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이야기 44.
‘양념’의 어원(語源)은?
귀농한 선배 한 분이 “양념이란 말이 ‘음식을 약처럼 생각하라'는 ‘약념(藥念)’에서 왔다는 설이 있던데, 맞는 얘기인지 궁금하다.”라고 해서 좀 찾아보았습니다.
먼저 ‘양념’을 사전에서는 “음식의 맛을 돋우기 위하여 쓰는 재료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아는 정도여서 특별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약념’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옵니다.
“약념 「명사」 『옛말』 양념. 향미료.
용례) 染 초지령 소곰 和 약념≪물보 하:3≫”
이는 “초지령(초간장의 옛말)에 소금을 타서 약념을 만든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실린 ≪물보(物譜)≫란 책은 조선 후기 학자, 관리이자 천주교 신자로서 순교한 이가환과 그 아들이 1802년에 펴낸, 사물의 이름을 정리한 일종의 사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약념'이 한자로 표기되어 있지 않은 걸로 보아 ‘藥念’이란 말은 사람들이 좋은 뜻의 한자를 골라 그럴듯하게 끼워 맞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차라리 ‘물들이다, 적시다, 담그다’라는 뜻이 있는 ‘염(染)’이나 온갖 양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인 소금, 즉 ‘염(鹽)’이라는 한자가 포함되어 있다면 모를까, ‘양념’에 난데없이 ‘약(藥)’을 들이밀거나 ‘생각 념(念) 자’를 갖다 붙이는 건 당최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입니다. 기껏 몇십 년 전만 해도 영양이고 건강이고 따질 것 없이 굶주림을 면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던 우리네 삶 아니었던가요?
이런 식으로 어떤 말의 유래를 학문적 연구나 사실과는 상관없이 그럴듯하게 끼워 맞춰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민간어원(民間語源)’이라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많이들 알고 계시듯이 ‘행주치마’가 임진왜란 때 격전지 ‘행주산성’에서 유래했다든지, ‘화냥년’이 병자호란 때 ‘환향녀(還鄕女)’에서 온 말이라든지, 한자어가 아닌 ‘강강술래’나 ‘생각’을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나 ‘생각(生覺)’이라고 굳이 한자로 표기하고 싶어 한다든지 하는 것들인데, 이는 대개 사대부들의 한자와 한문에 대한 의존성 때문에 생긴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마디로 전혀 상관 없는 한자들을 억지로 꿰어 맞춘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실제로 민간어원으로 만들어진 말은 대부분 지식인층의 자기현시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결국 섣부르게 아는 척하는 것이 병인 셈이지요.
이런 예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양말에서는 요즘 우리들도 흔히 먹는 ‘햄버거(hamburger)’가 유명합니다. ‘햄버거’라는 말 자체는 민간어원에 해당되지 않겠지만 거기서 비롯한 ‘치즈버거’, ‘불고기버거’ 등은 당연히 민간어원에서 파생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기를 다져 가공한 ‘패티(patty, 다진 고기)’가 들어 있는 ‘햄버거’를 씹으면서도 그것이 당연히 돼지고기 ‘햄’을 썰어 넣은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햄버거’의 기원은 독일 함부르크(Hamburg)입니다. 과거 함부르크 뱃사람들은 일이 바쁠 때면 다진 돼지고기에 채소 등을 섞어 구운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답니다. 그것을 ‘함부르크식 스테이크(Hamburger steak)’라고 했는데, 예전 경양식집 차림표에 흔히 등장하던 ‘함박스테이크’가 바로 그것이지요.(저는 어렸을 때 이게 어떤 음식인지 늘 궁금했지만 아쉽게도 먹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이 19세기 말 독일 이민자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고, 누군가 빵을 갈라 그 사이에 끼워 팔면서 미국식으로 발음한 ‘햄버거’란 이름과 함께 널리 퍼지게 됐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햄버거’에서 ‘함부르크’는 잊고 ‘햄’만을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이후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치즈버거’, ‘피시버거’, ‘치킨버거’ 등이 나타났습니다. 나아가 우리나라에서는 ‘김치버거’, ‘불고기버거’, 심지어 ‘밥버거’까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말의 근원을 따져 본다면 당연히 ‘Hamburg-er’로 나누어야지 ‘Ham-burger’로 나누는 것은 곤란합니다. 물론 ‘-burg’가 ‘성(城)’이라는 뜻으로 독일 지명에 많이 붙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써 놓고 보니 ‘우리말’ 아닌 ‘영어 이야기’가 되어 버렸네요. 하지만 어차피 우리도 많이 쓰는 말, 외래어로서 버젓이 사전에도 올라 있는 말이니 그 근원을 찾아본다 해서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닐 듯합니다. 인제는 식상한 표현이 되었지만, '국제화시대'잖아요.
김효곤(둔촌고등학교 교사, ccamy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