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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0.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2021. 5. 9. 김치현 목사
[시편 30편]
[성전 봉헌가, 다윗의 시]
1. 주님, 주님께서 나를 수렁에서 건져 주시고 내 원수가 나를 비웃지 못하게 해주셨으니 내가 주님을 우러러 찬양하렵니다.
2.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께 울부짖었더니 주님께서 나를 고쳐 주셨습니다.
3. 주님, 스올에서 이 몸을 끌어올리셨고 무덤으로 내려간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4.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여라.
5.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
6. 내가 편히 지낼 때에는 "이제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겠지" 하였지만,
7. 아,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 주시던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시자마자 나는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8.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었고 주님께 은혜를 간구하였습니다.
9. 내가 죽은들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내가 죽어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한 줌의 티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한 줌의 흙이 주님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습니까?
10. 주님,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주님께서 나를 돕는 분이 되어 주십시오.
11. 주님께서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셨기에
12. 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영원토록 주님께 감사를 드리렵니다.
시편은 이사야서와 함께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이다. 시편 150편 가운데 129편이 직접 간접으로 신약성경에 인용되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 하셨다. 구약에 예언된 모든 것이 나에게 이루어져야 되리라 하시며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을 언급하셨다. 예수님이 직접 인용하신 것도 시편에 많이 나온다. 특히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대부분의 상황들은 시편을 인용한 것들이다. 우리가 잘 아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라는 말과 쓸개 탄 포도주를 해융에 머금어 마시게 했다는 것도 시편에 나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자면 시편을 한 번은 봐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한번도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가장 약한 백성이다. 중동 지방의 주변국으로 가장 약하기 때문에 가장 많은 일을 겪어야 했다. 그 백성은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약한 백성의 그릇 속에 인생의 풍부한 경험을 다 담아서 그것이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하셨다. 예수님께서 직접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라고 말씀하셨으니까 이것이 구약성경을 해석하고 시편을 해석하는 토대다. 그냥 보면 개인의 고난이고 민족적인 고난이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을 그리스도와 연관지어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민족은 자기로서는 답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릴 수밖에 없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되도록 하나님이 이끌어 가셨다.
성전을 향하여
시편 30편은 성전 봉헌가라고 하는데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시편 30편의 내용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보기 바란다.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이 되게 하려고 지으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거처가 되게 하려고 택하셨다.
출애굽기 15장에는 홍해를 건넌 이후에 모세가 부른 찬송이 나온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라고 하였다(17절). 주의 백성을 인도하셔서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신 것은 주의 처소로 삼으시려는 것이고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운 성소라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하나님의 성소라는 것이다. 구약 성서에도 출애굽부터 성전을 짓는 것을 향해 가고 있지만 처음부터 이 백성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계시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성전이라고 수준 높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미 모세의 입에서 “이 백성이 바로 주님의 성소입니다. 당신의 거처가 되게 하시려고 이 백성을 택하셨습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한다면 각 사람의 경험은 마치 큰 집의 벽돌처럼, 큰 그림의 한 퍼즐 조각처럼, 큰 방주의 한 판자조각처럼 자리매김 되지 않겠는가. 교회 안에서도 ‘나는 교회의 한 벽돌이다. 한 판자조각이다.’라고 고백하지만 우주적인 하나님의 큰 집을 생각해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벽돌 한 장을 쌓고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이 되게 하려고 사람을 지으셨고, 자신의 거처가 되게 하려고 이스라엘을 택하셨다(출15:17). 큰 그림의 한 퍼즐 조각처럼, 택함 받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우주적인 집에 퍼즐의 한 조각 같은 자기 자리를 찾는다.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잤던 가장 곤고한 날, 하늘이 열리는 꿈을 꾸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벧엘)이라 불렀다. 하늘이 열렸다는 성경의 표현은 반대로 사방이 막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갈 바를 모르는 그 자리에서 하늘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고 “이 곳이 당신의 집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야곱은 무엇인지 모르고 고백했지만 계시적인 사건이었다. 이것은 장차 야곱 자신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을 미리 계시로 보여 주셨던 것이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광야로 도망다니던 때에 나온 시편이 많다. 그 중에 “주께서 나를 주의 날개 그늘 아래 두셨습니다. 주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두셨습니다. 당신의 생명 싸개 속에 나를 보호하셨습니다.” 이런 고백들이 있다. 시편 27편 4절에는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하였다. 왜 이런 고백이 나왔는가? 그가 평생 바라는 일은 주의 집에 살면서 주를 사모하며 주와 의논하는 것이라며 그 이유를 5절에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라고 하였다. 머리 둘 곳이 없는 곤고한 인생인데 그 인생이 경험한 것은 주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셨다는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군사를 이끌고 쥐 잡듯이 온 유다 땅을 뒤졌는데 어떻게 다윗은 1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다윗을 비밀한 곳에 숨겨두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광야에서 여기저기 도망다녔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한 장막 속에, 그의 초막 속에 숨기셔서 그와 함께 지내게 하셨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러했기에 왕이 되어서도 그의 한 가지 소원은 주의 집에 사는 것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신기하게도 설 곳조차 없는 가장 곤고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집에 대한 계시가 나왔으니 얼마나 역설적인지! 도망하다 돌베개를 하고 자고, 광야를 숨어다니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소망이 가장 분명하게 나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계획, 당신의 집이 되게 하려고 그 목적 안으로 나를 부르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내 인생을 당신의 부름 안으로 향해 가게 하는 모든 일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이 자신을 보존하고 내 집을 지으려 하면 그 길이 가시밭과 같다. 야곱이 자기 집을 지으려고 할 때는 그 인생이 가시밭길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집이 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이 그의 집이 되는 것이라고 알 때 우리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복이 되지 않을 일이 없고 해석되지 않을 것이 없다.
우리는 왜 사는가? 사는 이유가 우리 삶의 힘이다. 대전의 나상규 형제님이 요양병원에 누워 있다가 하나님 말씀이 들리고 살아야 될 이유가 생기니까 병원에서 나와서 건강하게 책을 쓰신다고 간증하셨다. 손주를 키우는 노인들이 힘은 들어도 십년은 수명이 길어진다고 한다. ‘내가 없으면 저 애가 어찌 살꼬? 먹을 것을 누가 챙겨주나?’ 이런 쓸데없어 보이는 걱정이 삶의 힘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은 이미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주어진 것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 내 인생을 어디에 쓸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물어야 될 물음이다. 바가지 하나가 스스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쓸데없는 고민을 하면 답이 없다. 이 바가지를 어디 쓸 것인가. 있는 것을 잘 쓰면 된다. 물 바가지로 쓸 것인가, 아니면 밥을 담는 그릇으로 쓸 것인가, 아니면 돈을 담을 것인가? 우리 인생도 무엇을 담을 것인지가 문제다.
우리 속에 있는 것은 다 담겨진 것들이다. 내 생각이라고 말하는 것, 내 견해, 내 입장……, 알고 보면 다 담겨진 것이다. 망고를 먹어 본 사람이 망고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되듯이 경험을 통해 무언가 내 속에 들어와서 그런 욕구나 동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무언가 담겨지는 그릇이라면 “이 질그릇에 보배를 담았다.” 이것이 복된 인생의 고백이 아니겠는가. 우리 인생 속에 아름다운 것,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이 담기기를 소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담겨지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과의 연합’, 이 말은 같은 말이다. 우리 속에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내용으로 담겨서 그분의 생명과 본성이 우리의 내용이 되어서 우리가 살지만 그가 사는 인생으로 살아지는 것이 그분과의 연합이고, 그분의 형상이 되고 그분의 집이 되고 그분의 표현이 되는 삶이다.
무덤까지 내려간 경험
1-6절은 죽음의 문턱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생명의 땅으로 끌어올리심을 찬송하는 내용이다. 3절에는 “스올에서 이 몸을 끌어올리셨고 무덤으로 내려간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죽음에서 건져주셨다는 것이다.
조금 아프다가 낫는 것과 죽음의 문턱에서 건짐을 받은 것은 다른 문제다. 나도 고등학교 때부터 내 병이 고칠 길이 없는 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찍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장가나 가고 죽겠는가?’라는 생각도 했고 결혼을 하고 첫 애를 배고 병원에 한 달을 입원해 있다가 기도원에 넉 달을 있을 때는 ‘뱃속에 있는 아이가 내 얼굴이나 보겠는가. 유복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별별 생각을 다 하면서 나대로 정리가 되었다. ‘내 필요로 산다면 60년을 살고 100년을 살아도 끝이 없지만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만큼 나를 세상에 두시지 않겠는가. 당신이 필요로 하시는 만큼 나를 세상에 두실 것이다. 그러면 살고 죽는 것은 내 문제가 아니다.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 생각과 스올에서 죽은 사람들이 있는 음부에서 끌어올리셨고 무덤으로 내려간 사람들 가운데서 회복시켜 주셨다는 고백은 차원이 다르다. 죽음 앞에 선 사람이 가져올 수 있는 세계는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과 다른 문제다. 사람은 누구라도 죽음을 운명으로 짊어지고 살기 때문에 ‘언제라도 나는 죽을 수 있다. 오늘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갈 수 있다.’라는 생각은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죽음 앞에 선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
지난 주에 ‘교회생활’ 5월 호가 나와서 펼쳐 보니 첫 면에 최천출 형제의 사진과 글이 있었다. “3년 전에 암 선고를 받았는데 이제 57세가 된 나이에 죽음을 앞에 두고 있다. 죽음 앞에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남은 것은 하나 교회에 산 것만 남았다. 이것이 제일 잘한 것이고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다.” 이 자리에서 하는 말은 무게가 다르다. 목요일 중심부 모임에서도 최천출 형제가 간단하게 말씀을 했는데 형제들은 아픈 사람을 앞에 놓고 화답 간증을 세 시간씩이나 하는 것이었다. 너무하다 싶어서 한마디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죽음 앞에서 인생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져오는 최천출 형제 한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을 양식으로 먹고 누리기 바빴다. 죽음 앞에서 인생의 진실을 드러내는 그 사람이 얼마나 아름답고 양식이 되는지! 밑바닥까지 가본 사람이 현재의 모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말해 줄 수 있고 모든 것이 감사할 수밖에 없는 자리를 보여준다.
배부를 때는 무엇이 맛있고 무엇은 맛없고 하며 가리지만 배가 고플 때는 가려지지 않는다.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름 앞에 있을 때 내게 맛있는 사람, 맛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미운 사람,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막힌 담을 허셨다는 것처럼 우리가 갈라놓았던 모든 호불호들이 이 앞에서 다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이 내 인생에 하신 모든 일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찬송하게 된다. “스올에서 이 몸을 끌어올리시고 무덤에 내려간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회복시키신 주님 앞에서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리라.” 이 말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5절에는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라고 하였다.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지만 다 내게 영원히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고난이 있지만 밤이 지나가면 기쁨이 넘치는 자리가 찾아온다. 밤은 밤대로, 낮은 낮대로 다 우리의 성숙에 의미가 있는 시간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 그때 주시는 잔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지만 주님이 가신 그 길 안에서 보면 쓴 것이든 단 것이든 주시는 잔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무엇이 와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릇으로 준비되어 가는 것이 성숙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전7:14) 하였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케 하셔서 사람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 수 없게 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잘될 것이라고 단정하거나 안 될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15절에는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라고 하였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겠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측량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비참하게 죽는 사람도 있고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데도 잘먹고 잘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것이 맞다거나 저것이 맞다고 할 수 없고 이것이 잘된 것이라거나 저것이 잘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주신 잔을 받아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다.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진노도 있고 은총도 있고, 그렇지만 그것이 영원히 내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들리는 경험
다윗은 편히 지낼 때에는 ‘이제는 내가 흔들리지 않겠지.’라고 생각했다. 교회에서도 말씀을 깨닫고 충만할 때는 ‘내가 이제는 알았다. 이제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겠다.’고 하지만 또 흔들릴 때가 온다. 시편 기자도 그런 경험을 하면서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 주시던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시자마자 나는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이렇게 오락가락 하는 것이 사람이다.
누구라도 잘나가고 형통할 때는 감사할 수 있지만 그 감사에는 모든 사람이 동참할 수 없다. 그런데 모든 것이 끝난 사람에게서 나오는 찬송은 사탄까지도 침묵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찬송하게 하신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신다. 아무것도 없는 자에게서 능력을 보게 하신다. 아무것도 없는 자, 가장 힘없는 자의 능력, 이것이 나타날 때 원수와 송사자가 잠잠케 된다. 아무것도 아닌 자의 찬송,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자의 감사가 하나님의 원수와 송사하는 자들을 다 잠잠케 한다.
이 찬송을 위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흔드신다고 하였다.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소망이지만 누구나 한 번씩 흔들려 보면서 산다. 흔들리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이 아니다. 의심도 해 보고, 의문도 가져 보고, 회의도 해 보면서 사람은 더욱 견고한 자리로 가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하루 하루가 늘 새롭다. 사춘기 때는 낙엽이 구르는 것만 보아도 웃는다. 예상치 못한 것을 보았을 때 웃음이 나온다. 왜 웃음이 없어지는가? 모든 것이 뻔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뻔해지는 날 우리에게서 웃음이 없어진다. 그런데 낙엽이 굴러가는 것도 새롭게 보일 때는 웃음이 나온다. 그것이 생명력이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것이 없다. 그렇게 되면 입꼬리가 쳐지기 시작하고 월화수목금토가 다 뻔한 날이 된다. 그러면 쳇바퀴 돌아가듯이 굴러가니까 한 주 두 주가 쏜살같이 가고 일 년 이 년이 쏜살 같이 간다. 미주에 있을 때 한 분이 그런 말을 하셨다. 십년을 살았는데 얘기할 꺼리가 별로 없다면서 왜 그런가 했더니 똑같은 날을 십 년 살아서 그렇더라고 하셨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게에 나가서 문 열고 손님 기다리고, 물건이 떨어지면 들여놓고, 가게 문닫고 들어와서 자고 아침에 또 나가고……, 똑같은 날을 살고 보니까 10년을 살아도 하루 산 것밖에 안되더라는 것이다. 새로운 것이 없는 인생은 굳어져 가는 것이고 죽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흔들려 보기도 하고 아파 보기도 하고……, 모든 것이 다 필요하고 감사한 일이다.
이런 고난이 올 때 시인은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도록 기도하였다. 9절은 시편 30편의 기도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죽은들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내가 죽어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한 줌의 티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한 줌의 흙이 주님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습니까?” 이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기도다.
광야에서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쓸어버리고 모세로 다시 시작해서 한 민족을 일으키겠다고 하실 때 모세는 “이 백성이 당신의 기업이 아닙니까. 만약 이 백성이 광야에서 죽는다면 자기들의 신이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했다는 소리밖에 더 듣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소리를 듣기 원하십니까?”라고 항변하며 하나님 마음을 움직였다(신9:26-29). 우리가 “불쌍하니까 하나님 한번만 봐 주십시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이 백성이 망하면 당신이 좋겠습니까?”라고 기도한 것이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죽어 한 줌의 흙이 된다면 주님을 향한 찬송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라고 기도했다.
시편 23편에는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하였다. 단지 우리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당신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당당함이다.
미국과 중국이 힘겨루기를 하는 가운데 한국은 잘못하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 상황에 놓여서 어느 편도 들 수 없는 외교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놓여 있다. 외교를 잘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겠는데 나는 잘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미군 철수를 하겠다고 해도 “제발 봐 주십시요. 당신들이 없으면 우리는 못삽니다.” 이렇게 나가면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당신들이 여기에 있는 것이 얼마나 당신들에게 유익이 되는지 압니까? 우리는 작은 나라 같아도 여기 당신들의 거점을 두지 않으면 태평양이 어떻게 될지 압니까? 우리나라가 없으면 당신들에게 유익이 되겠습니까?”라며 큰 소리를 쳐야 한다. 중국에게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저자세로 나갈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어서 자본주의 세계와 연결고리가 된다는 것을 모릅니까? 우리가 없다면 당신은 다리 하나를 잃는 것입니다. 중요한 다리 하나를 폭파하고 당신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가야 한다. 현실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왜 그들에게 중요한지를 설득시켜야 한다.
시편 기자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득하고 있다. “우리가 없다면 누가 당신을 찬송하겠습니까? 어떻게 당신의 마음이 만물에게 전해지겠습니까? 당신의 살아계심을 어떻게 알리겠습니까?”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셔야 할 이유가 더 크다는 것이다. 사람의 기도는 자신을 고난에서 구해달라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갈망은 우리를 쓸모없는 데서 건지시는 것이다.
사무엘상 25장에는 아비가엘이라는 지혜로운 여자가 나온다. 다윗이 분노해서 일가족을 멸하려고 하는 상황에 찾아가서 “당신은 하나님이 왕으로 세운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생명 싸개 속에 보호해서 지금까지 지키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당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당신에게 주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까.”라며 다윗의 위치를 일깨워 다윗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이 지혜로운 여자가 결국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 다윗 곁에 이런 지혜로운 여자가 있었다.
우리에게 있는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지혜롭게 살 수 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살 이유를 갖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셔야 할 이유, 당신이 내게 두신 소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가 붙잡고 살 때 우리는 누구 앞에서라도 당당하게 된다. 살고 죽고의 문제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예수님의 기도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당신의 나라가 임하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런 기도를 드리는 사람을 그의 소명이 다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살게 하시지 않겠는가!
우리의 소망에 따라, 우리가 무엇을 간구하고 사는 사람이냐에 따라 우리가 지켜져야 될 사람인지 아닌지가 결정된다. 내 보따리를 챙기고 내 울타리를 쌓고 나를 보존하려고 하면 “그냥 잘 살아라.” 하실 것이다. 그런데 나를 위해서 살 이유가 없지만 당신을 위해서는 살 이유가 있고 내 옆에 있는 형제를 위해서 살아야 될 이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지키시고 다른 사람들이 지키지 않겠는가. 이런 위치에 우리를 두신 것이다.
시편 30편의 이 기도는 참으로 중요한 간구다. “우리가 없다면 어떻게 주님이 찬양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없다면 어떻게 주의 진리가 전파될 수 있겠습니까?” 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시기 바란다.
슬픔의 상복을 기쁨의 나들이옷으로
11절에는 “주님께서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셨습니다.”라고 하였다.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슬픔의 상복을 기쁨의 나들이옷으로 바꾸셨다는 것이다.
옷은 그 사람의 신분과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최종적인 자기표현이다.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타락한 이후에 무화과 잎으로 자기를 가렸고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혀 주셨다는 표현을 넘어서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온다.
어떤 조건 때문에 오는 감사와 기쁨은 그 조건이 사라지면 다시 고통과 원망에 빠지기 일쑤다. 그런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감사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우리에게서 영원한 감사가 가능하다.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이제는 기쁨의 나들이옷으로 갈아입히셨다.
이것을 신약의 최종적인 표현으로 하면 그리스도로 옷 입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 되고 우리의 상태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 곧 그리스도와 연합이라 하였다(갈3:27).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그의 죽으심에 합하는 것은 그의 죽으심에 내가 포개진다는 말이다. 겹쳐지는 것이다. 그의 죽으심에서 내가 누군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다. 세상이 버린 그 사람, 우리가 버렸던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보배롭고 요긴한 머릿돌로 보여지게 되면 우리는 그에게 포개어 지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된다. 기쁨의 나들이옷을 입고 슬픔의 상복을 벗게 된다.
언제 우리의 슬픔이 끝나게 되는가? 요한계시록 21장은 시편 30편의 또 다른 표현이다. 내용을 보면 같다. 언제 우리 슬픔의 상복을 벗게 되는가? 언제 우리의 눈물이 그치게 되는가? 계시록 21장 3절에는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은 사람이 하나님의 장막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이 상태가 인간의 최종적인 축복의 상태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될 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상태를 묘사하였다.
아픈 것이 없는 것이 가능한가? 몸을 가지고 사는 한 우리는 육신의 질고를 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집으로서 의미가 있게 될 때 우리 눈에서 눈물을 그치게 된다.
하나님의 집이 되기 전까지, 그리스도로 옷입기 전까지 우리 인생의 슬픔의 상복은 벗겨지지 않는다. 울 일이 그치지 않고 괴로운 문제가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려고, 나를 당신의 집이 되게 하시려고 택하셨다는 이유를 가지고 살면 하나님 앞에서도 “나를 죽이시든 살리시든 내가 없으면 당신이 손해가 아닙니까?” 하고 당당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머무셔서 우리가 당신의 집이 될 때 비로소 우리 인생의 모든 눈물이 그치고 슬픔의 상복이 벗겨지게 된다. 그래서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드릴 때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우리는 이 시편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되는 소망을 가지고 이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때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가 끝나고 안식에 들어간 사람으로 살게 될 것이다. 이런 안식 안으로 부르신 주님을 찬양한다.
[ 기 도 ]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사는 한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육신의 고초를 겪고 살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당신의 집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 인생을 정리하시고 배열하시고 거기 소망을 두고 영광스러운 인생으로, 질그릇이지만 영광스러운 보화를 담은 인생으로 살게 하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 소망으로 우리 인생의 모든 짐과 슬픔의 옷이 벗겨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기쁨의 띠를 띄고 주님을 그리스도로 옷입고 사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우리 인생에 감사와 찬송만 남게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