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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밭에 피어나는 진선미적 문향
- 이운순의 수필집 『비타민이 열리는 나무』의 아름다운 품새-
김혜식
Ⅰ. 독창적 사유, 개성의 조화로 이룬 향취
소설, 희곡 등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꾸며낸 허구이나 수필은 작가의 사실적 체험에 의한 인격적 고백을 바탕으로 글이 꾸려진다. 이 때 작가의 사상과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적 향기는 독자들의 심금에 울림을 안겨주는 핵심적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인간 미학의 수필은 작가의 따뜻한 가슴이 필수적 소양이다. 거칠고 삭막한 마음으론 세상사에 대한 관점이 무미건조하고 냉랭하여 격조 높은 문학 작품을 창작하기 어렵다. 문학의 기저에는 정이 깔려 있기에 작가의 삶과 개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수필문학은 그대로 작가의 거울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운순의 수필집 『비타민이 열리는 나무』에 수록된 작품 문장 행간마다 작가 내면의 온기가 오롯이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가슴으로 전이된 이 따뜻함은 책장을 덮을 즈음이면 독자로 하여금 한껏 삶의 충만에 젖게 한다.
무엇보다 이운순은 섬세하면서도 다정다감한 심성을 지닌 작가다. 소소한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과 혜안을 따스한 내면으로 끌어들여 독자로 하여금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다. 이는 작가의 문학적 역량을 돋보이게 하는 장점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이며 비평가인 롤랑바르트 Roland Barthes 의 중심주제 처럼 이운순의 수필에는 사물에 대한 의미 부여와 그에 따른 진선미적 향취가 매우 맛깔스럽게 형상화되어 있다. 수필에서의 맛깔스러움이란 글의 군더더기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란한 수사로 덧칠하거나 사전을 찾아야만 뜻을 알 수 있는 낱말, 혹은 외래어 오, 남용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족이 지나치거나 유식한 체하는, 교만과 오만에 사로잡힘이 없는 내면에서 정화된 순박한 심상心想이 독자의 마음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이에 수필 특유의 아름다운 문향을 짙게 맡을 수 있어 독자로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운순의 작품이 갖는, 여느 문학 작품과 남다른 변별력이란 바로 이런 진선미적 문향이라 하겠다. 수필은, 작가 자신이 경험한 사회생활, 풍습, 제도, 양식, 인정의 세간사를 소재로 철학, 사상, 느낌 등 작가 자신의 삶의 과정을 통한 총체적 안목이 투영되는 문학 장르이다. 이운순의 이러한 남다른 사유, 독창적 개성이 조화롭게 표출된 수필집 『비타민이 열리는 나무』를 텍스트로 삼아 그의 수필을 면밀히 살펴볼 기회를 가져볼까 한다.
Ⅱ. 미적 쾌락과 교훈성
삶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절실한 번민과 고뇌는 시대적 조류에 대한 바람직한 편승이라 할 것이다. 동 시대의 오류나 모순의 이면에 내재된 인간성 상실에 따른 세태의 불균형을 외면 할 수 없는 게 작가의 책무가 아니던가. 오늘날 인간성 말살의 치유책은 가정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어두운 사회적 현상의 원형적 해결 방법 모색이 인간성 회복이기에 그 답을 친척 간의 따뜻한 사랑으로 치유해 보자는 것이다. 선진 문명에 밀려 대가족이 해체된 지 오래다. 이운순의 핏줄에 대한 의미와 친척 간 따사로운 정이 한껏 배인 수필 「귀착점」에서 잠시 삶에 지친 심신을 그 온기로 위로받아 볼까 한다.
-‘오뉴월 염천과 지루했던 장마, 태풍이 동반했던 폭우도 한바탕 지나갔다. 그리고 남은 건 올 여름 마지막 늦더위 폭염만이 남아있다. 무더운 여름날, 늘어지듯 무심한 일상의 어느 날 생기를 불어넣는 들뜬 목소리다. 비교적 안정된 직장과 원만한 가정생활을 꾸려가는 큰언니의 셋째 아들이 오랜만의 외가 나들이를 계획했다는 전화였다. 열 명이 훨씬 넘는 많은 조카들이 있지만 그 ‘이질’은 유독 외가를 좋아하고 잘 따라서 외삼촌들이나 이모들한테 사랑도 더 많이 받는 조카다. 다른 조카들보다 외가 출입이 잦기도 했지만,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 두 외숙과 막내 이모와 함께 보낸 많은 시간들로 추억도 이야기도 더 많기 때문이다.’ -수필 <귀착점>에서
수필 「귀착점」 발단부 도입 부분인 ‘오뉴월 염천과 지루했던 장마, 태풍이 동반했던 폭우도 한바탕 지나갔다. 그리고 남은 건 올 여름 마지막 늦더위 폭염만이 남아있다. 무더운 여름날, 늘어지듯 무심한 일상의 어느 날 생기를 불어넣는 들뜬 목소리다. 비교적 안정된 직장과 원만한 가정생활을 꾸려가는 큰언니의 셋째 아들이 오랜만의 외가 나들이를 계획했다는 전화였다. ’ 에는 큰 언니의 셋째 아들이 외가 나들이를 꿈꾸며 들떠 있는 심경이 유연한 언어 조직으로 표현 된 게 매우 정감적이다.
열 명의 조카 중 유독 외가를 좋아하는 큰 언니의 셋째 아들인 이질이라는 내용이 이 수필에 등장한다. 이 내용 만으로도 작가의 친정 집안 가계의 번족(繁族)함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귀착점」에서 얻는 긍정적 기운은 친척 및 가족 간 화합과 결속력이다. 무엇보다 작가의 친척 계보 언급에서 엿볼 수 있는 핏줄의 끈끈함은 가히 한국적 표본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질에게 외가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의 발길을 붙잡은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 담긴 그리움은 아마도 무조건 자신의 편이 되어 주시던 외할머니와 나이 차이가 크지 않는 외삼촌들과 막내 이모가 같은 세대라는 것도 이유가 될지 모르겠다’ -「귀착점」 중에서-
라는 내용에선 작가가 여기서 말하려는 이유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이질에게 외가는 외할머니를 비롯 외삼촌들 막내 이모의 사랑이 무한히 샘솟는 곳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안정된 직장이지만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받는 온갖 스트레스를 외할머니와 외삼촌들 및 막내이모로부터 위안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윗글 ‘ 그의 발길을 붙잡은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 담긴 그리움은 아마도 무조건 자신의 편이 되어 주시던 외할머니와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외삼촌들과 막내 이모가 같은 세대라는 것도 이유가 될지 모르겠다’에서 작자의 이 의도를 눈치 챌 수 있다.
이로보아 요즘처럼 각박한 세태에 일가친척이 많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삶이 버거울 때 따뜻한 말 한마디, 눈길 한번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무가 되고 힘이 되어주는 게 친척과 가족 아니던가. 퍽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요즘 젊은이들은 친척간의 계보에도 서투르다. 수필「귀착점」엔 ‘이질’, ‘외숙’이라는 낱말이 등장 한다. 이질은 친정 언니나 동생의 자손을 뜻한다. 외숙은 어머니의 동생이나 오빠로서 외삼촌의 존칭어이다. 굳이 ‘이질’, ‘외숙’이라 표현 한 것은 점차 잃고 있는 일가친척 계보를 계승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적 표현일 것이다.
옛 것을 숭상하고 이를 지키려는 노력은 이운순 수필의 특징이다. 이운순은 수필의 묘미를,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와, 충분한 근거를 대입시켜 마치 실물을 한 눈에 대면하듯 선명한 표현에 두고 있음을 제대로 자각하는 작가다.
문학에서 체감할 수 있는 구체적 사물의 표현은 추상성을 구체성으로 바꾸어 형상화된 사물에 대한 독자의 사상을 유도하는 일이기에 이런 용어들은 더욱 빛을 발한다고 하겠다.
흔히 입체적 표현이라는 말로 맛깔스러운 문장력을 칭찬하기도 한다. 수필 「소리」에서 그 맛에 취해 보고자 한다.
-‘딱 딱 딱 딱 또드락 똑딱 또드락 또드락 또드락 딱 딱
얼마 전 잊고 있던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를 찾게 되었다. 얼마나 그리던 그리운 소리였던가, 이럴 때 나는 책 읽기를 취미로 가질 수 있었던 것을 다행스럽게 또 고맙게 생각한다. 책이 아니면 어디서 이리 귀한 소리를 채집하고 들을 수 있었을까. 더불어 내게 눈물을 뽑아낼 만큼 리얼한 다듬이 소리를 기억해낸 최명희 선생이 너무 감사해서 터진 눈물이었다. 젊은 날의 어머니가 그리울 때 아무리 기억을 더듬고 눈을 감아도 좀체 가닥이 잡히지 않던 다듬이 소리였다. 선생님은 그 소리를 어떻게 찾고 기억을 하셨던 걸까? 소리와 리듬이 온전하게 살아서 내게 전해지도록 활자화 해 준 선생님의 천재적 소리 채집 능력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수필 <소리> 중에서
수필 형식에 매우 충실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문장과 내용이다. 다듬이질 할 때 들려오는 청아한 소리를 최명희 소설가의 작품에서 인용한 것은 주제 암시는 물론 독자의 호기심을 촉발시키는 일에 손색이 없도록 하기 위함 일 것이다.
수필 형식은 서두, 전개부, 결미라는 필수적인 구획이 뒤따른다. 이 때 서두는 배경 설정, 분위기 조성, 주제를 암시하는 특성을 염두에 둔 이운순의 주도적인 작법이라 하겠다.
수필「소리」의 결말부 도입 부분에 이르러서는 소재를 남다르게 견인하고 있어 감화력이 깊다.
-‘딱 딱 딱 딱 또드락 똑딱 또드락 또드락 또드락 딱 딱’
어머니의 장단, 어머니의 뛰는 심장소리 같은 그 소리는 점점 시대의 유물처럼 어슴푸레 사라져만 갔다. 내 어머니의 모습과 함께 멀어져 간 그 소리를 꿈결에라도 한번 간절하게 듣고 싶었지만 들을 수도 기억할 수 없었다. 내가 사십을 훌쩍 넘어 중년으로 치달을 때 어머니는 이미 여든 중반으로 총기도 건강 상태도 점점 나빠지셨다. 생활 전반의 걸친 발전, 의학이며 과학이며 식생활이 아무리 좋아졌어도 흐르는 세월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쇠퇴해가는 기억에도 실낱같은 육친의 감만으로 딸년을 알아보시던 어머니는 구순이 되시던 해 봄날 우리 곁을 떠나셨다. 모든 것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는 순간이었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처럼 찰랑찰랑한 묵의 농도 맞추는 것도 알맞게 뜸 들이는 것도 어설프고 고추장의 메줏가루 고춧가루의 비율도 아직 미숙하기만 한 그 딸을 버려두신 채 그렇게 떠나셨다.’-수필 <소리> 중에서
윗글 화자는 어린 날 어머니가 하얀 광목에 풀을 먹이고 그것을 다듬잇돌 위에 놓고 잗주름을 펴기 위해 다듬이질을 할 때 내던 리드미컬한 다듬이 소리를 수필의 제재로 삼았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처럼 찰랑찰랑한 묵의 농도 맞추는 것도 알맞게 뜸 들이는 것도 어설프고 고추장의 메줏가루 고춧가루의 비율도 아직 미숙하기만 한 그 딸을 버려두신 채 그렇게 떠나셨다’ 이 내용은 다듬이 소리를 떠올리며 자신 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진한 그리움의 회상으로써 독자의 감정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한 표현이다. 누구나 어머니를 떠올리면 그 숭고한 희생과 헌신에 눈가가 젖고 목이 메는 게 인지상정 아니던가.
뿐만 아니라 ‘딱 딱 딱 딱 또드락 똑딱 또드락 또드락 또드락 딱 딱’ 서두에 인용했던 의성어를 결말부 도입 부분에 또다시 인용한 점이 눈길을 끈다. 수미쌍관형식에 대한 묘한 변화를 모색한 게 인상적이다. 이는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담았던 다듬이질 소리를 거듭 표현함으로써 수필의 특성인 구조적 호응에 충실히 이바지 하고 있음이다.
인생사 이야기, 혹은 자연물의 느낌, 그것에 대한 풍부한 상상이야말로 수필가가 지녀야 할 덕목이자 소양이다. 주위의 사물을 투영된 심상의 미감으로 형상화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작가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운순은 글자 한 구절을 읽고 그것의 모순이나 오류를 짚어내는 깊은 안목과 남다른 비판의식을 지녔기에 진정 수필가다운 면모를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글「따위라니」를 감명 깊게 읽은 독자라면 이운순 작가와 일면식이 없어도 그가 어떤 성품을 지닌 작가인지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글은 곧 사람인 것이다. 수필은 더욱 그렇다.
-‘내가 그때 그곳에서 말도 안 되는 오류를 발견 한 건 지극히 우연이었다. 인터넷이든 그 어떤 것이든 사람이 하는 일이고 보면 오류가 생길 수 있고, 오류가 발견 되면 수정 하면 그뿐 아닌가. 내가 아니어도 그런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잡을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고, 제의나 요구 이런 단어들은 나와는 무관하고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부당한 단어가 쓰인 것만 같아 용기를 내어 수정 제의를 해보았다.’ -수필<따위라니>중에서
수필「따위라니」의 발단부 내용이다. 윗글처럼 주위로 눈을 돌려보면 오류와 모순 속에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때가 있다. 그 일이 크든 작든 삶에 때론 적잖은 피해와 파급을 안겨주기도 한다. 더구나 그 일이 한 사람이 평생을 두고 일군 업적이나 치적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보다 그 일이 우리네 삶의 표상과 귀감이 되는 일이라면, 앞장서서 입바른 소리를 해볼 필요가 있다. 그 동안 무심코 지나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일을 이운순은 작가의식 차원에서 오류를 수정하는 일에 용기를 아끼지 않은 점이 진정 문인답다.
-‘발단은 근동에 사시는 지인으로부터『면암 최익현 선생 편지 집』을 선물로 받으면서부터 선생의 업적과 행적을 더 알고 싶다는 작은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편지글 번역본에서는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상소로서 직언을 아끼지 않으시던 강직했던 선생께서 거제도, 제주도 등지에서 유배 생활을 하시면서도 고향 부친께 드리는 문안 편지와 집안 가솔들에게 보내온 많은 편지를 우리글로 번역 발간한 귀한 것이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에 미숙하던 남편과 나의 젊은 날,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방향 제시와 삶의 지표가 되어주시는 지인께서 내게 주려고 한 부 더 구하셨다는 말씀과 이곳 포천에 자랑이시라는 선생의 존함만으로 그 선물의 의미는 남달랐다.
21세기를 사는 현실에는 다소 동떨어진 단어라고 치부할지도 모르는 충忠과 효孝의 유교관념이 뼛속까지 배인 전형적인 선생의 편지글을 보며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읽혔다.’
-수필<따위라니>중에서
인용문에는 자신이 발견한 어느 오류를 밝히기 전 면암 최익현 선생의 편지 집을 지인에게 건네받게 된 경위와 최익현의 편지 집에 수록된 편지 내용에 관한 작가의 소회가 짧지만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다.
‘21세기를 사는 현실에는 다소 동떨어진 단어라고 치부할지도 모르는 충忠 과 효孝의 유교관념이 뼛속까지 배인 전형적인 선생의 편지글을 보며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꼈다.’
라는 이 인용문에선 작가의 사상과 삶의 철학을 느낀다.
현대인들의 영악함과 이기심이 팽배한 요즘, 또한 물신 시대에 사노라 물질에 눈이 멀어 부모에게도 걸핏하면 칼끝을 들이대는 세태에 최익현 선생의 편지 집에서 묻어나는 충효 사상과 당시 최익현 선생이 처했던 난국의 아픔을 엿본 작가의 혜안이 참으로 웅숭깊다. 작가의 예리한 시각은 물론, 옳지 않은 일엔 주먹을 쥘 줄 아는 용기 또한 놀랍다.
평범한 소재지만 누구도 관심두지 않고 미처 내용상의 오류를 깨닫지 못한 것을 특유의 섬세함과 예리함으로 발견하여 글을 빚어내는 이운순의 작가정신이 예사롭지 않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나 가치문제는 ‘삶’에 관한 문제였다. 문제는, 살되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옳고 가장 보람 있게 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자는 것이다. 인간은 좋건 싫건 이 같은 ‘의미’를 찾는 데에서 동물적 삶과 구별된다. ‘인간에겐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내재적 필연성이 있게 마련이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의 윤리적 요청일 것이다.’ 라고 한상렬은 자신의 저서『문자학적 사유와 철학적 함의』에서 밝혔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나 가치 부여는 인간답게 삶을 사는 일이다. 그 기초는 학교 교육에 앞서 가정교육이 우선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교육만큼 인간을 성숙시키고 바른 삶의 길로 인도하는 게 없을 것이다. 그 탓에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나 깨나 자식들의 참 교육에 대하여 고뇌를 멈추지 않는다. 내 아이만큼은 남다르게 교육 시키고 훌륭한 지식을 전수시키느라 학원 및 족집게 과외 선생을 찾는 일도 망설이지 않는다. 부모의 노력과 고민에도 불구하고 요즘 청소년들 일부는 부모의 기대를 벗어나는 언행을 일삼곤 한다. 이에 대한 확인은 이운순의 수필「벌」에서도 가능하다.
-‘얼마 전 버스에서 보았던 한 무리의 남중생들이 생각난다. 한창 조잘댈 나이, 버스 안의 다른 승객은 개의치 않는 당당한 행동은 과연 요즘 아이들답다. 요즘 세태가 그렇듯 아이들의 대화는 반 이상이 상스런 비속어 일색이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저 아이들의 입에서 거친 단어가 튀어나올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한 아이가 무용담처럼 담임한테 대들고 교실을 박차고 나간 이야기를 한다. 그런 제 행동에 같은 반 다른 친구들이 우르르 따라 나오더라는 이야기를 마치 영웅이나 된 듯이 떠드는 모습에 차마 귀를 막고 싶은 지경이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면 아직도 부모에게 응석이 남아있을 것 같은 저 아이들을 어쩌란 말인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질풍노도의 아이들을 온전하게 교실에 묶어두는 것이 최선인 걸까. 우리 교육의 현실을 생각게 한다.’
- 수필<벌> 중에서
수필은 가치 있는 삶, 아름다운 삶을 지향하는 특성을 지닌 문학이다. 작가는 그래서 생활 속에서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삶의 지혜를 직접 독자들에게 전달 하고자 수필 창작을 한다. 윗글도 이운순이 버스 안에서 직접 체험한 사실에 대한 깨달음과 느낀 점을 독자들과 공유하고픈 욕망에 의해 빚어진 글이다.
흔히 자식을 두고 ‘겉을 낳지 속을 낳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또 농사 중에 가장 짓기 힘든 농사가 자식 농사라고 한다. 어린 핏덩이로 태어나 첫걸음을 떼고 언어를 배우고 코흘리개로 초등학교 첫 입학을 하기 까지 모든 이 땅의 부모들은 내 자식만큼은 부모의 기대치를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부모들은 아이가 성장하여 청소년기에 이르면 입시라는 치열한 경쟁 속에 자식을 가둬야 하는 현실 앞에 자신들의 꿈과 희망에 대하여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부모들의 노심초사와 달리 아이들은 학교와 세상에서 보고 배우고 익힌 것을 여과 없이 모방하고 습득한다. 작품 ‘벌’은 문제의 청소년들이 빗나가는 과정의 첫째로 언행을꼽고 있다. 독자와의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제시어다. ‘작가는 우리 시대의 정신적 파수꾼이며 그 시대의 등대로 서 있는 자’라는 권대근의 언술을 비쳐볼 때 이운순 작가야말로 오늘날 이 땅의 청소년들의 학교 안과 밖의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는 진정한 부모요, 교육자이다. 평자의 이 관점 탓인지 아래의 예문이 감흥이 깊다.
-‘ 우리 아이들의 바른 인성을 심어주고 일차적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할 가정은, 언제부터인지 우리 아이들을 일정량의 온도와 일정량의 햇빛과 공기와 수분을 공급하는 온실 속에 화초로 만들고 말았다. 산업화가 진행되던 즈음부터 기성인은 경제활동의 주역이 되어 열심히 살아왔고, 그 반대급부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무엇 하나 어려움 모르는 풍요를 만들어주었다. 변화된 일상의 부모는 바른 언행과 기본예절의 교실이었던 ‘밥상머리 교육’을 간과하게 되었고, 우리 아이들은 점점 자신들의 요구가 커지고 거칠 것 없는 아이들이 되어가고 있다.’- 수필 < 벌> 중에서
이운순은 우리 삶 속에서 밥상머리교육이 실종된 것에 대한 실상을 위 인용문에서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바쁜 현대인의 삶은 자식들에게 풍요를 안겨주는 대신 자녀들을 사람답게 키우는 일엔 소홀하게 만들었다며 안타까워한다. 위 내용은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관심사이기도 하여 독자의 호응도가 높은 작품이라 말 할 수 있다.
이운순은 수필 「벌」에서 마치 도깨비 방망이 같은 부모의 과잉 사랑이 오히려 아이들을 온실 속의 화초처럼 나약하게 만들고 있다는 일침은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 참 교육이란 학교에서 습득하는 지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의미다.
아울러 이운순의 이 언명은 최초의 스승은 부모라는 인식으로 학교 교육에 의존하기 앞서 가정에서 먼저 밥상머리 교육이 이루어져야지만 장차 아이들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다는 말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는 학교 교육을 통한 지식과 더불어 가정교육을 바탕으로 올바른 인성이 형성되고,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의 개체가 성립 된다는 이운순의 평소 자녀 교육관의 표출인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세상사를 마음의 잣대로 재단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지 모른다. 현대엔 긍정적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부정적 사고에 사로잡혀 조현병의 병소(病巢)가 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부정적 사고 이면엔 나 아닌 타인을 존중하고 예우하는 마음보다는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존중받고 관심 받고자 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지배적인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자신이 타인을 믿지 못하고 그릇된 잣대로 타인을 재단하는데 어찌 상대인들 타인을 존중하고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날이 갈수록 사회가 복잡하고 빈부 양극화가 심화 되어 적대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음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자기를 위한 그릇된 방어기제인 말초 신경적 이기심과 삐뚤어진 인성 탓에 사소한 일로 응징과 보복을 일삼는다. 비근한 예로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복 운전도 어찌 보면 소소한 일에서 출발하는 심사라고 하겠다. 이런 일들은 타인에게 엄청난 공포와 상처를 안겨준다. 이런 세태여서인지 수필「상처」가 눈길을 끈다.
-‘그리고 자정이 다 되어 각자의 집에서 가족들과 여행의 뒷얘기에 열을 올릴 즘 우리는 한 친구로부터 모임에 그만 나오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문자 특유에 짧고도 간결한 문장에는, 더 이상의 관심과 관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단호하고도 냉기가 느껴지는 말들이었다. 문장의 낯섦,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이 상황은 뭘까? 갑자기 찾아온 이별 통보에 미움과 서운함이 급격하게 밀려온다. 각자의 유년 시절을 빼고 거의 반세기 가까운 시간을 늘 지척에서 지켜보며 이무로이 지내왔던 시간이 갑자기 모래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砂上樓閣) 같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보았다. 그동안 너무 가까워서 행해지던 관심과 친구여서 더 안타까운 사랑의 질타도 조언도 모두 버거웠던 것일까? 너무 친하고 너무 사랑해서, 더러는 친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던 간섭과 관심이 그녀로 하여 더 지치고 외롭게 했었던 모양이다. 이런저런 일련의 상황을 돌이켜보니 우정과 사랑이라는 베일로 가린 채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던가를 생각하게 한다. 시부모 봉양을 다 하고 마지막까지 며느리로서의 절차가 모두 끝난 친구의 경험에서 나오는 조언이나, 완벽을 기하는 성향이 있는 친구의 지적까지 표면적으로는 모두 웃음으로 보아 넘기던 친구는 남모르게 상처를 받고 있었던가 보다. 어떤 말들이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을까? 무엇이 그렇게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그녀를 아프게 했을까, 여행의 흔적에서 유난히 활짝 웃고 있는 그녀를 보며, 처음엔 그녀로부터 우리가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우리가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라는 자책에 괴로웠다.’- 수필 <상처> 중에서
수필 쓰기는 자기 속에 내장되어 있는 기억을 불러내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권대근은『여성 수필의 손맛과 눈맛』에서 정의했다. 이운순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그 안에서 일어났던 여러 현상들을 직시하며 원리에 의한 결과를 추론하기에 이른다. 작가의 남다른 통찰과 해석화의 의미화에 귀 기울여 보자.
-‘그동안 너무 가까워서 행해지던 관심과 친구여서 더 안타까운 사랑의 질타도 조언도 모두 버거웠던 것일까? 너무 친하고 너무 사랑해서, 더러는 친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던 간섭과 관심이 그녀로 하여 더 지치고 외롭게 했었던 모양이다. 이런저런 일련의 상황을 돌이켜보니 우정과 사랑이라는 베일로 가린 채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던가를 생각하게 한다.’ - 앞 글 중에서
느닷없이 모임에 불참을 하겠다는 아니, 이별을 통보해온 친구에 대한 걱정과 안쓰러움이, 그리고 우정이 금 간 것에 대한 친구로서 진정한 안타까움과 평소 좀 더 돈독하게 그 우정을 가꾸지 못한 반성과 성찰이 담겨있어 감동을 준다. 자기 내면 바로보기는 이 작품의 백미다.
수필의 멋은 작가의 체취를 느끼는 데서 나온다. 이운순은 단순히 사건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제시하는 데서 더 나아가 자신의 내면 풍경으로 절경을 그려내어 형상화하는 것으로 문학적 성취를 확보하고 있어 믿음직스럽다.
잘 빚어진 한 편의 수필을 읽으며 그 속에서 독자는 교훈, 지식, 정보, 교양 등을 얻을 수 있기에 수필의 효용가치는 객관적으로 입증이 된다. 이운순은 수필「상처 」를 통하여 독자로 하여금 ‘인간관계에서 과연 바람직한 처세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운순 수필은 이처럼 미적 쾌락뿐만 아니라 교훈성도 확보하고 있다. 한 편 치유적인 특성도 지니고 있어서 맛과 멋 그리고 향기를 낸다. 문학인이 갖추어야 할 따뜻한 인성을 지향함으로써 문학적 가치는 물론 진선미적 사유로 작가적인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실증하고 있다. 독자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다.
Ⅲ. 이운순의 문학적 성취
수필문학은 독자층이 의외로 넓다. 남녀노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장르이다. 수필 특성은 심금의 부딪힘이며 읽는 재미이다. 한 편의 수필에서 세상사를 읽어내고 또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고 책장을 덮은 후 가슴이 훈훈해진다면 독서에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명작 수필을 일컬을 때 딱히 ‘이런 작품이다.’ 라고 표본적 작품을 내세워 기준을 정할 수는 없으나 진솔하고 서정성이 짙고 누구나 읽어도 작품이 내포한 주제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 진 글이 좋은 수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욕심으로써 작가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 창출에 충실했다면 수필로서 조건을 제대로 갖췄다고 말 할 수 있다.
이운순의 작품집 『비타민이 열리는 나무』(2016년 발간)는 이운순 작가의 첫 수필집이다. 이운순은 2008년 계간《에세이 문예》로 등단하였다. 에세이 문예 ‘이 계절의 작가 2회’ 선정을 비롯 제 15회 ‘에세이 문예 작가상 수상’ 및 2015 국회 의원 표창( 문화 예술 창작 부문) 수상 등 남다른 문단 경력을 갖춘 탄탄한 문학성을 지닌 이운순 작가이다. 또한 수필집『비타민이 열리는 나무』로 2016년 제4회 ‘청향 문학상 대상’을 수상 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운순의 첫 수필집 『비타민이 열리는 나무』에 수록된 작품은 작가의 올곧은 삶의 지향점이 정립되어 있고 탁월한 필력을 바탕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우리가 과연 어느 길을 선택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뇌가 역력하다. 단순히 경험한 일만 나열하는 게 아니라 사소한 사회적 현상에도 의미부여를 하여 그 일이 발생하기까지 원인을 고민하고 해결 방안도 제시하고 있어 이운순 수필은 문학적 가치는 물론 그 성취도 또한 높다고 단언할 수 있다.
수필은 자기 성찰과 삶의 철학이 돋보이는 문학 장르이다. 수필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가꾸는 일은 물론이려니와 세상사에 대한 깊은 관심이기도 하다. 우리네 삶은 불확실한 미래 속에 존재한다. 이 탓에 왠지 일상이 불안하고 초초하다. 이의 치유 방법으로 수필이란 문학이 존재한다. 이운순은 세상사를 펜의 힘으로 정화시키려 노력하는 작가이다. 타인에 대한 관심은 따뜻한 정 없인 불가능하다. 이에 이운순은 자신의 온기를 수필집『비타민이 열리는 나무』에 담뿍 담아 사회의 음습한 그늘과 냉기, 어둠까지 물리치고 있기에 수필집『비타민이 열리는 나무』는 명작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