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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은 장경왕후(1남1녀)와 문정왕후(1남4녀) 사이에서 모두 2남 5녀를 두었다. 이 분들이 소위 진짜배기 왕자님, 공주님이시다. ‘군(君)’으로 불린 서자와 옹주로 불리운 서녀들은 모두 9분의 후궁에서 7남 6녀가 생산되었다. 자식들을 전부 집합시키면 9남 11녀로 야구 한 팀에 여자축구 한 팀이 나온다.
문정왕후는 결혼 후 내리 따님만 네 분을 먼저 생산하였는데, 이 글의 주인공은 왕후의 첫 작품인 문열이 의혜공주님이다. 일단 의정부지역에 내려오는 ‘평강공주 콤플렉스’의 설화 ‘숯장수와 혼인한 공주’ 보자!!
◈숯장수와 혼인한 공주◈
: 어느 날 중종이 공주들과 담소를 나누다 “너희들이 이렇게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이 누구의 덕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조금은 낯간지러운 질문을 물었다. 당연 모든 딸들은 이구동성으로 “네, 모두가 아바마마의 은덕입니다.” 고 답하였다. 다만 의혜공주만이 “사람이란 누구나 자신이 쌓아온 업보대로 살아가는 것이지 지금의 생활이 편안하다고 하여 아바마마의 덕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한 때의 영화는 물거품과 같은 것이라 들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가 담긴 답변을 하였다. (요래야만 궁에서 쫒겨나가는 스토리 전개가 아주 자연스럽다.)
공주의 답변을 괘씸하게 여긴 나랏님이 화가 나셔서 벌(罰)로 공주에게 이상스런 命을 내리신다.
“네가 정녕 그리 생각한다면 내일 새벽 동대문이 열릴 때 제일 먼저 들어오는 자에게 시집을 보낼테니 앞으로는 네 덕으로 한번 잘 살아보아라.” 하였다.
다음날 아침 동대문으로 맨 처음 들어온 사나이는 숯짐을 가득 진 한씨 성(性)을 가진 숯장수가 들어왔다. 비록 가난하지만 천성이 부지런하고 성실한 숯장수 한씨는 그 날 동대문으로 제일 먼저 들어온 덕에 공주님을 색시로 얻게되었다.
숯장수의 아내가 된 공주는 자신의 처지를 남편이나 다른 사람들을 탓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자신의 업보대로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열심히 살아가던 중, 어느 날 숯가마를 둘러보다가 황금이 섞여있는 커다란 숯가마의 이맛돌을 발견하고 그 황금으로 부자가 되어 한평생 해로하며 잘 살았다는 야그다.
설화는 교훈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이런 유형의 ‘여인발복설화’는 민간에서도 비슷한 유형이 여러 곳에서 전해
오고 있지만 원류는 모두가 ‘바보온달과 평강공주’가 그 모티브이다.
새 식구(며느리)가 집안에 잘 들어와서 어찌 어찌 해서 집안을 일으켰다. 모두가 비슷한 아류이다.
이 설화를 바탕으로 청주한씨 후손들과 묘소가 있는 지역인 의정부시는 이 설화의 교훈이라면서…
[470여 년 전, 가부장적인 엄한 유교사회에서 여인의 삶은 언제나 희생을 강요당해 왔지만, 공주께서는 당당히 자신의 의사(뜻)를 주장하면서 신분까지 초월해 가정을 성공적으로 일으킨 분이다.]
내용을 풀어 쓴 것인데 메가? 교훈이라는 것인지 언뜻 이해하기 아리송한데, 풀어쓰기 전의 문장은… 이렇다.
아주 유식한 문자로다 ‘의혜공주님은 당당히 독립자영의 사상을 굽히지 않고 나아가 자기변혁과 자기계발이라는 명제를 강력하게 주창함과 동시에 공주라는 신분조차 타파한 여성이다.’ 그래서 후손들 중에는 이 공주님을 왕신(王神)할머니로 모시는 토속신앙까지 생겼다. (이거 국민교육헌장 같다!!)
헐~ ㅠ ㅠ. 이 설화의 교훈이라고 내용을 그대로 써보니까,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도데체가 이러한 생뚱맞은 엉터리 야그를 설화란 이름으로 과대포장해 모두의 판단을 혼란스럽게 하는지 이해가 않된다.
더욱이 지방자치단체 제도 덕(?)인가? 의정부시에서는 ‘의정부시정 20년사’와 ‘의정부지리지’ 등에 이 설화가 교육적인 설화라며 자랑스럽게 내용을 소개히고 있고, 공영방송국 KBS 역시 무슨 생각을 갖고 편성하였는지 방송으로도 이 자랑스러운(?) 설화를 소개하였단다. (KBS 영상북 애니멘터리 한국설화, 2010) 그런데 어째 이런 설화가 생겼을까?
막강한 권력의 여제 문정왕후가 자신을 닮아 아주 강한 성격의 큰 딸을 미화시키려 포장한 뒤, 한 술 더 떠서 왕날나리 개망나니 사위들의 허물까지를 숯장수의 못 배움으로 ‘무식해서…’ 하며 상쇄시키려고 한 것인가?
그렇지만 일단 문정왕후 생전 時에는 믿을 넘 아무도 없으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언제? 누가? 어떻게? 왜?? 무슨 까닭에 어째 이따위로 왜곡 날조된 허구의 야그를 구전설화로 교묘히 돌려 만들어 낸 것일까?? 막강 권력의 청주한씨 가문과 파평윤씨 가문의 합작품이 아닐까?
이 부근에서 조금 냄새가 나지만 증명할 길은 없다. 무슨 일이든 원인을 찾고자 했을 때는 거꾸로 풀어가는게 지름길이다. 결국 이 설화가 민간에게 좋은 의미로 널리 회자될 때 가장 득(?)이 될, 아니 제일로 행복해 할 대상이 누구냐에 초점을 맞춰보면 대충 거론의 대상이 나오지 않을까?
①문정왕후 본인 ⇒ 전처소생 효혜공주를 비롯해서 조졸한 막내딸을 제외하고 공주 4분을 모두 자기 손으로 혼인시켰다.
그런데, 사위들이 하나같이, 거지같이,
바보같이, 모두같이 개망니들이다.
▸1521년, 먼저 효혜공주가 11살에 당대의 실세 연안김씨 김안로의 아들 김희와 혼인시킨다. (사위는 사위다 김희: 애비 김안로의 사주를 받아 ‘작서의 변’을 일으킨 아주몹쓸 인간이다.)
▸1531년, 자기의 친 딸 의혜공주는 3년을 준비한 끝에 역시 11살에 청주한씨 경록과 호화혼수로 세간의 여러 소리를 들으면서 시집보낸다. 공교롭게 그 해에 전처소생의 효혜공주는 21살로 生을 마감하였다.
이제 친 딸들만 남았다.
(숯장수 사위 한경록: 이 글의 주인공이다, 언제나 주인공은 뒤에 멋지게 등장해야 한다.)
▸1533년, 2살 어린 효순공주 역시 11살에 능성 구순(贈영의정) 아들 능성위 구사안에 출가하였다. 그러나 공주는 난산으로 1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공주의 사가 역시 초호화저택이었다고 한다.
(홀아비사위 구사안은 공주가 죽자, 나라의 ‘부마금혼법’을 어기고 새로 장가를 갔다가 걸렸다. 받은 거 다 토해냈다!!)
☞묘소: 강원 춘천 남면 추곡리 243- 10. (부부합장분으로 2010년 移葬완료하였다.)
▸1541년, 마지막으로 셋째 경현공주(1530~ 1584/8/13, 55세)를 고령신씨 목사 신수경 아들 영천위 신의와 혼인시켰다.
이 혼인 때도 호화주택, 예물과 복식의 지나친 사치로 물의를 빚었다.
공주부부는 아들 1명을 두었다. 그런데 햐~ 여기 부자가 똑같다. 왕후의 외손주도 말썽에서는 부전자전 그대로다.
::삐닥 사위 신의(1530~ 1584/1/24, 55세),
인종 때 김포현령 재직 중 대간의 탄핵으로 체직되었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처남 덕에 원종공신 3등에 녹선되어 당상관이 되었다. 1547년 여주목사가 되었으나 양사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고 통천으로 유배되었다.
◀▶명종 9년(1554) 1월 10일, 영천위 신의를 통천으로 귀양보내다. (명종 실록)
신의는 대윤과 친했는데 소윤 윤원형(문정왕후 동생)이 대윤 윤원로(문정왕후의 오라비)를 제거하면서 부부 사이가 나빠졌다고 한다. 이후 장모는 물론 부인까지 노골적으로 미워하며 욕을 하고 다녔다는데,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이후에 관직에는 다시 복귀하지 못하였다.
본래 어려서부터 사람을 때려 다치게 하거나 죽이는 자가 비일비재하였고, 사족의 부인을 능욕하는 등 성품이 광패하기에 조정에서도 유배 때 자진토록 하였으나 특별히 서용되어 석방시켜 준 것이다.
그런 관계로 장모 문정왕후가 죽자 기뻐 날뛰면서 공주를 더욱 홀대하였으며, 처남인 명종이 죽었을 때에도 기쁨을 감추지 않았는데 그런 사실이 모두 조정에 고해지면서 1568년 처조카 되는 선조 임금에 의해 다시 유배갔다.
선조17년, 신의가 죽자 당시 집에 상주가 없어 공주가 의지할 곳이 없음을 감안한 나라에서는 전남 대흥에 정배 중인 아들을 풀어주어 모친을 섬기도록 하였다. (그래도 조카가 고모를 생각해서 베풀어주었네~)
::부전자전 신사정(1546~ 1593, 37세), 공주의 외아들로 이조판서 밀양 박충원의 따님과 혼인하였다.
음직으로 주부를 역임했는데, 애비에 뒤지지 않는 망나니로 기생 석빙정에 빠져 1566년 국상(명종승하) 중임에도 석빙정과 음란한 행동을 하여 의금부에 추고되었고, 모친의 재물은 물론 외할매 문정왕후가 하사한 물건까지도 석빙정의 치마 속으로 모두 바치는 통에 나라에서 기생에게 바쳐진 재물을 압수하고 기생 석빙정은 제주로 유배 보내졌다.
(햐아~ 스무살에 기생질이라… 아무리 옛날이라도 이노무시키가~ 싸가지가 바가지네~)
선조1년(1567), 새로 국왕이 즉위하면서 애비 신의는 방종한 행동(문정왕후와 명종의 죽음을 기뻐함)에 괘씸죄로 인해 이듬해 4월, 애비가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외아들이란 넘이 내다보지도 않는 등 불효한 행적을 저질렀다.
이 사실 역시 조정에 알려지자 역시 괘씸죄에 걸려 사판(仕版: 벼슬기록부)에서 이름을 삭제시키고, 의금부에서 추문을 가했다. 결국 이 친구도 정배되어 10년이 지난 선조21년(1588)에야 부인 박씨의 사면요청으로 유배지에서 겨우 풀려났다.
이렇듯 경현공주는 광패한 남편과 불효한 아들로 인해 오히려 개인적으로 불행한 삶을 산 여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현공주와 서방이란 신희는 같은 해 태어나, 같은 해 생을 마감하였다. 젠장, 우연이겠지??
☞묘소: 경기 광주 목현동 산107, 모개미(감나무)마을 -> 신수경, 공주부부묘, 신사정, 신순 4대 묘역.
②청주한씨 양절공파 ⇒ 조선초기 최고의 중국통 권문세도가 좌의정 한확을 중시조로 하는 양절공파.
일단은 숯장수 설화의 주인공이 파평윤씨의 따님인 의혜공주와 청주한씨 한경록이다.
한경록은 청주한씨의 시조 고려개국공신 한란의 18세손이며 양절공 한확의 5세손이다.
‘숯장수와 혼인한 공주’의 설화는 청주한씨 양절공파의 이야기로 위의 설화 내용이 ‘의정부시 문화관광 사이트’나 ‘청주한씨 참의공파 사이트’ 등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와 같이 파평윤씨와 청주한씨 두 집안 이외에는 별 상관이 없다. 숯장수는 청주한씨이다.
이제부터는 역사책을 뒤집어, 한 발 더 들어가 보자. 감춰져있던 속살이 낱낱이 드러난다.
그 희열에 먼지 쌓인 고서들을 하루종일 뒤적인다.(옛날 선배님들 야그!!), 시방은 웹 바다에서 종일토록 헤맨다.
먼저 역사책에 나온 두 인물의 기록된 프로필이다.…
◆의혜공주(1521~ 1564, 44세歿): 문정왕후와의 큰 딸이나 중종의 차녀로 이름은 옥혜(玉惠).
1529년(중종24), 공주가 9살이 되자 저택을 수진방(壽進坊: 現수송동, 청진동)에 짓기 시작하다.
1530년(중종25), 공주의 저택수리에 군사 5백 명이 동원되었다. (중종실록, 25년 2월03일條)
1531년(중종26), 11세에 춘천부사 한승권의 아들 청원위 한경록과 길례를 올리다.
1545년(인종01)6월26일, 이복오빠 인종의 병세가 위급하자 문정왕후가 공주의 집에 있다가 문안가다.
1545년(인종01)7월, 인종이 승하하고, 남동생 명종이 7월 6일 즉위하다.
1555년(명종10)12월03일, 문정왕후가 전내(殿內)가 편치 않다며 창덕궁서 공주 저택으로 옮기다.
1563년(명종18), 명종이 친히 공주의 병문안을 하고 저택을 감상하였는데, 후원 별관에 올라 오랫동안 감상하다가,
'금중(禁中): 궁궐 안'에도 이런 좋은 경치는 없는데'라고 감탄하였다.
1564년(명종19), 공주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44세로 별세하여 양주에 예장하였다.
공주는 한경록과 3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판관 한의, 차남 도사 한완, 3남 부사 한순, 딸은 요절했다.
☞묘소: 경기 의정부시 호원동 산119- 39(다락원 인근), 향토유적 제14호.
◆한경록(1521년∼ 1593년, 74세歿): 본관 청주(淸州), 중종의 부마로 의혜공주(懿惠公主) 남편이다.
조선조 막강 청주한씨의 한 획을 그은 좌의정 한확의 5대손으로 판돈녕부사 한치인의 현손이 된다.
부친은 춘천부사 한승권이다. 외가 역시 빵빵한 집안으로 판중추부사 조계상이 외조부이다.
한경록은 부마의 신분에 더하여 막강한 집안을 배경으로 정치에 많은 관여를 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 이기, 정순붕 등과 모의해 대윤의 형조판서 윤임 등을 제거하는 공을 세워 위사공신(衛社功臣: 사직을 지킨 공로), 광덕대부 청원군에 봉해졌다.
1547년(명종 2), 정난위사공신(定難衛社功臣), 성록대부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으로 책봉되었다.
한경록은 이러한 공을 믿고 이기(李芑)와 함께 당을 지어 패악을 저지르며 궁중에 있으면서 모든 일을 좌지우지하니, 조정의 선비들이 다투어 경록에게 서로 아부하였다고 한다.
또한 막강 장모님 문정왕후의 총애와 세력을 믿고 방탕하게 술 마시고, 여색에 음탕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다고 한다.
술을 금하고 있는 때에도 무뢰한 종친들과 창기(娼妓)를 데리고 밤낮을 모르고 방자하게 술을 마시며 즐기는 등 행실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경록이 당시에 얼마나 좋지 않은 비판을 받았는지는 史官이 기록한 史論에 신랄하게 기록되어 있다.
史臣은 論한다. ‘경록의 집이 벼락맞았다.’고 하지 않고 ‘벼락이 경록의 집을 쳤다.’고 하였다.
이것은 하늘이 그 집을 벼락으로 친 것임을 말한 것이다.(中略) “이제 경록은 방자하고 교만하여 제멋대로여서 그 악함은
전씨가 남모르는 잘못을 저지른 정도가 아니니, 하늘이 벌을 내린 것은 당연하다.”
사헌부에서도 여러 번 경록을 탄핵을 하였으나 위사공신에 왕실 부마인 점 때문에 번번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1582년(선조 15)에 사림을 배척하고 곤경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파직당했다.
죽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1593년 임진왜란 중 전사(웬? 戰死)했다는 구전이 있다는데....
에휴!! 설화와 역사는 다르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각설하고, 그렇다면 숯장수설화를 통해서…
파평윤씨는 무엇을 얻었는고? 파평윤씨의 여인들은 매우 강(?)하고 똑똑하니 일등 신부감들이다.
청주한씨는 무엇을 얻었는고? … ?? … 음… 청주한씨의 남자들은 처복이 아주 많다.
역사에 기록된 부마의 행실은 매우 좋지않게 나오는데 설화에서는 아주 좋게나오고 있다. 헷갈리게…
더욱이 그 무덤이 문화재로까지 지정되어 있으니 더욱 헷갈린다.
물론 문화재로 지정 된 선현들의 묘를 답사할 때 그 분들의 삶에 대한 족적을 한쪽의 편향된 기록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항시 주절대는 야그지만 ‘역사는 승리자들의 기록’이기 때문에 패자의 변을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힘들여 찾아간 선현의 묘가 별로 인 인물로 평가되고 더욱이 문화재로까지 지정되어 관리에 정부나 지자제의 도움을 받고 있다면 요거이 이상한 짓이 아닌가?
개인문중에서 관리한다면야 그 인물의 좋은 사후팔자려니 하겠지만 역발상적인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면 지금부터라도
너무 많지만 역사적인 간신 모리배, 매국노등의 무덤들을 재정비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냥, 가벼운 옛날 야그에 그냥 넘어가시지 웬 딴죽거리냐고 말할이도 있을 수 있지만 애써 힘들여서 시간 들이고, 돈 들여 찾아간 곳이 그런 인물을 위해서였다면 속 좋을 이 있겠는가?
이왕에 지정된 것들이라면 앞서 얘기한 ‘역발상적인 교육’을 위해 그대로 남기더라도 넘치고 많겠지만 새롭게 지정될 문화재의 더 철저한 고증을 바라는 마음에서 한 번 짚어보는 것이지, 남의 귀한 가문 깍아내리자는 것도, 흉보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오류가 좀 있구나!! 그~냥, 그 렇 다 고 요.
다 읽고보니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데, 장모님은 호화주택에 호화 혼수 등 시세말로다 욕까지 먹어가면서 열쇠를 꾸러미로 해서 울 딸네미 예쁘게 사랑해 주라고 시집보내 주셨는데, 이 노 무 사위란 것들이… 하 나 같 이~~ 에휴. ㅠ ㅠ
문정왕후님 예뻐하실 사위 시키들 한 넘도 없으셨겠습니다. 글쎄요, 세상일이 다 그라지요?
◈‘숯장수와 혼인한 공주’ 설화와 역사의 오류을 찾아보면서 의미없는 이 글을 맺자.
▸공주들과 담소를 나누다 ⇨ 의혜공주 11살에 혼인, 당시 공주들만 참석했다면, 참석자는 의혜공주 (11살), 효순공주(10살), 경현공주는 아주 어린 2살이고 막내 공주는 출생 전이니, 아바마마의 야그를 들어바야 달랑 두 명뿐이다.
혹, 옹주님들까지 모두 모여라… 그렇게되면 3명 추가요, 나머지 이미 혼인해 출가외인 되었으니.
▸자신이 쌓아온 업보대로 살아가는 것 ⇨ 11살에??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의 업보를 논하다. 대단하다.
▸동대문이 열릴 때 제일 먼저 ⇨ 파루(罷漏) 때 33회 종을 치면 성문들이 열린다. 새벽 4시다.
다락원에서 살았다는데, 거기서 동대문까지 지금 도로사정으로도 18km 자전거로 1시간20분, 그 먼길을 숯짐까지 지고 걸어 1등으로 입성한다! 그렇다면 숯장수는 한씨는 초인간이다. 아니, 한씨집안 남정네는 대단하다.
이 선배 숯장수를 보고 노력한 한석봉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글씨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근데 한석봉은 본관이 다르네.
▸황금이 섞인, 이맛돌 ⇨ 몰랐다고? 숯장수 한씨는 온달과 동격이다. 최영장군인가? 황금 = 돌멩이.
▸한평생 해로(偕老)하며 ⇨ 한평생 해로(偕老: 함께 늙어가는 것)라?
공주님은 44세에 병으로 죽었고, 숯장사는 30년을 더 사시다가 임진왜란 때 74살의 고령에 전사란다.
그런가? 33년을 같이 살면서 3남1녀까지 두셨으니 ‘해로(偕老)’는 거기까지, 이후는 ‘홀로’냐 ‘Solo’냐?
◈숯장수부부가 살았던 다락원(樓院= 덕해원)은? (등산매니아들은 다 아시겠군요?)
: 다락원은 조선조 한양 북부에 설치된 국립 숙박시설이다.
원(院)이란? 조선시대 수령이 부임할 때, 관원이 공무로 여행할 때, 기타 일반 백성들의 여행에서 편의시설을 제공할 목적으로 주요 도로상에 설치된 숙박 시설로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역으로 가는 주요 도로상에 도로의 등급에 따라 주요 거점에 역(驛)을 두었고, 원(院)은 역과 역 사이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락원은 누원(樓院)의 우리말 표기로, 실제 이곳에는 2층 다락[樓]으로 지어진 원(院)집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댜.
다락원에 대한 기록은 ‘선조실록’에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년) 후 수많은 향화인(여진족, 왜인들 중 투화한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음은 남기고 있고, 다락원이 서울 동북부의 교통 요지로 인마의 왕래가 많아 상업이 무척이나 번성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특히 함경도와 경기 북부로 이어지는 도로의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어 한양으로 유입되는 어물(魚物)의 대부분을 이 지역 상인들이 독점하여 큰 규모의 장시가 형성된 옛 번화가였었다.
현재 도봉산역 환승 주차장 인근에 다락원 터 표지석이 있어 겨우 흔적을 남기고 있다.
☞표지석 : 도봉산역 버스정류장, 맥주집 ‘만남의 광장’ 앞 길가 변에 있다. (도봉동 179- 14)
◈의정부(議政府)!! 벼슬 이름이요? 땅이름이요?
: 의정부란 조선 초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고려 때의 도평의사사를 없애고 설치한 조선시대 최고 통치구조의 핵심으로 백관(百官)의 통솔과 서정(庶政)을 총괄하던 행정기관이다.
조선 초 태종과 신하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결국 함흥에서 돌아온 태조는 한양으로 가지 않고 무학대사가 있던 회암사에 머무른다. 나랏일을 상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태종이 회암사를 자주 찾게 되자, 모든 백관들까지도 너무 불편하므로 당시 국가 최고기관인 의정부를 아예 이곳으로 옮겨 국정을 의논하였다.
이후 이곳의 이름을 의정부로 부르게 되었는데, 실질 행정명은 1942년에 비로소 공식 지명이 되었다.
◈경기도(京畿道)의 ‘경기(京畿)’는 무슨 의미일까?
: ‘경(京)’은 천자 머물고 있는 경사(京師: 서울, 도읍, 수도)란 의미이고, ‘기(畿)’란 천자 사는 궁성(宮城) 사방 500리 지역이란 뜻으로 천자가 계시는 곳과 주변을 의미한다. 즉 ‘왕도의 외곽지역’.
조선팔도 지명의 어원은 충청도(충주+ 청주), 전라도(전주+ 나주), 경상도(경주+ 상주), 강원도(강릉+ 원주).
이제는 혼자서도 잘해요!! 나머지 이북의 팔도지명 그냥 나옵니다. 어때요?? 참 쉽죠이~ㅇ - 了 -
追記 :: 의정부에 사시는 울 카페 '파란하늘'님, '주사랑'님 이미 알고 계셨다는거 " 나~안! 알 아 요 !!"
첫댓글 예나 지금이나~ 남정네들은 그저~~~
저만빼고 ,,, 저는 순진 ㅋㅋ 감사합니다 잘 보겠습니다.
@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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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하얀 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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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33
파란하늘만 천기를 몰래 알고 있으려 했는디. 하나님께서 천기를 누설하셨네~~~~
천기 누설............
설화는 설화일뿐인거죠?^
당대의 카리스마짱 문정왕후께서도 자식은 맘대로 안되셨나봐요~~
예나지금이나~~~
자식문제는 참~~~
잼나면서도 유익한글~~잘읽었습니당~^♥
저 시방 할 일이 있어..
아일비빽~=3==33
역사의 뒤안길 속살을 파헤치는 희열을 맛 보시는 재미에 먼지나는 고서를 뒤적이시는 하나님 덕분에 저희는 구둘짱에 누워 그 속살 보는 재미를..ㅋㅋ
근데 한경록은 한석봉과 더불어 역사책에서도 두어군데 거론되었던 이름으로 기억돼요.
역사책엔 준위인급이었던 거 같은디..ㅎㅎ
한우봉 Richard님과는 그니까 성만 같은거죠?
아무래도 청주한씨일 가능성이 젤로 높을 것 같습니다. 청주한(韓)씨는 본관이 청주와 곡산뿐이나, 다른 본관을 쓰는 금산, 한양, 안변한씨 등은 청주에서 분파되었고 근간에는 같이 합쳐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
청주한씨 가문에서는 조선왕비님을 여섯 분이나 배출하셨으니, 조선 최고의 일등 신부감은 한씨에서 찾아보심이 가장 확실할 듯 합니다.
같은 발음으로 충주한(漢)씨가 있습니다만, 아주 미미해서시리...
청주한씨나 파평윤씨에서 저희도 며느릴 하나 구해야겠습니다 ㅎㅎ
늘 좋은글 감사히 잘 읽고갑니다 돌아서면 다 이자삐리서 걱정이지만요
수고가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