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묵상(43) - 2024/1/15>
43. 십자가는 성도의 최대의 관문.
막 8: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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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8: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다. 십자가의 구원, 십자가의 영광이다.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예수님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한다.
주님을 영접하고 복음을 받아 성도가 되었다면, 필히 그리스도인이요, 제자가 된 것이다. 성도가 제자가 되어 주님과 주종관계가 형성되어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고, 스승이 되었다면 나는 주님의 종이요, 제자가 된 것이다.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6:16-18)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본래 우리는 죄의 종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 죄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죽어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 주님을 영접하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의의 종이 되었다. 종은 종이로되 죄의 종이 아닌 의의 종, 순종의 종,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
성도는 이제 예수님의 종이요, 예수님의 제자이다. 종은 주인이 하라시는 대로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종이면서 주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일을 생각한다. 그리고는 베드로처럼 항변한다.
32절은 주님의 십자가 수난 예고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단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였다고 짧게 기록하고 있지만 이와 병행되는 마태복음을 보면 그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하며 매우 강하게 예수님의 수난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이처럼 주님의 수난 예고 앞에서 거의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보이며 반발했을까? 그것은 그가 고난 없는 영광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베드로 뿐이겠는가? 모든 제자들이 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본문 33절에서 “예수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라고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고난 없는 영광을 얻도록 요구하신 것이다. 이것은 곧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하실 때에 사탄이 나타나 세 번씩이나 시험하며 요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4:8-9)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그러므로 주님은 수난을 만류하는 베드로의 말과 행위가 사탄의 역사에 의해 나온 것을 아시고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고 꾸짖으신 것이다.
참으로 십자가는 주님이 넘지 않으면 안되는 관문이었다.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관문을 넘은 후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십자가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지만 묵묵히 그 길을 가셨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출애굽해서 약속의 가나안 땅,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광야를 통과해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통과해 가나안으로 가야 하는 그 여정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따라갔으면 빨리 들어갔을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의 여정에도 주님의 뜻에 맞추어 묵묵히 따라가면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도 십자가의 관문을 통과해야 주어진다는 것이다. 바울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롬8:17).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영광을 얻기를 소망하는 우리가 넘어야 할 최대 관문이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34절) 고 하셨다. 여기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말한다.
주님은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는 것을 막지는 않겠는데, 단 거기에는 조건이 있으며 그 조건을 충족한 자만이 자기 뒤를 따를 수 있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그 조건은 죄악된 성품으로 가득 찬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의 전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지워주시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에 해당하는 ἀπαρνησάσθω (아파르네사스도)의 원형 ‘아파르네오마이(ἀπαρνἐομαι)’는 ‘아르네오마이(ἀρνέομαι)’ ‘에 ‘~로부터’ 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아포(ἀπό)’ 가 붙어서 그 의미가 강조된 강조형이다. 따라서 아르네오마이’의 뜻을 살펴 보면 이는 기본적으로 ‘부인하다’ (녹 22: 57)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이것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적극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또한 ‘아르네오마이’는 ‘거절하다’ (히 11 :24) 라는 뜻 또한 가지고 있다. 즉 이는 요구 혹은 유혹을 허락지 않고 물리치는 행동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먼저 자신의 의지와 뜻을 부정하고 또한 자신의 욕구와 육체의 유혹을 허락지 않고 단호히 물리치는 적극적인 행동을 가리킨다(갈 5: 17). 어떤 경우에 이 단어는 ‘배반하다’ (딤전 5:8), ‘저버리다’ (계 2: 13) 라는 뜻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즉 이는 믿음과 의리를 버리고 등을 돌리는 행위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용어는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전에 섬기던 세상 주인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참 주인이신 주께 돌아오는 행위를 함축하고 었다.
우리는 구원받기 이전에는 사탄의 권세 아래서 사탄을 섬겼던 진노의 자녀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에 원하던 바를 행하였던 자들이었다(엡 2:3). 그러나 그리스도를 알고 그로 인해 죄용서를 받아 구원받은 지금 죄의 종노릇하던 사탄과의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한다면 단호히 육체의 죄된 유혹과 의지를 거절하고 이를 단호히 물리치는 적극적인 결단이 있어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는 당시 사람들에게 “십자가(σταυρός)”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능력이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희생을 상징하였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 하는 로마의 사형 방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마27:32). 따라서 죽음의 짐이요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 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생겨나는 온갖 고난 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헌신된 마음을 뜻한다. 본문은 명령형을 사용하여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지금 당장부터 능동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하여 희생을 감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인간적인 모든 욕망과 정욕과 탐심을 버리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버릴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요구는 베드로와 같은 제자들조차도 걸려넘어질 만큼 어렵고 힘든 관문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주님의 말씀에 넘어진다. 그러나 분영히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 누구도 십자가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복음과의 연합은 주님과 연합이다. 주님과의 연합은 고난과의 연합이다.
(롬6:3-5)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