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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집회- 하나임을 앎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린도전서 12:12~31)
하나님의 말씀은 원래도 하나이고 지금도 하나다 이렇게 말씀하는데 왜 우리 속에서 늘 헷갈리고 흔들리는가? 모양이 여러 가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을 보면 모두 모양이 다르게 생겼다. 사람도 보면 다 모양이 다르게 생겼고 모양이 다른 것만큼 성격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다. 관상을 보는 사람들은 얼굴 생김새의 모양을 보고 그 사람의 성격과 장래와 직업 등을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모양이 다르다 보니 우리가 하나가 아니라는 느낌이 늘 들게 되고 막상 또 상대적으로 관계를 갖게 되면 다른 것 때문에 의견이 충돌하고 부딪치게 되고 심지어는 싸우게 되는 문제가 모두 생기게 된다.
다르다는 모양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하나님은 똑같이 만들지 왜 여러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을까? 다 한 얼굴에 한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으면 성격도 같고 모양도 같고 사상도 같고 다 그렇게 해서 아무 문제도 없이 살텐데 왜 다르게 만들어서 이렇게 시끄럽게 됐는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들은 바에 의하면 한 나무에 꽃이 피어도 꽃잎이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다 한다. 그리고 한 나무의 나무 잎도 하나도 똑같은 잎이 없다 한다. 그렇게 모두 다르게 생겼다. 이것이 생명의 세계이다.
공장에서 찍어낸 것, 기계적으로 만든 것, 생명이 없는 것은 똑같이 만들 수가 있다. 생명은 똑같이 되지 않고 어디가 달라도 조금씩 다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만든 제품들도 수준 높은 제품들이 되었다. 옛날만 하더라도 나사못이 둘이 서로 맞아야 되는데 암컷과 수컷이 안맞아 억지로 드라이브를 돌려 맞추었다. 한번 풀면 둘 다 서로 망가져서 안맞는다. 왜 그런가하면 똑같이 못맞추어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우리 기술력이 부족할 때는 똑같이 만들 수가 없었다. 선진국에서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아주 일정하게 만들어져서 그런 일이 전혀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기계는 계속 기술을 개발하여 똑같이 만들 수가 있다.
그러나 생명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똑같아지느냐 하면 그렇지 않고 발전할수록 달라진다. 풀은 어렸을 때는 다 비슷하게 생겼다. 크면서 점점 달라진다. 사람도 그렇다. 어린아이들을 산부인과에 가서 보면 다 똑같이 생겼다. 다 쭈글쭈글하고 다 찡그리고 있다. 엄마들은 자기 몸에서 10개월 동안 있다가 나왔기 때문에 정이 들어 그런지 이쁘다고 하는데 나는 보면 예쁜 것은 하나도 없고 우스운 것밖에 없다. 저게 인간인가 그런 생각도 들고 다 똑같이 생겼다. 어느 애기라고 따로 예쁘다고 생각되는 애기는 없었다. 그런데 크면서 전부 달라진다. 생명은 자라면서 자꾸자꾸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것이 생명의 원칙이고 법칙이다.
똑같은 모양의 세계를 보려면 그것은 인공적인 세계를 가서 보아야 된다. 기계는 물론 일정하게 만들 수가 있고 그리고 가장 인공적인 정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전체주의 사회에 가면 똑같다. 북한 사람들은 박수 치는 것도 똑같이 치고 손 올리는 것도 기계처럼 똑같이 올린다. 군대 가면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기계처럼 똑같이 한다. 가장 인공적인 것을 가한 것일수록 모양이 똑같게 되어 있다. 모양이 똑같은 것은 생명의 세계에서는 죽음이다.
여기에 여러 사람이 모였는데 기계적으로 똑같은 것을 하려면 그것은 죽음이다. 살아있는 것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살아있는 것은 각자 움직이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른 것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다. 기계는 똑같이 움직인다. 엔진은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이 움직인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똑같이 움직일 수가 없고 움직여서도 안된다. 생명의 세계와 기계의 세계. 생명있는 것과 생명없는 것의 세계가 무엇으로 구별될 수 있는가? 하나는 모양이 똑같다는 것이고, 하나는 모양이 다르다는 것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 물론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도 구분이 되지만 모양이 같고 안같고로도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인위적인 것일수록 똑같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실 뿐만 아니라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셨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드셨을텐데 그렇게 만드시지 않은 것을 보면 그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런가? 맨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자기의 모양 자체가 없는 분이다. 모양 없는 분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그가 영이시라는 말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된다. 어떤 한가지 모양으로써 그분 자신을 다 드러낼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을 복제(복사)하면 된다. 모양이 없는 분이므로 그분을 다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지만물이 다 필요하다. 우리는 가끔 생각할 때 여름날 모기는 왜 만들었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참 고약하기 때문이다. 파리보다 더 고약하다. 파리는 불 끄면 조용해지는데 모기는 불을 끄나 안끄나 사람을 찾아와서 괴롭게 한다. 모기만은 안만들었으면 좋을 걸 모기는 왜 만들어 놓았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은 우리가 모르는 부분도 너무 많고 왜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하면 우리가 그분을 다 모르기 때문이다. 영이신 그분을 다 모르기 때문이다. 영이신 그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지으신 모든 만물이 다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렇게 지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몸을 보더라도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손가락도 똑같지 않고 발가락도 똑같지 않고 머리털 하나도 똑같지 않고 다 틀리게 생겼다. 왜냐하면 내 몸의 보이는 몸과 보이지 않는 몸도 있는데 그것이 표현되려면 여러 가지 모양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어서 그렇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기능을 발휘해야 그 생명이 살아가는 모양이다.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어 어떤 지체는 크고 어떤 지체는 작고 어떤 것은 더 많이 쓰이고 어떤 것은 잘 안쓰이는 것도 있다. 우리 인간의 생각 같으면 다 똑같이 만들어서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만 만들면 될 것 같은데 생명은 그렇게 되지 않고 각양각색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
모양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가 아니라는 생각을 절대로 가져서는 안된다. 모양은 달라도 하나이다.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이다. 바울은 그렇게 설명을 하고 있다. 교회는 어떤 것인가? 모양이 여러 가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맨 처음 교회는 가장 두드러지게 다른 것이 유태인과 이방인이었다. 유태인과 이방인은 아주 상종할 수 없는 관계이다. 유태인은 이방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고 그러므로 이방인은 유태인을 생각할 때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증오하고 미워할 것이다. 그래서 서로 상종할 수 없는 관계인데 유태교만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십자가의 도를 전파하다 보니 이방인도 들어왔다. 그리고 이상하게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일어나 그곳에 있던 성도들이 다 이방 세계로 흩어졌다. 자연히 교회는 이방 세계로 흩어지게 마련이다. 이방 세계 속의 이방 사람들 안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자연히 이방인들이 모일 것이다. 그래서 유태인과 이방인이 한 교회에 섞이게 되었다.
이것이 유태인과 이방인이 부딪치는 가장 첫 번째 문제였다. 이 문제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전서를 쓰게 되었다. 1장에서 십자가의 도를 말한 이유는 십자가의 도가 이 둘을 화평케 했다. 이 둘을 하나되게 한다. 유태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유태인도 십자가 안에서 이방인도 십자가 안에서 다 한 운명이라는 이 놀라운 계시가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대표적인 것이고 그 안에도 오늘 읽은 대로 여러 가지 은사가 있고 여러 가지 직임들이 있어 서로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그런 것들이 많이 있었다. 고린도 교회는 상당히 시끄러운 교회였다. 이 시끄러운 것 때문에 이 귀중한 말씀이 나오게 되었다. 몸은 하나인데 지체는 많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교회는 꼭 조용하다고만 좋은 것이 아니고 시끄러워도 좋을 수가 있다. 왜냐하면 시끄러우면 시끄러운 대로 더 온전한 계시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전한 사람만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온전한 사람만 있는 것보다 온전치 않는 사람도 섞여야 된다. 그 온전치 않은 사람도 있어야만 하나님의 비밀이 더 드러난다. 그 온전치 않은 사람을 통해 온전한 사람을 통해서는 드러나지 못할 것이 드러나게 되어 하나님의 어떤 깊은 것을 알게 된다.
아이들을 키울 때 아이들이 다 건강하여 낳아만 두어도 잘 커서 한번도 아프지도 않고 병원도 안가고 감기가 와야 콧물 흘리다가 말고 하면 부모들이 아이가 병이 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렇게 키운 사람들은 아이들이 병이 나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발휘할 기회가 없다. 자기 속에 그런 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부모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모르는데 아이들이 몸이 아프게 될 경우에 부모 속에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는데 이 마음은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마음이다. 부정적인 여건을 통해서 그 속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나온다.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어떠함 때문에 하나님은 물론 많은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으시겠지만 또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풍성하심과 영광스러움과 이 모든 것이 드러난다.
이스라엘 민족을 볼 때 그 민족이 결코 모범적인 민족이 아니다. 요즘 이스라엘 역사 열왕기상하를 보고 있는데 그 나라는 정말 한심하다. 우리 조선왕조 역사를 보면 한심한데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그보다 10배는 한심하다. 어찌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그럴 수가 있는가. 여호와 율법. 그 천하에 없는 율법을 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저런 모양이 될 수 있는가 하고 우리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백성을 통해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더욱 드러났다. 더욱 완전하게 드러났다. 이스라엘은 모범적이고 우수하기 때문에 선택받았다고 착각을 했지만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범적이고 우수하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가장 문제가 많기 때문에 선택받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다.
부모의 사랑은 병든 자식에게 더 간다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객관적으로 본다면 거기에 사랑이 더 갈 필요가 없다. 하지만 부모 안에서는 거기에 애착이 더 간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그 부모의 마음은 그런 경우에 나오는 것이지 아무 때나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다양하고 풍성하신 모든 은혜가 누구를 통해 나왔는가 하면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 흘러나오게 되었다. 그것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유산으로 전달되어진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똑같은 모양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우수한 것만 있어도 되는 것도 아니고 잘난 것만 있어도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 같으면 우수한 것만 있으면 좋겠는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풍성한 계시는 그렇지 않는데서 나왔더라는 것이다.
사실 신약성경 전체는 거의 이방인의 세계에 와서 쓰여지게 되고 이방인의 세계 안에 들어와서 교회는 확장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유태인들은 오직 자기들만이 선택받은 백성이고 하나님은 오직 자기들만 아시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들에게서 하나님이 손을 떼서 이방인에게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그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었다. 하나님의 세계는 다양하다. 여러 사람이 있는 것이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부러 속 썩이는 사람이 되면 좋은가. 그렇지는 않다. 또 누가 일부러 속 썩이는 사람이 되려는 사람도 없다. 자기는 자기대로 다 잘한다고 하는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교회는 결코 어디서 군대를 선발하듯이 키는 1m 얼마 체중은 얼마 이렇게 선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올지 모르는 동서남북에서 어디서 올지 모르는 사람들로 교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불 수 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의 문은 열두문이다. 사방에 세문씩 동서남북 어디서나 다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각자를 생각해 보면 문이 만약 하나만 있었더라면 우리는 못들어올 사람들이 전부이다. 유태인만 들어가는 문이 있었더라면 이방인은 못들어간다. 그런데 십자가의 도를 통해서 유태인만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이방인도 들어가는 문이 생겼다. 그래서 이방인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 문이 점점점점 더 많아져서 열두문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각 방면에서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 교회 구성 성분을 보면 과연 열두문을 통과해서 들어왔구나 하는 것을 실제로 볼 수 있고 이 문이 아니었더라면 이 사람은 절대로 못올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역력하게 볼 수 있다. 이 문이 있으니까 이 사람이 왔구나. 그런 것을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어느 문도 우리가 닫을 수가 없다. 어느 문도 이 문은 폐쇄하자 할 수가 없다.
새 예루살렘의 문은 전부 열려져 있다. 아무나 다 들어오도록 열려져 있는 문이다. 왜 그렇게 열려질 수 있는가? 진주 문이기 때문에 영원한 승리를 상징하는 진주 문이기 때문에 항상 열려져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항상 개방되어 있어야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열려진 문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각자 어느 문으로 들어왔는지 뒤에 가면 알게 된다. 나는 이 문으로 들어왔구나. 나는 저 문으로 들어왔구나. 이렇게 알게 된다. 그런데 열두문으로 들어오지만 들어오면 안에는 다 하나이다. 들어오기 전에는 다 다른데 들어오면 하나이다. 왜? 한 몸이 되기 때문에 하나가 된다. 한 운명 안으로 부름 받았기 때문에 하나가 된다. 우리가 달라도 몸은 하나이다.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이다. 그리스도도 이와 같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는 여기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몸,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양이구나 하는 것을 깊이 인상을 심어놓아야 한다. 교회는 열두문이 있어 사방에서 사람이 오는구나. 그렇지만 오면 하나이구나. 그것이 여러 문을 통해서 왔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풍성함을 우리가 공유하게 된 것이다. 운명은 하나인데 들어오는 길이 달랐다. 들어오는 길이 왜 달랐는가? 어쩌면 이 풍성을 위해서 들어오는 문은 다 달랐을 수가 있다. 우리는 이 문으로 들어오기 전에 왜 그런 길을 걸어왔던가? 꼭 그 문으로 동쪽 문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게 되었던가? 그 이유는 우리 인생으로서는 해답이 안된다. 교회라고 하는 이 몸 안에서 밖에 해답이 안된다.
예를 들어 누가 서쪽 문으로 들어오고 싶겠는가. 나도 동쪽 문으로 들어가고 싶다. 어쩌면 투표를 하면 다 동쪽 문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쪽 문이나 남쪽 문을 좋아하고 서쪽 문이나 북쪽 문을 싫어한다. 그래서 집을 살 때 동쪽 문이나 남쪽 문 집값은 비싸고 서쪽 문이나 북쪽 문 집값은 싸다. 다 동쪽이나 남쪽으로 집을 내고 싶을 것이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이런 길로 들어왔으면 좋았을텐데 왜 내 인생은 그리 굽이굽이 어려움이 있어 결국 이 길로 들어왔는가. 다른 사람은 편하게 들어왔는데 나는 왜 이렇게 어렵게 들어왔는가.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나는 왜 그렇게 들어왔는지 해석이 안된다. 그런데 몸 안에 오면 해석이 된다. 왜 새끼손가락은 있는 것인가. 왜 엄지손가락은 있는 것인가. 그것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면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이 몸 안에 붙어있으면 해석이 된다. 아~ 이래서 이것이 필요하고 이래서 이것이 필요한 것이구나. 몸 안에 있을 때만 이것이 필요하다. 몸을 떠나면 전혀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해석이 불가능하다.
지난 우리 인생을 생각해 보면 왜 나는 이런 길을 걸어왔던가 하고 생각할 일이 너무너무 많다. 지난 온 일도 그렇고 앞으로 갈 일도 그렇고 그런데 세상에서는 해석이 안된다. 재수가 없었다, 운수가 나빴다, 조상 탓이다, 이런 것으로 돌리게 된다. 그런데 교회 안에 들어오면, 몸 안에 들어오면 몸이 되면 전혀 누구 때문이 아니고 내가 몸이 되기 위해 이 길을 걸어왔구나. 그래서 몸 안에서 다 요긴한 사람이구나. 나는 그렇게 들어왔기 때문에 요긴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들어왔기 때문에 요긴하구나. 요긴하기 때문에 해석이 다 된다. 쓸모가 없으므로 해석이 안되지 쓸모만 있으면 해석이 다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와서 우리 자신의 인생이 쓸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 지난날의 모든 인생은 완전하게 해석이 된다. 내 인생이 하나님의 쓰심에 내가 드려질 때 해석이 되지 그렇지 않고는 내 인생이 해석이 안된다. 절대로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해석하려고 하지 말라. 해석하려고 생각하면 해석이 안되고 오히려 자기 인생은 혼란에 빠져 버린다. 몸 안에서만 이것이 해석이 된다. 우리가 엄지손가락이나 새끼손가락이 얼마나 귀엽고 유용한가. 그런데 이것이 잘라지는 순간에 징그럽다. 절단되면 몸 안에 붙지 않으면 징그러운 물건이 된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다 몸 안에 있지 아니하면 괴물이 되어 버린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게 된다. 몸 안에 있을 때 무엇 때문에 있는지를 알게 된다.
큰 회사나 공장에 가면 사람이 많이 있는데 공장이라고 하는 그 한 전체가 없으면 그 한사람 한사람이 거기 왜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회사나 공장이라는 전체가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이래서 있고 저 사람은 저래서 있는 것이구나로 해석이 된다. 문간에 들어가면 수위가 있을 것이고 또 들어가면 공장장이 있을 것이고 또 거기에 일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큰 회사일수록 다 필요하다. 부잣집에는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쓰는 그릇도 있다. 이런 식으로 바울은 묘사를 했다. 우리가 집이 크다면 더욱더 우리의 용도는 더 넓어지게 된다.
교회가 크면 우리 인생의 용도는 더욱더 커지게 된다. 그러면 어떤 사람도 다 들어올 수 있게 된다. 좁으면 어떤 사람은 들어오는데 어떤 사람은 들어올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 넓으면 모든 사람이 다 들어올 수가 있게 된다. 왜? 거기에 가면 다 쓰임이 되므로. 큰 회사에 가면 이런 사람도 사용되고 저런 사람도 사용된다. 작은 회사에 가면 몇 사람 채용 안하기 때문에 특수한 몇 사람만 필요하지 다 필요하지를 못한다. 오늘 하나님의 교회가 점점 크고 왕성해지고 더 다양해지게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회사와 같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다 들어와서 은혜와 안식을 누리는 교회가 되게 될 것이다.
온 인류가 다 들어올 수 있는 교회. 그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하나님은 지금 그런 교회를 원하고 계시고 그런 교회를 양육하고 계신다. 오늘 우리가 몸으로 부름 받은 이 자리에서, 교회로 부름 받은 자리에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몸을 그리스도의 몸을 확장하고 있구나. 그리스도의 몸을 점점점점 확장시켜가고 있구나. 확장될수록 하나님의 지체들은 더 많이 들어오게 되고 지체들이 더 많이 들어올수록 하나님은 더 다양하고 풍성하게 표현되어 가는구나. 우리가 많은 사람이 모여 집회를 하는 이유도 2~3명 모여도 집회가 되지만 많은 사람이 모일수록 더욱 좋은 이유가 더 많은 것이 표현되고 더 많은 것이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각 지방에서 따로따로 모이고 있지만 1년에 1~2번씩 한꺼번에 모이는데 이렇게 모이고 보면 다르다. 집에서 몇 사람씩 모일 때와 이렇게 한꺼번에 모일 때가 다른 이유가 바로 몸의 원리가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양은 달라도 다 하나이다. 어디에서 하나인가? 몸 안에서 우리가 하나이다. 그리고 그 몸은 클수록 좋다. 클수록 더 많은 지체를 수용하게 된다. 그리고 문은 많을수록 많은 방면의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다. 우리 교회가 많은 문이 있기를 원한다. 어떤 사람이든지 와서 자기가 들어올 문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여기 와보니 내가 도저히 들어갈 자리가 없다가 되면, 몸이 제대로 안되어 하나의 집단이나 단체는 되지만 교회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면 선교단체라는 것이 있는데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선교단체는 그런 류의 사람만 갈 수 있다. 다른 사람은 거기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을 교회라고 하지 않는다. 거기도 사람이 많이 모였으니 교회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하겠지만 학생들만 모여 있다면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선교단체, 학생단체이지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왜? 손가락만 하나 있는데 그것을 몸이라고 할 수 없다. 팔만 하나 있는데 그것을 보고 몸이라고 할 수 없다. 잘생겼든지 못생겼든지 손도 있고 팔도 있고 모든 것이 있어야 몸이라고 하지 그것이 없는 것은 몸이라고 할 수 없다.
교회와 단체는 다른 것이다. 단체는 어느 부분, 팔이면 팔 발이면 발 그것만을 이야기한 것이고, 교회는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교회를 생각할 때 어느 한 부분만 생각하면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도 처음에는 학생들만 있었다. 교회라고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학생단체였다. 지금은 학생단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사방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손도 있고 발도 있고 모든 것이 다 있게 되었기 때문에 교회라고 한다. 교회와 단체는 이렇게 다르다.
하나님은 바로 이 교회를 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을 지었으니까 이 교회를 통해서만 자기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다. 앞으로 교회생활을 하면서 내가 이런 면에 필요한 사람이라면 저 사람은 저런 면에 필요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인정을 해야 된다. 나와 같지 않다 해서 저 사람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일이 아니라 나는 나대로 필요하고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필요하다. 물론 내가 그것을 아직 모를 수가 있다. 나도 모른다.
나는 늘 간증할 때나 기다리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기다린다. 저 사람을 통해서 무엇이 표현될지 저 형제를 통해서 무엇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늘 기다려지기 마련이다. 오늘 기다리고 또 내일 기다리는 이유는 오늘은 이렇게 표현되지만 내일은 또 저렇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다린다. 간증을 들어보면 늘 똑같은 간증을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왜 기다리는가? 오늘은 또 무슨 간증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기다려진다. 미리 다 알아버리면 안기다린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교회생활하기 어렵다.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은 다 계산을 해서 뭐가 나오겠지 해버리면 들을 필요가 없다. 자기 혼자 알아버린다.
말씀 듣는 사람도 요즘 수능공부 하듯이 테이프 듣고 요점 정리 해버리는 사람은 한번 듣고 안듣는다. 다 알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늘 듣는 사람은 왜 듣는가 하면 들을 때마다 새로운 것이 들리기 때문에 듣는다. 한 테이프를 열 번 들었다는 사람이 있다. 왜 열 번을 듣겠는가. 외우려고 열 번 듣는 것이 아니고 들을 때마다 다른 것이 들려서이다. 이것은 수능공부와 다르다. 머리가 너무 좋으면 다 파악하고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은 들을 때마다 다른 것이 들린다.
간증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이 나와 맨날 똑같은 간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똑같은 간증을 하는 것 같은데 자세히 들어보면 늘 다른 간증을 하고 있다. 우리가 그 다른 것을 들을 수 있어야 된다. 그래야만 우리가 풍성함을 알게 될 것이다. 머리가 좋아 Out-line을 알아버리는 사람은 늘 들어보아야 똑같은 소리로 듣는다. 그러면 재미가 없다. 어제 하던 것을 오늘 또 하는구나 생각하여 지루하게 생각한다. 뭐 신선한 것 없나 하고 생각하지만 신선한 것이 늘 있겠는가.
사람은 자라면서 매일 조금씩 달라진다. 한꺼번에 확 달라지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눈으로 보기가 어렵다. 키가 크는 것이 날마다 쫙쫙 크는 것이 아니다. 언제 크는지 모르게 크는 것이고 씨를 뿌려 놓으면 자고 깨고 하는 동안에 열매가 맺힌다고 하는 것처럼 언제 자라는지 모르고 자란다. 그래서 나는 주의 깊게 들으려고 한다. 오늘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를 듣고 싶은 것이다. 늘 봐도 지루하지 않는 이유이다. 나는 30년간 들었다. 30년간 들었지만 늘 듣는다. 늘 모르기 때문에 듣는다. 바보는 늘 하는 것을 늘 해도 재미있다고 한다. 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바보이기 때문에 늘 들어도 재미있다. 미지의 세계이다.
오늘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모르는 세계이다. 똑같은 것 같지만 똑같을 리가 없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성령이 운행하시는데 똑같을 수가 없다. 금붕어가 연못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면 어떻게 보면 늘 똑같이 움직인다. 그런데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수학공식처럼 생각하고 보면 금붕어 돌아다니는 것이 꼬리치고 다 똑같다고 생각하면 볼 것이 없다. 그런데 생명의 움직임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날마다 봐도 다르다. 날마다 봐도 신기하다. 붕어 움직이는 것도 몇 년동안 들여다보았는데 아마 평생 들여다볼 것 같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날 너는 간증이 다되었으니 나가라 하면 어찌 되겠는가.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뭐가 달라도 늘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똑같은 것을 말하기는 정말 어렵다. 똑같은 것을 하라고 해도 정말 어렵다. 돈 주고 하라고 해도 어렵다. 군대 가면 구호를 계속 외쳐라 하는데 하기 어렵다. 왜 똑같은 이야기를 자꾸 할까. 자기는 똑같지 않기 때문에 재미가 있어 하는 것이지 똑같으면 못한다. 여러분이 해봐도 똑같으면 못한다. 우리 영광이가 말을 배우면서 하나를 배우면 계속 반복을 한다. 겉으로 들을 때는 똑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 같다. 그런데 영광이에게는 똑같은 것이 아니다. 늘 새로운 인식이 자꾸 오는 것이다. 아이들도 똑같은 것을 하라고 하면 안한다. 다 알아버린 것은 재미없어 안한다. 장난감도 어떤 장난감 갖고 놀다가 어느 날 가면 안논다. 다 알면 안논다. 늘 신기해야 가지고 논다. 늘 신기하다는 말은 늘 새로운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생명이 그렇다.
바울은 내가 같은 말을 해도 수고롭지 않다고 말했다. 왜 수고롭지 않겠는가? 자기 안에 늘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생명은 참 신기하다.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매일 같이 새롭고 매일 같이 신기하다. 우리가 교회 안에 있는 이 비밀,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 한 영은 과정을 거친 그리스도, 그 한 영을 말한다. 출생해서 살면서 죽으면서 부활해서 승천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다시 오시는 이 과정을 거친 그 영 안에서 그 영에게서 세례를 받고 우리가 한 몸이 되었고 그리고 한 영을 마시게 되었다. 우리는 그 영을 마시고 그 영 안에서 침례되었고 그 영을 마셨으니까 우리 안에는 그 무한히 변화할 수 있는 요즘 말로 하면 어디로 터질지 모르는 그 영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계실 때는 제한되어 있었다. 걸어가는 것도 제한되어 있었고 또 그분이 이적을 행한다 하더라도 역시 제한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5000명을 먹였다 하지만 못먹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도 못먹었을 것이고 많은 제한을 가지고 있었다.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쳤다는 말은 이런 모든 제한이 없이 이제는 완전하게 영이 되었다, 하나님이 영이시듯이 그 영이 되었다는 뜻이다. 생명주는 영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그분은 어디로 나올지 터질지 모른다. 교회 안의 그 영에 의해 우리는 세례를 받고 그 영을 마시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그 영이 움직이므로 우리가 어떻게 변화할지 어떻게 자라날지 모르는 것이다.
육신으로 있는 그분은 그림으로 그리려면 그릴 수가 있었는데, 과정을 거친 영이 되었을 때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어떤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우리 모든 사람이 그 그림을 그리는 것에 참여를 해야 된다. 자기 나름대로 그려내어야 된다. 참여하여 하나의 모자이크처럼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것이 바로 건축이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어디로 어떤 모양이 될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 안의 그분이 어떤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그 모양이 없으신 분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가 나올 것이므로, 그 모양 없으신 분의 형상이 될 것이므로 우리가 어떤 모양이 될지 모른다. 어느 날 어떻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전도를 하거나 하나님 말씀을 전해보면 상황마다 어떤 장소에 갈 때마다 늘 달라지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말씀을 전하는 형제들은 똑같은 말씀이지만 이 상황에 가서는 이렇게 말하게 되고 저 상황에 가서는 저렇게 말하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영은 제한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 상태에 따라 어떤 모양으로 표현된다. 고정된 것은 언제든지 똑같을 것이다. 네모난 것이라면 어디를 가나 네모난 것이 나올 것이다. 모양이 없는 영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어디를 가면 이런 모양이 되고 어디를 가면 저런 모양이 되는 것이다. 우리를 형상화 시키는 영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영에 의해 세례를 받고 그 영을 우리가 마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찌될지 모른다. 어떤 모양이 될지를 모른다. 오늘 어떤 사람이 어떤 모양이 됐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그렇게 고정된다고 생각하면 안되고 다음날 그 사람이 어떤 모양이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기다리게 되고 기대하게 된다.
오늘 어떤 사람이 흉한 모습을 갖고 있었지만 그 사람이 영원히 그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고 내일은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다. 왜? 그 안에 모양이 없는 분이 와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은 모양이 없으므로 우리 마음이 변하는 것에 따라 얼굴색이 달라질 수 있다. 얼굴은 똑같은 얼굴인데 어떤 경우에는 빨갛게 나올 수도 있고 부끄러우면 빨갛게 나오고 어떤 경우에는 창백하게 나올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시커멓게 나올 수도 있다. 이런 것이 내 얼굴 때문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마음 때문이다. 내 마음은 언제 어떻게 표현될지 모른다. 빨갛게 표현될지 창백하게 표현될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생활이 참으로 신기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다 모른다. 우리는 다 모르기 때문에 여기 모여 앉아 있다. 어떤 모르는 것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 때문에 다 있다. 알지 못하는 어떤 것 때문에 무엇을 나타내고 있다. 다 돼버렸으면 할 일이 없다. 그런데 아직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루고 있다.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교리화를 반대하고 제도화를 반대한다. 나쁘고 좋은 것을 떠나 제도화되면 규격화되기 때문에 교리화되면 규격화되기 때문에 그 규격 없는 영이 표현될 수 없다. 규격화가 되어버리면 모양 없는 그분이, 형상 없는 그분이 표현될 수 없다. 그분 앞에 내 인생을 내놓고 언제든지 그분이 나를 사용할 수 있도록 이렇게 쓸 수도 있고 저렇게 쓸 수도 있도록 나를 내놓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완전한 헌신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이 쓰고 싶은 대로 쓰시기를 원한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의 모양을 이루시기를 원한다. 그 모양이 내가 생각하는 모양이 아닐지라도 당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쓰여지기를 원하다. 이것밖에 우리는 할 것이 없다. 나도 나 자신을 준비할 때 어떤 마음으로 준비하느냐 하면 어떤 모양으로 쓰실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분이 원하는 대로 쓰시기를 원한다는 모양으로만 준비한다. 삼각형으로 준비하지도 않고 네모난 것으로 준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삼각형이 필요할지 네모난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쓰기를 원한다는 모양으로만 준비한다. 우리 자신은 그렇게 준비해야 된다. 그렇게 되면 내가 누구를 대하든 새롭게 대하게 될 것이고 늘 새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늘 보는 사람이지만 늘 새로운 사람, 항상 만나는 사람이지만 늘 다른 사람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 선입관을 만들어 놓고 그대로 고정시켜버리게 되면 나는 그 사람을 만날 때마다 고정된 관념을 가지고 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제의 사람이 아니고 오늘 다른 사람이 돼버렸는데 나는 고정된 관념을 가지고 그 사람을 대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나와 그 사람은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제 그 사람과 나와 무슨 관계였든지 간에 오늘 갈 때는 나도 새 사람이고 저 사람도 새 사람이다. 다른 사람으로 가는 것이다. 왜 다른 사람인가? 우리 안에 그 영으로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 영으로 우리가 마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새로운 사람이다. 우리가 늘 볼 때 얼굴이 똑같지만 사실은 늘 똑같지 않다고 한다. 매일 바꾸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무를 보더라도 우리가 껍데기를 봄으로 늘 똑같은 것 같지만 똑같지 않고 매일 바꾸어지고 있다. 미세하게 바꾸어지기 때문에 안보이는 것이다. 우리도 늘 보니 잘 안보여서이지 자꾸자꾸 바꾸어지고 있다.
20년전과 10년전과 오늘을 비교한다면 우리는 놀랍게 바꾸어졌다. 10년전 우리 교회를 와보고 우리 교회는 이렇다 하고 간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지금도 그대로 생각하고 있다. 변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교회는 난해한 교회이다. 이상하고 해석을 할 수 없고 뭘로 어떻게 해석을 해야될지 모르는 교회이다. 용렬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단숨에 해석을 하고 간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정말로 자세히 알면 정말 난해한 교회이다. 해석하기가 곤란한 교회이다. 자세히 알고보면 뭐라 할 수가 없다. 단지 살아있고 움직인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뭐라고 규정할 수가 없다. 나는 이것이 온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뭐라고 규정할 수 없지만 단지 살아있다는 것, 그것만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 성령은 한 영을 말한다. 우리는 한 영으로 세례를 받고 한 영을 마시게 되었고 한 영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고 한 영에게 침례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한 영에 잠기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한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될 것이다. 이번 집회 모일 때는 이렇게 모였지만 다음 집회는 어떤 모양이 될지 우리는 모르는 것이다. 내년에 우리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이번에 사진을 찍어놓고 가서 내년에 비교하면 사진은 같을지 모른다. 그런데 사진에 찍혀지지 않는 우리는 다를 수 있다. 사진에 찍을 수 없는 우리, 사진에 찍혀지지 않는 우리가 있다.
그것은 늘 변하고 있고 늘 움직이고 있다. 늘 꿈틀거리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고 꿈틀거리는 것이다. 뭐라고 정의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것은 느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다 맞는 말인데 우리 안에서 늘 꿈틀거리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한다. 이런 일 저런 일들이 늘 지나가면서 우리는 생명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일도 생명이 있는 사람이고 저런 일도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때로는 불쾌한 경우도 있고 때로는 기분이 좋은 경우도 있고 때로는 근심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편안한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움직임 안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뒤로 가서 보면 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되어있다. 다른 데 같으면 그것이 그대로 갈텐데 한번 죽은 사람은 그대로 간다. 죽은 사람 몸에 있는 점은 항상 그대로 있다. 산 사람은 점이 없어질 수도 있다. 나도 옛날에는 점이 많이 없었는데 지금 많이 생겼다. 이것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든 사람이 살아있고 움직이고 있으면 되는 것이고 느낌이 있으면 되는 것이지 염려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늘 꿈틀거리면서 늘 움직이면서 무슨 일인가가 늘 생겼다. 무슨 일이 생기다 보면 더 좋은 일이 생기고 또 좋은 것이 생긴다. 자꾸 좋은 것이 된다. 참 이상하다. 가만히 있는데도 저절로 다 좋은 것이 된다. 나는 그것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생명의 조절 능력이 있는지. 생명은 자기 스스로의 조절 능력이 있다. 어디가 아프면 온 몸이 그쪽으로 힘을 모은다고 한다. 손가락이 하나 아프면 온 몸의 힘이 그쪽으로 모여 일제히 치료를 하려고 공격한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른 곳이 아프면 또 다른 곳으로 간다. 누가 시켜서 가는 것이 아니고 생명 자체가 간다.
우리 교회 안에서는 유기적인 몸의 움직임과 치유하는 기능이 몸 안에 있다. 자꾸 흐르면서 뭔가가 치료되고 소생되고 그렇게 해서 늘 완전한 것으로 더 완전한 것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다양하고도 풍성한 교회 안에서 주님을 우리가 충분하게 마시고 충분하게 표현하고 충분하게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는 지금 이런 자리에 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이것을 그리스도라고도 한다.
[기 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한 몸으로 부르셔서 주님을 누리게 하시고 주님이 우리 안에서 표현되도록 우리를 사용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지체는 여럿이고 지체는 많은데 몸이 하나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이 교회 안에서 보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과 하나인 이 사실이 현실적으로 입증되고 현실적으로 느껴지고 현실적으로 알아지도록 축복하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살아있게 하는 생명의 원동력이 당신에게 있고 움직이게 하는 그 원동력이 당신에게 있고 우리는 무엇인가 흘러가지만 당신이 흐르게 하기 때문에 흘러가고 당신이 자라게 하기 때문에 자라갑니다. 당신이 움직이게 하기 때문에 움직여 가는 이렇게 신기한 나라로 신기한 세계로 신기한 몸 안으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날이 갈수록 시간이 갈수록 당신의 소원을 따라 당신의 목적을 따라 늘 변화하고 늘 새로워질 이 소망 안에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하고 우리가 늘 모일 때마다 늘 만날 때마다 당신을 충분하게 나타내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고 또 우리가 흩어져 세상에 나갈지라도 거기서 우리가 오직 유일한 임무, 주님 당신만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우리가 살게 되기를 원하고 세상 앞에 우리가 하나임이라는 사실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음을 우리가 입증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하나됨 이것은 세상에 대해서 큰 도전이 아닐 수 없고 우리의 하나됨 이것은 사탄이 따라올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승리하고 이것을 통해서 영광을 얻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