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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비담심론 제11권
11. 택품②[1], 지(知)ㆍ식(識)ㆍ명(明)의 법, 겁(劫)ㆍ경지가 물러나는 경우
[지법(知法)ㆍ식법(識法)ㆍ명법(明法)]
【문】지법(知法)ㆍ식법(識法)ㆍ명법(明法)이란 어떤 것인가?
【답】
지(知)란 일체법이다.
식(識)과 명(明)도 그러하니
지와 식과 명은
각기 일에 따라 설명된다.
고(苦)의 지혜로 고통을 알게 되고 나아가 도(道)의 지혜로 도를 알게 되니, 무루지1)는 분단해서 연하는 까닭이다. 선한 등지(等智)도 역시 고 내지 허공ㆍ수멸(數滅)ㆍ비수멸을 아니, 두루 모든 법과 인연하기 때문이다.
식(識)2)도 또한 일체법을 인식한다. 즉 눈의 인식은 색을 식별하고 몸의 인식은 촉감을 식별한다. 독자적인 모습[自相]을 거두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의식(意識)은 눈과 색과 안식(眼識)을 인식한다. 이와 같이 일체법을 인식하니, 두루 연하기 때문이다.
명(明)3) 역시 일체법을 밝히니 그 같은 일을 따른다. 즉 고인(苦忍)4)과 고지(苦智)로 고를 밝히고 내지는 도인(道忍)과 도지(道智)로 도(道)를 밝히게 된다. 분단(分段)하여 연하기 때문이다. 선(善)한 유루의 지혜도 역시 고(苦) 내지 허공과 비수멸을 밝힌다.
[겁(劫)]
【문】겁(劫)5)은 어떻게 지나가는가?
【답】
도병(刀兵)과 병과 기근을
중겁(中劫)이 지나간다고 하고
땅을 제외한 세 종류를
대겁(大劫)이 지나간다고 말한다.
‘도병(刀兵)과 병과 기근을 중겁이 지나간다고 한다’라고 한 것은 세 종류의 중겁의 지남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즉 전쟁과 병과 기근 등 세 가지 재난이 그것이다.
도병겁(刀兵劫)6)이란
이른바 사람의 수명이 십 년 밖에 못살 때가 되면 추악한 경계가 되어 탐하고 모든 사법이 행해지며 각기 해치려는 마음으로 살아가 손으로 풀이나 나무를 잡으면 그것이 모두 칼이 되어 서로를 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이 해서 7일이 지나면 도병(刀兵)의 중겁(中劫)이 지나가게 되는 것이다.
질역겁(疾疫劫)7)이란
역시 사람의 수명이 십 년 밖에 못살 때가 되면 여러 가지 질병이 많아지고 의사(醫師)나 처방약이나 병을 돌보는 사람이 없어진다. 그리하여 복덕이 박한 까닭에 병만 들게 되면 곧 죽는다.
이와 같이 해서 7개월 7일이 지나면 질역의 중겁이 지나게 되는 것이다.
기근겁(饑饉劫)8)이란
역시 사람의 수명이 십 년 밖에 못살 때가 되면 배고프고 목마른 일이 더욱 많아져 몸이 지극히 약해지고 온 하늘에 가뭄이 들어 심고 가꾼 곡식을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쌀알을 헤아려 가며 밥을 먹게 되고 사람의 뼈를 삶고 달여 그 즙(汁)을 마시게 된다.
이와 같이 해서 7년 7개월 7일이 지나면 기근의 중겁(中劫)이 지나게 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가 있다. 곧,
“만약에 금세에서 하룻낮ㆍ하룻밤 동안 살생을 하지 아니하는 계율을 지키기만 하여도 종극에 그 도병겁 가운데 태어나는 일은 없으며, 한 알의 가리륵(呵梨勒)의 열매를 승복전(僧福田)에 베풀어도 종극에 그 질역겁에 태어나는 일은 없다.
만약 한 끼의 밥을 승복전에 베푼다면 종극에 그 기근겁에 태어나지 않는다.”
이 염부제(閻浮提)에는 악겁(惡劫)이 바뀌어 가며 일어나지만 다른 지방에서는 이와 비슷한 일이 적게 일어난다.
이틈에 도병겁이 일어나게 되듯이 그들에게는 단지 노여움만이 더욱 증가하게 된다.
다시 이틈에 질병겁이 일어나듯이 그들은 오직 병들고 약해져서 힘이 적어지기만 하며,
이틈에 기근겁이 일어나듯이 그들에게는 오직 배고픔과 목마름만 더해질 뿐이다.
[대겁(大劫)이 지나가는 것]
【문】어떤 것이 대겁(大劫)이 지나가는 것인가?
【답】땅을 제외한 세 종류를 대겁이 지나간다고 말한다.
세 가지 큰 재난의 종류를 대겁이 지나간다고 말하니, 불과 물과 바람이 그것이다. 땅[地]의 종류는 제외된다.
왜냐 하면, 땅은 예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예리하다면 대겁을 부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땅의 종류가 겁을 부순다면 마땅히 제4선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거늘 땅[地:境地]은 일찍이 제4선에 이른 일이 없다.
【문】무슨 이유로 괴법은 제4선에 이르지 못하는가?
【답】정거천(淨居天)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더 높은 경지가 일어나 곧 반열반에 들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랫세계에 태어나지 않나니, 아랫세계는 비수멸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곳에 머물면서 괴겁을 겪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더욱 불어난 복력으로 그곳에 태어나는 까닭이다. 안으로 마음이 교란되는 일은 그 경지에 해당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니,
만약 그 경지에서 안으로 마음이 교란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밖으로도 재난이 있게 된다.
초선(初禪)의 경지에서는 내적으로 각관(覺觀)의 불이 마음을 교란하는 까닭에 밖으로도 화재로 인해 불타게 된다.
제2선의 경지에서는 내적으로 기쁨의 물[喜水]이 마음을 교란하는 까닭에 밖으로도 물의 재난으로 인해 표류하게 된다.
제3선의 경지에서는 내적으로 출입식의 바람이 마음을 교란하는 까닭에 밖으로도 바람의 재난으로 인해 허물어지게 된다.
【문】제4선에서 일찍이 아무것도 교란하는 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것이 영원한 경지가 아니겠는가?
【답】찰나무상에 의해 허물어지는 까닭이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가 있다. 곧,
“제4선의 경지는 정해지지 않은 채 상속된다. 그 하늘에 태어나는 일을 좇아 궁전도 함께 일어나며, 만약 하늘에서의 목숨이 끝나면 그 역시 사라진다.”
[겁(劫)이 다하고 최초로 생기는 일]
【문】어떤 것이 겁(劫)이 다하고 최초로 생기는 일인가?
【답】
일곱 번의 불이 차례로 지나고
그 후에 물의 재난이 일어난다.
마흔아홉 번의 불과 일곱 번의 물을 겪고
다시 일곱 번의 불 뒤에 바람의 재난이 온다.
[불의 재난]
‘일곱 번의 불이 차례로 지나간다’라고 한 것은 최초로 불의 겁이 일어남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곧,
“만약 화겁이 일어날 예정이라면 그 때 사람의 수명이 팔만 년에 달하여 지옥에서 명이 끝난 사람도 다시 지옥에 태어나지 아니한다. 그러면 이것이 겁이 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옥에 한 중생도 머무는 일이 없게 되니,
이것을 이름하여 ‘지옥의 겁이 다하였다’라고 한다.
지옥의 겁진과 마찬가지로 축생과 아귀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은데, 만약 축생으로서 사람에게 쓸모가 있다면 사람의 겁과 함께 다하게 된다.
이때에는 염부제에는 오직 한 사람이 있어 가르쳐 주는 이가 없이도 능히 초선(初禪)의 경지에 들어간다.
초선에서 일어나게 되면 그는,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 몹시도 유쾌하고 즐겁구나’라고 소리 높이 외치게 된다.
이와 같은 음성이 전전하면서 서로 알려져 염부제에 두루 퍼지게 되면 모든 나머지 중생들도 스승의 가르침 없이 모두가 초선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니, 마침내 염부제주에는 한 사람의 중생도 머무는 일이 없게 된다.
이것을 ‘염부제주의 겁이 다하였다’고 표현한다.
다만 울단월을 제외한 욕계의 모든 선취(善趣)도 역시 이와 같다.
울단월에서는 목숨이 끝날 때 선(禪)을 얻는 자가 없으니, 욕망을 벗어나는 것은 그들의 분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그때 초선의 경지를 얻은 한 중생이 아무도 가르치는 사람이 없는데도 제2선의 경지에 들어가 선에서 일어난 뒤 소리 높이 외치기를,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은 몹시도 상쾌하고 즐겁구나’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음성이 두루 범천(梵天)의 세계에 이르게 되며 나머지 모든 범천의 중생들도 역시 그와 같이하여 마침내 초선의 세계에는 한 사람의 중생도 머무는 이가 없게 되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중생 세계의 겁이 다하였다’고 표현한다.
이때 세계는 구원(久遠)의 허공세계가 되어 마침내 일곱 개의 해가 나타나게 된다.”
【문】어디서 나오는가?
【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겁이 이루어질 때 건타산(乾陀山)9) 뒤로 일곱 개의 일륜(日輪)이 머물고 있다가 그곳에서 나오게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기를 어떤 이는
“하나의 해가 나위어져 일곱 개가 된다”고 하고,
어떤 이는
“한 해에서 일곱 갑절의 열이 생기게 된다”라고 하며,
어떤 이는
“무간지옥으로부터 불이 솟아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중생들의 업의 힘 때문에 증상과(增上果)의 기세계(器世界)가 일어났다가 그 업이 다하면 이와 같은 교란이 생기고 나아가 범천(梵天)이 불타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물의 재난]
‘일곱 번 화재가 차례로 지나가고 그 후에 한 번의 수재가 일어난다’라고 한 것은,
일곱 번 불이 지나간 뒤에 한 번의 물의 재난이 있으며 마침내 제2선의 경지를 허물게 되는 것이다.
【문】물의 재난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제3선의 가장자리로부터 뜨거운 잿물[灰水]이 비가 되어 쏟아진다”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륜(水輪)이 솟아 나오게 된다”라고 하고 있다.
교란이 일어나는 일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다.
‘마흔아홉 번의 불과 일곱 번의 물’이라 한 것은
일곱 번 화재가 차례로 지나간 뒤 한 번의 수재가 일어나며, 이와 같은 해서 마흔 아홉번의 화재와 일곱 번의 수재를 겪게 됨을 말한 것이다.
[바람의 재난]
‘다시 일곱 번의 불 뒤에 바람의 재난이 온다’라고 한 것은
다시 일곱 번 불의 재난이 지난 뒤에 한 번 바람의 재난이 일어남을 말한 것이다.
물의 재난과 바람의 재난은 불의 재난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난다. 이것이 올바른 설[善說]이다.
이 변정천(遍淨天)은 64 겁의 수명이 있다.
물의 재난으로 표류하다가
마침내 제2선에 이르러 바람의 재난으로 허물어 지게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제3선에 이르게 되면 백억(百億)의 사천하가 일시에 함께 허물어진다.
열아홉 개의 중겁(中劫) 사이에 세계는 허공으로 변하고, 한 중겁 사이에 기세간은 허물어지고 한 중겁 사이에 기세간이 이루어진다.
그후 열아홉 중겁 동안 차례로 다시 머물게 된다.
만약 처(處)의 최초가 허공이었다면, 그곳이 가장 나중에 머무는 곳이 된다.
또한 처의 최후가 허공이었다면 그곳이 가장 먼저 머무는 곳이 된다.
[마음이 어지러워짐]
【문】어떻게 하여 마음이 어지러워지는가?
【답】
착란(錯亂)과 본업의 과보와
공포와 상해(傷害)가 있는데
가령 사지(四肢)를 해체함은
성인은 물ㆍ불ㆍ바람이라 말한다.
‘착란(錯亂)과 본업의 과보와 공포와 상해(傷害)가 있다’라고 했는데, 네 가지 인연으로 어지러워진다. 즉 4대(大)의 착란과 본업(本業)의 과보와 공포 및 몸을 상해하는 일이다.
4대가 착란이란 음식이 적합하지 아니한 까닭에 4대가 착란을 일으키게 되며, 4대가 착란을 일으키는 까닭에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본업의 과보란 본지(本地)에서 지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업보가 이미 무르익게 된 것이다.
【문】어떤 것이 그러한 것인가?
【답】매우 쇠해져서 화가 된 것을 전하여 남을 시름하게 하고 괴롭게 한다.
혹은 다시 욕설을 퍼부으면서
“너는 바보 미치광이며 마음이 어지러운 놈이다”라고 하고,
중생들을 구박하여 그들을 험한 환경에 떨어지게 하거나 산과 못을 불태우고 억지로 사람들에게 술을 먹이거나 혹은 망령된 생각으로 부처의 말을 설한다.
이와 같은 종류의 업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과보를 얻는다.
공포(恐怖)란 비인(非人)이 찾아오는 것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며 무섭고 겁이 나는 까닭에 그의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말한다.
몸을 상하게 하고 해친다고 하는 것은 비인에게 두들겨 맞기 때문에 몸을 다치는 것이다. 즉 그가 부정(不淨)으로써 대중이 모인 장소나 불승의 탑을 더럽히기 때문에 그곳에 있던 비인이 성이 나서 그를 두들겨 패는 까닭에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범부의 경우를 말한 것으로, 성인은 본지에서 지은 업행의 과보로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일이 없다.
만약 먼저 정해진 과보의 업을 심었다고 한다면, 먼저 그 과보를 받은 다음 그 후에 경지를 뛰어넘어 생사를 벗어나게 된다.
만약 일정하지 아니한 과보의 업을 심었다면 그 후 경지를 뛰어넘어 생사를 벗어날 경우에는 그 업은 곧 소멸된다.
마음이 어지럽다는 것은 욕계에 존재하는 일로서 저 지옥에서는 마음이 어지럽혀지지 아니한다. 항상 어지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축생과 아귀와 사람은 마음이 어지럽다. 울단월은 여기서 제외된다.
욕계의 하늘 세계에서도 역시 마음이 어지럽혀진다.
【문】어떤 성인이 마음이 어지럽혀지는가?
【답】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陀含)ㆍ아나함(阿那含)ㆍ아라한(阿羅漢)ㆍ벽지불(淪支佛)은 마음이 어지럽혀진다.
오직 부처의 마음만이 어지럽혀지지 않으니, 소리가 무너지거나 머리카락도 백발이 되거나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거나 하지 않으며 점차 단계를 밟아서 열반으로 옮겨지는 일도 없다.
세존은 마음을 교란하던 업을 오랜 옛날에 이미 모두 소멸한 채 묘행(妙行)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어지럽히는 것은 의식(意識)으로서 오식(五識)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다. 분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유루심이 어지러워지지 무루심이 어지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행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가령 마음이 미쳐 어지럽다면 이를 산란(散亂)이라 말하는가?
이것은 네 구(句)로 설명해야 하리라.
첫 번째 구는 이른바 미친 자의 선(善)한 유루심(有漏心)과 불은몰무기심이 그것이다.10)
두 번째 구는 자상(自相)으로 머무는 자의 염오심이다.11)
세 번째 구는 미친 자의 염오심이다.12)
네 번째 구는 자상으로 머무는 자의 선심 및 불은몰무기심이다.13)
[사지관절을 해체하는 요소]
【문】어떤 요소[大]가 능히 사지관절을 해체하는가?
【답】가령 사지관절을 해체함은 성인은 물ㆍ불ㆍ바람이라 말한다.
즉 세 가지 구성 요소로 능히 사지 관절을 분해할 수 있다.
지대(地大)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니, 예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대가 사지 관절을 분해한다는 것은 목숨이 끝날 때 화대(火大)가 증가하여 두루 힘줄을 태운다는 것이다. 태우고 나서는 마디마디 분해되며, 마디마다 분해되고 나면 얼마 되지 아니하여 목숨이 끝난다.
수대(水大)가 사지관절을 분해한다고 하는 것은 뼈마디마다 분해될 때 먼저 힘줄을 썩게 한다는 것이다. 힘줄이 썩게 되면 나머지는 앞에서 말한 내용과 같다.
풍대(風大)가 사지 관절을 분해한다고 하는 것은 바람이 힘줄을 부서지게 한다는 것이다. 힘줄이 부서지고 나면 그 나머지 일은 앞에서 말한 내용과 같다.
사지관절이 해체되고 나면 하룻밤ㆍ하룻낮을 넘기지 못하고 목숨이 끝나니, 4대가 착란하는 까닭이다.
지옥에서는 사지관절이 해체되는 일이 없다. 그곳에서는 사지 관절이 항상 해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업보 때문에 죽지도 아니한다.
축생ㆍ아귀 및 세 방향에는 사지관절이 풀리는 일이 있다.
울단월을 제외하니, 그곳에는 죄업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 세계도 또한 이와 같다.
범부와 성인은 사지관절이 해체된다.
오직 부처만이 여기서 제외된다. 죄를 짓고 업보를 받는 사람은 사지관절이 해체되지만 부처에게는 지은 죄의 업보가 없기 때문이다.
사지관절이 해체되는 일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경지가 물러나는 경우]
지금부터 경지가 물러나는 경우를 설명하겠다.
물러나는 법에 세 가지가 있나니
얻음과 얻지 못함과 익히고 행함[習行]이다.
혹 한 사람이 한 번 물러나기도 하고
얻지 못한 경우에는 두 곳에서 물러나게 된다.
저 익히고 행한 것에서 물러남은
세 종류의 성인도 모두 그렇게 된다.
물러나는 법에 세 종류가 있다.
즉 얻은 법에서 물러나는 경우와
법을 아직 얻지 못한 채 물러나는 경우와
익히고 행한 법에서 물러나는 세 종류가 그것이다.
얻은 법에서 물러난다고 하는 것은 얻은 공덕이 물러나야 할 인연을 만나 물러나는 것이다.
얻지 못하고 물러선다는 것은 마땅히 얻어야 할 공덕을 방일한 마음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 것이다.
익히고 행한 법에서 물러선다고 하는 것은 이미 얻은 공덕을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익히고 행할 수 없게 되는 경우를 말한 것이다.
[얻고 물러남]
【문】어떤 사람이 어떤 일에서 물러서는가?
【답】혹은 한 사람이 한 번 물러난다. 가령 얻었다가 물러나는 경우 이는 둔한 근기를 지닌 성문(聲聞)이 여기에 해당한다. 예리한 근기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리한 근기를 지닌 사람은 삼매의 힘이 있는 까닭이다. 그런 까닭에 ‘혹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어떻게 얻고 물러남을 아는가?
【답】두 종류의 아라한을 말하는 까닭이다. 이른바 법에서 물러나는 자와 물러나지 아니하는 자를 말한다.
가령 도에서는 물러나도 과보에서는 물러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번뇌를 끊고 얻은 것은 도와 합치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얻은 것은 도제(道諦)에 속한다. 그런 까닭에 도에서 물러나 번뇌를 끊지 아니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문】만약 번뇌의 종자에서 벗어났다면 어떻게 번뇌가 또 생기겠는가?
【답】가령 처음 얻는 무루심은 그 이전의 원인이 없어도 생기듯이 그 또한 이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자분인의 몫이 있기 때문이다. 끝없는 생사로부터 번뇌의 자분인의 몫이 생겨나는 것이다.
번뇌는 세 곳에서 일어난다고 함은 맞는 말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세 처에서 기번뇌(起煩惱)가 구족된다고 하는 까닭에 중생이 번뇌를 일으킴에 세 인연을 구족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인(因)의 힘과 경계의 힘과 방편의 힘이 그것이다.
그 욕애(欲愛)의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못하고 알려지지 않은 것이 곧 인의 힘이다.
끊은 자는 장애가 없고 안 자는 해탈한다.
욕애에 얽어매여 집착된 법은 곧 경계의 힘이며, 그 부정사유(不正思惟)가 곧 방편의 힘이다.
이것을 그들은 뜻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들의 경에 따른다면 부정사유는 앞의 부정사유가 그 몫이 아니라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앞서서 부정사유가 있었다면 이 생각은 끝없이 이어진다.
또한 선(善) 또는 무기심은 끝까지 일어나지 않는다. 가령 생겨난다면 해탈 역시 비분(非分)이 된다.
모든 번뇌를 불태우면 도로 생겨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마치 불로 나무를 태워 재로 만들면 끝까지 재가 되어 나무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라한이 지혜의 불로 번뇌라는 땔감을 불사르게 되면 다시는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같이 되지는 아니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러한 비유는 합당한 비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땔감을 태우면 재가 남아 있는가?
만약 이와 같다면 아라한의 번뇌 가운데 나머지 재와 같은 것이 있는 것인가?
만약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라한이 아니다. 아직 번뇌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남아 있는 재가 없다고 한다면 위에서 한 비유와는 같지 않게 된다.
그러나 성인의 도는 불로 땔감을 불사르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오직 성인의 도는 번뇌를 끊고 해탈을 얻고 작증(作證)을 얻는 일을 일으킬 뿐이다.
그가 만약 성인의 도를 떠난다면 역시 해탈득도 버리게 되고 결박을 얻는 일이 다시 일어나게 된다. 여러 물러나는 모습이 경설과는 다르니, 그 이유는 경전에서는 불시해탈(不時解脫)을 설하기 때문이라고 알아야 한다.
[얻지 못하고 물러섬]
‘얻지 못한 경우 두 곳에서 물러나게 된다’라고 한 것은
만약 얻지 못하고 물러서는 경우란 성문과 벽지불을 말한 것이지,
불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불은 일체의 가장 뛰어난 근으로 머물기 때문이다.
성문은 부처나 벽지불의 뛰어난 근을 얻을 수 없고 벽지불은 부처의 뛰어난 근을 얻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얻지 못하고 물러서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간략히 말한다면 모든 중생들이 만약 수행을 한다면 모두가 성인의 혜안(慧眼)을 얻게 되지만,
만약 수행을 하지 않고 이름과 색의 세계로 들어간다면 이것을 얻지 못한 채 물러선다고 하는 것이다.
【문】어떻게 얻지 못하고 물러섬을 알게 되는가?
【답】부처의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듯이 모든 하늘 및 세인(世人)이 지혜에서 물러선다면 명(名)과 색(色)에 물들고 집착한다. 성스런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닦고 수행하는 데서 물러남]
‘저 익히고 행한 것에서 물러남은 세 종류의 성인도 모두 그렇게 된다’라고 했는데,
만약 익히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물러나는 경우는 이른바 성문ㆍ벽지불ㆍ여래의 세 종류의 성인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중간에 여러 인연이 있는 까닭에 얻은 공덕이 늘 눈앞에 나타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문】어떻게 닦고 수행하는 데서 물러남을 알게 되는가?
【답】마음과 마음의 법의 물러섬을 설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곧,
“이 네 종류의 마음과 마음의 법은 현법에 안락하게 머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말하니, 그 하나하나는 물러섬이 있다.”
그 자세한 것은 수다라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다.
또한 말씀하기를
“흔들리지 아니하는 뜻의 해탈[不動意解脫]을 스스로 작증하고 성취하는 자, 그는 물러서지 않는 자이다”라고 하셨다.
그런 까닭에 세존께도 역시 익히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물러서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까닭에 말하기를
“세존은 미지(未至)14)의 경계에서 많이 노니셨지 근본지(根本地)가 아니다”라고 한다.
왜냐 하면 욕계에 가까운 경계이기 때문이다.
비록 부동의해탈은 익히고 행하는 데서 물러서는 경우가 있어도 그러나 그는 얻어서 닦음을 성취하는 까닭에 그 일체가 현재할 때 득은 항상 따라 전개된다.
그 마음과 마음의 법은 현재의 세계에서 닦게 된다.
이른바 현재 눈앞에 나타내지 않는 이름하여 퇴(退)라 하는 것이다.
익히고 행한 것에서 물러서는 경우가 가장 많은 사람은 이른바 세존이시다. 그것은 왜냐 하면 공덕이 가이없기 때문이니,
마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널리 모든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기를
“다른 이를 섭수하는 까닭에 부동(不動)이라 부르고, 스스로 섭수하는 까닭에 마음과 마음의 법이라 부른다.
세존께서는 다른 사람을 섭수하지만 스스로를 섭수하는 일은 적다. 이와 같이 세존은 크게 연민하고 크게 버리시는 것이다.
[물러나지 아니하는 곳]
【문】어느 곳이 물러나지 아니하는 곳인가?
【답】
모든 하늘 세계는 물러나지 않나니
과보에서 물러나도 끝내 죽지 않고
또한 그 업을 짓지 않는 것
그 과에 머무는 자가 짓지 않는 바이다.
‘모든 하늘 세계는 물러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모든 하늘 세계에서는 물러서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근이 예리한 자는 하늘 세계에서 과보를 얻는 까닭이니, 근기가 날카로운 사람은 물러서지 않는다.
또 가령 근기가 둔한 사람의 경우에도 과보를 얻은 다음에 하늘 세계에 태어난다면 물러나지 않나니, 생(生)을 경유하는 까닭이다.
성인이 생을 경유하면서도 물러나지 아니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물러남의 조건은 성인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존은 다섯 종류의 물러나는 조건을 말씀하셨으니, 다사업(多事業) 등이 그것이다.
다섯 가지 물러나는 법은 하늘 세계에는 없나니 그런 까닭에 물러남이 없는 것이다.
하늘 세계에서는 물러나지 아니하는 까닭에 물러나는 일은 반드시 인간 세계 안에만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물러설 조건이 갖추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보에서 물러나도 끝내 죽지 아니한다’라 했는데,
과보에서 물러선 사람은 끝내 죽지 않고 반드시 다시 과보를 얻는다. 왜냐 하면, 아랫경지에 태어나면 그것은 비수멸(非數滅)이기 때문이다. 비수멸법은 끝내 다시 눈앞에 나타나지 아니한다. 이는 불생(不生)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보에 속하는 도는 결정된 도며 결정코 구경에 이르기 때문에 그리고 과보의 도는 소식처(蘇息處)인 까닭에 그곳 사람들은 소식을 얻는다.
또 과보의 장소는 스스로 잘 보호하기 때문이고 과보의 장소에서는 세 가지 인연 및 다섯 가지 인연이 갖추어지기 때문이니,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다.
그 세 가지 과보만 물러서지 수다원과(須陀洹果)에서 물러서는 것은 아니다. 견도(見道)의 단계에서 끊는 번뇌는 대치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견도에서 끊는 번뇌는 자아의 처소에 의지하여 전개되지만 거기에 자아는 없다.
그러나 수도(修道)에서 끊는 번뇌는 대치하는 일이며, 수도단의 번뇌는 청정한 곳에서 전개된다.
그런데 거기에는 청정한 생각도 있고 부정(不淨)한 생각도 있다. 그가 모든 행이 더럽다고 사유하고 욕망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청정하다고 사유하면 부정을 밝히는 경지에서 물러나게 된다.
법에 대해서 나와 나의 것이라 사유하는 일 없이 무아(無我)의 견해에서 물러서게 되는 것이다.
또한 수다원과는 방편으로 널리 앞에서 베풀고 계율을 지키고 닦는 등으로 해탈로 향한다고 비유할 수 있다.
수다원과는 견도(見道)의 단계에서 얻는 까닭에 도를 밝히는 단계에서 물러서는 일은 없다. 그 길은 빠른 길이며 날카로운 길이며 비상비비상처에서 대치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라한과에서 물러서서 수다원과에 이르게 되면 세 단계의 과보에서 물러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대치하는 번뇌의 득(得)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업을 짓지 않는 것, 그 과에 머무는 자가 짓지 않는 바이다’라고 했는데,
가령 과보를 얻은 사람이 짓지 아니하는 업이라면 과보에서 물러선 사람도 역시 짓지 아니한다. 왜냐 하면, 부작률의(不作律儀)를 얻기 때문이며 성인의 도가 이미 악한 도를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마치 일찍이 약을 복용한 것과 같다.
그리고 또한 희망이 구족되었기 때문이며 그 사람은 소멸의 과보를 희망하고 악행(惡行)을 대치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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