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歷史)의 고도(古都) 강화(江華)
동막해변(東幕海邊) / 강화갯벌센터(저어새 조형물) / 덕진진(德津鎭) / 선원사(禪源寺)
⑤동막해변(東幕海邊)
강화의 가장 남쪽 해안에 있는 동막해변은 밀물 때에는 해수욕을 즐길 수 있고 썰물 때면 끝없이 펼쳐진 갯벌이 드러나면서 조개, 칠게, 고둥, 가무락 등 다양한 바다 생물들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근처에는 분오리돈대(分五里墩臺), 정수사(淨水寺), 함허동천(涵虛洞天)도 가깝고 조금 떨어져 동검도(東檢島)와 선두리(船頭里) 포구(浦口)에 어시장도 있어 볼거리, 먹거리 등이 풍부한 곳으로,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이다.
몽고병란을 피해 강화로 온 고려 고종은 강화 읍내에 궁궐을 지었는데 고종 49년 기미(己未) 2월(1242년)에 마니산 서쪽 흥왕리(興王里) 산기슭에 별궁(別宮, 離宮)을 지었으니 바로 흥왕이궁(興王離宮)으로, 일명 흥왕리 고려이궁(高麗離宮)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그 유적(遺跡)만 남아있다.
이 유적이 흥왕이궁지(興王離宮趾)로, 향토유적 13호로 지정되어있고 지금도 석축(石築)이 남아있는데 바로 근처에 앞서 기술한 접연화앙산정(蝶然花仰山亭)이라는 정자각도 있었다고 한다.
멀지 않은 곳에 흥왕사(興王寺) 절도 있었는데 마을 촌로(村老)들 이야기로 절에 빈대가 너무 들끓어 일부러 불을 놓아 태워버렸다고 하는데 과연 믿어야 할지... 또 몽골의 지배로 수많은 공물(貢物)과 공녀(貢女)를 바치고 고려왕들은 몽골 공주를 왕비로 맞아드려야만 하던 비운의 시기였다.
충렬왕(忠烈王)은 재위 2년(AD 1276)에 왕비였던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일명 莊穆王后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와 이 절에 왔다가 아름다운 금탑(金塔)이 있는 것을 보고 궁궐로 옮겨갔는데 흥왕사의 스님들이 돌려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공주는 끝내 거절하였다는 일화(逸話)도 있다.
⑥강화갯벌센터
강화 여차리(如此里) 앞에 있는 갯벌센터는 갯벌에 사는 다양한 생물들은 물론, 계절에 따라 날아드는 철새들의 집단 이동 경로라 조류들도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물론, 자세한 설명문도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좋은 학습장이 된다.
장화리(長花里) 남쪽으로 여차리(如此里)가 잇닿아 있는데 이곳은 썰물 때가 되면 광활한 갯벌이 펼쳐지고 갯고랑이 드러나 생선도 많이 잡히며, 철새도래지로 보호받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눈을 들어 바라보면 아득히 신도(信島), 시도(矢島), 모도(茅島) 장봉도(長峰島)등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어 풍광(風光)이 기가 막힌다. 이곳은 넓적부리 도요새 등 희귀 철새들이 수만 마리 모여오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해변에는 갯고랑이 엄청나게 많아서 이따금 망둥이 낚시를 하러 나갔다가 밀물이 오면 철벙거리며 나오다가 갯고랑에 빠져 익사(溺死)하는 사고도 생기는데 개흙에 발이 빠지면 빼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마니산 서쪽 기슭에 세워졌던 흥왕이궁(興王離宮)에서 바라보거나 조금 위쪽에 있었다는 접연화앙산정(蝶戀花仰山亭) 정자각에서 내려다보았다면 이 아름다운 풍광에 기가 막혔을 것으로 상상된다.
이곳에는 썰물이 되면 수 km 갯벌이 드러나는데 2~3km 나가서 그물을 넓게 쳐 놓았다가 다음 썰물 때 나가보면 그물에 걸린 고기가 엄청 많을 때도 있다.
⑦불은면 덕진진(德津鎭)-사적 226호(1971.12.28 지정)
강화 덕진진은 고려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外城)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뒤 강화도를 방비하기 위해 내성, 외성, 돈대, 진보 등의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중의 하나이다. 조선 현종 7년(166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주둔지(수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德浦)로 옮겼으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 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管轄) 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다. 梁憲洙
강화에 12진보(鎭堡)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던 곳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의 장군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데 이때 건물에 몸을 숨겨서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쌓았던 낮은 담은 모두 파괴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현재 덕진진에는 문루(門樓)인 공조루(拱潮樓), 남장포대, 덕진돈대, 대원군이 세운 해문방수비(海門防守碑)가 있다. 해문방수비에는 ‘바다의 문을 막고 지켜서, 다른 나라의 배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의미의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가 새겨져 있다.
⑧강화 선원사(禪源寺)<사적 제259호>
대몽항쟁(對蒙抗爭)을 위한 국민총화의 일환으로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고려 시대 최우(崔瑀)가 창건(創建)한 사찰이었다. 초대주지로 진명국사(眞明國師)가 위촉되었고, 2대 원오국사(圓悟國師), 3대 자오국사(慈悟國師), 4대 원명국사(圓明國師), 5대 굉연(宏演) 등 당대의 신망이 높은 고승들이 차례로 임명되었으며 당시 송광사(松廣寺)와 함께 우리나라 2대 사찰로 손꼽히던 사찰이었다.
그러나 고려 왕실이 다시 개경(開京/개성)으로 환도한 뒤 차츰 쇠퇴하여 조선 초기 이후에 폐허화되는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398년(태조 7)에 이 절에 있던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서울로 옮겼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이 절터에서는 유물들도 많이 출토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보상화문전(寶相花文塼), 명문이 새겨진 막새기와(瓦), 치미(鴟尾/소리개 꼬리 문양), 원숭이 상 등인데 양도 풍부하고 질적으로도 상당히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거의 고려 때의 유물로 추정된다.
또, 오백불상(五百佛像)도 있었다고 하며, 사찰지(寺刹址)는 1977년 사적(事蹟)으로 지정되었다.
언제인가 절 앞에 있던 집의 외양간에 있던 소가 혓바닥을 두드려 목탁소리를 낸다고 TV에 방영되었는데 그때부터 이 소를 우보살(牛菩薩)이라 불러 유명하게 되었고, 절 앞에는 제법 큰 연당(蓮塘)이 있어서 매년 연꽃 축제가 성대하게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