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1월 5일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에 보재 선생의 초혼묘(유골이 없는 분의 혼백을 모신 묘)가 만들어졌다. 당시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회장인 이상훈 박사와 윤병석 교수 등이 선생의 유해가 화장된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수분하 강변에서 초혼식을 거행한 뒤 이곳으로 모셔온 것이다. 비록 육신이 아닌 혼백일지라도….
이역만리에서 조국의 독립을 끝내 보지못하고 돌아가신지 79년만에,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지 126년만에 꿈에 그리던 조국의 생가를 찾아서일까?
보재 선생의 초혼묘를 합장하는 중에 숭렬사 숭모 비각안의 비석에서 땀이 흐르듯 물이 흘러 흠뻑 젖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기이하다고 느끼며 비석이 운다고 모두들 놀라워했다. 이후 숭모비는 몇차례 더 울곤 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97년 3월 2일 기일에 맞춰 숭렬사 준공과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사당 우측옆의 생가를 재정비하고 맞은편엔 기념관을 건립했다.
2006년부터는 날씨가 춥고 3·1절 다음날로 인한 관심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4월 22일(선생의 순국 당시 양력 일자)로 변경해 추모제를 이어오고 있다.
아쉽게도 그동안 각계의 노력에도 불구 선생은 해를 거듭할수록 잊혀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선생의 짧은 생애속에 빛나는 업적과 함께 생가, 기념관, 사당인 숭렬사 등 기념사업 과정을 소개한다. / 편집자
정부는 선생이 순국한 지 45년이 지난 1962년 3월 1일 독립운동 유공자로 건국훈장 대통령장(복장)을 추서했다.
1971년 3월1일 진천읍 교성리에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가 '보재이상설선생숭모비'라는 비명의 10척 높이 숭모비 건립을 시작으로 1975년 5월 31일에는 숭렬사를 건립해 선생의 존영을 처음으로 봉안했다. 1981년 보재 이상설 선생 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해 초대 회장에는 이상훈 박사와 부회장에 정원영(선생 외손녀 사위)씨가 선임됐다.
1986년 7월 31일 목천에 있는 독립기념관에 보재선생 어록비를 건립하고, 1987년 3월 24일 진천읍 산척리의 보재 선생 생가가 지방 기념물 제 27호 문화재로 지정됨에 따라 숭렬사 성역화사업은 본격적인 출발을 하게 됐다.
허나 정부의 복구비 1천200만원이 턱없이 부족해 종친과 군민부담으로 되어있는 1억7천만원의 추가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생가복원 추진위원회'를 1988년 4월 처음 발족했다. 초대 회장에는 이철우(청주 주물회사 회장)씨가 취임했다.
후원회는 교성리의 숭렬사 사당 부지 매입비가 너무 비싸 선생의 생가(진천읍 산척리)쪽으로의 숭렬사 이전을 수차례 요구하며 진천군민과 충북도민들이 참여하는 '보재 이상설선생 기념사업회'를 공식 발족했다. 초대 회장에는 이상훈 후원회 회장과 부회장에 이재홍(진천군 의회의장), 이상범(전 제천시장)을 선임했다.
1995년 3월 2일 마침내 '숭렬사 성역화 사업계획'이 확정되면서 1차적으로 진천군에서는 9억원의 예산을, 이상설 선생 후원회에서 부지매입비용 2억원을 군에 헌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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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과 기념사업회는 동상과 기념관을 건립하고, 국가보훈처의 후원으로 선생의 혼을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충북 진천으로 모셔와 부인 달성 서씨와 합장했다.
지금도 숭렬사 사당옆에는 초혼묘가 슬프게 놓여있다.
1997년 이상설 선생 사당 준공 이후 2000년에는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회를 사단법인으로 발족했다. 같은해 중국 용정시에 보재 이상설 선생 역사 전람관을 건립하고 중국 용정실험 소학교에 태권도부를 지원했다.
2001년에는 숭렬사 진입도로를 보재로로 지정하고, 러시아 연해주에 보재 이상설 선생 추모비를 제작하는 등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2005년 이재정 당시 국회의원을 회장으로 선임하고 을사늑약 무효투쟁 100주년 기념 강연회를 열어 보재 선생의 뜻을 알리고 숭렬사 주변을 새로 단장했다. 12월에는 보재 선생이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돼 국가보훈처, 광복회등과 보재 이상설선생 선양 공훈학술 강연회를 개최했다.
2006년에는 서전서숙 개교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였다. 중국 연변대학에서 조선족 근대교육 100주년이란 제하의 학술대회를 이틀간 열고, 중국 용정실험 소학교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국내에선 충북대학교 교육개발연구소에서 이상설과 근대교육이란 세미나를, 기념사업회가 '한국독립운동과 서전서숙'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이후 지난 4월 22일 숭렬사에서 보재 이상설선생 97주기 추모식을 갖는 등 해마다 기념학술 세미나와 자료집 발간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후대의 정성이 부족한 탓일까? 8일 찾은 숭렬사엔 방문객이 없었다. 그나마 순찰을 나온 진천향토사연구회 회원 4명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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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몇개의 유물이 전시된 기념관도 굳게 닫혀 있었다.
이재정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기념사업회원이 더 많이 가입되어야 하나 선생의 업적에 비해 알려진 내용이 적다 보니 많은 분들이 보재 선생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며 "진천군, 충청북도에서만 존경받는 인물이 아니라 전국에서 추앙받고 존경받는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회가 되도록 기념사업회가 더 많은 노력을 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 박익규
■ 이상설 선생의 생애
1894년 조선 마지막 과거 '급제' 간도에 서전서숙 세워 독립운동 국권회복 '악전고투' … 47세 별세
선생의 본관은 경주로 자(字)는 순오(舜五), 호(號)는 보재(溥齋)다.
1870년(고종 7년)에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학자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때 이용우의 양아들이 되어 서울로 올라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영어·노어·법률 등을 배워 동서양학문을 통달한 대학자다.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관장, 의정부 참찬 등 중요한 직책을 두루 맡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의 폐기를 상소하고 망명해 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워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힘썼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보호조약의 억울함을 세계만방에 호소하며 국권회복을 위해 악전고투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러시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17년 47세로 별세하였다.
1962년 정부는 선생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현재 대통령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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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재 선생 연대표
1 숭렬사는 이상설 선생의 존영을 모신 사당이다. 1972년 진천군 진천읍 교성리에 세워진 목조와가 9평의 맛배집으로 된 사당과 1971년 건립된 숭모비를 1997년 3월 2일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2 보재 선생의 초혼묘를 합장하는 중에 숭렬사 숭모 비각안의 비석에서 땀이 흐르듯 물이 흘러 흠뻑 젖었다고 전해진다.
3 선생이 태어난 생가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가집이다. 광복을 전후해 무너진 것을 복원한 것으로 1997년 진천읍 교성리 향교마을에 있던 사당인 숭렬사와 숭모비를 이곳으로 옮겨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4 보재 이상설 선생의 동상. 이 동상은 1997년 기념관과 함께 건립됐다.
이상설(1870~1917) |
년도 |
주요사항 |
1870년 |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선비 이행우와 벽진 이씨의 장남으로 출생 |
1877년 |
서울 이용우 선생의 양자로 입양됨 |
1885년 |
참판 서공순의 장녀 달성 서씨와 결혼 |
1886, 1887년 |
'수리數理'라는 책을 쓴 것으로 알려짐 |
1894년 |
조선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 (이승만, 김구와 함께 응시). 세자시독관, 비서감비서량에 임명 |
1896년 |
성균관 교수 겸 관장, 한성사범학교교관, 탁지부재무관 등 역임, 궁내부 특진관에 승진. 헐버트 박사와 친교를 맺고 영어, 불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 공부. |
1900년 |
중등교과서 '산술신서' 상권 1, 2 편역 |
1904년 |
박승봉과 연명으로 일본이 요구하는 황무지 개척 반대 상소문을 올림. 대한협동회 회장 선임(이준 부회장, 이상재 평의장, 이동휘 서무부장, 양기탁 지방부장) |
1905년 |
학부협판, 법부협판 역임, 의정부 참찬 발탁, 을사조약 파기, 5적 처단 주장 상소, 관직사퇴, 민족항쟁 촉구 연설후 자결시도 |
1906년 |
4월 조선통감부 설치되자 6월 이동녕, 정순만과 같이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 항일민족교육 요람인 '서전서숙' 설립 |
1907년 |
이준, 이위종을 대동하고 헤이그에 고종 특사로 파견. 공고사 투고, 국제협회 연설 일제 궐석판결로 사형선고 |
1908년 |
미국 덴버시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자회의에 이승만과 같이 참가 |
1909년 |
국민회 총회장 최정익과 국민회의를 열고 연해주로 망명, 독립운동기지인 한흥동 건설 |
1910년 |
13도의군 편성, 블라디보스톡에서 성명회 조직, 러시아 총독 니콜리스크로 추방 |
1911년 |
추방에서 풀려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온 뒤 김학민, 이종호, 정재관, 최재형 등과 권업회 조직, 권업신문 발행 |
1913년 |
이동휘, 김립, 이종호, 장기영 등과 중국령 나자구에 무관학교 설립 |
1914년 |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과 중국과 러시아에서 대한광복군정부 설립, 정통령 선임. 권업회 러시아 관헌에 의해 해산 |
1915년 |
상해 영조계에서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유동열, 유홍렬, 이춘일 등과 신한혁명단 조직 |
1917년 |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에서 사망 유해는 유언에 따라 수분하 강가에서 모든 유품과 함께 화장. | |
첫댓글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국가가 더 정성을 들여 순국선열의 역사를 지켜가야합니다.
대한민국호에 국가유공자는없습니다.
그게 대한민국입니다.
총괄적인 자료정리로 알기쉽게 보도한 중부매일 박익규기자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TV등 전국적인 홍보매체를 통한 대국민 보도로 이상설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하여
항일 운동의 태두로 공인받도록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