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
김태길
사람은 가끔 자기 스스로를 차분히 안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떠한 자세로 서 있는가? 나는 유언무언(有言無言) 중에 나 자신 또는 남에게 약속한 바를 어느 정도까지 충실하게 실천해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으로 정돈(整頓)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리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반성의 자세로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바닥을 흐르는 갖가지 상념(想念)을 어떤 형식으로든 거짓 없이 종이 위에 옮겨 놓은 글은, 자기 자신을 비추어 주는 자화상(自畵像)이다. 이 자화상은 우리가 자기의 현재를 살피고 앞으로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울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것은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고 장래를 위하여 인생의 이정표(里程標)를 세우는 알뜰한 작업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엉클어지고 흐트러진 감정을 가라앉힘으로써 다시 고요한 자신으로 돌아오는 묘방(妙方)이기도 하다. 만일 분노(憤怒)와 슬픔과 괴로움은 하나의 객관적(客觀的)인 사실(事實)로 떠 오르고, 나는 거기서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餘裕)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돈하기 위하여 쓰는 글은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말을 쓴다. 아무도 나의 붓대의 길을 가로 막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바를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 따라서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본래 상품(商品)이나 매명(賣名)을 위한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읽기 위한 것이요, 간혹 자기와 절실히 가까운 벗을 독자로 예상할 경우도 없지 않으나, 본래 저속(低俗)한 이해(利害)와는 관계가 없는 풍류가(風流家)들의 예술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상(高尙)한 취미의 하나로 헤아려진다.
모든 진실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스스로의 내면(內面)을 속임 없이 솔직하게 그린 글에는 사람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감동이 있다. 이런 글을 혼자 고요히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일일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누구에겐가 읽히고 싶은 충동(衝動)을 느낀다. 가까운 벗에게 보인다. 벗도 칭찬을 한다.
“이만하면 어디다 발표해도 손색(遜色)이 없겠다.”
하고 격려(激勵)하기도 한다.
세상에 욕심(慾心)이 없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칭찬과 격려를 듣고도 자기의 글을 ‘발표’하고 싶은 생각이 일지 않을 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노트 한 구석에 적었던 글을 원고 용지에 옮기고 그것을 어느 잡지사에 보내기로 용기를 낸다. 그것이 바로 그릇된 길로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想像)하지 못하면서, 활자(活字)의 매력에 휘감기고 마는 것이다.
잡지나 신문은 항상 필자를 구하기에 바쁘다. 한두 번 글을 발표한 사람들의 이름은 곧 기자(記者)들의 수첩에 등록(登錄) 된다. 조만간(早晩間) 청탁서(請託書)가 날아오고 기자의 방문을 받는다. 자진 투고자(自進投稿者)로부터 청탁을 받는 신분으로의 변화는 결코 불쾌한 체험이 아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청탁을 수락(受諾)하고, 정성을 다하여 원고(原稿)를 만들어 보낸다. 청탁을 받는 일이 점차(漸次) 잦아진다.
이젠 글을 씀으로써 자아(自我)가 안으로 정돈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밖으로 흐트러짐을 깨닫는다.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각을 정열에 못 이겨 종이 위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괴지 않은 생각을 밖으로부터의 압력에 눌려 짜낸다. 자연히 글의 질(質)이 떨어진다.
이젠 그만 써야 되겠다고 결심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먼길을 내집까지 찾아온 사람에 대한 인사(人事)를 생각하고, 내가 과거에 진 신세를 생각하며, 또는 청탁을 전문(專門)으로 삼는 기자의 말솜씨에 넘어가다 보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쓰겠다고 한번 말만 떨어뜨리고 나면 곧 채무자(債務者)의 위치에 서게 된다. 돈빚에 몰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글빚에 몰리는 사람의 괴로운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글을 쓴다는 것이 즐거운 작업이나 고상한 취미가 아니라 하나의 고역(苦役)으로 전락(轉落)한다.
글이란, 체험과 사색(思索)의 기록이어야 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글은 읽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체험하고 사색할 시간의 여유를 가지도록 하라.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 만 알을 꺼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한동안 붓두껍을 덮어 두는 것이 때로는 극히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안으로부터 넘쳐 흐를 때, 그때에 비로소 붓을 들어야 한다.
일단(一旦) 붓을 들면 심혈(心血)을 기울여 써야 할 것이다. 거짓 없이 성실하게, 그리고 사실에 어긋남이 없도록 써야 한다.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 될 것이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속여서도 안 될 것이며, 일부의 사실을 전체의 사실처럼 과장(誇張)해서도 안 될 것이다.
글이 가장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지는 예는 인기(人氣)를 노리고 붓대를 놀리는 경우에서 흔히 발견된다. 자극을 갈망(渴望)하는 독자나 신기(新奇)한 것을 환영하는 독자의 심리에 영합(迎合)하는 것은 하나의 타락임을 지나서 이미 죄악이다.
글 쓰는 이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잘못은 현학(衒學)의 허세(虛勢)로써 자신을 과시(誇示)하는 일이다. 현학적(衒學的) 표현은 사상(思想)의 유치(幼稚)함을 입증(立證)할 뿐 아니라, 사람됨의 허영(虛榮)스러움을 증명하는 것이다. 글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칭찬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읽고 알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어야 하며, 진실의 표명(表明)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나의 자아(自我)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시키는 일이다.
♣ 감상의 길라잡이
글쓰기가 가지는 덕성, 자신의 글쓰기 체험, 글쓰는 이가 주의해야 할 점들을 간결한 문체로 서술한 글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경계해야 할 게 무엇인가를 체험적으로 지적해두기도 했다.
지은이는 <자기를 차분히 정리할 목적>의 글쓰기에 가치를 둔다. 반성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헝클어진 감정을 정리하는 방편으로서의 글쓰기를 권한다. 간장을 글로 옮기는 순간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로 화하고, 객관화한 거리는 마음의 여유를 주는 법이니 <쓰고 싶은 말을 무엇이건 할 수 있는, 즐거운 작업이 바로 글쓰기다.>라는게 지은이의 수필 개념이다.
그런 글을 자꾸 반복하다보면 <진실에는 아름다움이 깃들기 마련이라> 이름이 알려지고, 그러다보면 청탁이 온다. 그러나 강제와 약속으로 쓰는 글은 질이 떨어지고 고역이 돼 버린다.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 만 알을 꺼내는 것> 같은 글쓰기는 경계해야 한다고 자신의 체험을 중심으로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글쓰기는 사람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는 교훈적인 내용이다.
♣ 작품의 해제
작자 김태길
갈래 경수필
성격 교훈적, 사색적
제재 글쓰기
주제 글이란 체험과 사색의 기록
♣ 구절 연구 및 분석
1) 묘방(妙方) : 교묘한 방법
2) 매명(賣名) : 이름을 파는 행위
3) 손색(遜色) : 견주어 보아 모자라는 점.
4) 영합(迎合) : 남의 마음에 들도록 힘씀.
5) 현학(衒學) : 학문이 있음을 뽐냄.
첫댓글 생각이 고이기를, 나의 자아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시키는 일이 우선이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