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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4년 11월 10일(제45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사사기 1:1-10
제목 : 믿음의 일에 앞장선 사람이 받는 복
여러분이 좋아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나름대로 좋아하는 일도 있고 싫어하는 일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어떻습니까? 즐겁고 만족하며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할 때는 어떻습니까? 힘들고 불편하고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싫어하는 일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싫어하는 일도 잘 감당하며 그것을 잘 극복하는 사람이 인생을 잘 만들어가게 됩니다.
특히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믿음생활의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겠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성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도 세상을 다스려 가시면서 좋아하시는 일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싫어하시는 일도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당하신 하나님의 고통은 사람이 당하는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 독생자를 십자가에 버리면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 믿음의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가지고 “믿음의 일에 앞장선 사람이 받는 복”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며 가나안 땅 정복에 온 힘을 기울였던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아직 가나안 땅이 완전히 정복되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 그동안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주도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본문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머지 가나안 정복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주신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유다가 올라갈 지니라.’ 이 말씀을 유다 지파가 나머지 지파를 이끌고 앞장서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다 지파를 앞세워 가나안 땅을 정복하시려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믿음의 일에 앞장서라
믿음의 일에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일할 때 거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일을 할 때는 이 열 두 지파 중에서 유다 지파가 앞장을 섰습니다.
그 앞장선 주된 요인을 찾아보면 먼저 유다 지파의 조상이 되는 야곱의 네 번째 아들 유다는 생명을 구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야곱은 네 명의 아내를 통하여 열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요셉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네 아내 중 가장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특별히 사랑하고 항상 채색 옷을 입혔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기회만 있으면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7장에 보면(12-28절) 가나안 땅에 살던 야곱이 어느 날 세겜에 가서 자기의 양떼를 치던 아들들이 궁금해서 안부를 알아보려고 요셉을 보냈습니다. “가서 네 형들과 양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14절).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요셉이 양 치는 형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자기들에게 오는 것을 본 형들이 요셉이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였습니다. 그래서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20절)고 합의 하였습니다. 요셉이 가까이 오자 형들은 요셉을 잡아 요셉이 입은 채색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는 빈 구덩이였습니다.
당시에 가나안 땅 광야에는 물을 얻기 위해 사막에 샘을 파다가 물이 나오지 않아서 버려둔 구덩이가 많았다고 합니다. 모래 바람이 불면 그 구덩이에 쌓이기 때문에 사람이나 짐승이 미끄러져 들어가면 밖에서 꺼내주지 않는 한 몸부림치다가 모래에 파묻혀 죽게 되었습니다.
형들이 이렇게 해서 요셉을 구덩이에 생매장을 시켜놓았습니다. 요셉은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그 구덩이에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마침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다가 말했습니다. 창세기 37:26-27절에 보면 “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고 했습니다. 28절,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던 동생 요셉을 미워하여 죽이려던 상황 속에서 유다가 앞장서서 요셉을 살려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미디안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아넘겼지만 그래도 구덩이 속에서 죽어야 했던 요셉을 그나마 살려낸 것이 유다였습니다. 요셉을 살리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유다였습니다.
어느 시대든 생명을 살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첨단화된 과학과 의학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죽어가는 사람들의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의사들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정부와 의사협회가 의대생 증원의 문제를 놓고 주도권 싸움에 많은 환자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긴급환자로 응급실에 입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중환자들도 병원에 입원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든 생명을 구하자면 어려움이 있고 때로는 자신이 희생적으로 모든 것을 쏟아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며 어떤 고난이라도 감수하지 않으면 남의 생명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을 사는 성도들은 유다의 이런 사건을 통하여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영혼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의 생명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육체의 생명과 그 속에 생령을 불어 넣으사 영적인 생명을 주셨습니다. 즉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육체의 생명과 영의 생명인 영혼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 최초로 지음 받은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인간의 생명에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일류의 타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타락한 인류를 다 지옥형벌로 몰아넣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들 중에서 일부를 선택과 예정을 통하여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 방법으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그들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속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도행전 16:31에서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도 기가 막한 사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귀신들려 점치던 여종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러자 여종의 주인들이 돈을 벌 수 없게 되어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리들에게 넘겨주어 상관들에게 고발하였습니다. 상관들이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기고 매로 친 후에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갇힌 감옥에서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그 때 바울과 실라를 지키던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할 때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고 막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빌립보 감옥의 간수, 죽음을 길을 갈 수밖에 없던 간수에게 준 말이 바로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이 세상에 살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다시 유다의 사건으로 연결해 보면 세상이라는 구덩이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형제들을 살려내는 일입니다. 그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전도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14-17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나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복음 되시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평생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복음 전하는 일에 앞장서며 헌신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무엇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무엇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왜요? 복음이 영혼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들도 유다처럼 믿음의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처럼 생명을 구원하는 복음 전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아멘 하실 수 있습니까?
2. 믿음의 일에 앞장선 유다 지파
오늘 본문은 사사기를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40년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많은 지역을 정복하였지만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곳이 많았습니다. 여호수아 24:29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사기를 시작하는 1:1절도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고 시작합니다. 2:8절로 가면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일을 주도하고, 가나안 정복을 7년여 정도 주도한 여호수아도 때가 되자 죽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었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아직 정복하지 못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이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 아직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땅 정복에 유다 지파가 앞장서라는 말씀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시작하는 민수기를 보면 유다의 후손인 유다 지파가 어떤 일에 앞장섰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가나안을 향해 행군할 때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둘러싸고 진군했습니다. 광야에서 진을 치면 성막을 중심으로 세 지파씩 동서남북으로 진을 쳤습니다. 구름이 떠오르면 동쪽에 진을 치고 있던 유다 지파가 앞장을 섰습니다. 거기에는 잇사갈 지파, 스불론 지파가 동행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남쪽에는 르우벤 지파, 시므온 지파, 갓 지파가 뒤를 따랐습니다. 그 맞은 편 북쪽에서 진을 쳤던 지파가 아셀 지파, 납달리 지파가 따랐습니다. 그리고 맨 뒤쪽인 서쪽에는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 베냐민 지파가 따랐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유다 지파는 행군을 하던 진을 치던 언제나 맨 앞장서서 행진을 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던 광야는 사막이었니다. 바람이 불면 모래바람이 불어 엄청나게 힘이 들었습니다. 앞장서서 가면 뒤따라오는 지파들에게 방패막이가 되었습니다. 모래바람이 불면 몸으로 막아야 하고 어려움이 닥치면 앞장선 사람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어떤 고난이나 위험이 오든지 어떤 사태가 벌어지든지 앞장선 사람들이 항상 희생과 어려움과 고통이 많고 이것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행군의 선두에는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잇사갈 스불론 지파가 어려움을 각오하고 감당하면서 앞장서 갔습니다. 일이년도 아니고 사십 년간이나 광야생활을 하며 행진할 때에 꼭 유다 지파가 앞장섰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다 지파는 그렇다고 할지라도 유다 지파와 동행해야 하는 잇사갈 지파와 스불론 지파는 항상 앞장서서 행진을 하니 많은 어려움과 희생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용하시니까 자기는 어떤 희생과 어려움과 고통이 있더라도 항상 다른 지파의 방패가 되고 희생을 하고 고통을 감수하고 손해를 보아가면서 혼자도 아니고 자기에게 속한 모든 족속들이 함께 고통을 당해도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늘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고 힘써 전진을 해갔는데 40년간 변함없이 늘 앞장서서 행진했다는 이 사실이 놀랍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떨까요? 성도들은 어떨까요? 조금만 어려우면 옆으로 새고 숨고 도망갑니다. 뒤로 물러납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변명과 핑계가 있습니다. ‘나는 돈이 없어서, 나는 몸이 약해서, 나는 조건이 안 좋아서, 나는 시간이 없어서... ’ 하면서 믿음의 일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믿음의 일에 앞장서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다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앞장서려면 치러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그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면 믿음의 일에 앞장 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때 앞장서려면 희생이 있고 개인적으로 손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힘든 일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애매한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감당하지 않으려면 믿음의 일에 앞장서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일도 안 하려고 합니다. 아닙니다. 묵묵히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의 일에 앞장설 때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는 유다 지파와는 다르게 약삭빠르고 비열하고 비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교회를 떠납니다. 힘들다고 포기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이 되어 버리는 일입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맛이라고는 전혀 없는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 지파는 전쟁할 때도 당당하게 앞장섰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수많은 전쟁을 치루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해 갔습니다. 전쟁할 때마다 유다 지파가 앞장섰는데 지금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입니다.
여호수아가 살아있을 때에는 민족을 이끌고 진두에서 지휘를 했기 때문에 누가 앞장서야 하느냐 하는 것은 의논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누가 앞장서라, 유다지 파가 앞장서라’고 하면 무조건 앞장섰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의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고 나자 막막해졌습니다. 자기들을 이끌어줄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앞서 전쟁을 해야 하느냐, 누가 선두에 서야 하느냐, 누가 희생타가 되어야 하느냐, 누가 방패막이 되어야 하느냐.’ 그래서 저들이 의논을 하는데 자기들끼리 모여서 의논해봐야 아무도 앞서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것이 본문 1-2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전쟁터에서 앞장서는 이들은 가장 위험한 자들입니다. 사망률이 가장 높습니다. 앞장서는 것은 희생을 감수하고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렇게 유다는 언제든지 전쟁터에서마저도 유다 자신과 그의 지파 족속들이 항상 앞장섰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와 같이 힘들고 위험하고 생명을 내어놓아야 할 이런 위급한 일과 위태로운 일과 희생해야 할 때 유다 지파가 앞장섰습니다. 아무도 앞장서려고 하지 아니할 때 유다 지파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앞장을 서자’고 앞장섰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일에 앞장 서는 유다 지파와 자손을 하나님은 가만히 보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세 번째 살펴볼 말씀입니다.
3. 믿음의 일에 앞장선 자가 받는 복
그러면 믿음의 일에 앞장서서 이끌었던 유다 지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하였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일에 앞장서 헌신하고 충성한 유다 지파에는 다른 지파가 받을 수 없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복을 주셨을까요?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 자손을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자손을 가장 많이 번성시켜주신 지파가 유다 지파였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그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출애굽 후에 처음으로 인구 조사를 한 내용이 민수기 1장에 나옵니다. 남자 장정 20세 이상 싸움에 나갈 만한 자들을 조사했더니 모두 603,550명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들과 여인들을 합치면 200만 명이 넘었다고 추정합니다. 각 지파 당 평균을 내면 5만 명 정도됩니다. 그런데 가장 적은 지파가 므낫세 지파로서 32,200명이었습니다. 반면 유다 지파는 74,600명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믿음의 일에 앞장서려고 할 때 앞장설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 40년이 지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인구 조사를 한 번 더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민수기 1장에서 인구 조사를 처음 할 때 남자 장정의 총 인구는 603,550명이었는데 사십 년 후 민수기 26장의 2차 인구 조사에서는 남자 장정의 총 인구는 1,820명이 줄어 601,73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유다 지파는 제 1차 조사 때에도 가장 숫자가 많은 74,600명이었는데 40년 후에 보니 76,500명으로 1,900명이 더 늘었습니다. 물론 늘어난 지파가 일곱 지파였고 줄어든 지파가 다섯 지파였으나 유다 지파는 줄때에도 줄지 않고 늘어날 때에는 제일 많이 늘어났습니다. 믿음의 일에 앞장선 자의 복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 지파에게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 앞장 설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숫자가 적으면 방패막이가 될 수 없습니다. 숫자가 적으면 전쟁을 치르는데 힘이 없습니다. 적과 싸우는데 앞장선 군인이 다 도망을 가버린다거나 전멸한다면 뒤에 따라가는 군인들은 전부 겁을 먹고 도망가든지 사기가 꺾여 패전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정복에 앞장선 유다 지파는 늘 패기가 왕성하고 용감무쌍하여 비록 전쟁하다가 희생되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남은 자들이 끝임 없이 전진하고 전진해서 그 전쟁을 언제나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전쟁할 수 있는 능력을 뒷받침 해 주셨고 능히 앞장서서 일할 수 있도록 축복하신 증거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도 믿음의 일에 앞장설 때 번성의 복을 주십니다. 이런 은혜를 받고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앞장선 유다에게 형제들의 첫 번째가 되게 하고 중심이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장남은 르우벤, 둘째는 시므온, 셋째는 레위, 유다는 넷째 아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으로는 가정의 계보를 잇는 것은 장자의 일입니다. 모든 특권을 장자가 이어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장자인 르우벤은 장자이면서도 장자 노릇을 못하였습니다. 유다는 넷째 아들이지만 장자 역할을 하게 되었고, 열두 아들 중 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행사에도 유다가 첫줄에 서고 첫 번째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유다가 중심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상을 유다이즘이라고 하는데 유다 지파의 사상이 이스라엘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창세기 49:8-9절에 보면 야곱이 열 두 아들을 축복할 때 그 축복 기도 가운데 이미 나타나고 있습니다.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과연 이 기도대로 유다는 형제들의 첫 번이 되고 중심이 되었습니다. 민족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일에 앞장섬으로 첫 번째가 되는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유다 지파는 왕들이 가장 많이 나오는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49:10절에 보면 야곱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유다를 축복했습니다. 여기서 ‘규’(홀)라고 하는 것은 왕의 지팡이로 치리자의 지팡이와 같은 뜻입니다. 즉 왕들이 제일 많이 나오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도 솔로몬 왕도 유다 지파에서 나왔습니다. 남북이 분열되었을 대 유다의 모든 왕들이 유다 지파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사사 옷니엘도 유다 지파였습니다. 믿음의 일에 앞장섬으로 우리 집안에서도 복 받는 후손들이 나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제일 좋은 땅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복을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창세기 49:8절에 역시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고 했습니다. 유다의 후손들이 모든 후손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는 대상이 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대로 열한 형제가 유다를 보면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도록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열두 지파에게 땅을 나누어 줄 때 유다 지파가 가나안 땅 중심 부분의 땅을 가장 넓게 분배 받았습니다. 유다 지파의 땅이 기름지고 좋은 땅인 것은 이미 야곱을 통하여 예언한 대로였습니다. 믿음의 일에 앞장 선 사람이 이런 복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믿음의 일에 앞장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지경이 넓어지고 확대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섯째, 유다 지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49: 10절입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여기서 ‘실로가 오신다’는 것은 메시아가 오신다는 예표입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축복인 예수님께서 유다 지파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유다 지파는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복을 유다는 받았던 것입니다.
믿음의 일에 가장 앞장서 가시는 분이 누구일까요? 유다보다도, 유다 지파보다도 이 인류 사회와 이 세상에서 가장 앞장서 가시는 분이 누구일까요? 믿음의 일에 선봉에 서서 가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앞장서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죽음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심판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저주와 멸망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죽음을 담당하셨습니다.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일에 앞장서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의 일에 가장 앞장서신 분이 되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앞장선 자의 축복의 정절을 이루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날에도 믿음의 잎에 앞장선 사람이 가장 큰 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이 생명의 말씀을 듣는 우리들도 믿음의 일에 앞장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이 앞장 서야 할 믿음의 일이 무엇일까요? 성도들이 앞장서야 할 믿음의 일이 무엇일까요?
첫째, 겸손에 앞장서라
겸손에 앞장서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잠언 29:23절에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잠언 18:12절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베드로전서 5: 5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시편 147:6 “하나님이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고 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겸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으로 앞장선 이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였습니다. 모세 옆에는 늘 칠십 장로들이 따라다녔습니다. 이 칠십 명의 장로들을 어떻게 임명하였을까요? 민수기 미드라쉬는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열 두 지파에서 한 지파 당 여섯 명씩 공평하게 뽑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칠십 이명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명을 빼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가 칠십 두 장의 종이를 준비하여 칠십 장에는 장로라고 쓰고 나머지 두 장은 백지로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칠십 두 명의 장로 후보들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장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대상은 칠십 두 명입니다. 하나님은 칠십 명을 원하십니다. 이 제비 상자에는 칠십 두 장의 종이가 들어있는데 두 장은 백지이고 나머지는 장로라고 적혀 있습니다. 빈 종이를 뽑은 이만 빼고 나머지는 장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제비를 뽑기 전에 엘닷과 미닷이라는 두 사람이 모세 앞에 나와서 말하기를 ‘우리 둘은 장로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제비를 뽑을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둘을 제외하고 나머지 칠십 분을 장로로 하면 될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구름이 내려와서 칠십 장로에게 임했습니다. 이때 성령님도 임했습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언자가 될 것이라. 그러나 모세만큼 위대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모대는 위대한 등불이었습니다. 아무리 등불이 많아도 모세의 등불을 약화시킬 등불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민수기 11:24-25절은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칠십 명은 예언을 하다가 그쳤습니다. 하루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칠십 장로를 뽑을 때 스스로 겸손하여 낮추었던 두 사람 엘닷과 미닷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예언의 영이 그들에게도 임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이 성경에 일관성 있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둘째, 기도에 앞장서라
기도에 앞장선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기도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앞장선 자들을 역사상 꼭 축복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바벨론에 잡혀 갔을 때 느부갓네살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뭉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포로로 잡아왔으니 자기를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기도하는 사람은 사자굴에 집어넣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기도에 앞장을 섰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에 앞장서다가 사자굴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니엘 보다 먼저 사자굴에 들어가셔서 천사를 동원시켜 사자의 입을 다 막고 계셨습니다. 사자굴이 천사굴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을 죽이려고 하는 굴이 다니엘을 국무총리로 만드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기도에 앞장서는 자에게는 이런 축복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를 너무 많이 하고 있습니다.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고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그 약속을 신실하게 믿으면 다니엘과 같이 오늘날 어떤 위험과 어려움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고 할지라도 천지 만물을 다스리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셋째, 전도에 앞장서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사가 하나 남았습니다. 가장 큰 일이 남았습니다. 그것은 전도를 통하여 영혼들이 구원 받는 일입니다. 마가복음 1:38을 보면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앞장서야 할 믿음의 일이 전도입니다. 성도가 앞장서야 할 일이 전도입니다. 내가 앞장서야 할 일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일이요 영혼을 구원하는 생명의 일입니다. 이 중요한 사명을 깨닫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5: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라고 했습니다. 항상 주의 일에, 믿음의 일에 앞장서서 헌신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