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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심
(빌립보서 4:17-20)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리지어다 아멘."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발견되고,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그리스도와 동역함으로 바울은 과실이 아주 풍성한 사람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배우고 듣고 본 받기를 원했다. 빌립보교회는 이러한 바울을 배우고 보고 본받은 결과,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향기로운 열매를 드리는 그런 교회가 되었다. 오늘 나눌 말씀은 바울이 그의 향기로운 열매를 받고 다시 풍성한 축복으로 화답하는 내용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구약의 제사장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면 그 그림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제사장은 자기가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또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주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드리고 또 하나님은 제사장에게 식물을 주고, 이렇게 주고 받는 관계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이다. 하나님 앞에 내가 무엇을 드리느냐에 따라서 내게로 돌아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결정된다.
내가 좋은 것을 드리면 좋은 것이 돌아오고, 안 좋은 것을 드리면 안 좋은 것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모든 관계가 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에게 양을 제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양을 또 먹으라고 식물을 주시고, 쇠고기를 제물로 드리면 하나님이 또 쇠고기를 식물로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은 그냥 양이 되돌려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어떠한 것으로 변화해서 제사장들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이삭이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에게 번제로 드려진 바 되었다. 그리고 그 산에서 내려왔다. 표면적으로 볼 때 올라간 이삭과 내려온 이삭은 똑같은 이삭이지만, 그 이삭은 전혀 다른 이삭이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에게 번제로 드려지면 전혀 다른 것으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어떠한 것으로 변화되어 살게 된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식물을 드리고,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식물을 또 공급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족케 하면 우리가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우리가 축복을 받는 이것이 계속 순환되는 것을 선순환이라고 한다. 악순환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지 못하면 우리에게도 축복이 올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족되는 그 사람은 가장 복된 사람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은 모두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화해서 우리에게 돌아온다. 우리가 드리는 것은 썩을 것이고 또 비천한 것이다. 그런데 썩을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썩지 않을 것으로 우리에게 되돌려주시고, 비천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존귀한 것으로 우리에게 되돌려주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내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제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모든 것은 우리에게 되돌려질 때에는 영광스런 것으로 변화되어 되돌려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 교회를 만나서 옛날과 지금의 우리 인생을 비교하면, 우리는 다른 자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우리는 하나님에게 좋은 것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사람으로 변화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에 농사를 지어서 하나님께 소산을 드렸다. 땅에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우리의 인격을 경작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경작이 되면, 우리는 경작된 그 인격을 하나님에게 다시 드린다는 것이다. 광야 생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셨다. 그런데 만나를 하나님에게 드릴 수는 없다. 만나는 보관할 수가 없다. 그냥 그날 하루 먹는 일용할 양식이다. 만나를 보관하면 썩어 버린다. 이것은 그날그날 하나님께서 주신 최소한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비로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에게 드린 것이다.
우리가 옛날에 종교생활 할 때 기도해서 응답을 받고 병을 고치는 그런 일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런 어떤 것으로는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만족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격에서 경작된 그 소산물을 드시고 기뻐하시고 만족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정을 거친 것이라야만 하나님에게 만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과정을 거친 이런 소산물을 하나님에게 드리면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해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된다.
우리는 반드시 거룩한 과정을 통과해야, 하나님이 기쁘시게 드실 수 있는 거룩한 음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날고기를 그냥 먹기 어렵다. 날고기가 숙성되면 얼마나 맛있겠는가. 추석 명절에 좋은 음식들을 많이 먹는데, 이것은 전부 다 과정을 통과해서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도 과정을 통과한 인격이어야만 하나님에게 드릴 수 있는 양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변화를 거치지 않으면 나도 못 살지만, 남에게도 좋은 것을 줄 수 없다. 남에게도 생명을 줄 수 없다.
통밀 그대로 있으면 썩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니까 자기는 좋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그 통밀을 먹을 수 없다. 사실 제일 맛있는 곡식이 무엇인가? 그 해 추수한 곡식이 제일 맛있다. 오랫동안 보관하면 기름기가 빠져서 1,2년 지난 쌀은 푸석푸석해져 맛이 없다. 제일 맛있는 쌀이 햅쌀이다. 기름기가 충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에게 제일 기름지고 싱싱한 햅쌀을 드리듯이 그렇게 하나님에게 드려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제때 먹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부패해 버리고 만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못 먹게 된다. 일단 나무에서 분리가 되면 그때부터 썩기 시작한다. 그래서 음식은 이렇게 드려지지 아니하면 가장 저급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음식이 사람에게 먹히면, 그 먹힌 음식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침에 우리가 밥을 먹었는데 그 밥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 안에서 과정을 거쳐서 말을 할 수도 있고 활동할 수도 있고 노래할 수도 있고 다 할 수 있다. 먹히면 훨씬 높은 차원의 것으로 바뀌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에게 먹히면, 즉 하나님에게 제물로 드려지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는,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그런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식물이 가장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사람에게 먹히는 것이고, 동물이 가장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또 사람에게 먹히는 것이다. 사람이 가장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먹히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먹혀서 하나님 것이 되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식물이 우리 몸에서 나와 하나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우리는 나 자신으로 사는데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는 그런 영광스러운 사람이 된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드렸다. 자기를 완전하게 드리니까 그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제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4-5)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만족이 되는 식물을 드리니까, 그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가 표현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가! 아들과 아버지의 선순환, 하나님께 나를 드리면 내가 어떻게 되는가를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 너무너무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식물로 드려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영광스러운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 이름이 바뀐 사람들이 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자기 자신을 드려서 자기가 영광스러운 사람으로, 그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구약의 변화를 완전하게 표현하고 완전하게 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리스도가 되셨다. 인생이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첫 번째는 하나님에게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모든 사람에게 향기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관계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이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다. 이 관계가 온전하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이 관계가 문제가 생기면 그 사람은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에게 향기로운 제물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향기로운 양식이 되는 사람은 너무너무 행복한 사람이다. 곡식을 오래 묵혀 두는 것처럼 내 자신을 나를 위하여 보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군가의 것이다. 직장에서도 '나는 내 것이야.'라고 생각해서 자기를 계속 보존하다 보면, 그 직장에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그 직장이 원하는 사람 즉 직장에 나를 드리는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은 직장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승진도 하고 상도 받게 된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에게 드려져야 행복한 사람이 된다. 우리는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 왜 놓치는가? 나를 보존하려고 하기 때문에 놓치는 것이다. 그래서 일 년 된 숫양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 그 시기를 놓치면 안된다는 것이다. 가장 최상의 상태가 되었을 때가 바로 일 년 된 상태인 것 같다. 그래서 그 양을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다. 이삭은 왜 모리아 산으로 가야만 하는가? 하나님에게 번제로 드리기 위한 것이다.
번제는 오직 하나님의 만족만을 위한 제물이다. 완전히 태워져 버리고 뭐만 남았는가? 하나님의 만족만 남았다. 내 인생이 하나님에게 드려지면, 나는 하나님의 만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만족이 되는 인생! 이것이 영광스런 인생이다. 그래서 이삭은 영광스러운 조상이 되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로 가야만 했는가? 십자가는 번제다. 십자가에서 완전히 자기 자신이 태워지고나니까, 그는 영광스런 새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내 인생이 하나님께 번제로 완전히 드려지게 되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그런 영광스러운 조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사탄은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상으로 지어졌다.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알도록 하나님을 대리하고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로 그렇게 지음 받았다. 이것은 과정을 거쳐야 되는데, 아담은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같이 되려고 했다. 이것은 시험 공부는 하지 않고 일등을 하려는 도둑놈 심보와 똑같은 것이다.
가을에 농사를 짓지 않고 자기 창고를 채우려고 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 그래서 추수가 다 된 논에 들어가서 밤에 몰래 추수를 해 버리고 가는 그런 도둑이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그런 도둑이 없었는데, 요사이는 그런 도둑이 있다. 이것이 무엇인가?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기 창고를 채우려고 하는 도둑놈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리하도록 하나님의 대리 권위자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대리 권위자가 되려면, 우리는 합당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나라 학제를 보면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이다. 이것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오랜 실험을 통하여 많은 시행착오을 거쳐서, 초등학교는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과정을 거치도록 된 것이다.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10년이라는 과정이 굳이 필요한가? 나 혼자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가면 되지.' 물론 그렇게 해서 대학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자기를 착각하면 안 된다. 자기를 평범한 사람으로 아는 것이 제일 정상적이다.
'다른 사람이 가는 길을 걷지 않고 나만의 특별한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은 자기가 남과 다른 특별한 사람이고 천재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학생은 합당한 과정을 거쳐야 정상적인 성인이 된다. 질그릇도 가마에 들어가서 뜨거운 열의 과정을 거쳐야 단단해진다. 흙으로 질그릇을 만들자마자 물을 부으면 구멍이 나 버린다. 어떤 것이든 과정 없이 된 것은 엉터리다. 우리나라의 교육 과정은 사실 대학에 가기 위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과정은 대학에 들어가지 않으면 별로 쓸모가 없는 것만 배운다. 대학에 가기 위해 족집게 과외도 있을 정도로, 문제에 답만 맞추는 연습을 학원에서 많이 하다 보니 결국 창의력이나 사고력이 발달할 수 없다. 대학에 가서도 모두 취직 공부를 하다 보니 대학 4년 동안 공부해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문제 해결 과정을 토론하고 실제적인 공부를 하면 어디에 던져놔도 헤쳐나갈 수 능력이 생긴다. 그런데 암기식 위주의 교육으로는 복제는 잘하지만 특별한 것이 나오지 못한다. 우리나라 교육으로는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 까닭은 기초분야가 약해서 복제는 잘 하지만, 창의력을 개발하는 교육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지 않은 제물을 받지 않으신다. 나는 교회에 와서 바로 말씀이 들리고 하나님 나라를 헤엄치며 누릴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씻겨야 하고, 꺾여야 하고, 가루가 되어야 하고, 없어져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과정을 거치고 난 후에 하나님 말씀이 들렸다. 인생은 과정을 거쳐야 변화하게 된다. 우리가 지금 타는 자동차도 오랜 과정을 거쳐서 현재의 자동차가 되었다. 처음 자동차가 나올 때는 소리가 너무 커서 지나가는 말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런 차가 지금 돌아다닌다면 우리는 시끄러워서 살 수 없을 것이다.
많은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조용한 차가 나왔다. 전기차는 전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모두 다 과정을 거친 결과이다. 사람도 태어날 때는 똑같은데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생기게 된다. 율법의 과정을 거치면 율법적인 사람이 된다. 정죄하고 판단하는 시어머니의 며느리가 되면 ‘내가 시어머니가 되면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해도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받은 그대로 살 수밖에 없다.
은혜의 과정을 통과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은혜로운 사람이 된다. 모세의 제자가 되면 모세가 되고, 예수의 제자가 되면 예수가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증인이 된다는 말은 '내가 그러하듯이 너희도 똑같이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다. 변화의 과정을 통과한 것은 결국 또다시 변화하게 된다. 사람은 변화를 무서워하면 안 된다. 변화해야 합당한 것이 될 수 있다. 제사장은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가? 하나님은 입이 없는 분이시다. 왜 입이 없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가?
하나님은 제물을 받으시는 게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받으신다. 나를 하나님께 태워 드릴 수 없으니까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자기 자신의 표현으로 제물을 드린다. 사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제물을 드리면 내가 드린 것이 되돌아온다. 쇠고기를 드리면 쇠고기가 되돌아온다. 되돌아올 때는 그냥 그 쇠고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한 것으로 변화되어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받을 것이라면 좋은 것을 드려야 한다.
제사를 드릴 때 제일 좋은 것으로 드린다. 어릴 때 기억에 제사 때 제일 좋은 것을 먹었다. 조상님께 드리는 것이니 제일 좋은 것을 드린다. 제일 좋은 것을 드리는 사람은 제일 좋은 것을 먹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시시한 것을 드리면 시시한 것을 먹게 된다. 하나님에게 최고의 극상품을 드린다면, 나는 극상품을 먹게 된다. 다르게 말하면 내 인생을 하나님에게 극상품으로 드리면, 나는 극상품 인생을 살게 된다. 최고의 인생을 살려면, 하나님께 나 자신을 드리는 인생으로 살면 된다. 하나님에게 나 자신을 드리면, 최고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형상이 되어 자기를 대신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의 완전한 형상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당신의 어떠한 것으로 우리를 변화시켜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살게 하신다. 하나님에게 좋은 식품을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를 가공해서 우리에게 다시 되돌려주신다. 만나를 하나님께 드린다면 만나는 그분의 것이니까 가공할 필요가 없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가공해서 제일 좋은 극상품의 인생을 만들어 되돌려주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극상품으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양식을 먹은 사람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으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은 너무너무 영광스럽고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에게 드리고 또 어떻게 하나님에게 받겠는가? 이것은 구체적인 교회 생활이다. 우리가 합당한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제일 좋은 것을 드리는 삶이다.
우리가 줌을 통하여 간증을 하는데 형제들의 이 간증은 우리 인생의 가장 좋은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에게 표현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그 사람이 된다. 하나님에게 표현한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하나님은 향기로운 제물을 받으시고, 제사장에게 영광스럽고 풍성한 것으로 되돌려주신다.
요한계시록 3장에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는 권세를 주겠다."(계3:20-21)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서로 함께 먹는다는 것은 식구라는 말이다. 제일 친한 사람은 한 상에서 밥을 먹는 사이다. 서로 먹고 마신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너는 나를 먹고 나는 너를 먹는다’ 는 말이다.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데, 더 좋은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먹는 것이다. 그 사람의 존재를 먹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자신을 먹기 원하시고, 또 우리 자신에게 당신이 양식이 되기를 원하신다.
이렇게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가 되면, 우리는 변화에 변화를 거치게 되고, 마지막에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게 된다. 이 말은 하나님을 대신한다, 하나님을 대리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바로 너이다. 네가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고, 네가 말하는 것이 내가 말하는 것이고, 네가 걸어가는 것이 내가 걸어가는 것이다.'라고 하신다. 주님을 먹고 마시는 동안 우리는 그런 사람으로 점점 바뀌어 간다. 그래서 우리 자신으로 하나님을 대리하는 사람이 된다.
인생으로 태어나 '하나님 자신을 대리한다.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이 사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생 최고의 영광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그 목적이 실현되는 자리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공급한 식물을 먹은 사람만 가능하다. 나 자신을 하나님에게 드리면, 하나님은 또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래서 우리가 아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주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 말씀을 받고 하나님 말씀에 젖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내가 당연히 들어야 할 말씀이고, 하나님 말씀에 대해 거부감이 전혀 없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죽었던 세포가 살아나듯이 반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이 말씀을 심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형제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함께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함께 먹고 마시는 게 너무 자연스럽다. 함께 먹고 마시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 되는,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이런 교회 안의 구체적인 교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식물을 공급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공급하시는게 아니라, 교회의 교통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식물을 공급하신다. 내가 사는 것이 힘들거나 문제가 복잡해졌다거나 관계가 틀어졌다면 이 모든 것이 양식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충분한 공급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이 오면, 아! 내가 교회 생활 안에 깊이 들어가지 않았구나! 교회의 공급을 충분히 받지 않았구나! 그렇게 알면 정확하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이런 공급을 받고 살게 되면, 모든 것이 씻겨 나가고 모든 것이 해결되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광 가운데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리시라.”고 했다. 여기서 바울의 하나님은 사울을 바울 되게 하신 하나님이다. 바울 자신을 변화케 하는 양식을 공급하신 하나님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하사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고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신부로, 교회로 자기 자신을 만들었다는 간증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광스러운 사람으로 만드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고 하나님의 식물을 먹어야 되는 것이다.
은사를 받아서 어떤 기적을 행하거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내 인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런 경험이 없지만 그런 경험을 하신 목사님의 말을 들어보니까 방언이나 병 고침의 은사를 받는다고 해서 자기 자신이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교회 안에 흐르는 이 인격의 흐름 안에 있어야 우리 인생이 바뀐다.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이것은 바로 바울에게 영광의 식물을 주셔서, 그를 영광스러운 사도가 되게 하신 그 하나님이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식물을 먹게 되면, 바울과 똑같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표현하는 그런 사도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나를 나 되게 하신 것처럼 또 저 사람들을 변화케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간구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 목사님의 간구이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대할 때에 그런 간절한 간구가 나오게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많이 썼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기름부음 받은 예수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예수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에게 기름부음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위임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죽음의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 바로 십자가를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고난'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우리는 보통 육체적인 고난을 고난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람은 왜 고통을 받는가? 자기 뜻대로 안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내가 내 뜻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면, 우리에게는 스트레스가 전혀 없다. 즉 우리에게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전혀 없게 된다. 그런데 내 뜻대로 되고 싶은데 내 뜻대로 안 되는 것, 이것이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고난은 어떤 고난인가? 밑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봐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흔들고 있다. 네가 뛰어내릴 수 없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모든 관념은, 능력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야 하나님의 아들이고, 십자가에서 뛰어내려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은 무엇인가? 이 사탄과 싸우는 것이다. 이 자리를 조롱하는 마귀와 싸우는 것이 예수님의 고난이다.
예수는 ‘나는 죽는다, 나는 죽기로 되어 있는 인생이다.’라는 사람의 자리에서 사탄을 이겼다. 만약 이 말에 흔들린다면 우리 인생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밑에서 조롱하고 있는 모든 조롱 앞에서 자기가 완전한 사람임을 드러내셨다. ‘나는 죽기로 되어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사람이다. 나는 흙으로 지어져서 하나님이 부르면 가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이것을 십자가에서 확실하게 나타내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사람은 죽기를 무서워해서 일생 종노릇한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바로 천사에게 절을 하고 있고 천사를 숭배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신 영원한 목적이 완전히 무산돼 버리고 만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그 죽으심을 통해서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람으로 달려있는 것, 죽음 안에 있는 아무 것도 아닌 이 존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풍성을 예수님에게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자리에 있는 예수님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자리에 있는 예수님을 아들로 인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 자리에서 당신 자신의 모든 복을 다 주셨다. 흙에 씨를 뿌려서 흙에 모든 복을 준 것처럼, 하나님은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모든 복을 다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내가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사오니”라고 표현하셨는데, 아버지를 어디서 영광스럽게 하였는가? 인생이 지어진 이 자리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 자리가 영광스럽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드릴 때에 하나님은 가장 만족하시고, 그때 우리는 영광스러운 사람이 된다. 우리가 예수의 기름 부으심에 참예하면 우리도 이 영광스러운 이름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처럼, 죽음 안에서 하나님을 증거한 것처럼, 우리 인생이 바로 이 십자가 죽음 안에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면, 우리에게도 기름부음이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하는 것처럼 우리도 ‘기름부음을 받은 누구누구’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기름부음을 받은 우리 형제, 조*호'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생의 자리,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올 수 없는 이 자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기름 부으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왕이나 제사장이 되려면 자기 대신 양을 드렸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 것은 누구를 드린 것인가? 자기 자신을 드린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내 인생을 드리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기름 부으신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에게 내 존재 전체를 위임한다면, 나의 운명과 생명 전체를 위임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의 백퍼센트를 요구하지 않겠는가? 나에게 백퍼센트 자기를 드리는 그 사람에게 나는 나의 존재를 위임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영원한 위임을 주셨다. 그분은 영 단번에 자기 자신을 드렸다. '영 단번에' 라는 말은 딱 한번이라는 말이 아니고, 백퍼센트를 드렸다는 말이다. 백퍼센트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백퍼센트 당신 자신을 예수님에게 위임하신 것이다. 자기 자신을 드린다면, 자기 자신만큼의 위임을 받게 될 것이다.
“영광 가운데” 라는 말이 나오는데, 영광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표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우리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이 표현될 때 우리 인생은 하나님만큼 영광스럽게 된다. 태양이 아니면 태양을 표현할 수 없고, 달이 아니면 달을 표현할 수 없듯이,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려면 하나님 자신이 아니고는 표현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한다면 그만큼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으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나무가 불이 되는 것은 언제인가? 나무가 태워질 때 불이 된다. 나무는 에너지가 아니다. 그런데 나무가 태워지면 거기서 엄청난 에너지가 나온다. ‘나는 나무야. 나는 절대 나무를 포기할 수 없어.’라고 하게 되면 나무는 불이 될 수 없다. 바꾸는 것이다. 나를 하나님에게 드리면, 하나님이 불이시라면 결국은 내 인생 안에서 하나님이 나타날 것이 아닌가? 십자가에 들어갔다가 우리가 부활했다는 말은 바로 이 말이다. 하나님에게 나를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통하여 당신 자신이 표현되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그대로 보존하고 하나님을 통하여 자기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니까, 한 번도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를 통하여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우리를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통하여 당신 자신이 나타나신다. “그 풍성한 대로 너희 필요를 채울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언제 풍성하게 되는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면 풍성하게 된다. 땅에 떨어지면 30배, 60배, 100배 풍성하게 된다. 이보다 남는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사람이 자기를 지키려고 하면 옹색하게 된다. 한 알의 밀이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고 하면, 밀의 생기가 점점 빠져서 나중에는 안의 생명이 텅텅 비게 된다. 그런데 그 밀을 보존하지 않고 땅에 뿌려지면 그 밀은 죽는데 이상하게도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인생이 하나님에게 드려질 때, 인생이 풍성해진다. ‘내 인생은 내 것이야.’ 하면 점점 옹색해지는데,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야. 내 인생은 하나님 것이야.’ 하고 하나님에게 드리면 풍성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으로 온 교회가 풍성해지고 충만해지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
오늘이라도 하나님이 오라고 하면 가야 되는 것이 인생이다. 하나님이 오라고 할 때 ‘아닙니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 말은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인생이 내 것이라는 말은 속은 것이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고 알게 되면, 이상하게 우리 인생이 넉넉해진다. 손해를 봐도 넉넉해지고, 핍박을 받아도 넉넉해진다. 바울이 “내가 궁핍과 풍부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라는 이 말이 무엇인가?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닌 사람이 경험하는 그런 풍부함이다.
사람은 제한적이고 부족할 수밖에 없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육체를 당신의 영으로 바꾸길 원하신다. 우리가 육체를 하나님에게 드리면,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 육체를 통하여 표현되시는 것이다. 사실 우리 육체는 한계가 있고 썩고 결국은 얼마 못 사는, 백 년도 살 수 없는 그런 인생이다. 예수님은 33년 인생을 사셨다. 33년 인생을 하나님에게 온전히 드리니까,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신 무한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금도 흘러넘치고 있다.
하나님에게 들어갔다가 나온 것만이 풍성한 것이다. 내가 아무리 좋은 악기라 하더라도 연주자에게 드려져야 연주자를 통하여 풍성한 음악이 나올 것이 아닌가? 우리가 들어갈 때는 제물로 들어가지만, 나올 때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온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겉옷을 다 벗겨 가버리고 말았고, 자기를 따르던 모든 사람이 다 가버리고 말았다.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예수를 표현하고 있다. 아무 것도 없는데 모든 것이 있는 분, 이것이 비밀이다. 아무 것도 없는데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분, 이것이 비밀이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내 인생에 온전히 나타나실 수 없다. 그런데 내 인생을 하나님에게 완전히 드려서 내 인생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비밀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 풍성을 맛보고 있다. 하나님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풍성을 나타내기를 원하시는지 모른다. 이 그리스도의 풍성을 나타내려고 하면 우리 한 사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들이 필요하다.
나 혼자 그리스도를 나타내려고 한다면, 그리스도를 부분적으로밖에는 나타낼 수 없다. 그런데 교회로 나타나니까 풍성한 주님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형제가 필요하다. 나는 이것밖에 표현이 안 되는데, 다른 형제가 있으면 얼마나 풍성하게 나타나겠는가? 이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 형제가 너무 소중하고 너무나 귀하다. 그러니까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풍성한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형제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기를 완전하게 하나님에게 드려서 마지막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것도 없는 그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것이 무한정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교회에 모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아무것도 아닌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풍성을 우리 자신으로 증거하기 위하여 교회에 온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릴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육신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죽으면 비석이 남겠는가?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서 표시해놓은 것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우리 인생을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되돌려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는 영광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우리에게 되돌려주시는 것이다. 어제 여수에 있는 장애자 김영수 형제의 간증을 들었다. 중증 장애이기 때문에 누구의 도움이 없으면 조금도 생활할 수 없다. 그런데 그 형제가 자기는 장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늘 듣던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가 너무 새롭게 들렸다. 인생의 장애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진 인생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는 것, 하나님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장애인 것이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에게 드리니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통하여 당신 자신의 영광을 풍성하게 나타내신다. 우리는 썩을 것을 드리는데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것으로 우리에게 되돌려 주신다.
인생은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못 바꾸면 인생은 손해를 본다. 그런데 정말 잘 바꾸면 우리 인생은 대박 터지는 것이다. 썩을 것을 가지고 썩지 않을 것으로 바꾸고, 비천한 것을 가지고 존귀할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인생의 기회다. 이것은 누구하고 거래하는 것인가?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우리 인생을 드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셔서 하나님의 어떠한 것으로 바꿔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되돌려주시는 것이다.
영광스럽게 되돌려주시는데, 그리스도로 되돌려주신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에게 드렸는데, 하나님은 그에게 그리스도로 되돌려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냥 예수가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다. 우리가 왜 태어났는가? 바로 ‘기름부음 받은 누구누구’가 되기 위하여 인생은 태어난 것이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표현하기 위하여 우리 인생이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 우리 인생을 하나님에게 만족하시는 제물로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되돌려주신다! 이것보다 영광스러운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교회생활하면서 이것이 계속적으로 교환되는 이런 경험을 하고 있다. 우리를 영광스러운 그리스도로 바꾸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주님을 영원히 찬양한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은혜에 감사하고 당신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을 내 것이라고 속고 살았을 때는 밀에 기름기가 빠지듯이 점점 우리의 기름기가 빠져서 나중에는 아무도 먹을 수 없는 그런 밀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드려서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그를 통하여 당신 자신이 온전하게 나타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나타나실 수 없고, 자기를 드리는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시기 때문에, 우리를 얼마나 기다리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에게 온전하게 드려서 우리도 ‘기름부음 받은 누구’라는 그런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진 그런 인생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거래하면 내 인생이 쫄딱 망하는 인생이지만, 내 인생을 썩어질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런 거래를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화시켜서 우리에게 되돌려주신다는 이 놀라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날마다 이렇게 대박 터지는 장사를 하게 하시는 당신을 찬송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