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봉의 달과 쇠똥구리
- 송태웅 선생님
한 생의 기억을 바람의 갈피에 남기기 위해
내 천 개의 손 붉은 깃발이 되어 길가에 섰네
- 송태웅 시「길가에 선 단풍나무는」중에서
그날도 길가에 서 있었던 나무.
할 줄 아는 거 어쩌다 홀로 빨개지는 것 하나와
그 이파리 바람결에 놔주는 것 이상 없어 보였던 사람.
그런 가랑잎 같은 이의 순수는 때로
누군가의 그 집 앞을 종일 사부작거리기도 하고
거기 단풍 빛 마음갈피에 바람 한 줌 끼워 넣기도 하거니와
나와 나라와 나귀와 나타샤에 출출이 푹푹 빠지면서
제 밀물의 요동소리에 성냥꼬투리를 그어
시대의 착란을 불사르기도 했겠지만 그거야 기껏
갓 대학을 벗어난 시인 지망생의 헤픈 끼라 해도 좋고
교사 지망생이 처음 앉아본 교무실의 새파란 건방쯤이라 비웃을지언정
통치와 기성이 몰아붙이고 싶었을 불온은 개 코 아니었던 것.
이 자의 생은 섬처럼 파도치기 시작합니다.
그의 돌발과 예민은 종종 벗들의 술안주가 되기도 했겠죠. 그를
어떤 이는 니힐리스트라 하고 누군가는 방랑벽이라 했으며
나는 프랑스 시인 랭보를 연모한 죄라고도 하였죠.
그해 강남여고를 찾아간 총각선생님은
그리움이 별처럼 쌓이는 한철의 여고교정에서
뜻밖의 풍랑을 만납니다.
순한 물결 드세어지고 날선 파도가 배를 뒤엎을 때까지
창랑의 전교조 참교육운동의 뱃머리를 단단히 거머쥐었지요.
그러나 운명의 배는 순순히 그의 포구에 닿지 않았습니다.
첫새벽의 샛별과 첫저녁의 개밥바라기별 같은 바다의 키는
끝내 난바다의 뱃길을 서울로 돌려놓습니다.
마음은 새벽이로되 몸은 석양을 살아
두 산머리에 집도 절도 없었습니다.
서울 돈을 제 키만큼 벌어 가족에 넘긴 뒤로
그의 배는 사실상 포구에 버려졌습니다.
그대 뒤틀린 생애 불러내 소주잔 들이키네,
물가에 선 때죽나무 이파리들처럼 파르르 매달려
인연 없이 왔다가 인연으로 떠나간 그대,
화염으로 월월 불타는 심장 하나가 나를 부르네
- 시「반야의 당신」중에서
술도 불, 심장도 불, 전교조도 불이었습니다.
교실은 파랑, 교단은 파란이었습니다.
참교육 전교조로 다가온 시운은 송태웅에게도 반야의 당신이고
어쩌면 송태웅 시집 전말을 울고 부는
떠나버린 그대이거나 기약 없는 사랑의 배후였을 것.
눈물은 불꽃의 다른 이름이죠. 함께 켜고 함께 끄는,
함께 묶고 함께 푸는, 인생의 질곡과 사랑의 변주곡.
송태웅은 눈물과 불꽃 사이에 끼어
들지도 못하고 나지도 못하는 내면의 사립에서 낭자히
빨갛게 애모의 시 날리는 단풍나무 한 그루였습니다.
뒤뜰을 바다로 깔았다
내 뒤뜰로는 파랑도
끼룩거리는 철새처럼 밀려오는 것인데
나의 배후가 짙푸르게 물들어
끊임없이 출렁인다 해도
당신은 그 어느 피안에서
흰 주단을 덮고 눕길 바란다
- 시 「파랑 또는 파란」 중에서
항시 흰 주단을 덮어주고 눕혀주고픈 ‘그대’라는 이름의 열병과
깃발로 화염으로 달겨들고픈 ‘당신’이라는 이름의 지병.
쯧, 그러니까 그렇구먼.
이런 원들을 글로 써서 우니 그대는 팽야 시인인 것이고
이런 것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우리는 금메 동지인 것이고
오늘 이 편지가 벨라도 따뜻한 것이고
오늘 모인 옛 그분들이 새 그님들인 것이고
오늘 이 삐거덕거리는 원년 배에 이녁이 재 승선한 것이고
오늘 이 자리 상갑판의 노장들이 공짜배기로 널 반겨준 것이고!
알아묵겄는가 이 사람, 태웅이.
지치고 다친 상처들 달덩이로 뭉쳐 제 등에 업고는
끝없이 홀로 반야봉을 기어오르는 쇠똥구리 내지
섬진강을 날마다 마시고 그 바닥을 짓치는 날도래쯤으로 돌아와
이제야 다시 씩씩하게 우리 앞에 섰답니다.
송태웅입니다.
그동안 쉬 잊지 못하는 사랑 몇 시래기와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그리움 몇 두름 팔았고, 또 아껴
미움 몇 사발에 설움 몇 뚜껑도 사고
그것을 더 잘게 썰어서
시골집 짜부라진 주방에 자글자글 새벽 어스름 한 국자 뜨고
들창에 기대어 빗줄기 몇 자락 이 쑤시고
그러다 희뜩 신출한 손이 들어 혀 파란 시어 몇 조각 나와 놀면
헤벌쭉 입술을 비틀어 해장주 한 잔 때려 넣기도 했을
도무지 채워지지 않을 존심의 바다 또는 바닥.
도무지 비워지지 않을 양심의 고행 또는 핑계 위에
시는 산길을 오르고 몸은 강물을 흘러 입때껏 살았답니다.
그리움은 꼭 여성성이 아니어도 좋으리.
사랑은 늘 꽃이 아니어도 좋으리.
추억은 반드시 아름다운 것이 아니어도 좋으리.
그리 아팠어도 이 쓸쓸한 삶의 뒤뜰과
짙푸른 바다의 추억 그런 것들의 미행을 따돌리고
작은 영감님, 잘 오셨네 고생하셨네 그랴.
그대가 정년퇴임을 한다면 딱 이 무렵이나 아니 되겠는가?
오늘 미로의 푸른 밤 싹 다 벗었네그랴.
꽃 핀 세상 보기 위해 가방 메고
나 여기에 왔다
검은 나무에 흰 꽃 피는 것은
내 지난겨울 움츠려 꾼 꿈이
검은 나뭇가지에 맺히는 것이다
-시 「꽃이 피는 것은」중에서
이제 봄이 흘러가는구나.
우리들의 꿈이 간밤을 지났구나.
우리들의 나무가 아침 햇살 앞에서 꽃 벗는구나.
부끄러이 한가로이 따사로이...
2023. 2. 21
김진수 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