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16>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으니 1961년쯤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강릉에 기차가 처음으로 들어오게 되어 사람들이 새하얗게 남대천 제방 둑에 구경하러 몰려나왔던 기억이 난다.
겨울밤이면 우리 아버지는 이따금 문고리 옆 문설주에다 못을 박아 놓고 삼(麻) 끄트랭이를 모아두었다가 못에 걸고 노끈을 꼬고는 하셨다. 그럴 적이면 나는 아버지 옆에 붙어 앉아 신기한 세상이야기를 듣고는 했는데 어머니와 누나도 까무룩한 등잔불 밑에서 삼을 삼으며 말없이 아버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다가는 소리를 죽이고 쿡쿡 웃고는 했다.
‘아, 기차란 눔은 시꺼먼기 엄청나게 큰데, 처음에 기차화통으로 시꺼먼 연기를 내 뿜으민서 치~익 처~억 하다가 조금 있으면 이번에는 허~연 연기를 콸콸 내 뿜으면서 바퀴가 철커덕 철커덕 구르기 시작하는데 바로 그때 꽤~액~하고 벼락 치는 소리를 낸단 말이여. 아, 그러면 저~만큼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도 귀가 먹을 지경이지 뭐~’
‘아, 인자 달리기 시작하는데 첨에는 허연 연기를 내 뿜으면서 치익 처억 치익 처억하는데 속도가 빨라지면 치쿡 치쿡하다가는 이따금씩 꽤~액~하고 벼락 치는 소리를 내지~’
‘아 내가 금강산 유람을 가느라구 서울에서 온정역(溫井驛)까지 기차를 타고 갔는데 이눔의 기차는 속도가 붙어 놓으면 울매나 빠른지 바람소리가 쌩쌩 나구, 창 밖으루 팔을 내 밀면 팔이 뒤루 꺾어진단 말이여~’
어린 시절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평생에 그런 기차를 한번 타 볼 수 있을라나, 그놈의 기차는 얼마나 크고 또 얼마나 빠르길래 바람에 팔이 다 부러지나....하고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삼 삼기 / 강릉에 기차가 처음 들어오던 날 / 남대천 재건교
바로 그 기차가 처음으로 강릉에 들어오는 것이라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 서너 명과 제방 둑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아있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 기차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나 저제나 남대천을 가로지른 철길만 쳐다보고 있는데 얼마 후 굴 밖인 박월리 쪽에서 꽥~하는 기적소리가 울리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잠시 후 시커먼 기차가 철다리 앞까지 와서는 다시 꽥~하고 기적을 울리자 가까이 앉았던 사람들은 귀를 막고 개미처럼 흩어졌다.
그날은 시험 개통이어서 몸통은 없고 기차머리만 다리 위로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강릉역으로 갔다. 그때는 경포(鏡浦)에도 간이역(簡易驛)이 있어 얼마동안이었는지 경포까지도 기차가 다니다가 후일 경포역은 폐쇄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해 만복이 형이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때 만복이 형의 아들 길수는 벌써 뜀박질을 할 정도였는데 만복이 형은 이따금 뜨문뜨문 잠깐씩 들러서 옷가지랑 돈을 놓고 갔다고 하였다. 이번에도 택시를 타고 왔는데 찍꾸(포마드)를 발라 반들거리는 머리는 올빽으로 넘겼고, 까만 양복, 까만 라이방에 반들거리는 구두를 신었는데 커다란 가방을 두개나 들고 내려서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가방을 받아든다, 인사를 한다, 법석을 떨며 집으로 들어왔는데 금의환향하는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저녁도 드시는 둥 마는 둥 연순이 네로 달려가서 동네 아낙네들과 풀어놓은 가방을 구경하셨는데 가지가지 미제(美製)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하였다.
가지가지 옷은 물론이고 지포(Zippo) 라이터, 미제 화장품, 미제 간스메(통조림)에다 햄이며 이상한 냄새가 나는 노란 덩어리도 있었는데 빠다(Butter)라고 하더란다. 그런 냄새나는 것을 먹으니 양놈들한테서 노린내가 난다더라는 둥 이야기꺼리가 한도 끝도 없었다. 또 손바닥 만한 라디오도 있었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 나무에다 안테나를 높이 건너매고는 또 한 줄은 어스(Earth)로 땅에다 묻고 광석(鑛石)이라는 조그만 돌멩이를 안테나에서 내려온 줄에 끼워 바늘 끝을 대어 레시버로 방송을 들었었다. 이렇게 방송을 들으면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고 문이라도 쾅 닫으면 광석에 닿아있던 바늘이 움직여 소리가 들리지 않기도 하였다.
언젠가 귀가 약간 어두운 엿빵집 영감은 우리 집에 와서 처음 레시버로 방송을 듣고는 ‘햐, 이눔들이 욕을 하네... 여기는 강릉방송국입니다. 페이페이 에씨팔(KBS).... 머 이래는거 같구만...’ 해서 웃은 적이 있었다.
저녁에 동네 청년들이 모여들자 만복이 형은 양담배를 한 개비씩 권한 후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 놓았는데 시골 사람들로서는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대충이 이야기는 먼저 친구들 몇몇과 어울려 삼척(三陟) 부두에서 하역(荷役)하는 일을 하다가 부두의 기도(紀導)를 보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어찌하여 다시 경북 영주(榮州)로 옮겨 큰 영화관 몇 군데서 다시 기도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서울 청량리(淸凉里)로 가서는 이것저것 자잘구레한 미제(美製) 물건을 받아 다방으로 돌며 장사를 시작했는데 괜찮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번, 친구들과 크게 해보자고 의논이 되어 용산(龍山)에서 동두천(東豆川)을 오가며 본격적으로 미제 물품을 받아 넘기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동두천의 양갈보 촌 이야기며, 어수룩한 미국 놈들 이야기에 영어도 몇 마디씩 섞어가며 풀어놓는 이야기로 듣는 사람들의 얼을 빼놓았다.
이제 곧 자리가 잡히면 마누라와 아이를 데리고 가서 호강을 시킬 자신이 있다고 하였는데 사람들은 만복이 고등꽈라두 나왔으면 한자리 톡톡히 해 먹을 사람인데 아깝다고 하였다.
우리 어머니는 툭하면 나보고 ‘너두 커서 이담에 만복이 반(半) 만이라도 되면 좋겠다.’고 노상 말씀하시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