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찬경의 문학 감상] 김영익 시인의 시집 『아름다운 사기를 알아채다』(소울앤북, 2025)를 읽고
김영익 시인의 시집 『아름다운 사기를 알아채다』(소울앤북, 2025)를 오늘에야 다 읽었다. 140여 쪽 분량의 시집을 읽는데, 20여 일이나 걸린 것이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시집 속 시(詩)의 언어들은 나를 자꾸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들게 만들어 읽는 속도가 빠를 수 없었다.
시집의 제목에 나타난 <아름다운 사기>에 대해서도 나는 한참이나 생각에 빠져야 했다. 아름다운 사기라니? 세상에 ‘사기’가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시집을 다 읽고, 끝내 이해했다. 남을 속이는 ‘사기(詐欺)’도 실은 놀랍게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시인의 순수함과 그 언어 속에서는 ‘사기’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넓이와 깊이가 가늠 안 되는
저 짙푸른 겨울 하늘,
필지마다 구획 지어 내다 팔 수만 있다면
- 김영익 시인의 <아름다운 사기> 중에서
기획부동산 사기꾼들이 험한 야산을 지도에서 반듯반듯하게 구획 지어 필지를 나누고, 투기욕이 강한 사람들에게 택지로 분양하여 ‘먹고 튀는’ 사기처럼, 김영익 시인은 하늘을 필지로 나누어 팔아먹을 생각을 했다. 해 지나간 자리는 6천원, 달빛 흘리고 간 자리는 7천원, 별똥 사선 그은 자리는 8천원 등에 팔려 했다. 그것도 작가처럼 생각할 수 있는 시인들에게 팔려 했다. 이 정도면, 그 ‘사기’는 “아름다운 사기”가 맞다.
김영익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사람의 내면(內面)이 얼마나 넓고, 또 그 깊은 속을 얼마나 잘 알 수 없는지도 깨달았다. 사실 시인과 나는 오랜 친구이다. 어린 시절부터 거의 50여 년을 교류한 친구이다. 그러나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전혀 새롭게 알게 되는 생소한 그의 얘기들과 내면을 보게 되었다. 김영익 시인이 저렇게 깊고 너른 세계를 그 안에 지니고 있었구나, 나를 친구로 갖기에는 너무 큰 세상을 지닌 친구였구나, 그는 시인이지 내 친구가 아니었구나 하는 일종의 소외감도 느꼈다. 그는 친구가 아닌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집을 읽으면서, 시인이 나와 친구가 아니어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김영익 시인의 넓고 깊은 내면은 항상 세상의 다수를 향한 연민과 따스함을 지닌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인은 친구로서가 아니어도, 세상 사람의 하나로서 나에게 연민과 따스함을 아낌없이 충분히 베풀어 줄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마음속에는
뭔가를 길어 올리고 싶은
두레박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터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
뭐라도 길어 올려 주고 싶은 건
내 마음속 두레박도 누군가
길어 올려 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오늘도 네 우물가를 서성대다
내 두레박을 떨어트린다
- 김영익 시인의 <공감> 중에서
김영익 시인이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과 따스함으로 두레박을 다수의 우물에 더 많이 떨어트려 더 많은 것을 끌어 올려줄, 더 많은 시를 생산해내길 기대하게 하는 대목이다.
김영익 시인의 시집은 쉽게 감동과 격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건 내 느낌이다. 꽃처럼 밝은 색상, 쉽게 감동을 자극할 흔한 문구들, 직설적으로 교훈적인 논리와 언어들, 이념적 편향들을 김영익 시인은 모두 사용하지 않는다. 김영익 시인은 자신이 시 속에서 연결시켜 놓은 단어들의 연관을 통해서, 독자가 그 나름대로의 느낌을 갖도록만 만들어 놓았다.
북으로 이어진 강변 철조망은
미혼모의 수술 자국처럼
슬픔을 박아댄다
- 김영익 시인의 <겨울의 속셈> 중에서
분단된 조국을 가르는 강변의 철조망을 보며, 나름대로 아픈 기억을 평생 지니고 살아갈 그러면서도 그 자신의 삶을 모질게 이어갈 미혼모를 떠올리게 만든다. 분단된 땅에 사는 모두에게 상처처럼 쓰라리게 박힌 철조망을 김영익 시인은 겨울이 보여주고 있다고 얘기한다.
봄, 여름, 가을의 천연색을 다 빼내고
역사의 고갱이만을 보여주려는
겨울의 속셈은 무엇인가
- 김영익 시인의 <겨울의 속셈> 중에서
겨울이 가고 나면, 또 다시 겨울이 가고 나면, 언젠가는 그 철조망이 꽃 덩굴로 변할 그런 날도 오지 않겠는가? 그런 봄날 같은 세월을 맞이하기 위해 아픈 현실은 아픈 현실대로 처절하게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겨울의 속셈은 그것인가?
이제 김영익 시인의 시집 『아름다운 사기를 알아채다』를 한차례 일독했다. 분명히 그 시집에 대해 아직은 더 많이 얘기할 것이 남아 있다. 일독으로는 부족하다. 한번 더 읽으면, 더 다른 느낌이 있을 것이다. 머리맡에 두고 읽고 또 읽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해야 할 시집이다. 여러분에게 일독을 권할 시집임이 틀림없다.
2025년 3월 8일 토요일 임찬경 작성
첫댓글 시만큼이나 시평도 감동입니다.
원주 홍천의 물과 땅이 하늘을 비추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