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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시대의 시기 구분론에서 전 후기를 양분하는 기준으로 작용할 정도로 조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큰 것이었다. 임진왜란의 역량이 전국에 걸친 것이었다면 병자호란은 지역적으로는 경기지역 특히,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부가 가장 큰 피해를 준 전란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에 이어 1636년(인조14년) 12월 9일 청 태종이 직접 1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함으로써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인조는 이조판서 최명길의 건의를 받아들여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수성전(守城戰)을 전개하였다. 남한산성에 주둔한 조선군은 대략 1만 4천여 명으로 10만 명의 청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조선 각지의 구원병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을 향해 진군한 조선군의 대부분은 패배하였다. 다만 전라병사 김준용(金俊龍)이 이끄는 호남 병력은 수원 광교산에 12월 중순 진을 설치하고, 청군과의 접전으로 청태종의 사위를 전사시키는 승첩을 거두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사천공께서는 광주부에 살다가 충청도까지 피난 간 사대부에 당시 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일기를 쓴 이는 김극형(金克亨 1,605~1,663)으로 본관은 청풍 자는 태숙(泰叔), 호는 사천(沙川) 또는 운촌(雲村)으로 박지계(朴知誡)의 문인입니다.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이후 창릉참봉, 동문교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공조정랑, 화순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송시열과 서한을 통해 성선체용설(性善體用設)에 관해 많은 의견을 교환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병자피란일기(丙子避亂日記)①은 호란으로 인한 지역민의 동향과 당시의 정황을 잘 보여 준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자료로 평가된다. 여기에서는 그의 피난 체험에 대한 섣부른 해석보다는, 날짜별로 일기를 초역하여 사천공의 이동 경로 당시 정황, 청군의 동향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636년 12월13일 청인(淸人)이 국경을 침범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12월16일 저녁 대가(大駕)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자 적들이 이를 포위했
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날 밤 이정경(李鼎慶)이 서울에서 가족을 데리고
왔고, 하루 전에 이함(李涵), 경보(敬甫) 역시 와서 세 사람이 모여 앉아 피
난 갈 것을 의논하여, 영서(嶺西)로 갈 것을 의결하였다.
12월17일 새벽 즉시 동로(東路)로 길을 떠났다. 10리쯤 가다가 적(賊)의 한 부대가 이
미 판교(板橋)②에 주둔하고 있다는 와언(訛言:잘못 전해진 말)을 듣고 두려
워 길을 가로질러 호서(湖西)로 선회하였다, 중로(中路)에서 이백첨(李伯瞻
)을 만나 며칠 밤을 동숙하였다.
12월25일 청양(靑陽)의 망우(亡友) 이방숙(李方叔)③과 그의 숙부 이준(李浚)의 집에
도착하였다. 이준의 아우 이자장(李子長)이 나와 함께 해도(海島)에 들어가
고자 하였으나, 이준은 어렵다고 하여 나는 낭패라고 생각하였다.
1637년 01월04일 드디어 서산(瑞山)에 있는 장인(婦翁:부옹 처의 아버지)의 농장(農庄)을 향
하여 덕산(德山)의 조씨 집을 지나 제가(諸家:문중의집안)에 유숙하였다.
밤에 어떤 사람이 삼남(三南)의 장수(將帥)가 용인과 광주 접경(接境:경계)
에 이르렀다고 알렸는데, 그 위세에 적들이 달아나 괴멸되었다고 하면서 말
하기를, “믿을 만한일이다. 주상께서 어느 곳에서 무릎을 꿇었으나, 신하들
은 한 사람도 목숨을 버리지 않으니 나아오기가 진실로 어려우니 어떤 마음
인가?” 하였다. 이에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렸다.
01월09일 서산에 이르렀는데 안연(晏然:해가 저물다)하였으므로 피난하지 않아도 되었
으나, 인심이 순후(淳厚:인정이 두텁지 않다)하지 못함으로, 부득이 따르던
이자장과 함께 해도(海島)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이때 이자장은 이미 결성(結
城)의 해구(海口)에 도착하였다고 편지가 왔는데, 이같이 소식을 듣고 즐거웠
다.
01월13일 이자장이 나에게도 따르기를 간청하였으므로 결성(結城)을 향하여 20리를
가서 한증(韓增)의 집을 지나갔다. 한증은 나의 동서(同壻)인데 늦게 유숙하
게 되었다. 이날 밤에 남종 둘과 여종 셋이 도망갔다.
01월14일 실인(室人:아내)은 머무르고 다만 징아(澄兒:金澄1623~1673)와 망형(亡
兄)의 딸 등 두 아이를 데리고 하루 만에 결성(結城)에 이르렀다. 이자장은 곧
돌아갔다. 적(賊)이 덕산(德山)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오래전에 들었음으로,
한씨가와 함께 남으로 내려와 간월도(看月島)에 이르렀다. 섬의 한 면이 조수
(潮水)가 드나들어 바닷물이 빠진 후 건널 수 있었는데, 바닷물이 안 빠져 피
난 무리가 해안가에서 노숙하였다.
01월15일 조수가 빠져 일행 남녀 모두가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바다를 건너다가 뻘 중에
다리가 빠져 피가 나기도 하였다. 간월도에 며칠간 머물렀다. 안면도(安眠島)
로 들어가 20여 일을 지냈다. 한양에서 온 자가 국왕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출
성(出城)한 일을 알렸는데, 섬 안에 사녀(士女:선비의 아내)가 일을 듣고 분개
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02월16일 섬에서 나와 한씨가로 돌아왔는데, 그는 선비이었으므로 속된 마음이 없었으
며, 후하게 대접해 주었고 끝내 나태하지 않았다.
03월01일 다시 청양의 이씨가로 돌아왔다. 작농(作農)할 계획으로 광주로 돌아와 성묘
(省墓)하였다.
03월09일 고향집에 돌아왔는데 가사(家舍:집을 말함)와 마을이 모두 소신(燒燼:불에 타
서 재가됨)되어 마을의 태반(太半)이 포로로 잡혀 갔으며, 살아남은 자 몇몇이
곳곳에 서로 모여 곡(哭)하고 조문 (弔問)하였다.
나의 장서(藏書:간직한 책) 수백권 및 선조(先祖)의 옛 물건은 다 재로 되어버
렸다. 내가 구허(舊墟:옛 집터)를 세우고자 오래 탄식하였으나 끝내 세울 수 없
었다. 종질(從姪)사촌 형제의 아들 김수(金洙) 형제와 서종매부(庶從妹夫) 박
사룡(朴士龍:김충백의 사위) 서종형(庶從兄) 김호선(金好善)이 모두 섬에서
돌아왔다. 호선의 아우 말선(末善)과 그 어미가 섬에 들어갔다가 말선이 나왔
으나 집에서 취식(取食)하다가 적을 만나 잡혀갔으나 그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한다.
03월17일 다시 청양으로 향하고자 평택을 지나다가 서내형(庶內兄,고종형(姑從兄) 자
기보다 나이가 위인 고모의 아들) 권관(權管) 권임길(權臨吉)에게 곡(哭)하였
다. 그가 호서백(湖西伯)의 정세규(鄭世規)를 쫓아 전쟁에 나갔다가 화살을 맞
고 귀가하여 병이 깊어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호란으로 사절(死節:절개를 위해
목숨을 버림)한 부인(婦人)이 많다는 것을 듣고 보았다.
03월하순 아산(牙山)을 지나다.
윤04월05일 충청도 청양(靑陽)에서 설가(挈家:가족을 이끌고 다님)하여 충청 황간(黃磵)으
로 향하다.
윤04월08일 전라도 구례 남전(藍田)의 처가에 도착하여 머무르다.
05월29일 아이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호징(虎徵)의 나이는 세 살이었다. 거기서 초장
(草葬)을 지냈는데 훗날 그 뼈를 가지고 와 왕곡동 선영(先塋) 옆에다 묻으려고
하였다.
이는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사천공이 가솔를 이끌고 전라도 구례까지 피난 갔었던 핍진(모조리 다 없어져 바닥이 남)한 기록이다. 그는 일기 끝부분에 다음과 같이 호란 으로 인한 피난에 체험을 마무리하였다.
“나는 숙병(宿病 오래된 병)으로 10년 동안 누워서 몇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난리를 만나 천리를 돌아다녔으니, 발길 닿는 곳은 지세가 가파르고 험하였고, 풍찬노숙(風餐露宿:객지에서 모진 고생한다는 뜻)한 것도 60여일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1636년 12월 9일에 청인(淸人)이 압록강을 도강(渡江)하였다는 소식을 13일 에 듣고 이어 국왕의 대가(大駕:임금이 타는 가마)가 남한산성에 입성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16일 밤에 피난 갈 것을 논의하고, 그 다음 날 새벽 사천공 집안은 즉시 길을 떠 나 피난 길에 오르게 된다. 사천공 집안에 피난 행로는 다음과 같다.
1차 피난
1636년12월17일 피난길에 오름 → 12월25일 충청도 청양의 이씨집 도착 → 1637년01월09일 서산 도착 → 01월14일 결성에서 간월도로 이동 → 01월15일 안면도 → 02월16일 결성 이씨집 → 03월01일 청양 → 03월09일 왕곡동 귀향
2차 피난
1637년03월09일 왕곡동 → 03월17일 평택 → 03월하순 아산 → 윤04월05일 청양에서 황간으로 이동 → 윤04월08일 전라도 구례 남전의 처가 도착
이와같이 사천공 집안은 자신과 후배(後配:청송심씨1613~1691) 및 그의 자녀들, 그리고 서울에서 온 이씨가 등 세 집안이 함께 피난길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피난 기간은 반년을 넘는 기간이었으며, 숙병으로 10여 년간 누워 지낸 사천공이 풍찬노숙한 것도 60여일에 이르렀으므로 험난한 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1차 피난 길에서 고향집에 돌아온 것은 호란이 발발하고 약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으며, 2차 피난을 떠난 것은 1637년03월 중순경이었다. 결국 2차 피난길은 충청도 청양, 황간을 거쳐 전라도 구례 남전의 처가로까지 이어졌다.
피난길에 오른지 한달이 못 되어 남종 둘과 여종 셋이 야반도주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사천공의 1차 피난을 마치고 고향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수백권의 장서 및 선조들의 옛 물건이 다 불타버린 상태였으며, 구허(옛집)는 호란이 끝나고도 끝내 복구할 수 없었다. 더구나 2차 피난 중에 특히 아이의 상을 당하였는데, 호징의 나이는 세 살이었다. 거기서 초장(草葬)을 지냈는데, 훗날 그 뼈를 가지고 와 선영 옆에다 묻으려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외에도 사절(死節)한 부인들의 죽음을 직접 보고들은 사천공의 병자호란 피난 일기는, 지역과 인명피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의왕시사 제1권 자연과 역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