합니다. 특히 사방 천지에 설치된 독일군의 부비트랩으로 미군은 뜻밖의 피해를 입고, 병사들은 공포에 떨게 됩니다.
(타미야 빈티지 밀리터리 키트 중에 하나인 나치 독일의 공수부대. 몬테 카시노 전투는 그 시작과
끝까지 이들 공수부대의 활약으로 인해서 연합군은 끔찍한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그들 못지 않은 "독종" 상대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바로 나치 독일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되고
학살된 폴란드의 망명 정부 소속 자유 폴란드 부대들이었습니다.이는 아래 소개될 뉴질린드 사단의
인도군들과 그외 연합군들의 끔찍한 희생 후에야 비로서 벌어질 이야기입니다.)
독일군은 쿠스타프 라인의 급소라 할 수 있는 몬테 카시노 지역에서의 전투를 위해서 이미 3개월 동안 충분한 시간을 갖고 방어 준비를 해왔으며 치밀하게 설치된 부비트랩을 건드린 미군 병사들은 순식간에 다이너마이트의 폭발로 목숨을 잃곤 하였습니다. 게다가 돌 산은 공격하는 입장에서 적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자연 엄폐물이 없는 탓에 독일 저격병들에게 좋은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태리의 겨울은 끝없이 내리는 비와 뼈 속까지 얼게 하는 추위로 병사들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2월 초까지 공격 목표인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서 불과 1마일 전방까지 전진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2월 7일 1개 대대 병력이 수도원이 위치한 언덕 바로 밑에 지점에 도착하였고 이 지점은 불과 370m 떨어진 지점이었습니다. 그 중 1개 분대가 최초로 절벽이나 다름없는 수도원을 향해 접근하려는 순간 수도원 바로 앞에 배치되어있던 독일 제2 공수 여단의 일제 사격이 시작됩니다. 지형적으로도 유리하였지만 나치 최정예 부대라 할 수 있는 그들의 공격에 미 34사단 병사들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후퇴하게 됩니다. 미군의 후퇴 후 그자리는 미8군 소속 뉴질랜드 사단(실제로 뉴질랜드 군과 인도군으로 구성되었음.)이 맡게 됩니다.
(뉴질랜드 사단에 소속된 인도군의 모습, 터어번을 쓴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자꾸
일본 강점기 타의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온 우리나라 학도병들의 모습과 겹쳐지게 됩니다.
특히 인도의 무더위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이태리의 살을 에는 초봄 날씨는 최악의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수많은 희생임에도 불구하고 몬테 카시노는 함락되지 않습니다.)
2월 11일까지 3일 동안 수도원에 진입하려던 미군의 공격은 독일 공수 부대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이후 약 20일 간의 치열한 전투의 결과로 미 34사단의 2,000명(사단 병력의 80%)의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 근접한 연합군과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독일은 수도원을 방어하는 공수부대에 추가로 보병 대대 병력을 투입하게 됩니다.
(B-17 하늘의 요새)
새롭게 투입된 인도군 부대는 카시노를 공격한다는 것이 지형적으로 얼마나 불리한 조건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전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탓에 유리한 지형에서 반격을 가하는 독일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으면서 고전을 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군 수뇌부는 구스타프 라인을 뚫기 위한 공격의 거듭되는 실패의 주된 이유가 바로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 독일군들이 거점을 잡고 공격해오는 연합군들을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정확한 공격 지점을 관측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이런 판단은 실제로 객관적인 증거도 없이 정황상 그럴 것이다라는 추측들이 모여서 기정 사실화 된 상황이었고 1944년 2월 11일 제4 인도군 사단은 수도원의 공습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서 미공군의 지휘관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강력한 폭격기들이 얼마나 위력적으로 지상군을 지원하는지 선전할 수 있는 기회라 판단하고 수도원 폭격 작전을 위한 폭격 규모를 필요 이상으로 증가시켜서 계획합니다. 하지만 마크 클라크 장군과 같은 일부 지휘관들은 이런 수도원 폭격의 필요성에 의문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 독일군이 수도원에 주둔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주둔해있다면 분명히 수도원이 방어를 위한 효과적인 관측 거점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에 강력하게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합니다. 실제 독일군의 포격은 수도원 밑 쪽에 언덕에 구축된 진지에서 이루어졌고, 수도원을 폭격할 군사적인 필요성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 훗날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B-25 미첼 폭격기)
실제 독일 방어군 사령관 케슬링 원수는 수도원을 방어 거점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연합군측에 전달하였으나 연합군이 이런 사실을 믿지 않고 공격을 해올 것이라는 사실도 예측하여 공습 전에 대부분의 귀중한 고문서들과 서적들을 수도원 밖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어쨌든 2월 15일 무려 142대의 "하늘에 요새" B-17 중폭격기와 47대의 B-25 미첼 폭격기 그리고 40대의 B-26 마로더 폭격기까지 하늘을 뒤덮고 무려 1,150톤의 고성능 폭탄을 수도원 위로 쏟아버렸습니다. 엄청난 폭발이 거듭되면서 수도원의 윗부분은 순식간에 거대한 자갈 더미로 바뀌어버렸는데 공습 당시에 수도원에는 독일군들이 없었고, 수도원을 피신처로 삼아 거주하던 230명의 이태리 주민들만 폭격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수도원 주변에 주둔해있던 독일군들은 수도원에 집중된 공습에서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막연한 추측만으로 수백년 동안 귀중한 문화 유산의 가치를 지닌 중세 수도원을 무지막지한 폭격으로 부쉬버리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셈입니다.
(B-26 폭격기)
당시 공습이 얼마나 서둘러서 준비되었는가는 미공군의 공습 당일 수도원 코앞에까지 전진해있던 인도군 사단 병력이 그날 공습 계획을 전혀 통보받지 못하였고, 정작 공습이 시작되자 독일군 못지않게 인도군들도 놀핬습니다. 연합군 지상군이 공격 준비도 되기 전에 공습이 너무 일찍 시작되었고, 이어진 악천후로 효과적인 지상군의 공격이 이어지지 못하였습니다.
(폭격의 결과 폐허가 된 몬테 카시노 인접 마을의 모습. 정말 건물들이 산산히 부서져
버린 폐허의 모습이 당시 지나칠 정도로 강력한 분량의 폭격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카톨릭 교계에서는 이 어리석은 공습에 대해서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습니다.(하지만 정작 바티칸에 교황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당시 교황은 이태리 독재자 무솔리니와 결탁하고,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눈 감았던 비열한 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일부 폭격은 오폭으로 연합군 지상군에게조차 사상자를 발생시켰습니다. 실제로 16개의 폭탄이 몬테 카시노에서 무려 27킬로미터나 떨어진 5군 부대에 떨어져서 피해를 입혔습니다. 심지어 클라크 5군 사령관이 집무 중이던 임시 관사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던 트럭이 폭탄으로 파괴되었습니다.
공습 이전까지 독일군은 수도원에 진입하지 않고 성직자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지만 도리어 공습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수도원에서 성직자들과 주민들이 모두 떠나자 이제는 마음 놓고 수도원을 방어 거점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아이러니컬하게도 연합군의 공습 덕분에 자갈 더미가 되어버린 수도원은 독일군 입장에서 이눈치 저눈치 안보고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최정예 공수부대원들이 본격적으로 수도원의 폐허를 효과적인 방어진지로 구축하게 됩니다.
공습 후에 연합군 소속 인도군 부대들은 지상 공격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공격은 절반 이상의 사상자를 내면서 실패로 끝나게 되는데 폐허 더미 속에서 맞닥뜨린 독일 공수부대와 인도군들의 전투는 때로는 백병전이 될 정도로 처참한 지경이었습니다. 이틀 밤에 걸친 공격의 결과 인도군에 15명의 장교들 중에서 12명이 전사했고, 313명의 사병들 중에서 절반이 넘는 162명을 잃었습니다. 2월 18일까지 300명이 넘는 전사자가 추가로 발생하면서도 인도군은 더 이상의 전진을 못하고 도리어 후퇴를 하게 됩니다.
(몬테 카시노 전투 중에 파괴된 독일군 전차를 조사하는 뉴질랜드 군)
수도원 공습 후에 지상군 공격이 독일군 공수부대의 강력한 반격으로 처참한 실패로 끝나게 되자 연합군은 다시 한번 공격 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악천후가 계속됨에 따라 실제 공세가 시작된 것은 3월 15일이었습니다. 3월 말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연합군과 독일군 모두 수백명의 전사자를 양산하면서 끊임없이 살육전이 이어집니다. 연합군 폭격에 수도원과 카시노 마을에 진입하여 방어를 하던 독일군 공수부대들도 절반 이상이 전사하였고, 특히 인도군 부대에 소속되었던 네팔 출신의 산악전 전문 부대 고르카군은 몬테 카시노 돌산에서 독일군 공수부대원들과 맞서서 용맹하게 싸웠으나 거의 절반의 병력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게 됩니다. (사실 인도군이나 네팔 출신의 이들은 만약 그들의 조국이 영국의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자신들의 고향에서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이태리에 와서 독일군의 총탄에 세상을 등질 운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일본 강점기 시절 원하지 않던 전쟁터에 끌려나갔던 우리나라 학도병들의 신세와 큰 차이가 없는 비극적인 운명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쨌든 인도군이 수도원 코 앞까지 전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더이상의 전진을 못하자 연합군 사령관 알렉산더 장군은 새로운 전략을 고심하게 되는데 이때 자유 프랑스 군(점령된 프랑스에서 탈출한 드골 망명 정부 소속 부대) 지휘관 Juin 장군의 의견을 채택하게 되는데 카시노를 빙 둘러싸고 포위하여 압박해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전에는 미5군(미 2사단과 자유 프랑스 군)과 영국8군(13사단과 망명 폴란드 군 사단)이 투입됩니다. 4월이 되자 완연한 봄이 되어 3월까지 인도군의 진격을 방해했던 끔찍한 악천후는 멈추게 되었고 공격하는 입장에서 보다 넓은 진영으로 기갑부대의 효과적인 운영이 가능해집니다.
(몬테 카시노 전투에 투입된 폴란드 군의 모습. 그들의 활약은 몬테 카시노 전투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본격적인 공세는 5월 11일부터 이틀간 시작됩니다. 영국8군의 1,060문의 대포와 미5군의 600문의 대포가 일제히 포격을 시작했고 영국,미국,뉴질랜드,폴란드,남아프리카 그리고 자유 프랑스군까지 총동원된 지상군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합니다. 4개로 나뉘어진 지점에서 1시간 30분의 공격이 지속되었으나 몬테 카시노 서쪽을 공략하던 미군쪽은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거의 진격을 못하며 고전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미5군 소속 자유 프랑스군이 먼저 전진에 성공을 거두고 동쪽에 영국 8군이 맡은 지역에서 영국 제4보병 사단과 제8 인도군 사단은 라피도 강을 건너서 몬테 카시노에 근접한 거리까지 전진하는데 성공합니다. 또한 독일군의 치열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인도군 사단의 공병들은 라피도 강에 다리를 놓고 캐나다 제1 기갑여단의 전차들을 도하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동안 미군과 인도군이 선봉에 섰던 뉴질랜드 사단의 공세때 라피도 강에 가교 설치에 실패하여 전차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황을 고려하면 라피도 강 도하 작전의 성공은 향후 연합군 공격의 판도를 바꾸게 됩니다. 향후 맞닥뜨리게 될 독일 전차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연합군 전차의 투입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몬테 카시노 위쪽 산악 지대에서는 독일군 산악부대가 폴란드 망명 정부군에 의해 패퇴하고 3일 동안 용맹한 폴란드 군은 독일군 공수부대와 양쪽 엄청난 희생을 치루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는데 폴란드 군은 3일 동안의 전투에서 무려 281명의 장교들과 3,500명의 사병들을 잃게 됩니다. 놀랍게도 이런 연합군의 집요한 포위 공격을 막아낸 독일군 공수부대 병력은 고작 800명이었습니다. 훗날 생존한 독일군 공수부대 장교의 증언은 당시 폴란드 군의 용맹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진격해 들어간 폐허 속에서 한명의 폴란드 병사가 피투성이로 두 다리가 절단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미 탄환도 바닥이 난 채 우리를 보면서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주변에 돌맹이를 집어들어 던지면서 저항했습니다. 그는 곧 총알 세례를 받고 절명했는데 정말 끔찍한 순간이었습니다...."
(이태리 전선에 투입된 폴란드 망명 정부 소속 군인들. 그들의 동포들이 나치 독일에게 끔찍하게 학살된 원한을 갚기 위해서
그들은 다른 연합군들이 감히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로 독일 최강의 공수부대원들이 주축이 되어 방어하던 몬테
카시노를 점령하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폴란드는 나치 독일이 전쟁을 발발한 직후 전격전의 희생물이 되어 철저하게 초토화되었고 엄청난 숫자의 군인들과 주민들은 점령군 독일군의 집단 학살로 희생되었습니다. 그런 탓에 폴란드 망명 정부의 병사들은 독일에 대한 적개심으로 말하면 미군이나 영국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탓에 비록 영국 8군에 소속되어 참전한 전투였지만 독일 최정예 부대인 공수부대와 전투에서 단 한걸음도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임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2차대전 말기에 상해 임시정부 출신으로 미군에게 훈련을 받았던 독립군 부대가 실제 일본군과 전투를 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폴란드군 못지않은 용맹을 보였을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5월 12일 오후까지 라피도 강을 건널 수 있는 가교는 추가로 설치되었고 5월 13일에 드디어 독일군의 동쪽 진영이 미5군의 공격에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몬테 카시노에 인접한 몬테 마조 산 정상을 점령한 자유 프랑스 군의 활약으로 연합군은 몬테 카시노를 향해 대등한 높이에서 포격을 가할 수 있게 되면서 독일군은 퇴각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포탄들을 전부 연합군을 향해 일제히 쏟아부으면서 타격을 주게 됩니다. 케슬링 원수가 이끄는 독일군 방어 병력은 쿠스타프 라인을 드디어 포기하고 약 13킬로미터 북쪽에 설정한 방어선(일명 히틀러 라인)으로 후퇴하게 됩니다.
(연합군이 함락한 후에 몬테 카시노 폐허에 진입한 셔먼 탱크)
5월 15일 영국 78사단이 투입되면서 몬테 카시노 공격에 큰 타격을 입고 주춤했던 폴란드군은 두번째 공세를 시작합니다. 몬테 카시노에 고립된 독일군 병력은 치열한 저항으로 연합군에게 마지막까지 엄청난 타격을 주었지만 결국 쌍방이 맞닥뜨리는 거리까지 접근하게 되자 코 앞에 적에게 총검을 찔러대는 백병전 양상이 되어갔습니다. 결국 5월 17일 몬테 카시노 수도원의 폐허에 남은 독일 공수부대원들은 최초로 수도원에 진입한 폴란드군의 공격에 하나 둘씩 쓰러져갔고, 얼마 안되어 온통 돌 무더기로 변한 수도원을 점령한 폴란드군은 폴란드 국기를 게양하면서 몬테 카시노 전투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영국8군은 히틀러 라인까지 후퇴한 독일 방어 부대를 뒤쫓아 거침없이 진격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결국 연합군은 오랜 몬테 카시노 전투의 승리 후에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다음 작전을 준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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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랜만에 따블오남편님의 멋진 리뷰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리뷰"라고 하시니까 좀 뜨끔한데 이거 "리뷰"아니고 그냥 역사 이야기 늘어놓는 것인데......... 언젠가는 "키트 리뷰" & "제작기" 올릴 날이 있을 것입니다요! 언제가는.....................
아...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처참합니다. 휴~
감사합니다. 이제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되었네요. 뭐 급한 일도 아니니 좀 차분하게 이야기 풀어나가겠습니다.......
지금 그냥 역사 이야기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실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런 글들 하나 하나가 제 제작기에 바로 바로 연결할 수 있는 고증의 배경 스토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카페 회원분들을 위해서도 이차대전 이야기를 써가지만 언젠가 시작할 제 자신의 제작기의 참고 자료로써 이글들을 써가고 있습니다.
뉴저지에 살면서 제가 사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요즘에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얼마 전까지 겊핏하면 극장에서도 미친 놈이 총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쏴 죽이곤 하더니 이제는 마라톤 하는 장소에서 폭탄이 터지네요. 허 참...............
폭격기 이름이 틀렸네요. 내일 고쳐야하겠네요.
너무나 처절한 전투이지만 역사에 잊혀진 전장터가 이탈리아 전선이 아닌가 싶습니다.아마도 2차대전 유럽에서 가장 처절했던 곳은 동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이지 않나 싶네요.항상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동감입니다.
오오.. 실감납니다. 전장의 긴박함이 생생하게 밀려 오네요. 매번 올려주시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