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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성김씨 괴산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원근33세
시조(始祖)는 김 석(金 錫)으로 신라(新羅)金氏 38代(56代)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이며 고려 태조 왕 건(王 建)의 장녀 신란공주 (一名 낙랑공주)가 어머니이다.
신란공주(神鸞公主)는 왕건 태조의 셋째부인 신명태후(神明太后) 충주유씨(忠州劉氏)의 소생이다.
이로써 고려 왕건 태조의 외손이며 2代 혜종(惠宗), 3代 정종(定宗), 4代 광종(光宗)의 생질(甥姪)이다.
고려 초 무신(武臣)정치 시대에서 벗어나 널리 인재를 등용하는 文治 시대로의 전환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국방(國防)과 백성들의 구휼(救恤)에 공을 세워 경종 임금 때 식읍 300호를 하사 받고 의성군(義城君)에 수봉 되었으며 제 8대 현종 때 덕유후(德儒侯)의 시호(諡號)를 받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의성(義城)으로 삼았으며 그 뒤 여섯 분의 선조(先祖)들이 의성군(義城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義城君 新羅 敬順王 第 4子 高麗太祖 外孫受封 義城子孫 因以爲貫]신라 경순왕의 제4자로서 고려태조의 외손으로 의성군에 책봉되니 의성자손은 이로 인하여 본관을 사용하게 되었다
<9세 첨사공 김용비의 묘>
시조 김석에 의해 처음으로 개관된 의성김씨는 8세손 김공우(金公瑀) 대에서 크게 번성했는데, 장자 김용비(金龍庇)는태자첨사(太子瞻事)를, 차자 김용필(金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막내 김용주(金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의성김씨는 이들 대에서 5개파로 나뉘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첨사공파· 수사공파· 충의공파· 찬성공파· 선락장군공파 등이 그것 이다. 의성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25만330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의성김씨 연혁과 인물
의성김씨는 김석이 성관을 연 이후, 고려와 조선조에 이어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명문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군(君)으로 책봉된 사람이 7명이 나왔고,
시호를 받은 사람도 충의공 용주 외에 용소공 영열(英烈), 문원공 원(源) 등13명이나 된다.
[문과] 101명, [무과] 84명, [사마시 진사] 96명, [사마시 생원]173명
≪의성김씨 계보도≫
《의성 김씨(義城 金氏)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人物)》
고려(高麗) 개국(開國)과 함께 문호(門戶)를 개방(開放)한 의성김씨(義城金氏)는 8세손(世孫) 공우(公瑀)의 아들대에서 크게 번창(繁昌)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의 기틀을 다졌는데,
장자(長子)인 용비(龍庇)가 태자첨사(太子詹事 : 동궁에 속한 종 3품 벼슬 )를 지냈고, 차자(次子) 용필(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 막내 용주(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歷任)하여 명성(名聲)을 날렸다.
그외 고려(高麗)에서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훤(暄)과 지예(之銳)의 맏아들 도순문사(都巡問使) 광부(光富)는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개경을 침공하자 이를 수복한 공으로 1363년(공민왕 12) 2등 공신이 되었으며, 1372년 부원분자(附元分子) 고철두(高鐵頭) 등이 변방에 침입하였을 때 수어관(守禦官)으로 이를 격파하였다.
그뒤 계림윤(鷄林尹)을 지냈으며, 1379년 8월 합포도순문사(合浦都巡門使)가 되었는데, 9월에 왜구가 단계(丹溪)·거창(居昌)·야로(冶爐) 등을 습격하고, 가수현(嘉樹縣: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 이르자 이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공조 전서(工曹 典書)를 지내고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발문(跋文)을 적은 거두(居斗)와 정당문학(政堂文學) 거익(居翼),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 춘(椿),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옥(玉), 평장사(平章事) 연(衍) 등이 명문(名門)의 대를 이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옥(玉)의 아들 현주(玄柱)가 찬성사(贊成事)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 : 제와 사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종 2품 으뜸 벼슬)에 이르렀고, 영렬(英烈)은 태종(太宗) 때 추충 분의좌명공신(推忠奮義 佐命功臣)에 올랐다.
도순문사(都巡問使) 광부(光富)의 아우인 판서 수덕(修德)의 아들 용초(用超)는 성품이 꾸민 데가 없이 수수하고 곧으며 무재(武才)가 있었다. 충정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문관이면서도 무예(武藝)가 뛰어나 활쏘기와 말 타기를 능가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공민왕과 함께 사냥하면서 날아가는 새를 백발백중으로 맞추고, 백 발자국 밖의 나뭇잎을 맞추어 말 한 필을 상으로 받기도 하였다. 이 내용은 백문보(白文寶)가 지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1390년(공양왕 2) 왜구가 양광도에 침범하자 밀직부사로서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왜구 100여 명을 사살하면서 평정하였고,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으며, 호남도병마도절제사(湖南道兵馬都節制使)와 충청도병마도절제사를 거쳐 관찰사를 지냈다. 관직에서 물러나 김천시 부항면 유촌리에서 살았다. 1406년(태종 6)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제문을 지어 보내고 3일간 조회(朝會)를 폐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시호를 문절(文節)이라 하였다.
존성(存誠)의 아들 효손(孝孫)은 세종(世宗)때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거쳐, 형조 및 예조의 참판(參判)을 지내고 대사헌(大司憲 :사헌부의 종 2품 으뜸 벼슬)을 역임했으며, 을방(乙邦)은 고려 문신(文臣)으로 국운(國運)이 다하자 통곡하며 예안 (禮安)의 요성산(邀聖山)으로 내려가 초당(草堂)을 짓고 은거(隱居)하였는데, 조선조에서 수 차에 걸쳐 벼슬을 제수(除授)하 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기리며 불취하자 그가 살던 마을 둔번리(遁煩 里)라 불렀다고 한다.
광부(光富)의 손자(孫子)이며, 사농경((司農卿) 로(路)의 넷째 아들 숙검(叔儉)은 태종(太宗) 17년(1417) 정유(丁酉)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3[探花郞]위로 문과에 합격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 인천지군사(仁川知郡事)등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1455년(세조1)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 되었다.
고려말에 병부상서를 지낸 의성군 남파 김광부(南派 金光富)의 현손이며 사농경(司農卿)에 오른 석포 김로(石圃 金路)의 증손이고, 사직 김자중의 아들 한경(漢卿)의 자는국보(國寶), 호는 도곡(道谷)이다.
1456년(세조2)에 개성 풍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적부터 학문이 뛰어나 재용감정(濟用監正)에 올랐으며 당시 연산군으로 인한 폭정으로 나라가 어지러워 지자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의 뜻있는 사람들과 뜻을 같이 하여 연산군을 폐위 시키고 진성대군(중종)을 왕위에 올리는 데 기여한 반정공신이었다.
그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중종 즉위년인 1506년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훈록(勳錄)되었고 정2품 자헌대부 지중추부지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반정을 성공시킨 뒤에 반정공신들이 자신들의 훈록을 둘러싸고 파를 지어 싸우는 것을 보고 중앙정치에 염증을 느껴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도리로 낙향을 하였다. 그리고 김실 서당과 도곡정을 짖고 독서와 강론을 하며 평생을 조용히 지냈다.
숙검(叔儉)의 손자이며, 첨정(僉正) 안중(安中)의 아들 전(巓)은 성종(成宗) 14년(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3[探花郞]위로 출사하여 성종 24년(1493)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종부시정(宗簿寺正),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지냈다. 전(巓)의 아우 헌(巚)은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그러나 1519년(중종 14)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난(亂)으로 인하여 국청(鞠廳)에서는 신진사류들을 중대한 죄인으로 문초하는 국치가 벌어지고, 많은 선비들이 사사되거나 투옥되는 일대 정국의 혼란이 일어났다.
이때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連累)된 전(巓)은 파주(坡州) 교하로, 헌(巚)은 합천 삼가현(三嘉縣)의 거부(巨富)인 졸당공(拙堂公) 박총(朴聰) 처가댁으로 곧 바로 서둘러 낙향(落鄕)하였다. 이후 이곳에서 의탁(依託)생활을 하면서 대평(大坪) 송지촌(松旨村 : 지금의 합천군 대병면 성리.)에서 여생(餘生)을 마쳤다.
연산군(燕山君)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흠조(欽祖)는 중종반정(中宗反正)후에 검열(檢閱 )을 거쳐 단양(丹陽)·제주(濟州) 등지의 목사(牧使 )를 역임한 후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으며, 윤석(潤石)은 중 종(中宗) 때 등과(登科)하여 청송 부사(靑松府使)로 나갔다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대사성(大司成) 유 학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정 3품 벼슬)에 올라 군수(郡守) 세우(世 瑀)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조선 중기에서 명문(名門) 의성 김씨(義城 金氏)를 더욱 빛낸 인물은 모재(慕齋) 안국(安國)과 사재(思齋) 정국(正國)의 형제를 들 수 있다.
안국(安國)은 1478년(성종 9) 참봉(參奉) 연(璉)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닦고, 연산군(燕山君) 때 별시문 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어 부수찬(副修撰)과 부교리(副校理)·예조참의(禮曹參議)를 거쳐 경상도(慶尙 道)와 전라도(全羅道)의 관찰사(觀察使)로 나가 각 향교(鄕校)에 [소학(小學)]을권장하고 [벽온방]· [창진방( 瘡 疹方)]등을 간인(刊印)하여 보급하였다.
특히 그는 천문(天文)·주역(周易)·농사(農事)·국문학(國文學)을 비롯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당시 유명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쌍벽을 이루었고, 기묘사화(己卯 士禍)가 일어나 한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거쳐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 提學)·좌찬성(左贊成 : 의정 부에 속해있던 종 1품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동몽선습(童蒙先習)] [모재가훈(慕齋 家訓)]을 비롯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안국(安國)의 아우인 사재(思齋) 정국(正國)은 김굉필(金宏弼)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1509년(중종 4) 문과( 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 : 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혔으며, 이 조 정랑(吏曹正郞 )을 거쳐 관찰사(觀察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병조(兵曹) 예조(禮曹)·형조(刑曹)의 참판(參判)을 지낸 후 좌찬성 (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시문(詩文)이 당대에 뛰어났고 의서(醫書)에 조예가 깊어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를 비롯 한 훌륭한 저서(著書)를 많이 남겨 형과 함께 후세에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한편 생원(生員) 진(璡)의 아들 5형제는 모두 당대에 이름난 거유(巨儒) 퇴계(退溪) 이 황(李滉)의 문하(門 下)에서 글을 읽고 문명(文名)을 날렸는데, 맏아들 극일(克一 )은 내자시정(內資寺正)을, 둘째 수일(守一)은 찰방( 察訪)을 지냈으며, 셋째 명일(明一)은 효행(孝行)이지극한 학자(學者)로 유명했다.
넷째 성일(誠一)은 1568년(선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정언(正言)을 거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將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제학(副提學)·나주 목사(羅州 牧使)를 역임하고 사성(司成 )으로 통신부사(通信府使)가 되어 일본(日本)을 다녀왔다.
그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초유사( 招諭使 :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초유하는 일을 맡은 임시벼슬)로 참전하여 죽산(竹山)·함양(咸陽)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모아 진주성(晋州城)을 사수하다가 진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는 성리학(性理學)에 능통했으며 사후 (死後)에 선무일등공신 (宣武一等公臣)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막내인 복일(復一)은 명종(明宗) 때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70년(선조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낭관 (郎官)·전라도 어사(全 羅道御 史)를 거쳐 울산 군수(蔚山郡守)·창원 부사(昌原府使) 등을 역임하고, 성균관(成均館)의 사예(司藝)와 풍기 군수(豊基郡守) 를 지냈다.
임진왜란 의병으로 증형조판서 김호(金顥)의 아들 제민(齊閔)의 자는 사효(士孝)이며 호는 오봉(鰲峯)이고, 이항(李恒)의 문인으로 선조 계유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직을 거쳐 동부승지,좌승지를 지내고, 임란을 당하매 아들 엽(曄)·섬(暹)·안(晏)·흔(昕)을 거느리고 역전하여 다대한 전과를 거둔 호남 삼대 창의장(倡義將)으로 이름을 남겼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강(忠剛)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선복(善復)은 임진왜란 때 중봉(重峰) 조헌(趙憲)[1544~1592]과 더불어 창의하여 1592년(선조 25) 8월 17일 충청도 금산 전투에서 칠백의사와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금산의 칠백의총에 묻히고, 비가 세워졌다. 청주시 문의문화재단지(충북 청원군 문의면 문산리 산 6-1)안에 충신각이 세워져 있다.
대호군 윤우(允祐)의 아들 응일(應一)은 합천군 용주면 고품마을 출신으로 자는 자순(子純) 호는 삼락당(三樂堂)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그는 44세의 나이로 스스로 삼가(三嘉)지역에서 구산(龜山) 윤탁(尹鐸), 봉사(奉事) 노흠(盧欽), 생원(生員) 권양(權養), 권제(權濟)등이 이끄는 삼가의병대(三嘉義兵隊)에 지원하여 용감한 의병활동(義兵活動) 중, 삼가의병대(三嘉義兵隊)가 곽재우(郭再祐) 군사와 합류하여 왜적이 서부 경남지방을 노략질하고, 낙동강을 건너 의령(宜寧)지방으로 침입하려고 벌인 정암진나루 전투, 진주성 전투등에 참전한 이후,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화왕성(火旺城)전투에 참전하여 충의(忠義)를 다하였다.
또한 윤우(允祐)의 손자(孫子) 두남(斗南)도 합천군 용주면 고품마을 출신으로, 자는 여앙(汝仰)이며, 호는 덕탄(㯖灘)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특하였으며, 나이 6세에 부친에게 글을 배워 15-16세때는 이미 문장에 통달하여 그 뛰어난 재주와 이름이 이웃 고을까지 떨쳤다. 26세되는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 경상도 일대의 남명 조식(曺植)선생 문인들은 삼가(三嘉)에서, 그리고 내암 정인홍(鄭仁弘)의 문하생들은 합천 가야면 숭산동(崇山洞) 일대에서 궐기하여 대대적으로 왜적토벌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삼가(三嘉)에서 입재(立齋) 노흠(盧欽), (龜山) 윤탁(尹鐸), 화음 (花陰) 권양(權養)등이 이끄는 삼가(三嘉) 향병으로 지원하여 망우당 곽재우(郭再祐)장군의 진영으로 편성되어 의령(宜寧)의 정암진나루 전투등에 참전하였다.
특히 합천(陜川)을 중심으로 한 초계, 성주, 고령 일대에서는 3000여명의 대병력으로 낙동강(洛東江) 연안을 제압하여 왜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호남(湖南)침공을 방어 하고 왜적의 거점인 성주성(星州城)을 수복 하는등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전란이 끝난 후 임천(林泉)에 다시 돌아와서 오로지 학문(學文)에만 전념 하였으며, 과업에는 뜻을 두지않고 부모봉양에 극진하였다. 또한 친족간의 정을 두텁고 화목하게 지내는데 노력하면서, 산속 냇가를 벗삼아 묻혀 지내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남에, 의병(義兵)으로 다시 출전하여, 경남 창녕(昌寧)의 "화왕성(火旺城) 전투"에서 31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순직(殉職) 하였다.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 당동 고호 세덕사(世德祠)에서 배향하고 있다. 사후에 효행으로 1634년(인조12) 증 선무랑(宣務郎)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에 추서되고 1650년(효종2년) 사정려(賜旌閭)되었다. 저서로는 19cmX25.4cm 크기의 “덕탄집(㯖灘集)”이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삼척 부사(三陟府使) 희삼(希參)의 아들 우옹이 명종(明宗) 때 문과( 文科)에 올라 선조(宣祖) 때 대사헌(大司憲)·병조 참판(兵曹參判) 등을 역임했고,우굉(宇宏)은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올라 숙종(肅 宗) 때의 수찬(修撰) 여건(汝鍵), 대사헌(大司憲) 방걸(邦杰)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영수(永銖)가 장기 군수 겸 경주 병마절제사(慶州兵馬節制使)에 재임시 선정(善政)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고, 철종(哲宗) 때 [북 천가(北遷歌)]를 지어 국문학(國文學) 사상 중요(重要)한 업적(業績)을 남긴 진형(鎭衡)과 예조 참판(禮曹參判) 굉이 명문의 대를 이었다.
영남유림(嶺南儒林)의 거두(巨頭) 흥락( 興洛)은 수차에 걸쳐 벼슬에 등용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學問)에만 진 력하여 [서산집(西山集)]을 집필하였으며, 하락(河洛)은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무공(武功)을 세워,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원식(元植)·동삼(東三)·창숙(昌淑)·붕준(鵬濬)·황(榥) 등과 함께 가문을 더욱 빛냈다.
특히 의성김씨는 조선 말기에 들어와 많은 의병운동가, 독립지사, 의사, 열사를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하다.
‘안동김씨의 나라’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조선시대는 안동김씨의 권세가 막강하였는데 (조선 전·중기는 신 안동김씨가,후기는 구안동김씨의 세도가 심했다), 조선 말과 일제 때에는 의성김씨 가문에서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심지어 같은 가문, 집성촌 전체가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예도 있었다. 그리하여 의성김씨 한 문중에서만 독립운동유공자가 85명이나 배출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 전국 유림을 대표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서로군정서를 창립하고 참모장을 역임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전봉준과 함께 갑오 농민전쟁을 지휘한 김도삼(金道三), 단발령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김도화(金道和)가 유명하다.
심산 김창숙은 경북 성주 출생으로 어려서 유학을 배우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문을 올려 투옥되었다.
1909년 성명학교를 창립하여 육영사업을 진행했으며, 3·1운동 이후 망명을 결심하고, 전국 유림을 대표하여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진정서를 가지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된 후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다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그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신채호·박은식 등과 신문을 발간하고,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 선전위원장으로 활약했다.
또한 이동녕·김구 등과 함께 청년결사대를 국내로 파견하여 일제 통치기관을 폭파하도록 했다.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도 그의 지도하에 이뤄진 것이다. 그는 또다시 일본 영사관원에게 체포되어 14년 형을 언도받고 대전 형무소에 복역하는 중 병세가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이때 받은 고초로 평생 일어서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되었다. 해방 후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고,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전국의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설립한 성균관대학의 재단 분규로 총장직을 사임한 뒤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962년에 별세했다.
일송 김동삼의 본명은 긍식(肯植)으로 경북 안동에서 출생했다.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 등과 함께 협동중학을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종사하다가 1909년 서울의 양기탁 집에서 신민회 결성을 논의하였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교포의 안정과 교육 문제에 힘쓰며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이때 설립한 신흥강습소는 후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하였다.
1918년에는 서일·김좌진 등 38인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다시 상하이임시정부 휘하로 들어가 서로군정서가 되었는데, 그는 서로군정서의 참모장이 되었다.
그 후 만주사변(1931년) 때 하얼빈에서 잡혀 강제 송환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는 중 옥사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의성김씨에서는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김재춘(金在春)을 비롯하여 국회의원 김중위·김명윤·김원웅·김화남 등이 있으며, 수 많은 정관계·학계·재계 인사들이 있다.
≪조선조 문과 급제자 배출 성씨 본관 / 김씨≫
광산(光山)김씨(金氏)262명 안동(安東[舊])김씨(金氏)163명 안동(安東[新]) 김씨(金氏)158명
연안(延安)김씨(金氏)163명 김해(金海) 김씨(金氏)131명 청풍(淸風)김씨(金氏) 105명
상산(商山) 김씨(金氏) 68명 선산(善山) 김씨(金氏) 61 명 순천(順天) 김씨(金氏) 51 명
풍산(豊山) 김씨(金氏) 38명 전주(全州) 김씨(金氏) 22 명
<경순왕 계열> 521명
第1子 부안김씨(扶安金氏/ 김겸용金謙用)...................................... 27명
第2子 울산김씨(蔚山金氏/ 김덕지金德摯).......................................12명
第3子 경주김씨(慶州金氏/ 김명종金鳴鍾).................................... 212명
第4子 의성김씨(義城金氏/ 김석(金錫)..........................................101명
第5子 강릉김씨(江陵金氏/ 김건(金鍵).......................................... 98명
第6子 언양김씨(彦陽金氏/ 김선(金鐥)............................................27명
第7子 삼척김씨(三陟金氏/ 김추(金錘)............................................46명
※ 의성김씨 6世 언미(彦美)의 제3자 녹광(綠光)을 시조로 하는 광주김씨(廣州金氏).............................. 3명
※ 의성김씨 9세 용비의 아우 용주를 시조로 하는 개성김씨(開城 金氏)..................................................13명
※ 의성김씨 9세 용비의 孫子 김남득(金南得, 아명 기지(麒芝)를 시조로 하는 고령김씨(高靈金氏)......... 5명
※ 의성김씨(義城金氏)의 과거급제자: 문과 101명, 무과 84명, 사마시진사 96명, 사마시생원 173명
≪조선조 의성김씨 12세(世) 남파공(南坡公)파 문과 합격자 명단≫
14世 김숙검(金叔儉) 태종(太宗)17년(1417)정유(丁酉)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3[探花郞]위(3/33)
15世 김명중(金命中) 세종(世宗) 26년(144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2위(12/33)
15世 김양중(金養中) 단종(端宗) 1년(145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정과(丁科) 21위(31/40)
16世 김 전(金 巓) 성종(成宗)14년(1483)계묘(癸卯)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3[探花郞]위(3/33)
예종(睿宗) 1년(1469) 증광시(增廣試) 2등(二等) 11위(16/100)
16世 김갱수(金鏗壽) 성종(成宗) 20년(14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위(11/33)
일명(김익겸) 성종(成宗) 20년(14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0世 김극화(金克和) 인조(仁祖) 23년(1645) 을유(乙酉) 별시(別試) 병과(丙科) 8위(13/15
인조(仁祖)20년(1642)임오(壬午)식년시(式年試)[진사]3등(三等)10위(4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