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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사론 제13권
39) 팔지처(八智處)
여덟 가지의 지혜[八智]라 하는 것은,
법지(法智)ㆍ미지지(未知智)ㆍ지타심지(知他心智)ㆍ등지(等智)ㆍ
고지(苦智)ㆍ집지(集智)ㆍ진지(盡智)ㆍ도지(道智)를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경을 지은 사람이 여덟 가지 지혜에 근거하여서 논(論)을 지었는가?
[답] 경을 지은 사람의 생각에 그렇게 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하고자 한 대로 이와 같이 경을 지었지만 그것이 법과 서로 어긋나지 아니하였다. 그런 까닭에 여덟 가지의 지혜에 근거하머 논을 지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 경을 지은 사람이 보탠 것은 없다”라고 하였다.
[문] 무슨 이유로 경을 지은 사람이 보탠 것이 없는가?
[답] 이것은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말이다.
경전에서 여덟 가지의 지혜를 말씀하신 것을 경을 지은 사람은 부처님의 경전 가운데서 근본과 말단에 근거하여 처소(處所)로 삼았을 따름이며, 이것을 아비담(阿毘曇) 가운데서 논(論)으로 지었다.
그러므로 경을 지은 사람은 여덟 가지의 지혜 가운데서 한 지혜를 줄여서 일곱 가지의 지혜를 내세우거나 여덟 가지의 지혜에서 한 지혜를 더하여 아홉 가지의 지혜를 내세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문] 왜 그런가?
[답] 이것이 이른바 모든 경전에서 말하는. “불어나지도 아니하고 줄어들지도 아니한다[不增不滅]라고 하는 것이다.
불어나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불어나서 줄일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고,
줄어들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불려야 할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다.
불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아니할 경우 이와 같은 것은 헤아릴 수 없이 깊고 끝 가장자리가 없는[無邊]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길다고 하는 것은 한량없는 이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며,
끝 가장자리가 없다고 하는 것은 끝없는 맛[味]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큰 바다가 한량없이 깊고 끝 가장자리가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경전의 뜻도 한량없이 깊고 끝 가장자리가 없는 것이다.
한량없이 깊다고 하는 것은 한량없는 이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며,
끝 가장자리가 없다는 것은 끝없는 맛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리불 존자의 경우 이와 같은 지혜를 백천나유타[百千那術]의 숫자로 헤아려 불경의 단 두 구절의 뜻을 수천 권의 경전으로 풀이하여 ‘지혜’를 파악하려 하였어도 불경의 두 구절의 뜻조차 간략하게라도 풀어 낼 수 없었다.
부처님의 경전의 경우처럼 이 논(論)도 그렇기 때문에 경을 지은 사람은 한 일이 없는 것이다.
[문] 만약 불경에 따라 이 논서가 지어졌다면,
부처님은 경전에서 무량한 지혜를 말씀하셨는데 혹 때에 따라서는 두 가지 지혜를 말씀하시고,
증일아함(增一阿含)의 오십이품에서는 한 지혜 가운데서 두 가지 법을 설법하셨으며, 또 혹 때에 따라서는 네 가지 지혜를 말씀하셨다.
또 증일아함의 오십이품에서는 한 지혜 가운데서 네 가지 법을 설법하셨으며, 또 혹 때에 따라서는 여덟 가지 지혜를 설법하셨다.
또 증일아함의 오십이품에서는 한 지혜 가운데서 여덟 가지 법을 말씀하셨으며, 또 혹 때에 따라서는 열 가지 지혜를 설법하셨다.
또 증일아함의 오십이품에서는 한 지혜 가운데서 열 가지 법을 설하셨으니, 부처님의 경전의 경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지혜를 말씀하셨는데,
왜 경을 만든 사람은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지혜를 여덟 가지 지혜에만 의거하여 논(論)을 지었는가?
[답] 여덟 가지 지혜는 이 가운데서 말하는 내용에 모든 지혜가 포함되어 있다.
두 가지의 지혜에도 비록 모든 지혜가 포함되었다 하지만 다만 그것은 너무 간략하고,
열 가지의 지혜에도 비록 모든 지혜가 포함되었다고 하지만 다만 그것은 너무 광범위하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여덟 가지 지혜라 하는 것은 되풀이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는 되풀이되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여덟 가지 지혜라 하는 것은 되풀이되어 사유하게 되지만,
진지와 무생지는 되풀이되어 사유하는 지혜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여덟 가지 지혜라 하는 것은 인견(忍見)의 성품과 지혜의 성품을 지니고 있지만,
진지와 무생지는 비록 지혜의 성품은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인견의 성품을 지닌 지혜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여덟 가지 지혜라 하는 것은 욕망이 있고 욕망이 없는 마음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지혜이지만,
진지와 무생지는 오로지 욕망이 없는 마음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지혜다.
욕망이 있고 욕망이 없는 마음의 경우와 같이 이와 같은 이치로 노여움이 있고 노여움이 없는 가운데서 얻게 되고,
어리석음이 있고 어리석음이 없는 가운데서 얻는 지혜도, 오만심이 있고 오만심이 없는 가운데서 얻는 시혜도 있으니, 이렇게 추리하면 모두 곧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여덟 가지 지혜라 하는 것은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의 경지에 있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지혜지만,
진지와 무생지는 오로지 무학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마음 가운데서만 얻을 수 있는 지혜다.
이와 같이 추리하면 작용하거나 작용하지 않는 경우, 구하거나 구하지 않는 경우, 쉬거나 쉬지 않는 경우도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경을 만든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지혜를 떠나서 여덟 가지 지혜에 의하여 이 논(論)을 지은 것이다.
[문] 경을 지은 사람이 혹 한 지혜에 의거하는 무렵에 논을 지었다 하여도 잡건도(雜犍度)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 가지 지혜로 모든 법을 알게 되는가?
[답] 그렇지 않다.
[문] 이와 같은 지혜로 생기는 모든 법은 무아(無我)인데 이 무아의 지혜가 무엇을 모른다는 것인가?
[답] 자연법(自然法:眞如 法性)을 모르고 공유법(共有法)을 모르고 상응법(相應法)을 모른다.
[문] 왜 그런가?
[답] 경을 만든 사람이 한 가지 지혜에 의거하는 무렵에 논을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만약 경을 만든 사람이 여덟 가지의 모든 지혜에 의거하여 논을 지으면서,
“자못 여덟 가지 지혜 가운데 한 가지 지혜로도 모든 법을 알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할 수 있나니, 즉 등지(等智)가 그것이다.
이와 같이 일곱ㆍ여섯ㆍ다섯ㆍ넷ㆍ셋ㆍ둘ㆍ한 가지 지혜에 근거할 경우에도,
만약 경을 만든 사람이 한 지혜에 근거하여 논을 지으면서,
“자못 한 가지 지혜로도 모든 법을 알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럴 수 있나니, 등지(等智)가 그것이다”라고 대답하게 된다.
만약 경을 만든 사람이 한 가지 지혜 가운데서 두 시기에 걸쳐 논(論)을 건립하면서,
“자못 한 가지 지혜로 두 시기에 걸쳐서 모든 법을 알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역시 “한 가지 지혜로 두 시기에 걸쳐 모든 법을 알 수 있다”고 대답하게 된다.
즉 자연법과 상응법ㆍ공유법을 제외한 나머지 법은 한 가지 지혜로 한 시기 사이에 모두를 알 수 있고,
한 지혜로 두 시기에 걸쳐서 알게 되는 경우는 자연법과 상응법과 공유법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그 지혜는 두 시기에 걸쳐 모든 법을 다 알 수 있다.
다만 경을 만든 사람이 한 가지 지혜로 한 시기에 걸쳐 논을 건립하면서,
“자못 한 가지 지혜로 모든 법을 알게 되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니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여덟 가지 지혜란,
법지(法智)와 미지지(未知智)ㆍ지타심지(知他心智)등지(等智)ㆍ
고지(苦智)ㆍ집지(集智)ㆍ멸지(滅智)ㆍ도지(道智)이다.
[문] 여덟 가지 지혜에 어떤 성품이 있는가?
[답] 지혜의 성품에는 한 경계[界]와 한 입(入)과 한 음(陰)의 일부분이 포함된다.
여기에 의거하는 상응법과 공유법에는 세 가지 경계[界]와 두 가지 입과 오음이 포함된다. 이것이 지혜의 성품이다.
이미 지혜의 종류와 모습과 바탕이 갖고 있는 본래의 성품을 말하였으므로 마땅히 그 행을 설명해야겠다.
[문] 왜 지혜라 말하는가? 지혜에 어떤 이치가 있는가?
[답]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 지혜의 이치이다.
[문] 만약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 지혜라는 말의 뜻이라 한다면 의심하는 단계 가운데서는 마땅히 지혜란 존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의심하는 단계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답] 의심하는 단계 가운데서도 지혜 있는 사람은 결정을 내리는 성품이 있다.
다만 그것은 다른 법이기 때문에 의심하는 단계라 이름하는 것이다.
즉 의심하는 단계에서는 고통은 고통인데도 머뭇거리며 고통인지 아닌지를 의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집제ㆍ멸제ㆍ도제에 대해서도 머뭇거리며 의심하게 된다.
경량부 논사들은 말하기를,
“마음속에 지혜가 있는 사람은 무지(無智)는 있을 수 없으며 같은 이치로 마음속에 의심이 있는 사람은 결정이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또 경량부의 논사들은 이 아비담(阿毘曇)의 논사를 힐책(詰責)하면서 말하기를,
“여러분, 여러 존자가 대중을 이루고 있는 것같이 아비담의 논사들도 법성이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일심(一心) 가운데 지(智)와 무지(無智)를 시설하고, 또 일심 가운데 의(疑)와 결정(決定)을 함께 시설한다”고 하였으나,
오직 아비담의 논사들은 법성을 설명하면서 한 마음 가운데 지혜와 무지(無智)를 건립하고 또한 지혜도 아니고 무지도 아닌 것을 건립한다.
같은 이치로 한 마음 가운데 의심하는 마음과 결정하는 마음을 건립하고 또한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결정하는 것도 아닌 마음도 건립한다.
지혜라 하는 것은 지혜며, 무지라 하는 것은 무명이다.
지혜도 아니고 무지도 아닌 것은 다른 법에 속한다.
같은 이치로 의심한다는 것은 머뭇거리는 것이고 결정한다는 것은 지혜다.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결정하는 것도 아닌 마음은 다른 법에 속한다.
[문] 이것은 지혜라 말해야 하는가, 깨달음[了]이라 말해야 하는가?
[답] 지혜라고도 말해야 하고 깨달음이라고도 말해야 한다.
지혜라는 것은 결정한다는 내용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고집멸도(苦集滅道)를 아는 것을 말하고, 깨달았다[了]라고 하는 것은 개시(開示)한다는 뜻이 있다.
즉 자기 마음을 개발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개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라고도 표현해야 하고 깨달음이라고도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공행(共行)을 말한 것이니,
이제부터는 곧 별행(別行)을 말하겠다.
[문] 가령 열 가지 지혜의 경우 그 모두가 법성(法性)인데 왜 하나의 법지(法智)만을 말하는가?
[답] 열 가지 지혜가 비록 법성(法性)이라 하더라도, 다만 일[事] 때문에 한 가지 법지만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십팔계가 모두 법성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오직 일 때문에 하나의 법계(法界)만을 말하는 것과 같다.
또 가령 십이입(十二入)이 비록 모두 법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생기는 일 때문에 법입(法入)은 하나만을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칠각지(七覺支)의 내용이 비록 법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오직 거기에 수반하는 일 때문에 택법각지(擇法覺支) 하나만을 법과 관련된 것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육사념(六思念:佛ㆍ法ㆍ僧ㆍ戒ㆍ施ㆍ天에 대한 思念)이 비록 모두 법성을 지닌 것이지만, 오직 관련되는 일 때문에 염법(念法) 하나만을 법과 관련시켜 말하는 것과도 같다.
또한 사신(四信)이 비록 모두 법성을 지닌 것이기는 하나, 오직 관련되는 일 때문에 법신(法信) 하나만을 법과 연관시켜 말하게 되는 것과도 같다.
또한 사념처(四念處:身不淨ㆍ受苦ㆍ心無常ㆍ法無我)가 모두 법성을 지닌 것이라도, 오직 관련 되는 일 때문에 법념처(法念處) 하나만을 법과 연관시켜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사변(四辯, 四無礙辯:法無礙ㆍ義無礙ㆍ辭無礙ㆍ樂說無礙)이 모두 비록 법성을 지닌 것이기는 하지만, 오직 관련되는 일 때문에 법무애변(法無礙辯)만을 법과 관련시켜 말하는 것과도 같다.
또한 삼보(三寶)와 삼귀의(三歸依)가 비록 모두 법성을 지닌 것이기는 하지만, 오직 관련되는 일 때문에 법보와 법귀의만을 법과 연관시켜 말하는 것과도 같다.
이와 같이 비록 지혜에도 열 가지 지혜가 있기는 하지만, 관련되는 일 때문에 법지(法智) 하나만을 법과 연관시켜 말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법지라 하는 것은 하나의 이름뿐이나 다른 지혜는 두 가지 이름이 있다.
법지라 하는 것은 모든 경우에 같은 명칭으로 표현하나,
다른 지혜는 같은 명칭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고 같지 않은 명칭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법지만을 법이라 말하고,
다른 것은 그렇게 말하지 아니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지라 하는 것은 법을 여법(如法)하게 최초로 깨닫는 까닭에 법지라 말하는 것이다.
또 법을 여법하게 나중에 깨닫는 것을 일컬어 미지지(未知智)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 미지지를 설명하는 데 있어,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지라 하는 것은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믿음을 처음 얻는 까닭에 법지라고 말한다.
그 뒤에 얻는 허물어짐이 없는 믿음 이것은 미지지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지라 하는 것은 욕계에 많은 법상(法相)이 아닌 결(結). 즉 노여워하고 분개하고 말을 하지 아니하고 높은 자리에 위치하여 다른 사람을 해치고 아첨하고 남을 속이고 부끄러움과 뉘우침이 없고 인색하고 질투하는 마음 등을 제거한다. 그런 까닭에 법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다른 번뇌를 제거하는 것 이것은 미지지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지라 하는 것은 욕계의 결(結)을 제거하는 것이 법지이며,
색계와 무색계의 결을 제거하는 것 이것은 미지지이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지타심지(知他心智)라고 말하는 것인가?
[답]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혜이기 때문에 지타심지라 말한다.
[문] 다른 사람의 심수법(心數法)을 아는 경우 왜 그것을 지타심지라고 말하고 지타심수지(知他心數智)라고는 말하지 않는가?
[답] 방편으로 구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혜라고 한다.
이 법에는 많은 차별[事]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
혹 성품 때문에, 혹 근거하기 때문에, 서로 호응하는 일 때문에, 방편으로 구하기 때문에, 행 때문에, 연 때문에 행과 연 때문에 이런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이 가운데서 성품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경계[界]와 입(入)과 음(陰)과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근거하기 때문에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육식(六識)들과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즉 눈에 근거하는 것을 안식(眼識)이라 부르며 이것을 근거라 말한다.
이렇게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그렇다.
다음 서로 호응하는 일 때문에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감각과 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즐거운 감각의 법을 느끼고 고통의 법을 느끼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아니한 법의 감각을 느끼는 것이 어기에 해당한다.
방편으로 구하는 까닭에 이름을 얹었다고 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것과 같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혜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무량공처(無量空處)와 무량식처(無量識處)의 경우에는 행(行)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으로 고지(苦智)ㆍ집지(集智)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 연 때문에 이름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사념처(四念處)나 또는 오견(五見)이나 정수(正受)와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행과 연 때문에 이름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진지(盡智:滅智)ㆍ도지(道智)와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지혜는 이름도 같고 연도 같다.
이 가운데서 방편으로 구하는 까닭에 지타심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에 연하여 짐짓 행(行)하는 사람이 정성껏 부지런히 방편을 찾아,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게 하소서”라고 염원하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방편을 정성껏 부지런히 구하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다른 사람의 심소법을 알게 된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임금을 만나 보는 방법을 찾다가 임금을 만나게 되면 아울러 임금이 거느리는 권속까지 만나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치로 수행하는 사람이 정성껏 부지런히 방편을 구하면서,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보게 하여 달라”고 욕구하다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본 후에는 자연히 다른 사람의 심소법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묘한 설법에는 묘한 이치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 단계에서 무엇이 가장 묘한가 하면 마음이 그것이다.
설명에 따르면 임금이 행차하면 권속이 뒤를 따라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마음이 왕이다. 그 마음에 연하여 짐짓 심소법이 건립되는 것이다.
마음이란 비유해서 대지(大地)라 말한다.
그 대지에 연하여 짐짓 십대지(十大地)가 건립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 같은 신통력을 증득할 때 무애도(無礙道)와 연하는 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알에서 말한 것과 같은 말로 마음에 관한 것은 이 가운데서 모두 대답하였다.
그런 까닭에 지타심지라 말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등지(等智)라 말하는 것인가?
[답]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까닭에 등지라 부른다. 가령 이 가운데서는 청정한 행과 부정(不淨)한 행이 모두 행해지고 재단(裁斷)하고 가르고 꿰매고 가고 오며 앉고 눕고 말하고 마시고 먹는 일 이와 같은 다른 일들을 모두 다 같이 알게 되는 까닭에 둥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가령 최고의 진리가 담긴 고집멸도(苦集滅道)와 더 나아가 모든 법을 아는 경우에도 왜 그것을 등지라 말하고 제일의지(第一義智)라고는 말하지 아니하는가?
[답] 많은 사람이 다 같이 아는 까닭에 등지라 부른다. 아는 사람이 적은 것이 제일의(第一義), 즉 최고의 진리다. 그런 까닭에 제일의지라고 말하지 아니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숨겨져 보이지 아니하는 까닭에 등지(等智)라 부른다.
가령 그릇 위에 뚜껑이 덮여 있을 경우, 이것을 ‘숨겨져 보이지 아니한다’고 표현하는데,
이와 같은 이치로 이 지혜로서는 그 자성이 숨겨져 나타나지 아니하는 까닭에 등지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지혜는 어리석음에 근거하여 어리석음과 이어져 유지된다. 그런 까닭에 등지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존자 바수밀(婆須蜜)은 설명하기를,
“이 지혜는 지혜의 모습을 지닌 것이 아니다.
다만 많은 사람이 그 작용을 거론하며 지혜의 모습이라 하는 까닭에 등지라 이름지은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많은 사람이 들어서 임금을 만들었지만 본질은 임금이 될 종족이 아니고 다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추천하고 천거해서 임금이 된 것과 같다.
많은 사람이 천거한 까닭에 이것으로,
‘많은 사람의 천거로 다만 왕이란 이름만 얻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이 지혜는 지혜의 모습을 지닌 것이 아니고 다만 여러 사람이 지혜라 거론할 따름이니, 지혜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그런 까닭에 등지라 이름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고지(苦智)ㆍ집지(集智)ㆍ멸지(滅智)ㆍ도지(道智)라 말하는 것인가?
[답] 고제(苦諦)의 행도 네 가지 행이며 도제(道諦)의 행에 이르기까지 사제(四諦)의 행은 모두 네 가지의 행이다.
이것을 고지(苦智)ㆍ집지ㆍ멸지ㆍ도지라 하는 것이다.
[문] 세속(世俗)의 지혜도 역시 고행(苦行)에 네 가지 행이 있고 이렇게 도제(道諦)의 행에 이르기까지 모두 네 가지 행이 있는데. 왜 이것은 고지(苦智) 내지는 도지(道智)라고 말하지 않는가?
[답] 세속의 지혜는 고제(苦諦)ㆍ집제(集諦)와 동일한 속박이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고지(苦智) 내지는 도지(道智)라 표현하지는 아니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같은 세속의 법은 도제(道諦)를 비방하여 고제ㆍ집제ㆍ멸제ㆍ도제는 없다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고지(苦智) 내지는 도지라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제의 행에서의 네 가지 행에서 도제의 행에서의 네 가지 행에 이르기까지는 유(有)를 소멸하고 파괴하는 행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고지 내지는 도지라 한다.
세속의 지혜는 비록 고제에서 도제에 이르기까지 네 가지 행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번뇌를 더욱 많이 받아들여 오래도록 길러 가는 일에 지나지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고지 내지는 도지라 표현하지는 아니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제의 네 가지 행에서부터 도제의 네 가지 행에 이르기까지의 행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번뇌를 끊고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윤회(輪廻)를 끊는 행이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고지 내지는 도지라고 표현하지만,
세속의 지혜는 비록 고제의 행에서 도제의 행에 이르기까지 각기 네 가지 행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번뇌가 이어질 수 있고 생사를 윤회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고지 내지는 도지라 부르시는 아니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제의 네 가지 행에서 도제의 네 가지 행에 이르기까지의 행은 고통이 다하여 도로 나아가고 번뇌가 다하여 도로 나아가고 탐욕이 다하여 도로 나아가고 생로병사의 윤회가 다하여 도로 나아가게 하는 행이다. 그런 까닭에 고지 내지는 도지라 표현하지만,
세속의 지혜에는 비록 고제에서 도제에 이르기까지 각기 네 가지 행이 있다고 하더라도 고통이 모여서 도로 나아가고 번뇌가 모여서 도로 나아가고 탐욕이 모여서 도로 나아가고 생사의 윤회가 거듭되면서 도로 나아간다. 그런 까닭에 고지 내지는 도지라 부르지는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제의 네 가지 행에서 도제의 네 가지 행에 이르기까지는,
몸에 대한 편견ㆍ집착의 종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전도 망상(顚倒妄想)의 종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애착심의 종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번뇌의 종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탐욕이 처하는 곳이 아니고 노여움이 있는 곳이 아니며 어리석음이 있는 곳이 아니며,
더러운 것이 섞인 것이 아니고 독약이 섞인 것이 아니고 탁한 것이 섞인 것이 아니며,
번뇌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고제(苦諦)ㆍ집제(集諦) 속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고지 내지는 도지라 부른다.
세속의 지혜에는 비록 고제의 네 가지 행에서 도제의 네 가지 행에 이르기까지의 행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몸에 대한 집착ㆍ편견의 공자가 되고 전도 망상의 종자가 되며,
애착심의 종자가 되고 번뇌의 종자가 되며,
탐욕이 있는 곳이고 노여움이 있는 곳이고 어리석음이 있는 곳이며,
더러운 것이 섞여 있고 독약이 섞여 있으며,
탁한 것이 섞여 있고 번뇌 속에 존재하여 고제ㆍ집제 속에 떨어지는 지혜다.
그런 까닭에 이것은 고지 내지는 도지라 표현하지는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설명에 의하면 네 가지 일 때문에 법지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즉 비로소 법을 알게 되는 까닭에 법지라 부르고,
현법(現法)을 알게 되는 까닭에 범지라 부르며,
법에 있어서 어리석은 것이 아닌 까닭에 법지라 부르며,
법에 있어서 속이는 것이 아닌 까닭에 법지라 부른다고 하였다.
또 멀리서 아는 까닭에 미지지(未知智)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지혜도 역시 네 가지 일에서 멀리서 알게 된다.
즉 원인 따라 멀리 결과를 알게 되고 결과로부터 멀리 원인을 알게 되고,
몸의 행[身行]과 입의 행[口行]으로부터 멀리 마음을 알게 되고,
거룩한 설법을 인견(忍見)하는 일로부터 멀리 부처님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혜로 역시 네 가지 일에서 원인 다음으로 연이 뛰어나게 불어난다.
이 지혜에는 네 가지 연이 있고 아는 일에도 역시 네 가지 연이 있다.
등지(等智)도 역시 네 가지 일이 있다.
이름이 같고 상속하는 바가 같고 세속의 작용이 같고 소입(所入)이 같은 따위이다.
고지(苦智)도 역시 네 가지 일이 있다.
태어나는 것이 고통이고 늙는 것이 고통이고 병드는 것이 고통이고 죽는 것이 고통이다
집지(集智)에도 역시 네 가지 일이 있다.
행이 모여들고 번뇌가 모여들고 사랑이 모여들고 처하는 장소가 모여든다.
멸지(滅智)에도 역시 네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세 가지 결(結)이 다하게 되고, 두 번째는 탐욕과 노여움이 엷어지고, 세 번째는 오하분결(五下分結)이 다하게 되고, 네 번째는 모든 결이 다하게 된다.
도지(道智)에도 역시 네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연이고, 두 번째는 현법(現法)에서 안락하게 노닐게 되고, 세 번째는 몸으로 유희하게 되고, 네 번째는 해야 할 바를 관(觀)하는 것이다.
진지(盡智)에도 역시 네 가지 일이 있다.
공삼매(空三昧)와 서로 호웅하지 아니하며, 편견에 속하지 아니하게 되고, 지타심지(知他心智)와 함께 하지 아니하며, 구하던 것을 이미 버리게 된다.
무생지(無生智)에도 역시 네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근거가 마련되고, 두 번째는 방편을 구하게 되고, 세 번째는 생각이 있게 되고, 네 번째도 전환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또 설명에 이르기를 한 가지 지혜에 모든 지혜가 포함되는 것은 법지(法智)가 이에 해당한다.
이 지혜의 성품은 여법(如法)한 지혜는 아니며 열 가지 지혜의 성품이 이 지혜의 성품이다.
법지에서 두 지혜로 모든 지혜를 거두어들이는 경우에는 유루ㆍ무루, 상속(相續)ㆍ비상속, 계박(繫縛)과 계박이 아닌 것으로 나뉜다.
세 가지 지혜로 모든 지혜를 거두어들이는 경우는 법지와 미지지와 등지(等智)가 여기에 해당된다.
또 네 가지 지혜로 모든 지혜를 거두어들일 경우 법지와 미지지와 지타심지(知他心智)와 등지(等智)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 다섯 가지 지혜로 모든 지혜를 거두어들일 경우 고지(苦智)와 집지(集智)와 멸지(滅智)와 도지(道智)와 등지(等智)가 여기에 해당된다.
또 여섯 가지 지혜로 모든 지혜를 거두어들일 경우 고지ㆍ집지ㆍ멸지ㆍ도지ㆍ지타심지ㆍ등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 일곱 가지 지혜로 모든 지혜를 거두어들일 경우 법지ㆍ미지지ㆍ등지ㆍ고지ㆍ집지ㆍ멸지ㆍ도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여덟 가지 지혜에 모든 지혜를 포함시킨 경우에는 법지와 미지지ㆍ지타심지ㆍ등지ㆍ고지ㆍ집지ㆍ멸지ㆍ도지가 그것이다.
[문] 만약 여덟 가지 지혜에 모든 지혜가 포함된다고 한다면,
이 여덟 가지 지혜 이외에 또 다른 여덟 가지 지혜가 있으니,
즉 법계주지(法界住智)와 열반지(涅槃智)와 생사지(生死智)와 염숙명지(念宿命智)와 누진지(漏盡智)와 묘지(妙智)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 이렇게 여덟 가지 지혜가 있다.
이 여덟 가지 지혜가 어떻게 저쪽의 여덟 가지 지혜에 포함되는가?
[답] 이 여덟 가지 지혜는 모든 저 여덟 가지 지혜 속에 거두어들여진다.
[문] 어떻게 이 여덟 가지 지혜가 저쪽 여덟 가지 지혜에 거두어들여지는가?
[답] 법계주지(法界住智)라 하는 것은 이는 법성에 속하는 것으로 저 편의 여덟 가지의 지혜 가운데 법지와 미지지와 지타심지와 등지에 해당한다.
다음 열반지(涅槃智)라 하는 것은 진지(盡智)를 말하는 것으로 저쪽 여덟 가지 지혜 가운데 법지와 미지지와 멸지와 등지의 네 가지 지혜에 해당한다.
다음 생사지(生死智)라 하는 것과 염숙명지(念宿命智)라 하는 것은 본래 아비담(阿毘曇)의 논사들과 계빈(罽賓)의 논사들이 말한 것인데 저쪽 여덟 가지 지혜에서 말하면 등지(等智)와 같은 것이다.
존자 구사(瞿沙)는 설명하기를, “생사지(生死智)와 염숙명지(念宿命智)는 지타심지(知他心智)와 멸지(滅智)를 제외한 법지ㆍ미지지ㆍ둥지ㆍ고지ㆍ집지ㆍ도지에 해당된다”라고 하였다.
[문] 왜 지타심지는 제외되는가?
[답] 생사지ㆍ염숙명지는 과거ㆍ미래와 연하는 지혜며, 지타심지는 현재에 연하는 지혜다. 그런 까닭에 제외된다.
[문] 그렇다면 왜 멸지(滅智)는 제외되는가?
[답] 생사지ㆍ염숙명지 이것은 유위(有爲)의 세계와 연하는 지혜지만, 멸지(滅智)는 무위(無爲)의 세계와 연하는 지혜다.
그런 까닭에 제외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생사지ㆍ염숙명지는 같은 슥명지(宿命智)며 유루(有漏)의 지혜다.
다음 누진지(漏盡智)라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지혜에 누(漏)가 다하는 연이 있으면 누진지(漏盡智)다”라고 하였다.
이와는 다르게 말하는 사람은 이르기를,
“누진지라 하는 것은 번뇌[漏]가 다한 생각 속에 얻을 수 있는 것이 누진지다”라고 하고 있다.
번뇌가 다하는 연이라고 말할 경우 이것은 법지ㆍ미지지ㆍ멸지ㆍ등지가 여기에 해당되고,
번뇌가 다한 생각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라 할 경우에는 열 가지 지혜 모두를 번뇌가 다한 생각 속에서 얻을 수 있다.
다음 묘지(妙智)라 하는 것은, 본래 아비담의 논사나 계빈국의 논사들은 등지(等智)와 같은 지혜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존자 구사(瞿沙)는 설명하기를,
“묘지라 하는 것은 법지ㆍ미지지ㆍ지타심지ㆍ등지ㆍ고지ㆍ집지ㆍ도지 등 일곱 가지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멸지는 여기에서 제외된다”라고 하였다.
[문] 왜 멸지는 제외되는가?
[답] 묘지는 유위(有爲)의 세계와 연하는 지혜며 멸지는 무위의 세계와 연하는 지혜다. 그런 까닭에 멸지는 제외된다.
묘지가 등지와 같다고 말하는 사람의 경우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법지ㆍ미지지ㆍ고지ㆍ집지ㆍ멸지ㆍ도지 등 여섯 지혜 속에 포함시켜서 지타심지와 등지는 여기에서 제외된다고 말하고 있다.
[문] 왜 지타심지는 제외되는가?
[답] 진지와 무생지는 지타심지와 서로 호응하지 아니하는 까닭에 제외된다.
[문] 왜 등지(等智)도 제외되는가?
[답] 진지와 무생시는 유루지며 등지는 무루지이다. 그런 까닭에 등지는 제외된다.
이렇게 이 여덟 가지의 지혜에 전편의 여덟 가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일설에 이르기를,
“모든 지혜는 마땅히 한 가지의 지혜라 말해야 한다. 지혜란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법(如法)한 것을 알게 되는 까닭에 열 가지 지혜는 모두 법지(法智)이다”라고 한다.
모두가 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열 가지 지혜를 모두 묘지(妙智)라고 말해야 하는 것은 모두가 소원(所願)이 가득히 채워지기 때문이며,
열 가지 지혜를 모두 진지(盡智)라고 말해야 하는 것은 누(漏)가 다하기 때문이며,
열 가지 지혜를 모두 무생지라고 말해야 하니 윤회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문] 이 여덟 가지 지혜 가운데 몇 가지 지혜가 욕계에 속하는 지혜며,
또 몇 가지 지혜가 색계에 속하는 지혜며,
몇 가지 지혜가 무색계에 속하는 지혜이며,
몇 가지 지혜가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아니하는 지혜인가?
[답] 여섯 가지 지혜는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아니하는 지혜며,
등지(等智)는 욕계에 속하는 지혜이고,
지타심지(知他心智)는 색계에 속하는 경우도 있고 목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다.
그 정지(定地)로서는 법지(法智)는 미지선(未至禪)과 중간선(中間禪)과 근본 사선(根本四禪) 등 여섯 경지에서 일어나고 미지지(未知智)는 이 여섯 경지와 무색계의 세 가지 정[空處ㆍ識處ㆍ無所有處] 등 아홉 경지에서 생기는 지혜며,
지타심지는 근본 사선의 경지에서 얻는 지혜다.
[문] 어찌하여 사선의 근본지에서 얻게 되는가?
[답] 신통력 때문이다. 신통력은 정(定)에서 생겨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혜이다.
사선의 근본지가 아닌 경지나 무색계는 신통력이 생기는 정지(定地)가 아니다.
등지는 열한 가지 경지에서 일어난다.
또 고지ㆍ집지ㆍ멸지ㆍ도지의 법지(法智)에 해당하는 부분으로는 여섯 경지에서 생기고,
미지지(未知智)에 해당하는 부분은 아홉 경지에서 생긴다.
지혜의 근거를 말한다면,
법지와 지다심지는 욕계에 근거하는 지혜며,
미지지와 등지는 삼계에 근거하는 지혜며,
고지ㆍ집지ㆍ멸지ㆍ도지는, 법지(法智)에 해당하는 부분은 욕계에 근거하고 미지지에 해당하는 부분은 삼계에 근거한다.
그 행을 말한다면,
법지와 미지지는 열여섯 가지의 행이 있고,
지타심지와 도지(道智)에는 네 가지 행이 있으며,
등지는 혹 열여섯 가지 행이 있을 수도 있고 또 혹 열여섯 가지 행을 떠나서 얻는 경우도 있다.
고지ㆍ집지ㆍ멸지ㆍ도지는 각기 네 가지 행이 있다.
그 연을 말한다면,
법지와 미지지는 사제(四諦)예 연하고,
지타심지는 욕계ㆍ색계와 연하여,
기타 유루(有漏)ㆍ무루(無漏)의 마음과 심소법으로 일어나는 법과 인연한다.
등지(等智)는 혹 사제(四諦)와 연하기도 하고 또 혹 사제를 떠나서 생기는 경우도 있다.
고지는 고제와 연하고 집지는 집제와 연하고 멸지는 멸제와 연하고 도지는 도제와 연한다.
그 염처(念處)를 말한다면,
지타심지는 심념처(心念處)에 속하고,
법지ㆍ미지지ㆍ고지ㆍ집지ㆍ도지는 사념처(四念處)와 연하고,
멸지는 법념처와 연하며,
등지는 혹 사념처에서 생기는 경우도 있고 또 혹 사념처를 떠나서 생기는 경우도 있다.
그 지혜를 말한다면, 여덟 가지 지혜 그 자체가 곧 지혜다.
그 정(定)을 말한다면,
법지와 미지지는 삼삼매(三三昧:空ㆍ無相ㆍ無願)와 서로 호응하는 지혜며,
지타심지와 도지는 무원(無願) 삼매와 서로 호응하고,
등지는 혹 세 가지 삼매와 호응하기도 하고 혹 호응하지 아니하기도 한다.
고지는 두 가지 삼매와 서로 호응하고,
집지ㆍ멸지ㆍ도지는 각각 한 가지 삼매와 서로 호응한다.
그 받는 감각의 측면을 말한다면,
법지ㆍ미지지ㆍ지타심지ㆍ고지ㆍ집지ㆍ멸지ㆍ도지는 모두 낙근(樂根)ㆍ희근(喜根)ㆍ사근(捨根) 등 세 가지 근기와 서로 호응하고,
등지는 오근(五根:愛ㆍ喜ㆍ苦ㆍ樂ㆍ捨) 모두와 서로 호응한다.
[문] 이 지혜는 과거의 지혜라 해야 하는가, 미래의 지혜라 해야 하는가, 현재의 지혜라 해야 하는가?
[답] 과거의 지혜라 말해야 하고, 미래의 지혜라 말해야 하고, 현재의 지혜라 말해야 한다.
[문] 과거에 연한 지혜라 해야 하는가, 미래에 연한 지혜라 해야 하는가, 현재에 연한 지혜라 해야 하는가?
[답] 법지(法智)ㆍ미지지ㆍ등지는 혹 과거와 연한 지혜이기도 하고 혹 미래와 연한 지혜이기도 하고 혹 현재와 연한 지혜이기도 하다.
고지ㆍ집지ㆍ도지는 과거와 연한 지혜라 하여야 하고, 또 미래와 연한 지혜라고도 하여야 하고 또 현재와 연한 지혜라고도 하여야 한다.
멸지는 마땅히 세상의 연을 떠난 지혜라고 말해야 한다.
[문] 이름과 연한 지혜라 해야 하는가, 이치와 연한 지혜라 해야 하는가?
[답] 이름과 연한 지혜라 해야 하며 또 이치에 연유한 지혜라 해야 한다.
[문] 자기 생각에 연유한 지혜라 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의 생각에 연유한 지혜라 해야 하는가? 생각을 떠난 것에 연유한 지혜라 해야 하는가?
[답] 법지와 미지지와 등지는 마땅히 자기 생각에 연유한 지혜라 말해야 하고 또 다른 사람의 생각에 연유한 지혜라 말해야 하며 생각을 떠난 것에 연유한 지혜라 말해야 한다.
지타심지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연하는 지혜이며,
고지와 집지와 도지는 자기 생각과도 연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도 연하는 지혜라 말해야 하며,
멸지는 생각을 떠난 것과 연하는 지혜라 말해야 한다.
여덟 가지 지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