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노인
차는 다시 대전으로 되돌아 왔다. 벌써 아침 7시가 다 되었다.
문호는 경찰서로 가지 않고 바로 중앙 관광호텔로 직행했다.
도착하자마자 당직 지배인부터 찾았다.
프론트에 있던 벨 보이들이 부석부석한 눈을 부비며 나왔다.
"지배인 어디 갔지?"
"어젯밤 홀랑 새우고 댁으로 일찍 돌아가셨어요."
"다음 책임자는 누구야?"
"전데요. 무슨 일로..."
검은 양복을 입은 종업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어젯밤 사건 때문에 투숙한 손님들 있는 곳으로 안내 좀 해줘요"
검은 양복으로 정장한 종업원이 앞장서서 걸어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6층 버튼을 눌렀다.
증인으로 자청해서 나섰던 사람들은 잠에 떨어졌는지 문들이 꽉꽉 잠겨 있었다.
"거 제일 나이 많은 영감이 투숙하고 있는 방은 어디죠?"
"602호실이에요."
문호는 602호 방문 앞에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같은 간격으로 3, 4회나 눌러댔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깊이 잠드신 모양인데요."
종업원이 무의식적으로 도어 핸들을 비틀며 중얼거리다 말고 깜짝 놀란다.
손잡이는 힘없이 그의 손아귀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어? 문이 열려 있네. 어떻게 된 거지."
종업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호가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시트 는 사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정돈되어 있었고 테이블에 커피잔 하나 만이 덜렁
놓여 있었다. 문호는 화장실에까지 들어가 확인해 보았다. 치약도 칫솔도 비누도 어느
것 하나 사용한 흔적 없이 그대로 있었다.
"언제 나갔지?"
"글세... 잘... 모르겠네요. 어이 미스터 김 이리 좀 와봐. 602호실 손님 언제 체크
아웃했는지 알아봐."
조금 전에 나왔던 눈이 부석부석한 벨 보이가
"저도 잘 모르겠네요. 부지배인님이 오실 때에도 박스에 키가 없었어요." 하고 대답했다.
"키? 지금은 어딨지?"
"가만 계세요. 제가 확인해 보고 올께요."
벨 보이가 프론트로 나가더니 한참 후에 나타났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프론트에도 키가 없네요."
"그래? 그럼 방을 뒤져 봐."
602호 키는 침실 베개 밑에서 나왔다, 다른 방에는 신부와 베이지 색 바바리 여인과 그의
동행자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애꾸가 아니라고 잘라 말하던 노인만이 호텔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짐작은 했지. 아직 단정을 할 수 없지만 애꾸가 사라진 것은 논리 적으로 성립이 돼.
아직 가정이긴 하지만..."
"어떤..."
최찬일이 호기심이 가는지 옆으로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자, 이왕에 노인은 놓친 거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자구. 가만 있자 노인의 연락처가 어디더라.
주소는 주민등록증 보고 제대로 기록해 놓았겠지?"
노인을 놓친 게 억울한 듯 주먹으로 벽을 쾅쾅 쥐어박던 문호가 호텔광장으로 되돌아가
차를 다시 서울로 몰았다. 차 속에서 한 마디 도 않고 있던 문호가 머리를 끄덕끄덕하더니
그대로 잠에 떨어졌다.
서울은 아침 햇살에 안개가 말끔히 가셔져 있었다.
아침 수사 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문호는 사무실과 가까이 있는 '아람 다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Q신문 사회부 차장 민형규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 소위 '덫'으로
알려진 토곡리 밀실 살인 사건때 해결의 큰 역할을 맡아 주었던 장본인이었다.
민형규는 신당동에 있는 경찰 병원에서 사진 기자와 함께 고강진 사건 을 취재하고
막바로 문호에게 달려온 것이다.
"금년에 이거 왜 이러지. 힘들어 어디 해먹겠어?"
문호가 투덜거리며 형규와 마주 앉았다.
"아까 병원에서 잠깐 얘기 들었어. 고생 했더군. 그런데 왜 좀 일찍 연락하지 않았어?
놓쳤잖아. 특종감인데."
"너 특종 다섯 개 얻으면 장가간다고 그랬지.
지난번 '덫'사건으로 세개 채우고 두개 더 채워서 장가가면 내가 심심해서 어떻게 살아."
"약 올리지마. 잠깐, 나 얼른 신문사에 가서 기사 만들어 놓고 올테니 같이 좀 뛰지. 어때."
"좋아, 지금 9시 30분이지. 그럼 11시까지 서울역장실로 나와. 나 거기 있을 거니까.
그런데 이번 사건 의외로 좀 복잡해. 이게 말야... 아냐.
이따가 만나서 얘기하지. 지금 바쁘니까."
"그럼 11시 서울역장실에서..."
문호와 형규는 다방 앞에서 헤어졌다. 문호는 터덜터덜 걸으며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서도, 어떤 사건에서도 숨쉬는 사람들간에 일어난 사건이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 일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사람의 능력으로 추리할 수 없는
불가해한 일도 그것이 과연 초자연적이고 초능력적인 사건일까 하는 점에 도달하면
그 신비에 대한 회의가 먼저 다가오곤 했다. 풀리지 않는 사건,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건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보이지 않는 질서가 물 흐르듯 질서 정연하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질서 의 서두, 그 서두만 잡히면 얽힌 실오라기가 풀리듯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풀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장 힘드는 일은 그 서두가 풀리지 않을 때였다. 처음부터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얽히고 설킨 것처럼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달리는 열차 속에서 불과 10분 동안에 사라진 사람. 그 신비만 해도 그렇다.
그가 분명히 사람이고 신발이 확실한 물체라면 어떤 물리적 작용이 일어난 사실이지 절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경우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게 '공범자' 관계였다. 공범자가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문호가 수원에서 차를 되돌려 대전으로 급히 되돌아간 이유 도 이런 가능성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대전에서 사라진 노인이 공범자로 밝혀진다면, 범인이 열차에서 사라진
방법은 간단하게 해결된다. 만일 그 노인이 공범자라고 가정한다면 사건의 서두는 보다 쉽게
풀리고 빠르게 진전될 수 있다. 그가 기록해 놓은 그의 신원이 확실하다면...
그러나 문제가 또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노인은 범인이 애꾸가 아니라고 진술했었다.
그 때문에 그가 공범자일 것으로 생각됐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런 진술 때문에
공범이 아닌 것같다는 인상도 짙게 젖어왔다. 승무원이 이미 밝혔거니와 한쪽 눈의
검은자위가 없다는 것은 누구도 식별하기 쉬운 일이다.
승무원뿐만 아니라 그 베이지색 바바리 여인도 그렇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유독 왜 그 노인만이 애꾸가 아니라고 진술했을까, 애꾸를 애꾸가 아니라고
진술했어도 뒤집혀질 일도 아니지 않는가.
만일 그가 애꾸임이 밝혀지면 자기 자신에게는 움직일 수 없는 허위 진술의 기록이 남게 된다.
만일 그 노인이 공범자라면 그런 터무니없는 진술을 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점이 그가 '공범자'라는 생각에 회의를 품게 하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그 노인은 왜 호텔에서 사라졌을까. 젊은 사람들도 밤샘을 하고 피로를 못 이겨
갈길도 마다 하고 잠에 떨어졌는데 그 노인만이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면 그 점은 또 그가
'공범자'일 가능성을 더욱 질기게 묶어 놓는 결과가 된다. 사라진 노인,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며 범인과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단순한 승객으로 착시 현상을
일으킨 것에 불과한 사람일까. 만일 그 노인이 공범자가 아니라면 범인은 그 짧은 시간에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달리는 조그만 침대 열차칸 하나,
그것이 문호의 머리를 아프도록 때리고 있었다.
사무실 본부로 되돌아온 문호는 노트를 꺼내놓고 수사 진행에 따른 일정표를 두 장
만들어 한 장은 책상 유리 밑에 잘 보이도록 꽃아 놓고 한장은 지갑에 접어넣었다.
그리고 나서 책상에 엎드려 단잠에 빠져들었다.
아침부터 시내는 온통 고강진 피살 사건으로 들끓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그가 가지고
태어난 미모와 연기인으로서의 확실한 재질, 거기다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는
인기가 이번 사건의 신비스러움과 결부되었으니 그 강도는 쉽사리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방송국 앞에서는 어린 여학생들과 여인들이 인산 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신문사로는 문의 전화가 빗발치듯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방송국이나 신문사가 아니고 바로 수사 당국이었다.
쉴 새 없이 걸려오는 문의 전화와 범인을 잡지 못하면 경찰서 앞에서 자살해 버리겠다는
소녀들의 협박, 경찰이 유능하다면 이럴 때 실력을 보여 주어야 할 게 아니냐는 야유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 왔다.
신문사측에서도 특집까지 준비하며 독자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려고 애쓰고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스파트 뉴스로 그의 죽음을 보도했고 경찰의 능력을 가늠해 볼 때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해 왔다. 수사진은 토곡리 사건 소위 '덫' 살인 사건 해결로 명성을 높인
박문호 형사를 중심으로 특별 수사반을 편성해서 사건 해결에 나섰다.
문호는 첫번째 조치로 만일을 대비해서 방송국 정문에 기동대를 투입시켜 정문을 봉쇄하였다.
마치 이태리의 미남 배우 발렌티노나 제임스 딘, 마릴린 몬로가 죽었을 때의 광경을
방불케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수 없는 사태였다. 이러한 사태 속에서 가장
침통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곳은 뭐니뭐니해도 바로 S-TV였다. R-TV에 언제나 눌려만
왔던 S-TV가 R- TV에게서 선두 주자의 자리를 빼앗은 것은 새로 발굴한 고강진 때문이었다
. 고강진 자신도 자신의 인기 관리에 혼신의 힘을 다해왔지만 방송국측에서도 막대한
물량을 투입하여 그를 성장시켜 놓은 것이었다. 이제 그의 인기가 절정에 달해 최대한의
효과를 얻으려고 벼르던 터였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죽어 버려 S-TV로서는 본전도
못 건진 장사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고강진 자신의 죽음문제보다도 방송국 앞일이 더
걱정이 되어 임원진은 초죽음 상태가 되어 있었다. 사건에 대한 조사차 경찰에서 방문
하겠다는 연락은 받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일주일 분 녹화가 끝나 금주 말까지 방영될 홈 드라마 '꿈길'은 그런 대로 커버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막대한 물량을 투입하여 제작중인 '흥남 철수 작전'이
더 큰 문제였다. 외국의 TV 용 영화 대작 '뿌리'나 '남북전쟁'에 버금가는 한국 최초의
12시간의 대하 드라마였다. 작년부터 시작된 이산가족 찾기 운동과 돌아올 6, 25를
겨냥한 대작으로 오래 전부터 기획하여 촬영하였고 이제 최종 막바지 촬영에 열을 올리고
있는 터였다. 시나리오를 개작하던가 아니면 고강진 대타로 누굴 내세워야 하는데,
문제는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이러한 당면 문제와 톱 스타를 잃은 결정적 피해가 이들을
초조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렇게 S-TV와 경찰측이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을 즈음 대전에서
문호에게로 연락이 왔다. 대전을 기점으로 천안일대의 철로 주변을 샅샅이 조사하였으나
단서가 될 만한 범인의 유품이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대전과 천안
일대의 여관이나 여인숙에도 수상한 사람이 투숙한 흔적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대전에 잔류로 남아 있던 김 형사도 12시 차편으로 상경하겠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대전으로부터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보고를 받은 문호는 시간을 맞춰 서울역으로 갔다.
미리 연락을 해놔서 그런지 담당 역원과 역장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이거 신세를 지게 돼서 죄송합니다. 협조 좀 얻으려구요."
"네, 그렇지 않아도 연락받고 준비중입니다. 거 하필이면 열차에서 그런 일이 생겨서...
저희들도 무척 당황하고 있습니다. 자 안으로 드시죠."
문호는 역장이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가 앉고 이어서 문이 열리고 잠바차림의 깨끗한
인상의 남자가 들어왔다. Q신문 사회부 차장 민형규였다. 문호는 형규와 역장을 간단히
인사시켜 주고 사건의 개요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어젯밤 9시 45분 특급 열차 개찰을 맡았던 분을 뵙고 싶은데요."
"아, 곧 올 겁니다. 아까 말씀 듣고 대기하도록 지시해 놨으니까요"
역장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문호와 형규에게 담배를 한 대씩 권했다.
"거 고강진이란 배우 인기가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죠?"
역장이 웃으며 문호를 바라보았다.
"아이구 말도 마십시오. 웬 꼬마 계집애들이 그렇게 난리를 피우는지 모르겠어요.
자기 오빠가 죽어도 그 난리는 안 피울 겁니다. 원 세상에...
경찰에 전화 걸어서 뭐라는지 아십니까? 책임지고 범인 잡아내고 만약 범인 못 잡으면
치안 국장이나 책임자가 물러나라는 거예요. 요새 애들 이렇게 당돌해요."
문호의 말을 싱글거리며 듣던 형규가 역장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경찰만 당하는 줄 아십니까. 신문사는 또 어떻구요. 10초마다 한 통씩 전화가 와요.
'범인 잡았느냐' '고강진이 혹 아주 죽지는 않은 거 아니냐' '지금 시체는 어디서
보관하고 있느냐' '빨리 경찰에 압력 넣어라' 별 말 다한다구요. 일전에 말이죠.
D신문사에서 K라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초청해서 연주회를 가진 일이 있었어요.
오랜만에구경을 갔죠.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했는데 연주가 참 기막히더군요.
바이올린이 그렇게 아름다운 선율을 내는 줄 정말 몰랐었어요. 앵콜을 다섯 번이나
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구 연주회가 끝나고 일어났어요.
바이올리니스트 K가 대기하고 있는 대기실에서 난리가 났어요.
그저 한 중3이나 고1, 2학년은 됐을까요. 여학생들이 몰려와서 발로 문을 걷어
차고 K씨 내놓으라고 아우성이었어요. 취재하려던 우리 신문사 음악 담당이 곤욕을
치룬 모양이에요. 요새 애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나이 서른을 넘은 사람보고 K씨 K씨 하며 내놓으라니 기가 차서. 뭐 어쩌겠다는 거예요,
글쎄. 고강진 때문에 난리 피우는 거 알 만해요. 아이구 역장님 혹시 그만한 따님 가지고
계시면 아예 초장부터 조져 버리시라구요."
역장과 문호와 형규는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좀 늙어보이는 듯한 사람이 들어와서 역장에게 깍듯이 절을 했다.
"자 이리 좀 앉으시죠."
역장은 방금 들어온 사람에게 의자를 권하며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
"이분이 어제 개찰을 맡았던 최씹니다. 뭐 여쭤볼 거 있으면..."
"좋습니다. 역장님은 바쁘실 테니 이분 모시고 자리를 옮기죠.
오늘 정말 여러 가지로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호와 형규는 역원과 함께 역 구내로 나갔다.
문호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으며 말을 꺼냈다.
"퇴근도 못하시고... 죄송합니다.
이거 사람도 같은 사람인데 인기인이 죽으니까 보통 난리가 아닙니다.
여쭤볼 말씀은 다름이 아니구 어젯밤 9시 45분 침대 특급 열차 개찰할 때 혹 특별한
사람 기억이 나는가 해서요. 가령 애꾸라든가 아니면 좀..."
"애꾸요?"
옆에서 묵묵히 따라오던 역원이 깜짝 놀라며 우뚝 서 버렸다.
"뭐 기억에 남을 만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문호가 긴장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 있었습니다. 어휴. 어제... 개찰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는데,
그 때가 9시 38분이나 40분은 족히 됐을 겁니다. 돌아갈까 어쩔까 망설이며 시계를
보고 있는데 웬 사람이 침대 차표를 불쑥 내밀었어요. 표에 구멍을 뚫어 검표를 하고
돌려 주는 순간 얼굴을 보았는데 전 그만 깜짝 놀랐어요. 왼쪽 검은 자위가 없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얼굴 전체 분위기가 어찌나 무시무시하고 음산하던지 소름이 쭉 끼칠
정도였으니까요. 그 사람 커다란 가방을 질질 끌고 나가는데 힘이 무척 강해 보였습니다.
아무튼 기분도 나쁘고 해서 서둘러 일을 끝냈죠."
"분명히 한쪽 눈이... 아니 왼쪽 눈이라고 하셨죠. 검은자위 없는 게.
"네 틀림없었어요. 왼쪽 눈이 그냥 하앴으니까요."
"나이는 어느 정도나 되어 보였습니까?"
"글쎄요, 한 사십 사오 세?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른 특별한 특징은..."
"글쎄요... 다른 특징은 잘 모르겠어요. 워낙 엉겹결에 놀라 버려서,
그저 힘 좀 세어 보이고 어깨가 딱 벌어지구 얼굴이 험상궂다는 것 외에는..."
"감사합니다. 그리고..."
잠깐 서서 생각에 잠기던 문호는 다시 역원을 바라보며 "잠깐, 그 침대 열차 구조 좀
살펴보고 싶은데 볼 수 있습니까?"
"그야 어렵지 않죠, 마침 어젯밤 부산에서 올라와 정비 점검중인 차량이 있으니까요."
역원은 형규와 문호를 안내하며 앞장 서서 걸었다. 형규가 문호를 툭치며
이상하다는 듯 질문을 던져왔다.
"이봐, 저 사람도 범인이 애꾸라고 하지 않아. 어젯밤 승무원도 애꾸라고 했고 또 한
사람도 그렇게 봤다고 했고. 그런데 왜 그 없어진 노인만이 애꾸가 아니라고 했을까.
난 아까 저 개찰 역원이 말했을때 말야, 그 사람이 애꾸라고... 그 때 난 말야, 없어진
그 노인이 혹시 공범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 어때 문호는 어떻게 생각해."
"음, 그 문제 때문에 나도 생각중이야. 그 용의자가 애꾸라는 건 이젠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말야. 그 영감이 진술한 바에 따르면 두 눈이 예리하고 날카롭게 생겼다고
했거든. 아주 무시무시할 만큼 말야. 그 사람이 공범자가 사실이라면 용의자를 감추는데
도움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구태여 애꾸가 아니라고 진술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모든 사람이 다 애꾸라고 밝히고 있는데 자기만 아니라고 주장하면 자기가 주목을 받을게
뻔한 이칠 텐데.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공범자가 아닌 것도 같고 또 범인이 연기처럼 사라진
점을 생각하면 그 노인밖에는 더 혐의가 가는 사람이 없구 말야...
거기다가 그 노인만이 대전에서 또 어디론가 사라졌단 말야."
이야기하며 걷는 동안 그들은 침대차 내부로 안내되었다. 어젯밤 부산으로 내려간 침대차와
내부 구조가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했다.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단조로웠다. 복도를 중심으로 좌우로 침대칸이 있는데 한 칸은
상하로 다시 나뉘어 있어 2층 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한쪽편이 6명씩
그러니까 상하 12명이 승차할수 있었다.
문호는 침대차의 내부를 도면으로 그려서 주머니에 넣고 따라온 역원을 돌려보냈다.
둘만이 열차 복도에서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봐, 형규 이 도면을 잘 보라고. 내가 대전에서 올라오다가 생각한건데. 만일 말야,
이건 물론 어디까지나 가상이야.
그러니까, 가상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얘기를 들어 보라구."
문호는 연필을 꺼내어 도면에 그림까지 그려 가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넌 아직 상황이 투명하게 이해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의 상황 설명을 잘 들어봐. 그 애꾸라는 자가 고강진 시체가
들어 있는 대형 가방을 들고 승차하기 전에 제일 먼저 얼굴을 본 사람이 이 개찰원.
아까 그 사람이고, 다음이 03호 차량에서 일하던 승무원이 두번째 목격자.
그 사람은 침대 차표를 인수할 때 목격했지.
그리고 애꾸의 바로 맞은편 03-15에 승차했다가 대전에서 사라진 노인이 세번째 목격자.
그리고 신부가 네번째 목격자. 베이지색 바바리를 입고 있던 여인이 다섯번째 목격자란 말야.
그러니까 자, A가 개찰 역원, B가 03 침대차승무원,C가 03-15노인, D가 신부,
E가 베이지색 바바리 여인인 것이야. 이렇게 다섯 명이 모두 목격자로 밝혀졌는데
A가 개찰할 때 애꾸를 보고 섬ㅉ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지. 그리고 B가 표를 인수할 때
역시 그랬고, 다음 C는 애꾸가 담뱃불을 빌려 달라고 했을 때 두 눈동자가 멀쩡하다고 했지.
다음 D신부. 신부는 애꾸가 아닌 것 같지만 확실히는 못 보았다고 했으니까 예외로 치구.
다음이 E의 바바리 여인. 이 사람도 애꾸를 보고 섬ㅉ하여 놀라서 되돌아갈 정도라고 진술했지.
그 여자는 애꾸의 신발을 밟고 사과하려고 머리를 돌리다가 봤다거든.
이 모든게 수원도 미처 도착하기 전의 일이란 말야,
그리고 열차가 다음 역인 천안에 도착했지. 거기서 머문 시간은 2, 3분밖에 되지 않았어.
침대차에는 더구나 천안 하차를 위해 침대차를 이용한 사람도 없었고,
한번 더 확인할 필요는 있겠지만 이 때 침대 열차 승객은 100%깊은 수면에 빠져 있을
시간이거든. 승무원이 이 시간에 순찰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 있는 거야. 열차가 잠시
멈췄다가 덜컹하며 출발할 때 잠에서 깨어난 게 바로 E의 베이지색 바바리 여인이었어.
이 여자는 서울서 출발할 때 화장실 가려다 애꾸를 보고는 놀라서 침대로 되돌아갔다가
2호 차량 화장실을 이용하고 되돌아왔지. 잠에서 깬 E의 여인이 무심코 통로를 내다보다가
애꾸의 자리에서 시선이 멈춘 거야. 그 때 그 침대 커튼 사이에서는 담배 연기가 빠져
나오고 있었다거든. 열차가 출발한 뒤였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범인은 침대 속에 누워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는 결론이야. 애꾸가 있었다는 얘기지.
그 다음 승무원 B가 밤 11시 35분에 대전 하차 승객을 점검하기 위해 순찰을 돌았거든.
02-14호의 장교, 01-07호의 임신부 한 명, 그리고 03-03의 문제의 애꾸,
이렇게 세 사람의 동태를 살피려고 순찰을 돌면서 보니까 세 사람 침대 밑에 구두가
다 있었다는 거야. 그러니까 밤 11시 35분에도 애꾸는 있었다는 얘기가 되거든."
말을 잠시 멈추고 생각에 잠기던 문호가 형규의 어깨를 탁 쳤다.
"이봐,형규. 나 담배 하나 줘."
형규가 문호를 흘깃 쳐다보고는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주었다.
"자네 지금 누구 바라봤어?"
"싱겁긴, 너 쳐다봤지 누굴 쳐다봐."
"어딜 봤어?"
"갈수록 태산이군. 네 얼굴 봤다, 왜?"
"그렇지? 그런데 그 담뱃불 빌려준 노인이 03-03사내의 얼굴을 못봤다고는 할 수 없겠지.
더구나 그 거리에서 그의 눈동자를 못봤다는 것도 말이 안돼."
"그야 그렇지."
"자, 그럼 지금부터는 그 대전에서 사라진 노인 얘기야. 들어봐. 아까 말하던 상황의 연속이야.
그 승무원이 10분 후에 대전 하차 손님 표를 꺼내서 되돌려 주려고 03-03침대로
가는 순간 C의 03-15의 영감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봤단 말야. 정면으로 얼굴이
마주친 거지. 그리고 둘이서 인사를 나누었지. 그리고 03-03 침대 밑을 보니까 조금
전에도 보았던 그의 구두가 없어진 거야. 커튼을 열어 보니까 구두뿐 아니라 사람까지도
연기처럼 사라진 뒤였지. 깜짝 놀란 승무원이 방금 노인이 나온 화장실만 빼고는
다 뒤져본 거야. 그러나 애꾸는 연기처럼 열차에서 사라졌다 이거지. 형규,
너 뭐 생각나는 거 없어?"
문호의 이야기를 열심히 메모하며 듣고 있던 형규가 갑자기얼굴을 들어 문호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아하, 그렇구나."
하고는 이번에는 문호를 이끌고 열차 03호 화장실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호, 난 말야 내 생각이 자네 생각과 일치하는지 일치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는 없어. 그러나 자네 생각의 근사치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말할 테니 들어봐."
형규는 화장실 벽에 기대어서서 지금까지 문호가 들려 준 상황을 종합하여 사라진 애꾸의
미스터리를 추리하기 시작했다.
"마술사들이 상자 속에 든 사람을 없앤다는 얘기나 실제의 마술을 본 일이 있어.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사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관객의 눈을 환각에 젖도록
교묘히 만드는 트릭이거든. 트릭이란 알고 보면 언제나 장난 같은 짓에 불과해.
소위 '덫'으로 알려진 토곡리 살인 사건만 해도 그래. 문이 모두 안에서 잠겨져 있고
그 안에서 화재가 나고, 그래서 사람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니 손목 없는 시체가
발견되고, 손목은 밖에서 발견되고, 얼마나 신비롭게 보였어. 그러나 알고 보니 장난
같은 트릭에 불과했잖아. 이것도 마찬가지야. 눈이나 귀라고 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믿을 만한게 못돼. 더구나 눈이나 귀는 감상에 무척 약하거든. 직관에 의한 판단 능력,
눈이나 귀의 힘은 결코 사고력에 미치지 못해. 그게 이 사건의 포인트 같애. 더구나 사람이
공포에 싸이게 되면 사고력이 형편없이 둔화되거든. 소위 이성을 잃는 거지.
사람의 커다란 약점이기도 하지만. 다시 말해서 마술사가 사람이 들어 있는 상자를
순식간에 텅빈 상자로 만들었을 때 눈은 환각이라는 트릭에 걸려들게 돼. 사람,
그 상자 속의 사람이 어디로 어떻게 빠져나갔을까 어떻게 우리의 눈을 속였을까 하는
사고력은 어디론가 증발해 버리고, 사라진 자체에만 놀라는 거지.
그 환각에 마취되어 버린 거야. 마술이 끝나면 사람들이 먼저 보이는 제일의 반응은 박수야.
떠나갈 듯한 박수.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는 순간이지.
그 다음엔 뭐가 오는지 알아? 혼란이야 혼란. 이성을 잃은 증거로 나타나는 혼란의 증거로
수군거리는 양상을 나타내지. '어떻게 된 거지' '아, 놀랍다' '기가 막히다' 하고 놀라기는
하면서도 왜 그럴까 하고 사고할 생각은 없는 거야.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아낼 수 있는 원리, 즉 공포는 감성을 앞세워 이성을 잃게 한다는
원리를 생각하면 애꾸가 10분 동안에 사라진 원리는 너무 간단해.
그 노인이 애꾸의 '공범자'라는 가정하에서이긴 하지만."
문호는 형규의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신문 기자다운 아주 냉정하고 적절한 표현이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결국, 애꾸는 사라진 게 아니었어. 알겠지 문호, 그 노인이 장난한 거야.
노인은 복도에서 최초의 순찰을 마치고 돌아간 승무원이 사무실에 있는 동안 애꾸를
불러내어 화장실에 피신시켜 놓고 자기도 화장실에 같이 있다가 승무원이 다시 나오는
시간에 맞춰 자기 자신이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음을 승무원에게 보여준거야.
그러니까 승무원이 03-03의 침대 커튼을 열었을 때 애꾸는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지.
승무원은 놀랄 수밖에 없고 이 때부터 승무원은 사고력과 이성을 잃은 것이지.
그가 만일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면 노인이 방금 나온 그 화장실을 뒤져보았을 거야.
그러나 그 상황에서 그걸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지. 지금 여기서 우리가 곰곰이 생각하니까
그렇지 그 상황에서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지.
그 애꾸야 적당한 기회에 화장실 옆에 있는 승강구를이용해서 탈출하면 그만이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범인이 열차 내에서 10분 만에 연기처럼 사라진 원리가 해명되지 않겠어?"
"맞아, 내가 생각한 점이 바로 그거였어. 내가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오다 말고
다시 대전으로 내려간 이유가 바로 그 점이었거든. 그런데 그 노인은 대전 중앙
관광호텔에서 일찌감치 사라져 버린 뒤였어. 그가 '공범자'였으리라는 가능성을
지금 형규가 추리한 바탕 위에 결정적인 짙은 색깔로 채색한 셈이 되지. 아주 완벽하게
완성시킨 거야. 젊은 사람들도 지쳐서 잠에 떨어졌는데 노인이 침대에 한번도 눕지 않고
사라졌다는 것은 스스로 공범자임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지. 또 그밖에는 애꾸가
사라질 방법이 없어. 나도 인간에게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아.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완벽한 추리를 무너뜨릴 가능성이 1%정도는 남아 있어.
그게 좀 마음에 걸려. 만일 우리가 믿고 있는 99%의 이 가능성이 1%의 논리로 깨져
버린다면 나는 인간의 초자연적 힘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없어.
최후 절망을 맛보는 거지."
"뭔데 ? 1%의 논리라는 게."
"그건 말야... 믿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거야."
갑자기 힘이 빠지는지 문호는 침대차 03-03에 털썩 주저 물러앉았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던 그가 깜짝 놀라 다시 담배를 꼬나 물었다.
정신 없이 뭔가를 생각하다가 담배를 거꾸로 입에 물었고 필터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99%의 가능성을 무너뜨리는 1%의 논리,
그것은 사라진 03-15의 노인이 공범자가 아님이 밝혀졌을 경우야."
그 말에 형규도 더 할 말이 없었다.
논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 노인은 절대 공범자이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 그가 공범자라는 확증은 없다. 더구나 그가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이 애꾸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한 점이 1%의 논리에 더욱 힘있는 뒷받침이 돼 주고 있다.
애꾸를 애꾸가 아니라고 우기는 데는 그가 잘못 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밀고 나가는 우직함이 포함되어 있었다.
만일 그가 공범자라면 그런 서투른 증언을 할 리가 없었다.
만일 그가 수사의 혼선을 빚기 위해 허위 진술을 한 것이라면 몰라도.
그러나 또 그가 허위 진술을 했다면 자기가 제공한 자기의 집 주소가 엉터리일 것이다.
둘 중 하나는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그 노인 신원은 파악돼 있어?"
형규가 약간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민등록증 보고 주소를 적어놨다니 틀림없겠지. 대전 이민우 형사가 받아놓은 것이니까."
"확인 아직 못했지?"
"조사하라고 지시해 놨어. 서울 사람이니까 저녁이면 다 알게 될 거야."
"좋아 그 때까지 기다려 보는 수밖에. 어때, 승차원 발매소에 가지 않겠어?"
형규와 문호는 다시 승차원 발매소로 자리를 옮겼다.
많은 사람들이 서류를 만지기도 하고 또 승차권을 쌓아놓고 지역별로 묶기도 한다.
문호가 용건을 말하자 계장이라는 사람이 안내했다.
"죄송합니다. 용건이 좀 있어서요.
어젯밤 9시 45분 경부선 특급 열차 중 침대차 발매분에 대해 조사 좀 하려고 합니다.
협조를 부탁 드립니다."
"역장님한테서 각 부서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수사에 최대한협조하라구요.
그건 금방 뽑을 수 있습니다.
요새는 컴퓨터화되어 있기 때문에 뭐 특별히 뽑고 자시고 할 것도 없죠."
계장은 어느 캐비닛을 열어 한 묶음의 종이를 가져왔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표를 정리하면서 125편의 침대 차표를 1, 2, 3 호차로 구분하여 가져 왔다.
"한 칸에 24명, 어제 당일 세칸이 운행됐으니까 72명이 정원입니다,
그런데 어젯밤 승객은 42명뿐이었습니다.
1호차에 18명, 2호차에 13명, 3호차에 11명이었습니다."
문호는 03-03 즉 애꾸가 구입해 간 문제의 승차권 카피를 찾아냈다.
그리고 나머지 승차권도 일일이 조사했다. 대전이 3명, 대구가 10명,
부산이 29명이었다. 행선지가 모두 일목 요연하게 보였다. 예상대로 서울-천안 승객은
한 명도 없었다. 형규는 애꾸가 구입했던 승차권의 카피를 보며 계장에게 물었다.
"이 승차권의 발매 번호를 보아 이건 하루 전에 예매한 게 틀림없군요.
다른 것보다 번호가 훨씬 빠른 걸 보니."
"그렇습니까? 어디 좀 봅시다."
계장은 42매의 승차권 카피를 되돌려 받아 죽 훑어보고는
"맞습니다. 이것 하나만 예매를 했군요. 왜 이랬을까."
하며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어째서 그랬을까요. 요즈음... 최근 침대 차표 발매 실적은 어떻습니까?
꼭 예매를 해야 할 실정이었습니까?"
"아니죠. 어제만 해도 겨우 60%를 웃돌지 않았습니까? 당일 구입해도 충분하죠.
예약 문의 전화가 와도 당일 구입해도 좋다는 어나운스를 꼭 해 드리죠.
사실 연휴나 명절 아닌 다음에는 소화량이 절대 부족입니다."
형규는 03-03 즉 3호차 3번 좌석 승차권 카피를 노트에 옮겼다.
문호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계장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계장님 그러면..."
형규가 승차권 카피를 메모하고 있는 것을 넋없이 바라보던 계장이 깜짝 놀랬다.
"아, 네네 무슨..."
"저 죄송합니다만, 이 승차권만이 하루 전에 예매된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표를 판매한 사람은 혹 이 표를 구입해간 사람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잠시 만나 볼 수 있을까요?"
"네, 그저께 근무했으니까 어제 비번이고 오늘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리로 가실까요?"
계장이 먼저 일어났다.
승차권 판매원을 만나봐야 특별히 참고 될 만한 것은 없겠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한 마디라도 더 듣고 싶은 심정이 솟구친 것이다
. 그리고 문호가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것은 03-15 즉 대전서 사라진 노인이 구입한
승차권은 애꾸와 마주 앉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배제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주도 면밀하게 계획한다고 해도 실수나 허점은 있게 마련이다.
만일 03-03표를 구입한 것이 노인이라면, 노인과 애꾸의 관계를 맺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꿈같은 기대는 역시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판매원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학생이 구입해 갔다는 것이다.
애꾸의 친척이거나 지나가는 학생 돈 몇 푼 주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 여기서 그것을 더 이상 추적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선 방송국 방문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고강진의 검시 결과도 궁금했다.
침대 열차의 구조 파악은 세밀하게 조사해서 끝냈다.
그러나 무슨 단서가 되거나 가능성을 제시해 볼 방법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남아 있는 마지막 열쇠는 사라진 노인의 정체를 밝히는 일 뿐이었다.
과연 그는 공범자인가 아닌가. 그 결과에 따라 모든 사건 의 실마리가 풀어지게 마련이었다,
주민등록증을 보고 기재했다고는 하나, 그 와중에 사진까지 확인해서 기록했는지 아니면
불러 주는 대로 받아 쓴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대전 이민우 형사에게서 받아온 노인의
주소에 성기준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지 않는다면 이 사건은 장기화되던가 아니면 아주 완
전 범죄로 처리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문호는 입술이 말라가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가장 어려울 때 신문기자라는 입장을 떠나서 자기를 도와 주었던 민형규.
대학 동창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이런 미궁 같은 사건이 발생될 때마다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준 형규를 대전까지 데리고 가지 못한 게 몹시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상사의 눈초리도 어쩔 수 없어 그를 떼어놓았던 것이다.
서울역 구내 다방에 들어가 몸을 녹이며 형규와 문호는 똑같이 공범혐의를
가지고 있는 성기준 씨에 대해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형규가 입을 열었다.
"문호, 다음 수사 방향은 어디다 초점을 마출 거야. 이거 노인만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 사실 그 노인의 주소가 확실해도 문제는 있어."
"음... 나도 지금 그 생각 중이야. 문제는 바로 그거야. 네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거.
주소가 확실하고 신분이 뚜렷하다면 최소한 그를 '공범자'로 볼 수는 없어 이런 커다란
살인 사건에 소위 공범자라는 자가 자기 주소를 경찰에 제공하겠어? 마치 날 잡아가주슈
하는 식으로 말야. 지금 내가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 게 바로 그 점이거든.
그런데 자넨 어떻게 내 속을 그렇게 손바닥 보듯 훤히 읽어 ! 기분 나쁘게."
"흥, 야 네 속 하나 못읽고 어떻게 사건 기자 해먹니.
그건 그렇고 그 노인의 신분이 확실해도 걱정, 불투명해도 걱정, 이거 정말 죽겠는데..."
사실이 그랬다. 문호나 형규가 말도 못하고 서로 끙끙 앓는게 바로 이 점이었다.
'사라진 노인' 만일 그 노인의 주소가 확실하고 그 거처가 분명하다면 그를 도저히
공범자로 볼 수 없는 입장이 된다. 공범자가 스스로 나서서 자기의 위치와 신분을 밝히고
목격자임을 자청해서 나서기까지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소나 신분이 확실하면
공범자로 볼 수 없을 것이다'하는 한 차원 뛰어넘은 수법을 써서 대담하게 자기를
노출시켜 경찰측의 판단을 흐리게 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고차적인
수법까지 썼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만일 그의 신분이 확실하게 드러난다면
그리고 그가 공범자가 아님이 밝혀진다면 어떻게 되나. 노인의 주소나 신분이 확실해서
공범 혐의가 벗어지면 그 다음엔 형규가 말한 대로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고 그 후에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혼란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또 그의 주소나 신분이 불투명해서 그가 '공범'임이 강력하게 대두된다면 어떻게되나.
인상 하나만으로 노인을 체포하기에는 막대한 정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공범자로 지목된
노인은 그 신분이 확실해도, 또 불투명해도 고민이라는 이유는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호나 형규는 차라리 노인이 불투명한 채로 아주 잠적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시속 120km로 달리는 열차, 그 열차의 침대 속에서 노인의 도움 없이 어떻게 증발할 수
있겠는가. 전혀 논리에 맞지 않게 사라진 범인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사라진 노인이
공범이어야 만했다. 설혹 노인을 잡지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범인의 증발 방법은
설명되어지기 때문이었다. '공범자'로 지목되는 노인의 신분이 확실해서는 안 된다는
이 이상한 논리 앞에 두 사람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난 오늘 방송국 방문하기로 되어 있거든.
나 먼저 가볼테니 잘 좀 추리해 보라구."
다방에서 나온 문호와 형규는 무거운 마음을 누르며 서울역 광장 앞에서 헤어졌다.
문호는 수첩에서 오늘의 수사 스케줄을 꺼내 보았다. 지금부터 가 보아야 할 곳은
S-TV였다. S-TV에서 이성구 제작담당 이사를 만나기로 한 것이다. 교보 빌딩에서
지하도를 건너 국제극장 맞은편으로 빠져나왔다. 좌석 버스 720번이 S-TV로 가는
차였다. 초겨울 추위가 목덜미로 파고 들었다.
사람들은 옷깃을 세워 바람을 막으며 종종걸음을 걸었다. 어디선지 성급한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려 왔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차를 기다리며 무엇인가의 생각에 잠겨
있던 문호는 720번 좌석 버스가 두 대나 지나가도록 승차할 생각을 않고 있더니 발길을
돌려 다시 지하도로 총총히 걸어 모습을 감추었다.
거리에는 서둘러 나온 석간 신문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거리에 신문을 쌓아놓고 팔고 있는 소년들은 '특보요 특보'하며 목청을 돋구고 있었고
사람들은 소년들이 집어 줄 사이도 없이 동전을 던져놓고 손수 집어 그 자리에서 펴보며
특보 기사를 읽기에 바빴다. 신문 기자들이란 좀 엉뚱한 데가 있는 친구들이어서 이런
커다란 사고가 나면 때로는 경찰측에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사를 쓰곤 했다. 전혀 엉뚱하게 짚는 때도 있었지만 또 어떤 때는 정확히 예견하는
때도 있었다. 최찬일 형사는 Y신문과 J일보를 사들고 마포 입구에 있는 골든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최찬일을 중심으로 한 양쪽 테이블에는 중년
부인들이 신문을 펴들고는 커피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고강진 피살 사건'을 입에
침이 튀도록 떠들어대고 있었다.
"어머 얘, 이 사진 좀 봐. 얼마나 미남이니..."
"글쎄 말야. 이렇게 멋지게 생긴 배우가 글쎄 왜 죽었을까? 그것도 열차 속에서 말야.
이거 무슨 썸씽 있는 거 아냐?"
"아깝다, 아까워.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바에야 살았을 때 나나 한 번 사랑해 주지.
그럼 내가 울어 주기라도 하잖아."
"어머, 얘 너 못하는 소리가 없어."
"웃기지 마. 넌 그런 생각 한 번도 안해 봤단 말야? 난 솔직히 말해서 그래."
"호호호..."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할 일 없는 여편네들이었다.
남편들은 죽자하고 직장에서 뛰고 있는데 호텔 커피숍에서 죽은 배우한테 사랑 한 번
못 받은 게 불만이라는 세상에 참. 최찬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 동안 앉아서 이 여인들을 쫓아낼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아주머니 조금 전에 라디오 못 들으셨어요?"
최찬일이 일어서며 떠들고 있는 여인들에게 말을 걸었다.
"예? 못 들었는데요. 무슨 뉴스라도."
뚱뚱한 중년 부인이 호들갑을 떨며 몸체를 앞으로 내밀며 최 형사를 바라보았다.
"고강진이란 배우가 죽었대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구..."
하고는 얼른 돌아가서 커피숍을 빠져나와 화랑실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나와 보니 이들 대여섯 명은 무엇인가 열심히 떠들며 호텔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혼자 킥킥거리고 있던 최 형사는 아까 자기가 한 말의 끝을 독백처럼 달아맸다.
'그게 아니구요, 사망했대요' 통쾌한 듯 여인들을 보던 그는 다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보나마나 그 여인들, 돌아다니며 고강진이 아직 죽지는 않은 것이라고 아는 체 떠벌리며
돌아다니겠지. 딴 사람 들은 아직 그 뉴스를 모를 테니까. J일보는 고강진 피살의 원인을
여성 문제 쪽이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었고 Y신문은 그의 인기를 시샘낸
다른 연예인의 사주에 의한 살인이거나 아니면 어떤 개인적 원한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촌평하고 있었다. 신문마다 고강진 피살은 대문짝같이 게재했으면서도
진남포 피습 사건은 눈에 뜨이지도 않을 정도로 구석에 조그마하게 실었다.
고강진이 죽은 것 만큼 진남포도 상처는 대단했다.
가슴을 온통 붕대와 솜으로 휘감고 있었다.
의식을 잃거나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출혈이 심하고 상처가 여러 곳 나 있어서 치료에는 시일이 좀 걸려
앞으로 2, 3주 후에나 퇴원하게 될 것이라고 담당 의사가 말했다.
서른 바늘 이상을 꿰맸다고 하니 그 정도는 짐작이 갈 만했다.
아직 면회할 단계도 못 된다고 해서 진남포의 집만 알아보고 곧바로 마포로 찾아온 것이다.
진남포의 집은 작은 아파트였다. 그러나 그의 아파트를 찾아가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마포 경찰서에서 알선해 준 이 근처 똘마니와 만나기로 했다.
얼마 후 커피숍 카운터에서 안내 방송이 들려 왔다.
"최찬일 씨 계세요? 최찬일 씨 계세요."
최 형사는 카운터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20대 초의 청년인데 머리는 요즈음
유행하는 퍼머 머리를 했고 바지는 여자 것인지 남자 것인지 모를 이상한 것을
입고 있었다. 목에는 목걸이까지 하고 있었다. 최 형사는 손을 흔들어 청년에게 손짓했다.
"앉아, 커피하겠어?"
"그러죠 뭐, 어이 커피."
사양하는 기색이나 어려워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덥석 커피를 주문하고는
부스럭대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뭣땜에 그러슈."
"어제 진남포라는 배우 이 동네서 당한 거 알고 있어?"
"신문에서두 보고 동네서도 소문이 나서 알고 있어요."
"어떻게 생각해."
"제가 뭐 생각하고 어쩌고 할 게 있나요. 그 사람 좀 안 됐다는
생각밖엔."
"자네하고 진남포하고 아는 사이야?"
"아 그럼 이 동네서 뼈가 굵었는데 그 사람 모를까요."
"어때."
"뭐가요?"
"그 사람"
"...글쎄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에 꼬고 앉아 꺼들꺼들하며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소릴 지르거나 다그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저 잘 구슬르고 얼러서 조그만 정보라도 얻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청년은 담배를 부벼끄고는 다시 껌을 꺼내 짝짝 씹어대고 있었다.
"진남포 평판은 어때? 이 동네서."
"왔다예요."
"왔다라니, 무슨 말이야?"
"있잖아요. 그 사람 괜찮아요. 인기도 있구. 인정도 많구.
명절때나 크리스마스 같은 때는 이 동네 신문팔이 애들같이 좀 불쌍한 애들 양말
한 컬레씩이라도 꼭 사줘요. 구두닦이 애들 몇이 모여서 꽃이라도 사가지구 병원에
찾아가겠다나 봐요."
"그럼 이 동네서 인심은 안 잃은 편이구만."
"인심을 잃다뇨? 그 형님만 같으라 그래요.
얼굴이 못 생겨서 그렇지 장가는 안 가두 마음 씀씀이는 그만이에요. 허기야 돈도 없으니 뭐."
"진남포 씨 돈 없는 거 어떻게 알아?"
"보면 척이죠. 자동차도 딸딸이에요.
구식 브리사 몰고 다니는데 고것도 누가 그냥 준 거래요. 돈 생각하면 그것도 몰고
다닐 처지가 못 되는데 준 사람 생각해서 겨우 휘발유나 넣고 다니나 봐요.
집도 자기 것이 아니라 전세라죠. 그런데도 불쌍한 애들한텐 기차게 해주거든요.
아깐 미안했어요. 경찰이라면 전 괜히 싫거든요. 진남포 형 잘봐 줘요. 제가 형, 형,
하며 따르는 처지거든요."
"이 동네서 진남포 건드릴 만한 놈은 없나?"
"택도 없어요. 누가 이 동네서 형을 건드려요. 그리고 형님이 보통인줄 아세요.
시시한놈 너댓놈 덤벼도 눈도 꿈쩍 안할 거예요.”
청년에게서 얻은 정보는 그가 이 마을에서 인심을 잃지 않고 살아 왔다는 점과
그가 몹시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최 형사는 청년을 돌려보내고 진남포가
사는 아파트로 왔다. 생각보다 훨씬 후미진 곳이 많았다.
그가 피습당했다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한동안 생각에 빠졌다.
새벽 1시 20분경 피습을 당했다는데 도대체 그 깊은 심야에 그는 왜 후미진 뒷골목을
나왔으며 그를 습격한 괴한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진남포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만이
목적이었을까 아니면 살인 미수로 그치고 도망친 것일까.
그가 피습당한 부근까지 오자 이제까지 우발적인 사고일 것으로만 생각했던 추측에
수정을 가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새벽 1시경 이 어둡고 칙칙한 골목에 진남포가
서성거리고 있었던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또 피습자는 그 시간에 어떻게 이 골목에 나타나 진남포와 맞부닥뜨렸을까 하는
점도 쉽사리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협박을 받고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왜 그는 누구에게 협박을 받고 있었을까.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니다. 얼굴이 잘 생기고 인기가 많아 시샘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연예인으로서 누구에겐가 위협을 줄 만큼 대단한 인물도 못 된다.
그렇다면 그가 피습당한 제일 큰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꼬리도 보이지 않았다.
고강진 피살은 나름대로 여러 가지 추측이떠오른다.
그러나 진남포 피습은 도무지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점, 바로 그 점을 찾는 것이 최 형사의 임무였다.
아파트 일대와 마포극장 일대를 돌아보았다. 피습 장소를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단서가 될 만한 물건을 찾는다는 것도 무리였다. 지역적 여건으로 보아 범죄가
자주 일어날 우범지대도 못 되었다. 그렇다면... 최찬일은 새로운 각도에서 수사를
시작해야 했다.
박문호 선배에게 우발적인 '사고일 것'이라고 자신 있게 한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이 곳 상황이나 사고 시간대를 생각하면 절대 우연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왜? 무엇을 진남포에게서 노렸을까,
그에게 무엇이 있어서 심야에 습격을 했을까,
과연 진남포 피습 사건과 고강진 피살 사건은 아무 관련이 없을까...
머리가 복잡해진 최 형사는 근처 구멍가게에 들어가 바람을 피하며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가게의 유리창을 통하여 아파트가 보였다.
이 때 아파트 정문에서 두툼한 잠바를 걸친 경비원이 다가와 담배를 한 갑 사서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최 형사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벌떡 일어나 경비원 뒤를 쫓았다.
"저, 아저씨 아저씨."
하고 큰소리로 부르자 경비원이 뒤를 휙 돌아다보았다.
한쪽 눈자위가 약간 희미한 애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