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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안 여행기(2014.9.14.-18. 4박5일)
< 시작하며 >
시간을 2,000년전 과거로 되돌려 보면 그때 세계의 중심지는 지금은 서안으로 불려지는 장안이었다. 당시 장안은 로마보다 더 강력하고, 콘스탄티노플보다 더 크고, 알렉산드리아보다 더 부유했던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중국 역사상 주, 진, 한, 수, 당 등 13개 왕조의 도읍이었던 곳이며, 약 1,100년 동안 중국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지금도 이 도시에는 21세기의 가장 강력한 대포로도 뚫을 수 없는 견고한 옛 성벽이 옛 모습을 간직한채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며, 그곳이 지금의 서안이다.
서안 여행은 고향 친구 모임에서 한 회원이 제안하고, 내가 적극적으로 참가 희망자를 모아 추진하게 되었다. “천년고도 서안 일주”, “눈으로 듣는 역사 이야기 서안” 등 여행사가 제공하는 패키지 프로그램의 명칭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하여 책에 기록된 역사보다는 중국 고대사의 한 부분을 현장에서 몸으로 체험하고 가슴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나는 여행 일정을 보며 진시황제, 유방과 항우, 현종과 양귀비, 안녹산 등 한 시대를 주도했던 역사적 인물들의 활동 무대를 직접 밟아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또한 천 수백년전의 그 옛날 옛적에 신라의 왕자, 구법승려, 유학생 등이 천하의 중심지였던 그곳 장안에서 남긴 자취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서안에 도착해 보니 4박 5일간의 짧은 기간에 이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3일간 비가 내려 일정 진행에 방해를 받았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많은 곳을 방문했다. 실크로드 출발지, 섬서역사박물관, 대안탑북광장, 와룡사, 서원문, 소안탑, 회민거리, 고씨장원, 종루야경, 팔로군 기념관, 대흥선사, 화청지, 지하궁전, 진시황릉, 병마용갱을 둘러 보았다. 여행 4일째 마침내 비가 개어 흥경궁, 서안 성벽, 장한가무쇼를 볼 수 있었다. 하루 평균 4곳 이상을 보았으니 주마간산격이고, 사진 찍고 떠나는 전형적인 단체 관광 이었다. 좀 더 머물고 싶어도 오래 머물 수 없고, 빨리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도 없었다. 단체가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정 때문에 역사와의 대화를 꿈꾸었던 나의 기대는 그저 꿈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 동서양의 연결 통로, 실크로드의 출발점 >
서안에 도착한 첫째 날 오후 비를 맞으며 실크로드의 출발점을 기념하는 조각공원을 방문했다. 고대 중국과 서역을 이어주던 무역 교통로인 실크로드는 중국의 중원에서 시작하여 하서회랑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북 가장자리를 따라 파미르 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르는 길이다. 기원전 139년 전한의 장건이라는 사람이 수행원 100명을 거느리고 한무제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길을 떠났으나 도중에 흉노족에 잡혀 10년을 허송세월하고 마침내 탈출하여 대월지국을 거쳐 다시 장안으로 돌아오기 까지 13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장건이 개척한 이 길을 통하여 후대 당나라 때인 7-10세기간 가장 활발한 동서교류가 이루어 졌다고 한다. 중국은 지금 신실크로드의 부활을 내세우고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종주국 역할을 하던 옛 소련이 해체되면서 힘의 공백상태가 된 이 지역에서 중국과 미국이 치열한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경주 박물관에 가보면 신라의 전성기에 아라비아의 상인들이 경주를 왕래했다고 한다. 서안에서 시작되고 서안에서 끝나는 실크로드를 경주까지 다시 확장할 수는 없을까?
< 섬서역사박물관과 거대한 대안탑광장 >
여전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우산을 쓰고 섬서 역사 박물관을 방문했다. 박물관은 사람들로 가득차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중국인 특유의 고성 대화 소리는 귀청이 찢어질 듯 했다. 구석기시대의 유물들을 비롯하여 주, 한, 수, 당, 명, 원, 청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의 역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전시물의 대부분은 모조품이고 유리관에 보관된 진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진품은 대부분 대만으로 가져 갔다는 설명까지 나왔다.
대안탑은 당의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AD622년 당 고종 때 건립된 4각형의 누각식 탑이다. 초기에는 5층으로 세워졌으나 여러 왕조를 거쳐 10층으로 재 건축 되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7층만 남아 있다. 탑이 있는 광장은 218mX346m 의 거대한 분수 광장으로 이곳에 설치된 분수노즐만 2,048개나 된다고 한다. 한 여름 이 분수들이 한꺼번에 물을 뿜어내는 광경을 상상하면 저절로 시원해 진다. 중국인들의 통큰 스케일은 대대로 전해져 오는 DNA일까? 어디를 가나 규모의 방대함에 압도 당한다.
< 민초들의 삶이 역동하는 회민거리 >
회민거리는 서안 성내 종루 근처 고루 뒤편에서 시작하여 북쪽 서안 성벽까지 이어지는 서안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음식거리다. 실크로드를 거쳐 들어온 이슬람교도들이 장안에 정착하며 만들어진 거리이며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回民)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지금은 흰 두건을 쓴 회민들의 모습은 간혹 보일 뿐 대부분은 한족들이 각종 음식물과 장식픔 등을 파는 거리로 변모했다. 밤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이 거리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상인들의 호객 소리로 왁자지껄 했다. 민초들의 삶이 살아 숨쉬는 거리다. 이곳에는 회민이고 한족이고 구분이 없어 보인다. 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라도 더 팔아 보려는 상인들의 치열한 생존경쟁의 모습이다. 비가 내려도 눈이 내려도 이곳에서는 언제나 같은 모습일 것이다. 진시황제 시대나 유방의 한나라 시대, 당나라 태종의 정관의 치 기간이나, 현종이 정치를 내팽개치고 양귀비의 미색에 빠져 있었을 때에도, 그리고 다시 초강대국의 하나가 된 오늘에도 여전히 민초들의 삶은 크게 바꿔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 양귀비의 온천탕 화청지 >
화청지는 서안시의 북동쪽 30km 지점인 임동구 여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온천지로 서주 시대부터 여궁이 있었으며, 진시황제는 이곳에 여산탕을 세웠다고 한다. 이곳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백거이(백낙천)의 장한가이다. 온천의 온도는 43도로 신경통,관절염에 효과가 있다고 하며 양귀비가 사용했던 욕조를 보존하고 있다. 우리는 9.16. 오후 이곳을 관광하고 밤에는 장한가무쇼를 볼 예정이었다. 그러나 여행 기간 내내 내리던 비는 그날 따라 더 심해졌고, 결국 우리는 쇼 관람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인 9.17.일 아침에 일어나니 기적처럼 날이 개이기 시작했다. 오전 중에는 여전히 공연여부가 결정되지 아니하여 속을 태우다가 오후 3시경 마침내 희소식이 전해졌다. 밤 8시부터 쇼가 공연된다는 것과 우리 팀의 예약이 이루어 졌다는 소식이다.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시간에 맞추어 다시 화청지로 향했다. 약40분이 걸려 화청지에 도착하였다. 화청지 앞 한양관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광장을 산책했다. 어둠이 깔리자 광장의 화려한 조명이 켜지고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곳곳에 중국인들이 모여 파륜공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스포츠 댄스를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중 여자들도 일부 가담하여 함께 어울렸다.
< 장한가무쇼 -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 >
개찰구에는 입장객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우리는 줄을 서지 아니하고 다른 입구로 입장했다. 가이드는 귀빈 대접이라고 으쓱 됐지만 외국인 단체 관광객들에게는 이런 특별 대접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공연장에는 어제 화청지 관광시 걸어 다녔던 통로가 모두 관람석으로 변해 있었고, 이미 자리를 잡은 관객들로 가득찼다. 밤 8시10분 경 쇼가 시작 되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캄캄한 밤 하늘의 어둠 속에서 양귀비가 조명을 받으며 천사처럼 하강했다. 화청지 호수위에 사뿐히 내려 앉은 양귀비는 연꽃을 타고 현종이 보낸 수많은 시녀들의 호위를 받으며 황제 현종과 만난다. 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부는 현종과 양귀비의 만남과 황제의 양귀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다. 2부에서는 안녹산의 난으로 대궐이 함락되고 피신하는 도중 양귀비를 죽게 한 황제가 자신의 행위를 자책하며 비탄에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3부에서는 난이 끝나 다시 대궐로 환궁하여 양귀비만을 그리워 하는 황제를 그렸다. 마지막장 4부에서는 도사의 환술로 양귀비의 영혼을 찾아낸 황제가 양귀비와의 미래의 사랑을 다짐하고 맹세하는 내용이다. 백거이 원작에 장예모 감독이 제작한 이 중국식 뮤지컬은 여러 면에서 관객을 매료 시킨다. 변화무쌍한 서사로 사랑의 기쁨과 슬픔, 비탄과 회한을 잘 노래한 원작처럼 가무쇼도 수많은 무희들의 노래와 춤, 현란한 조명과 음향으로 때로는 극적으로 때로는 잔잔하게 비련을 그려낸다. 화청지 연못 물속에서 크고 작은 무대가 수시로 바뀌어 나타나고 사방의 궁궐에서 쏘아대는 형형색색의 조명과 레이져 빔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연못 물이 분수로 치솟아 커텐이 되고 조명이 커텐에 아름다운 그림을 수놓는다. 뒷산 여산에 조각달이 떠오르는가 했더니 여산 전체가 별들이 찬란한 밤하늘로 펼쳐질 때 관객들의 탄성은 최고조에 달했다. 백거이의 장한가 원문에서는 “在天願爲比翼鳥-원컨대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길 원합니다.此恨綿綿無絶期-이 슬픈 사랑은 영원히 끊어지지 않으리.” 비익조는 날개가 하나인 전설속의 새로 암수가 한 마리가 되어야 날 수 있는 새이고, 연리지는 두 그루의 나무이면서 가지가 붙어 한 나무처럼 커가는 나무를 말한다고 한다. 비장한 사랑의 맹세다.
생각해보면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은 처음부터 불륜이고 비극적 결말을 잉태하고 있었다. 현종과 양귀비의 나이차는 38살이나 되었고 더구나 현종은 양귀비의 시아버지였다. 이런 불륜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왜 매료 되는가? 백거이 같은 당대 최고의 시인과 장예모 같은 중국 최고의 명 감독의 작품이기 때문일까?
< 거대한 진시황릉과 지하궁전 그리고 병마용갱 >
역사상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던 진시황제, 그의 무덤은 전체 면적이 60만평에 이르고 지하 4층의 거대한 궁전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묘역 안팎에는 내성과 외성을 쌓아 당시 도읍지인 진나라 함양의 모습을 담았으며, 외성곽 길이만 12km에 달한다고 하니 무덤이라기 보다는 지하 도시란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지하 4층 중앙에는 진시황제의 관을 안치해 놓고 살아 있을 때처럼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별도의 편전, 부장묘구를 설치했으며, 전체적인 황릉의 지형은 돌아올 회자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시황제는 즉위하면서부터 능을 만들기 시작하여 통일 후에는 전국에서 70만명을 동원하여 땅을 깊이 파고 구리를 부어 곽의 둘레를 메우고,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고 기계장치로 흐름이 가능하게 하였으며 위로는 별자리를 만들고, 아래로는 땅의 형세를 갖추었다”고 기록했다. 진시황은 불노장생에 대한 집착이 남달리 강했지만 자연의 법칙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서복을 제주도에 보내는가 하면 그가 살았을 때 누렸던 만큼이나 사후에도 영화스런 지하제국에서 살고자 했다. 그는 불노초에 의한 영생에는 실패하였지만, 이 황릉을 통하여 2천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영원히 사는데 성공한 셈이다.
서안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진시황의 병마용갱(용갱은 인형무덤이라는 뜻)을 보기 원한다. 병마용갱은 널리 알려져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우리의 이번 여행도 핵심은 병마용갱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병마용갱은 1974년 서안 외곽의 시골 마을에서 우물을 파기 위해 땅을 파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안 사람들 사이에는 우물이 서안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입장 했을 때 1호갱 내부 관람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거대한 체육관식의 반원형 건물 아래로 들어난 용갱을 보며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1호갱은 길이 230m, 너비 62m에 군사 8,000여 명과 말 500여 필,전차 130대가 열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한다. 이들은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 달려나갈 듯이 대기하고 있는 전투대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대형의 인형 병사들은 위풍당당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그들의 손에는 한결같이 무기를 들고 있으며 키가 175-195cm 나 되는 늠름한 체격이다. 말 또한 키 150cm, 몸 길이 2m로 귀를 바짝 세우고 우뚝 선 당당한 모습이다. 8,000명의 군사들의 얼굴이 너무나 생생하고 저마다 다르다고 한다. 실제로 진시황이 거느렸던 병사들을 그대로 본 떠 만들었다고 한다. 그들 모두 진짜 칼, 창, 또는 춘추전국시대의 전형적인 무기인 쇠뇌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발굴자들은 진시황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검도 발견하여 시험해 본 결과 놀랍게도 칼의 표면은 녹슬지 않도록 크롬화합물로 산화처리 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놀라운 것은 이 도기 병마들에는 하나하나에 그것을 빚어 구운 도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2호 용갱은 1976년 4월 1호 용갱의 북동쪽 20m 떨어진 곳에서 발견 되었는데 L자형인 이 용갱은 길이 96m, 너비 84m로 1호 용갱의 절반 크기다. 이곳에서는 2,000여 명의 병사와 전차 89대, 청동 병기 수만 점이 나왔다고 한다. 거의가 보병인 1호 용갱과는 달리 2호 용갱에서는 궁노병, 경차병, 차병, 기병의 네 병과가 대형 군진을 이루고 있다. 연달아 아주 작은 3호 용갱이 발견 되었는데 이곳에는 4명이 승차한 지휘용 전차와 출전하기 전에 점을 친 흔적으로 보이는 동물의 뼈와 사슴뿔 조각이 나왔다고 한다. 병마 용갱 1,2,3호가 발견됨으로써 마침내 비밀에 싸였던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막강한 안행진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한 명 한 명의 병사를 도공의 상상력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실제 모델을 세우고 9천명의 실제 얼굴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만들어 나갔음이 분명하다고 한다. 또한 각각 다른 신분, 연령, 개성, 경력을 갖는 다종 다양한 인물을 묘사해 내고 신분의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복식묘사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진시황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병마용갱을 보며 자연스레 제기되는 의문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그는 기원전 246년 열세 살 소년으로 진나라 왕위에 올랐고 스물세 살 때부터 실권을 잡고 군사를 일으켜 이웃 나라들을 정복했다. 그의 군대와 전술은 뛰어나 10년도 못돼 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 할 수 있었다. 대륙을 통일 한 그는 봉건제를 중앙집권제로 바꾸고 봉건제도를 뒷받침해온 유교 철학을 없애기 위해 모든 유학 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 460명을 생매장 했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전제군주로 악명이 높았으나 치적 또한 눈부시다. 성문법을 만들고, 도량형을 표준화 하고, 화폐를 통일하고, 글자를 통일함으로써 중국 어디에서나 뜻이 통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한 도로와 운하를 건설하는 한편 저수지를 최초로 만들었고, 아방궁 이외에도 수많은 궁전을 지었으며, 만리장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 흥경궁 공원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서안 시민들 >
흥경궁 공원은 당 나라 최번성기를 이룩한 현종이 즉위전에 살았던 궁전이라 한다. 현종은 즉위 2년만인 서기 714년 저택을 개축하여 흥경궁이라 칭하고 양귀비와 더불어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현재에는 당대의 건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초석만 남아 있으며 시민 공원이 되었다. 어떻던 우리가 이 공원을 방문 했을 때 입구에서부터 일단의 사람들이 흥겹게 춤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호수 가에서도 아치형 다리 부근에서도 숲속에서도 곳곳에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남녀가 손잡고 부루스를 치는 곳도 있었다. 가이드는 부루스를 치는 곳을 가리키며 서안의 모든 불륜사건은 저곳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공개된 장소에서 내놓고 춤을 즐기는 모습이 아름답기만 했다. 숲속의 다른 곳에서는 오케스트라 연주가 펼쳐진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만든 오케스트라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의 복장도 제각각이고 함께 노래 부르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제각각이다. 간단히 산책나온 시민들이 산책중 이곳에 잠시 멈춰서서 신바람나게 한곡 부르고 가던 길을 다시 간다. 자유롭고 품위있고 아름다운 광경이다. 언제부터 중국사회가 저렇에 여유있고 품위있게 변모하였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부럽기도 하다. 분명 소득 수준만으로 판단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서안 직장인의 평균 월급이 월 60만원 남짓이라는데 그들의 저런 여유와 멋과 풍류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에 비하면 우리의 소득 수준은 서안 시민의 수준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 좌와 우의 극렬한 시위가 판을 치는 우리 서울의 모습은 서안 공원에서 본 것과는 너무 다르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악의가 넘치는 사회는 어둡고 살벌하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살벌한 대립 사회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 왔다는 생각에 이르자 서글픈 생각마져 든다.
< 서안과 우리와의 관계 - 신라 시대부터 현재까지 >
주서안 총영사관이 최근 발간한 자료를 보니 당 나라 시절 장안에 있던 해동 삼국인의 주택수가 20 개에 달했다고 한다. 고구려인 14, 백제인 3, 신라인 3이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고선지장군과 남생 등의 이름이다. 다른 자료에서는 신라인의 왕래가 두드러진다. 혜초 등 구법 승려들과 최치원 등 선비들의 유학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신라의 왕자였던 원측은 15세 때인 서기628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현장법사의 수제자가 된다. 그는 범어와 서장어에 능통하여 현장법사를 도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번역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자장 법사는 서기 636년 장안에 유학 하여 7년간 수도한 후 귀국하여 신라 불교 발전과 당나라 문화 전파에 기여 하였다고 한다. 의상 대사는 서기 661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장안 등지에서 10년간 중국 화엄사상을 연구후 귀국하여 화엄종을 전파하였다. 신라 성덕왕의 셋째 왕자였던 무상은 서기 728년 장안에 건너와 불법을 연구하였으며 그 후 사천성으로 건너가 20여년간 선법을 포교하여 사천지역 백성들의 추앙을 받는 등 당 나라 선종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서기 730년 경 신라의 고승 혜초는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실크로드를 따라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는 장안에서 인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하였으며, 그의 여행기는 1908년 프랑스인에 의해 돈황의 막고굴에서 발견 되었다. 그는 우리가 방문했던 대흥선사 등 여러 사찰에서 밀교를 연구하였다 최치원은 서기 868년 국비 유학생으로 장안에 유학하여 6년 만에 빈공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관역순관이라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올랐고, “토황소격문”을 지어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놀라서 의자에서 내려 왔다는 일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서기 884년 신라로 돌아와 함양군수 등을 역임하고 해인사에 은둔하면서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이 이외에도 수 많은 신라의 구법 승려, 유학생들이 장안에 와서 공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안 방문 두 번째 날 우리는 문서거리를 방문했다. 이곳은 각종 문방구를 파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인사동과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 같다. 붓과 동양화, 화구들을 파는 곳, 보석을 파는 가게들이 일려로 죽 늘어서 있다. 수많은 신라의 승려와 선비들이 이곳 문서거리에서 지필묵을 사기위하여 드나들었을 것을 생각하며 그 당시와 지금을 상상해 본다. 최근에는 한국인의 방문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3년전 1천여명에 불과했던 한인사회는 현재 5천여명으로 불어났고, 2013년 한 해 동안 섬서성을 찾은 한국인 여행자수는 25만여 명을 상회했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6월에 서안을 방문했고, 76억불을 투자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준공식이 금년 5월에 있었다고 한다. 삼성SDI도 7억불을 투자했다고 한다. 서안은 더 이상 우리에게 멀고 먼 잊혀진 고도가 아니었다.
< 끝내며 >
이번 서안 여행은 매우 보람 있었다. 중국 고대사의 단편을 몸소 체험으로 터득할 수 있는 기회였고, 값싼 여비를 내고 5성급 고급 호텔에서 4박 5일간을 편히 쉬면서 좋은 음식을 맛보고 친구들과 함께 담소하고 웃고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다시 중국 여행에 나서고 싶다.
2014.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