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브/손원평/창비
책장을 덮으니, 뭔가 어중간한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뭘까?
셰익스피어의 문학이 고전인 것은 복합성과 입체성이 두드러져라고 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튜브]는 뭔가 알 수 없는 것, 복합적이지도 입체적이지도 않는 느낌이다.
처음부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서술 형식, 오르한 파묵의 [나는 빨강이다]나, 밀란 쿤테라의 [불멸]에서 본 듯 한 서술형식이, 친숙하게 느껴지면서도 새롭지 않게 다가와서 뭔가 좀 아쉽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뜬금없이 지푸라기라니, 제 아무리 물속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지만, 지푸라기 프로젝트라는 이름은 전체적인 책 내용과 조금은 동떨어진 느낌의 작명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다른 이름으로 했다면 어땠을까? 김성곤이 하고 있는 ‘등 곧게 펴기’ 같은 도전은, 현재 #챌린저스 라는 앱에서 다양한 내용으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비슷하다.
그래도, 좋은 점은, 별 것 아닌 것을 별 것인 것처럼 만드는 매일의 도전이, 매일의 작은 변화를 가져오고, 그것이 사람을 달라지게 할 수 있다는 면은 굉장히 긍정적으로 읽힌다.
내가 경험한 별것 아닌 그것은,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시작한 새벽 산책을 4년째 이어오고 있다. 언젠가는 무어라도 달라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여전히 새벽 산책을 즐기고 있다.
지푸라기가 튜브가 되는 그날까지 도전하고 또 도전하고 또 도전하는 일이, 마치 시지프스의 형벌이라도 되는 것처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굴레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는 굳건한 모습을 보여주려 애쓰고 있다. 그런 면이 인간 삶의 비애처럼 느껴져서 슬프기도 하다.
그나마, 요즘에 뜨고 있는 유튜브를 소재로 사용한 점이나, 대기업이 개인을 집어삼킨 점 등은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듯한 현실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렇다하더라도, 주변의 인물들과는 화합하지 못하고 무시하고 외면하고 싸움을 하면서, 사이버 공간속에서 위로 받고, 힘을 얻는 다고 표현된 부분은, 잠깐의 이익을 위해서 모였다가 흩어지는 군중처럼, 어쩌면 더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인간의 깊은 외로움을 외면한 부분처럼 느껴져서 아쉬움이 남는다.
가장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은 박실영 아저씨다. 인생의 수많은 경험을 한 뒤에 초월한 느낌으로 그려진, 뭔가를 다 아는 듯한 인물로 그려진 모습이 뭔가 아쉬움을 주는 것은. 아마도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고 또 성공하고 실패한다고 해서, 김성곤 안드레아처럼 자살을 꿈꾸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삶에 대한 고민의 결과로 선택한 결정이라고 해도, 두 번씩이나 자살을 시도하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살아남게 그려진 부분은 굉장한 아쉬움이 남는다.
더더군다나 주인공의 이름에 세례명까지 붙여놓고서 말이다.
등장인물들 이름에 세례명을 굳이 붙여서 말하는 것은, 없어도 될 것 같은 군살 같은 느낌이 든다.
지푸라기보다는 튜브가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하기에, 책 제목을 튜브로 했을까?
전체적으로 책 제목과 내용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로 봐도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든다. 튜브는 익명에 의존하는 도구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결국 오래가지 못할 도구처럼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내가 물에 빠졌을 때, 누군가의 도움 없이 튜브는 내가 의지할 수 없을 것이기에, 자력으로 헤엄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으로 묘사했더라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표현했어야 할까? 참 쉽지 않지만, 모든 문제는 주체적으로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라면, 거기에 튜브라는 도구는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