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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14권
12. 정론[7]
12.28. 불선각품(不善覺品)
좋은 생각[善覺]을 구족한다 함은 사람이 잠을 자지 아니하면서도 좋지 않은 생각을 일으킨 것이니,
이른바 욕심에 대한 생각[欲覺]과 진심 내는 생각[瞋覺]과 괴롭히려는 생각[惱覺]과 또는 친척에 대한 생각[親里覺]과 국가에 대한 생각[國土覺]과 죽지 않는다는 생각[不死覺]과 남을 이롭게 하려는 생각[利他覺]과 남을 업신여기는 생각[輕他覺] 등이다.
차라리 잠을 잘지언정 이 모든 좋지 못한 생각들은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해탈하려는 등의 좋은 생각을 바르게 생각해야 하리니 이른바 벗어나려는 생각[出覺]과 성냄과 괴로워하지 않는 생각과 8대인의 생각[大人覺]이다.
욕심에 대한 생각이라 함은 욕심에 의지하여 생각을 일으키어 다섯 가지 욕심의 가운데서 이익과 쾌락과 있다고 보는 것을 욕심에 대한 생각이라 한다.
중생을 괴롭히기 위한 것을 진심내는 생각과 괴롭히려는 생각이라 한다.
수행하는 이는 이 세 가지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생각을 하게 되면 중대한 죄를 얻기 때문이다.
또 먼저 이미 탐욕 등에 대한 허물을 말하였거니와 이러한 허물 때문에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문] 어떤 이유로 어리석음 따위의 생각은 말하지 않는가?
[답] 이 세 가지 나쁜 생각[惡覺]은 차례로 생기거니와 그 밖의 번뇌는 그와 같지는 아니하다.
수행하는 이가 혹시 다섯 가지 욕락을 생각[念]하면 그 때문에 탐내는 생각을 내고 탐낸 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진심을 내며 진심이 일어나는 것을 괴로워한다고 하는데 그러므로 어리석음 따위는 말하지 아니한다.
또 어리석음으로 이루어진 결과는 탐심과 진심이어서 만일 탐심과 진심으로부터 생기는 것은 착하지 못한 업이다.
이 세 가지 생각을 착하지 못한 업의 인(因)이라 한다.
경전 중에서
“어느 숯 구렁이에서 밤에는 연기가 나고 낮에는 불이 타오르는 것과 같다”고 함과 같다.
연기는 바로 생각[覺]이요, 불은 업을 말한다.
친척에 대한 생각이라 함은 친척이기 때문에 모든 생각을 일으킨다. 친척에게 안온한 즐거움을 얻게 하려 할 때, 퇴폐한 일을 생각하면 근심이 생기고, 친척과 함께 여러 가지 사업을 같이할 일을 생각하면 친척에 대한 생각이라 한다.
수행하는 이는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본래 출가할 때에 이미 친척을 하직 하였는지라 이제 다시 이런 생각을 하면 마땅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만일 출가한 사람으로서 도로 친척을 생각한다면 헛되이 가족을 버린 것이다. 공연히 성취하는 것이 없으리라. 친척을 사랑하기 때문에 탐착을 내고 탐착하기 때문에 수호(守護)하려 하며 수호하는 관계로 치고 때리고 하는 업이 차례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친척에 대한 생각을 내지 않아야 한다.
또 친척과 화합하면 착한 법을 더 늘리지 못한다.
또 수행하는 이는
“온갖 중생은 생사에 유전하는지라 친척아닌 이가 없거니, 무엇 때문에 치우치게 애척하랴”고 생각해야 한다.
또 생사를 되풀이 하는 동안에 친척을 위하여 근심하고 슬퍼하면서 흘린 눈물은 큰 바다를 이뤘거늘 지금 다시 탐착하면 그 고통은 끝이 없을 뿐이다.
또 중생은 이익되는 인연으로 서로가 친애하되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또 친척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어리석은 모습이라 세간의 어리석은 사람은 제가 이로울 일은 행하지 않고 남만을 이롭게 하려 한다. 만일 친척을 생각하면 자신의 이익은 적게 된다.
이러한 일들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친척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국토에 대한 생각이라 함은 수행하는 이가 생각하기를
“아무 데에 있는 국토는 풍부하고 낙이 있어서 안온하는 곳이라 거기로 가서 안락을 얻어야겠다”고 하는 것이다.
또 마음이 경솔하고 조급한지라 두루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려 한다.
수행하는 이는 이러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국토에는 다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는 몹시 춥고 어떤 나라는 몹시 더우며 어떤 나라는 험한 데가 많고 어떤 나라는 질병이 많으며 어떤 나라는 도적이 많은 등의 이러한 갖가지 허물들이 있기 때문에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또 경솔하고 조급한 자는 선정을 잃어버린다. 좋아하는 데를 따라서 착한 법을 더 닦으면 그것이 좋은 것이다.
무엇하러 여러 국토를 두루 관람할 필요가 있겠는가? 온갖 국토는 다만 멀리서 듣기에만 좋을뿐 직접가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못한 것이니, 세간 사람은 지나치게 말이 많기 때문이다.
또 여러 나라에 유람다니는 사람은 갖은 고통을 다 받는다.
또 몸은 고통의 근본이라 이 고통의 근본을 가지고는 가는 곳마다 모든 고통을 받을 뿐이다.
또 고통과 쾌락을 받는 것은 다 업의 인연 때문이니, 아무리 멀리 간다 해도 역시 이익 될 것은 없으리라. 그러므로 국토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죽지 않는다는 생각이라 함은 수행하는 이가 생각하기를
“나는 서서히 도를 닦아야겠다. 그 먼저 수다라와 비니와 아비담(阿毘曇)과 잡장(雜藏)과 보살장(菩薩藏)을 읽고 외워야겠으며 널리 외전(外典)을 익히고 많은 제자를 기르며 어진 사람을 끌어다가 네 가지 탑에 공양하고 중생을 교화하여 크게 보시하게 하고서 그런 뒤에야 도를 닦아야겠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죽지 않는다는 생각이라 한다.
수행하는 이는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죽을 때란 일정하지 않으며 미리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일을 경영하는 동안에 목숨이 끝나면 수도할 수가 없고 뒤에 죽게 될 때에는 뉘우치며 근심하고 괴로워하면서
“나는 헛되이 이 몸을 길렀고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으므로 축생(畜生)의 죽음과 똑 같구나”라고 하게 된다.
경전 중에서
“범부는 스무 가지로 자기의 마음을 항복받아야 할지니, 이를테면 이러한 생각을 하라.
‘나는 형용과 의복만 속인과 다를 뿐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구나’ 하며 내지
‘조복받지 못한 채로 죽음에 이르겠구나’고 하라”고 함과 같다.
슬기로운 이는 하지 아니할 것은 하지 않는다.
법구(法句) 중에서 “
하지 않아야 할 것은 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이면, 언제나 하여라. 생각하며 지혜에 두는 마음이면 모든 번뇌는 다하게 되리라”고 함과 같다.
또 경전 중에서
“아직도 네 가지 진리를 얻지 못한 이는 방편으로 얻고자 하면서 부지런히 더 전진하기에 머리에 붙은 불을 끄기보다 더 서둘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또 죽지 않는다는 생각은 바로 어리석은 기질이다. 어떤 지혜있는 사람이라도 목숨의 무상하기는 마치 나뭇가지 위의 이슬과 같거늘 한 생각 동안인들 보존될 수 있음을 알겠는가?
또 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부처님은 여러 비구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어떻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닦아 익히느냐’
어떤 이가 부처님의 말씀에 대답하였다.
‘저는 7세를 보전하지 못 하오리다’라고 하였고, 혹은 ‘6세입니다’라고 하였고, 이렇게 점점 감하여 내려가다가 ‘잠깐 동안이옵니다’라고 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다 방일하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닦는구나’고 하셨다.
어느 한 비구가 한쪽 어깨를 벗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내쉬는 숨에서 도로 들이 쉴 것을 다짐하지 못하고 들이쉰 숨에서 도로 내쉴 것을 다짐하지 못 하겠나이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다. 너만은 참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닦는구나’”고 하셨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다는 생각을 내지 않아야 한다.
남을 이롭게 하려는 생각이라 함은 친척이 아닌 이에게 이익을 얻게 하려 함이니, 혹시 생각하기를
“아무개를 부귀하고 안락하게 만들어서 잘 보시를 행하게 하면 누구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라”고 하는 것이니,
수행하는 이는 이런 생각은 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생각만으로는 남으로 하여금 괴롭거나 즐거움을 얻게 할 수도 없고, 자기만이 이 때문에 선정의 마음을 무너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문] 남을 이롭게 하려는 것은 인자한 마음이 아니겠는가?
[답] 수행하는 이는 도를 구하는 분이므로 으뜸가는 진리인 무상하다는 등을 생각해야 한다.
그 중에는 비록 조그마한 복은 있기는 하나 도업을 방해하는 것이므로 이익은 적고 허물은 많은 것이니, 선정의 마음을 산란시키기 때문이다.
만일 산란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려고 생각하면 탐착의 허물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남을 업신여기는 생각이라 함은 수행하는 이가 다른 사람의 씨족과 살빛과 부귀와 기능과 그리고 계행과 영리한 근기며 선정과 지혜 등이 모두 자기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다.
수행하는 이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온갖 만물은 모두가 무상하기 때문이다. 만일 상이라 중이라 하라 한들 무슨 차별할 것이 있겠는가?
또 이 사람의 몸과 머리칼과 손톱 발톱이며 이까지도 모두가 깨끗하지 못하다 하나, 똑같아서 다를 것이 없다.
또 늙고 병들고 죽는 것들의 괴로움도 역시 마찬가지요, 또 온갖 중생의 안팎의 괴로움도 다 같아서 다를 것이 없다.
또 범부의 부귀는 바로 죄악의 인연이다.
또 부귀는 오래잖아서 도로 빈천하게 된다. 그러므로 남을 업신여기지 않아야 한다.
또 이런 교만은 무명의 갈래인지라 슬기로운 이로서야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겠는가?
12.29. 선각품(善覺品)
벗어나려는 생각[出覺]이라 함은 마음을 멀리 여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만일 다섯 가지 욕심의 세계와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를 떠나서 이 멀리 여윔을 좋아하면 그것을 벗어나려는 생각이라 한다.
이 멀리 여윔은 즐거운 것이요, 모든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탐착에 따르면 고통이 있지만 탐착이 없으면 즐겁다.
모든 생각 중에는 두 가지 생각을 즐거운 것이라 하는데 진심이 없는 생각과 괴롭힘이 없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생각을 안온한 생각[安隱覺]이라 하기 때문이다.
여래품(如來品) 중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여래에게는 항상 두 가지 생각이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니, 안온한 생각과 멀리 여윔의 생각이다.
안온한 생각이라 함은 이는 곧 성내거나 괴롭히지 않는 생각이며 멀리 여윔의 생각이라 함은 이는 곧 벗어나려는 생각이다.
또 이 세 가지 생각을 생각할 때는 복이 더 늘어가면서 또한 마음의 안정을 성취하며 또 마음은 청정하게 된다.
또 이 세 가지 생각을 생각할 때에는 모든 번뇌를 막으며 모든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빨리 끊음을 증득한다.
또 수행하는 이는 멀리 여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착한 법을 많이 모은다. 그러므로 빨리 해탈을 얻는다.
대인각(大人覺)이라 함은 부처님의 법 가운데서 욕심이 적은 자는 이익을 얻고 욕심이 많은 자는 그렇지 못하다.
넉넉한 줄 아는 이와 멀리 여의는 이와 정진하는 이와 바른 생각을 하는 이와 선정의 마음을 가진 이와 지혜가 있는 이와 쓸모없는 의론이 없는 이는, 이익을 얻거니와 쓸모없는 의론을 하는 이는 그렇지 못하다.
이런 것들을 여덟 가지라고 한다.
욕심이 적다함은 수행하는 이는 도를 닦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만을 바라는 것이요, 그 밖의 쓸데없는 물건을 바라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욕심이 적다고 한다.
넉넉한 줄 안다 함은
어떤 사람은 혹시 인연에 따라서 더러 계행을 지니게 하고 또는 남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이 때문에 적게 취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넉넉하게 여기지 않기도 하거니와
만일 사람이 적게 취하면서도 마음에 넉넉하게 여기면 그것을 넉넉한 줄 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비록 적게 구하면 이것은 욕심이 적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넉넉한 줄을 아는 사람은 아니다.
만일 취미로 적게 물건을 취한다면 그거은 넉넉한 줄을 안다고 하리라.
[문] 만일 필요한 바를 취하는 것을 욕심이 적다고 말할진대 온갖 중생은 다 욕심이 적다고 말하리니 그것은 각자에게 필요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답] 수행하는 이는 탐착하는 마음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고, 쓸 것만을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부러 많이는 취하지 않나니, 세상 사람이 훌륭하게 단장하고 칭찬을 듣기 위하여 가외로 많은 물품을 모으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문] 수행하는 이는 무엇 때문에 욕심을 줄이고 넉넉한 줄을 알아야 하는가?
[답] 수호하는 따위 안에서는 허물이 있는 것을 보고 또 무용한 물품을 저축하는 것은 어리석은 모습이며, 또 출가한 사람은 속인 모양으로 쌓아 모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물 때문에 욕심을 줄이고 넉넉한 줄을 안다.
또 수행하는 이로서 욕심을 줄이고 넉넉한 줄을 알지 못하면 탐심은 차차 더하여져서 재리 때문에 구하지 않아야 할 것을 구하며, 재리를 욕심내고 좋아하기 때문에 끝내 안온할 때가 없으리니, 깊이 탐착하기 때문이다.
또 이 사람의 출가는 멀리 여윔의 즐거움 때문인데, 재리의 탐착 때문에 그의 목적을 잊어버리게 된다.
또 역시 모든 번뇌를 버릴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밖에 있는 물건조차 버리지 못하거든 더군다나 안에 있는 법이겠는가?
또 이곳은 바로 고통받을 원인이 됨은 마치 우박이 나락을 해치는 것과 같다고 본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을 줄이고 넉넉한 줄 아는 것을 익힌다.
또 보시 받은 물건의 갚기 어려움이 마치 빚을 지고 갚지 못하면 뒤에 고통을 받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본다.
또 이것은 모든 부처님과 어진 사람들이 버렸던 바로 본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내가 이곳에 가까이 하지 않으니 이곳도 나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심과 같다.
또 이 수행하는 이는 착한 법이 넉넉하기 때문에 이곳을 버린다.
부처님의 말씀에
“여러 하늘조차도 오히려 벗어나는 즐거움[出樂]과 여의는 즐거움[離樂]과 적멸의 즐거움[寂滅樂]과 참된 지혜의 즐거움[眞智樂]을 얻되 내가 얻은 바는 같을 수가 없다”고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이곳을 버린다.
또 사리불이 말하기를
“나는 모양 없음[無相]을 잘 닦고 공한 삼매를 지녀서 온갖 바깥 만물을 관찰하되 그것보기를 마치 눈물이나 침 보듯 한다”고 함과 같다.
또 수행하는 이는 욕락을 받되 만족함이 있다고 보지 않음이 마치 짠물을 마시면 갈증을 제거하지 못함과 같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지혜를 구하는 것으로 만족을 삼는다.
또 욕심이 많은 사람을 보건대 항상 원을 세워서 많은 것을 구하나 얻어지는 것은 적다. 그러므로 항상 고통이 있다.
또 구걸하는 사람을 보건대, 남에게 천대를 받는 데, 욕심이 적은 이가 존경을 받는 것보다 못하다.
또 출가한 사람이 많이 구하는 것은 그의 할 노릇이 아니며 남이 주는 것일지라도 받지 아니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므로 욕심을 줄이고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멀리 여윈다 함은 만일 출가거나 재가한 사람은 그 가운데서 몸으로 멀리 여의고 모든 번뇌에 대하여는 마음으로 멀리 여의면 그것을 멀리 여윔이라 한다.
[문] 수행하는 이는 무엇 때문에 멀리 여의는 것인가?
[답] 모든 출가한 사람은 아직 도를 얻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멀리 여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지만 모든 속인들은 여색과 시끄러운 가운데 살고 있으므로 끝내 안락함이 없다.
또 만일 멀리 여의면 마음이 쉽사리 적멸하여지기가 마치 물을 흔들지 아니하면 자연히 맑아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멀리 여윔을 공부한다.
또 이 멀리 여의는 법은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많은 부처님에게서 칭찬을 받는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부처님은 비구가 마을 가까운 곳에서 안좌(安坐)하는 것을 보면 마음에 기뻐하지 않지만
또 비구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누워 잠자는 것을 보셔도 마음에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마을 가까운 곳에서 안좌하면 여러 가지 인연이 많아서 선정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여도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고 증득해야 할 것을 증득하지 못하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워 자는 것은 비록 조금 게으르기는 하지만 만일 일어나서 선정을 구하게 되면 흩어진 마음이 잘 껴잡아지며 마음을 껴잡으면 해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모양을 취하므로 인하여 탐욕 등의 번뇌를 일으키지만
고요한 곳에서는 물질 등의 모양이 없는지라 번뇌 끊기가 용이함이 마치 섶이 없으면 불이 저절로 꺼지는 것과 같다.
또 경전 중에는
“만일 비구가 모아서 살기를 좋아하고 잡담을 좋아하면 대중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애착의 인연조차 해탈할 수 없거늘 하물며 무너지지 않는 해탈을 얻겠는가? 멀리 여의는 행은 반드시 다 함께 증득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등불이 바람을 여의면 밝게 비치는 것과 같이 수행하는 이도 그와 같아서 멀리 여의는 행 때문에 참된 지혜를 통달할 수 있다.
정진이라 함은 수행하는 이가 정근(正勤)을 행하여서 착하지 못한 법을 끊고 착한 법을 닦아 모으면 그 중에서는 애써 행하게 되기 때문에 정진이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불법의 이익을 능히 얻는다. 왜냐하면 착한 법을 쌓음으로써 이익이 나날이 더 늘어가기란 마치 우발라(憂鉢羅)와 발두마(鉢頭摩) 들이 물이 불어나는 대로 더욱 자라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게으름을 피우는 이는 마치 나무공이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나날이 닳아져 없어짐과 같다
또 정진하는 이는 이익을 얻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기뻐지거니와 게으름을 피우는 이는 나쁜 법이 마음을 덮는지라 항상 괴로움을 품는다.
또 정진하는 이는 생각생각 동안에 착한 법이 항상 자라나서 줄어지는 일이 없으며, 또 깊이 정진을 행하면 가장 수승한 모든 부처님의 도를 얻는다.
경전 중에서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깊이 정진을 닦으면 부처의 도에 이르리라”고 하심과 같다.
또 정진하는 이는 선정의 마음을 얻기 쉽다.
또 우둔한 근기로 정진만하면 오히려 생사에 빨리 해탈을 얻지만 영리한 근기라도 게으르면 얻을 수 없다.
또 금생이거나 내생이거나 세간이거나 출세간이거나 간에 모든 이익은 다 정진으로 인하며, 온갖 세간의 모든 괴로움은 다 게으름으로 인한다. 이와 같이 게으름의 허물과 정진의 이익을 보게 되기 때문에 정진을 생각한다.
바른 생각[正憶]이라 함은 항상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身受心法]에 있어서 바르고 편안한 지혜를 닦는 것이다.
[문] 이 네 가지의 법을 생각하면 어떠한 이익들을 얻는가?
[답]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함이 마치 수비를 착실히 하면 나쁜 사람이 들어오지 못함과 같다.
또 병이 가득 차면 다시는 물을 넣지 못함과 같이 착한 법이 가득 차면 모든 악한 법을 용납하지 않는다.
또 이 바른 생각을 닦으면 해탈 갈래의 온갖 착한 법을 껴잡는 것이
마치 바닷물을 마시면 뭇 냇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니, 온갖 냇물이 큰 바다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 이 바른 생각을 닦는 일을 자재한 행의 처소[自在行處]에 머무른다고 한다.
번뇌의 마귀[煩惱魔] 떼가 무너뜨릴 수 없음이 마치 매와 볍새의 비유와 같다.
또 이 사람의 마음이 편안하게 머물러서 움직이기 어려움은 마치 둥근 병이 틈 속에 넣어짐과 같다.
또 이 사람은 오래지 않아서 이익을 얻을 것이다.
비구니경(比丘尼經) 중에서
“모든 비구니는 아난에게 물었다.
‘대덕이여, 우리가 염처(念處)를 잘 닦으면 깨달음이 본래에서와 다르겠습니까’
아난이 대답하였다.
‘이 법을 잘 닦으면 으레 그렇게 된다’고 함과 같다.
선정의 마음이라 함은 만일 선정의 마음을 익히면 미묘한 이익을 얻는다.
경전 중에서
“선정의 마음을 닦으면 사실대로 알 수 있다”고 함과 같다.
또 이 사람의 몸으로 남보다 뛰어난 법을 얻는 일이니 몸에서 물과 불을 뿜으며 날아다님이 자재하는 일 따위이다.
또 이 사람은 즐거움을 얻는 일은 모든 하늘과 범왕들까지도 따르지 못할 바이다.
또 이 사람을 마땅히 할 일은 하고 하지 아니할 일은 하지 않는 이다”라고 한다.
또 선정을 잘 닦아 익히면 착한 법이 항상 늘어간다.
또 선정을 닦아 익히는 이는 뒤에 뉘우치는 마음이 없다. 이 사람을 출가의 결과를 얻은 이라 부르며,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이라 부른다.
다른 사람이 공연히 남의 공양을 받는 일과는 같지 아니하다.
이 사람은 능히 시주의 복에 보답할 수 있고, 그 밖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또 이 선정의 마음의 법은 모든 부처님과 성현들이 모두 친근한 바며, 또 온갖 착한 법을 받아낼 수 있다.
또 만일 선정이 잘 성취되면 성인의 도를 얻고, 설사 성취하지 못한다할지라도 깨끗한 하늘에 가서 나는 것이니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를 말한다. 왜냐하면 보시 하는 등의 일로써는 이런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니, 마침내는 모든 죄악을 짓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경전 중에서
“‘어린아이가 나면서부터 자비를 익히면 나쁜 마음을 일으키거나 나쁜 마음을 생각하게 되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하심과 같다.
이것은 선정의 힘이다.
또 선정의 마음을 참된 지혜의 인(因)이라 한다. 참된 지혜는 모든 행을 다하며, 모든 행이 다하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은 사라진다.
또 수행하는 이는 온갖 세간과 출세간의 일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이내 판단하며 헛되이 공력을 들이지 아니한다.
다른 사람으로는 마음을 내어 그의 얻은 바를 헤아려 볼 수조차 없다. 그 때문에 선정의 마음은 이익을 얻는다고 말한다.
지혜는 슬기로운 이의 마음 가운데서는 번뇌를 내지 않는다.
혹시 나더라도 바로 사라지는 것이 마치 한 방울의 물을 뜨거운 철판 위에 떨어뜨림과 같다.
또 슬기로운 이의 마음은 모든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혹시 일어나더라도 바로 사라지는 것이 마치 나뭇가지 위의 이슬이 햇빛만 보면 말라벌미과 같다.
또 만일 지혜 눈[智眼]이 있어서 불법을 잘 관찰하면 마치 눈을 가진 사람이 햇빛을 잘 이용하는 것과 같다.
또 지혜있는 이를 가리켜서 불법의 갈래를 얻었다고 하는데 마치 친자식이 아버지의 재산 몫을 얻는 것과 같다.
또 지혜로운 이를 살아 있다 하고, 그 밖의 사람을 죽었다고 한다.
또 지혜로운 이를 참 도인이라 하는 것이니, 능히 도를 알기 때문이다.
또 지혜로운 이는 불법의 맛을 앎이 마치 혀가 결단나지 않았으면 다섯 가지 맛을 구별할 수 있음과 같다.
또 지혜로운 이는 부처님의 법 가운데서 마음이 안정되어 움직이지 아니함이 마치 돌로 된 산을 바람이 움직일 수 없음과 같다.
또 지혜로운 이를 믿음[信]이라 부르는데 네 가지 믿음을 얻어서 다른 것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거룩한 지혜의 근본을 얻으면 부처님의 제자라 하고, 그 밖의 사람을 외범부(外凡夫)라 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능히 이익을 얻는다고 말한다.
쓸모없는 의론이 없다 함은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거나 하고 논의하면 쓸모없는 의론이라 한다.
아난이 사리불에게 물음과 같다.
“만일 여섯 가지 닿임이 욕심을 여의는 데 들어서 다 없어지면 다시 남은 것이 있는가”
사리불은 말하였다.
“여섯 가지 닿임이 욕심을 여의는 데 들어서 다 없어졌다면 설사 나머지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논의할 것이 못되거늘 그대는 논의 하겠는가”고 하였다.
만일 없는 것을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라 하면서 문답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문] 이 일은 어찌하여 논의할 수 없다는 것인가?
[답] 이것은 실아[實我]의 법에 대하여 하나인가 다른가를 묻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답하지 아니한다.
나는 결정코 없으며 다만 다섯 가지 쌓임 중에서 이름을 거짓 붙여서 설명할 뿐인데,
만일 있다 없다 하는 따위로 대답하면 곧 아주 없다[斷]와 항상하다[常]에 떨어지게 된다.
만일 인연으로 나를 설명하면 그것은 쓸모없는 의론이 아니다.
또 만일 중생의 공[衆生空]함과 법의 공[法空]함을 보면 쓸모없는 의론은 없다.
그러므로 쓸모없는 의론이 없는 이는 부처님의 법의 이익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것을 착한 생각을 구족한다고 한다.
12.30. 정구품(定具品) 중 오정구품(五定具品)
착한 신해(信解)를 갖추었다 함은 수행하는 이가 만일 열반을 좋아하고 생사를 싫어하면 착한 신해라 한다. 그와 같은 신해는 빨리 해탈을 얻는다.
또 열반을 좋아하는 이는 마음에 애착이 없고 또 열반을 좋아하면 두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만일 범부로서 마음에 열반을 생각하면 놀람과 두려움을 품으면서
“나를 영원히 잃어버리는구나”고 하기 때문이다.
[문] 어떠한 인연으로 열반을 믿고 이해하는가?
[답] 수행하는 이가 세간의 무상으로 고통스럽고 허무하고 나가 없는 것을 보면 열반에 대하여 고요히 사라짐의 생각을 낸다.
또 이 사람의 본래 성품은 번뇌가 경미한지라 열반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마음에서 믿고 즐긴다.
또 어진 스승으로부터거나 혹은 경서를 읽거나 간에 생사의 허물이 무시경(無始經)과 5천사(天使) 등의 모든 경전 중의 말과 같음을 들으면 생사를 싫어하면 열반을 믿고 즐긴다.
수행하는 이로서의 분수를 갖춘다 함은 경전 중에서 다섯 가지 수행하는 이의 분수를 말함과 같다.
첫째는 믿음이 있고,
둘째는 마음에 아첨과 굽음이 없으며,
셋째는 질병이 적고,
넷째는 정진하며,
다섯째는 지혜가 있는 것이다.
믿음이 있다 함은 삼보와 사제(諦)에 대하여 마음에 의심이 없음을 말한다. 의심이 없기 때문에 빨리 선정을 성취한다.
또 믿음이 있는 이의 마음은 기쁨이 많다. 그러므로 빨리 선정을 성취한다.
또 믿음이 있는 이는 마음이 조복되어서 껴잡기가 용이하다. 그러므로 빨리 선정을 얻는다.
[문] 만일 선정으로부터 지혜를 낸 연후에 의심을 끊는 것이라면 지금은 어찌하여 선정보다 먼저 의심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답] 많이 들음 때문에 의심하던 것을 끊은 것이오, 선정을 얻었기 때문은 아니다.
또 깊이 신앙하는 집에 태어나고 믿는 이와 사업을 함께 하면서 항상 신심을 닦으면 비록 선정을 얻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의심하지 않는 이런 일 따위이다.
아첨하거나 굽지 않는다 함은 순직한 마음으로 숨기는 것이 없는지라 이는 제도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니 마치 사람이 의사에게 자세히 병세를 이야기하면 치료하기 쉬움과 같다.
질병이 적다함은 초저녁으로부터 새벽까지 정진을 쉬지 아니해야 할 터인데, 만일 병이 많으면 도를 수행하는데 방해가 된다.
정진한다 함은 도를 구하기 위하여 항상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마치 부시를 치되[鑽燧] 쉬지 아니해야 빨리 불을 얻는 일과 같다.
지혜라 함은 지혜가 있음으로써 위의 네 가지 일의 결과를 맺으리니 이른바 성도(聖道)인 것이다.
[문] 염처(念處) 등의 법도 역시 수행하는 이의 갈래라 하는데, 어찌하여 이 다섯 가지 법안을 말하는가?
[답] 비록 다 같이 이것이 갈래이기는 하나 이 법이 가장 수승하고 이것이 수행하는 이의 긴요한 바라, 이 때문에 특별히 말한 것이다.
또한 온갖 악을 여의고 온갖 선을 쌓는 것을 수행하는 이의 갈래라 하는데, 구니사경(瞿尼沙經) 안에서 말함과 같다.
해탈의 곳을 갖춘다 함은 다섯 가지 해탈의 곳을 말한 것이니,
첫째는 만일 부처님이나 높은 비구가 그를 위하여 설법하면 그가 들은 바에 따라 말씀의 뜻을 통달하고 통달하기 때문에 마음에 기쁨이 생기며 마음이 기뻐지면 몸이 편안해지고 몸이 편안해지면 즐거움을 느끼며 즐거움을 느끼면 마음이 껴잡아지리니,
이것이 첫 번째의 해탈의 곳이다.
수행하는 이는 이 해탈의 곳에 머무르기 때문에 생각[憶念]이 굳고 강해져서 마음은 선정을 껴잡으며 모든 번뇌는 모두 다 끊어져서 반드시 열반을 얻는다.
두 번째는 경전을 잘 외우며,
세 번째는 남을 위하여 법을 말해 주며,
네 번째는 혼자 있으면서 모든 법을 생각하며,
다섯 번째는 선정의 모습을 잘 취하는 것이니,
아홉 가지 모양들을 말한 것으로서 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문] 부처님과 높은 비구는 무엇 때문에 이 행자를 위하여 법을 말씀하는가?
[답] 법을 받아서 큰 이익을 얻을만하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설법하는 것이다.
또 이 비구는 부처님으로 인하여 출가한지라 모든 근기가 순숙하였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설법하는 것이며,
높은 비구는 행하는 업이 동일하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설법하는 것이며,
또 이 수행하는 이는 반드시 법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설법한 것이다.
또 이 사람은 깨끗한 계행 등의 공덕이 있어서 성숙하였음이 마치 완전한 그릇이라야 물건을 담을 수 있음과 같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설법하는 것이다.
이것을 세 가지 지혜라 한다.
말에 통달하는 것은 바로 많이 듣는데로 부터 얻는 지혜[多聞慧]이고
뜻을 통달하는 것은 바로 생각하는 데로부터 얻는 지혜[思惟慧]이다.
이 두 가지 지혜로부터 마음의 기쁨을 내게 하며 내지 마음을 껴잡아서 진실한 지혜를 내게 하므로 이것을 닦아서 얻는 지혜[修慧]라 한다.
이 세 가지 지혜에는 세 가지의 결과가 있는데 싫엏마과 여윔과 해탈이다.
또 법을 듣고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하여 설법하면 그것을 많이 듣는 데서 얻는 지혜요, 모든 법을 생각하는 것 생각으로부터 얻는 지혜요, 선정의 모습을 잘 취하는 것은 닦는 데로부터 얻는 지혜라 한다.
[문]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샘이 다함[漏盡]의 이 두 가지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선정으로 번뇌를 막기 때문에 마음이 해탈한다 말하고 영영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샘이 다했다고 말한다.
[문] “계행을 가지면 마음은 뉘우치지 않고 마음에 뉘우치지 아니하면 기쁨들이 있다” 하고
혹은 “보시 따위로 인하여 역시 해탈을 얻는다”고 말함과 같이
계행을 가지는 등의 법도 역시 해탈의 곳이거늘 무엇 때문에 이 다섯 가지 법만을 말하는가?
[답] 수승하기 때문에 특별히 말하는 것이다.
[문] 이 법에는 어떠한 수승한 점이 있는가?
[답] 이것은 해탈의 가까운 인연이고 계행 등은 먼 인연이기 때문에 말하지 아니한다.
[문] 어떻게 그것이 가까운 인연인 줄 아는가?
[답] 수행하는 이는 법을 듣고서 음(陰)과 계(界)와 입(入) 등이 다만 여러 가지 법으로 화합한 것이다.
그 중에는 나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붙인 이름을 부순다.
붙인 이름을 부수면 이것이 곧 해탈이기 때문에 가까운 인연이라 한다.
또 경전 중에서
“많이 듣는 공덕이라 함은 다른 이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으면서 마음을 쉽게 껴잡는 따위이다”라고 하였다.
역시 이러한 일 때문에 그것이 가까운 인연인 줄을 안다.
또 불법에는 큰 공덕이 있는데 번뇌를 끊고 열반에 이르는 따위이다.
이 적멸한 법 가운데서 듣기도 하고 외우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 생각하기도 하면 빨리 해탈을 얻으므로 가까운 인연이라 한다.
또 보시로는 큰 부자가 되고 지계로는 존귀하게 되며 많이 들음은 지혜를 얻고
지혜 때문에 모든 번뇌가 다하게 되는 것이요, 부귀 때문은 아니므로 가까운 인연인 줄을 안다.
또 사리불 등의 큰 지혜 지닌 이라고 일컬음을 모두가 많이 들음으로 말미암아서다.
[문] 만일 많이 들음 때문에 마음을 껴잡기 쉽다하면 아난은 어찌하여 초저녁부터 새벽까지도 해탈을 얻지 못하였던가?
[답] 아난은 머리가 베개에 닿기도 전에 바로 해탈을 얻었다. 그러므로 희유한 법[希有法] 중에 있었다고 하겠다. 무엇 때문에 빠르지 않다고 말하는가?
또 아난이 그날 밤에는 정진이 조금 과해서 너무 피로하였기 때문에 해탈을 얻지 못하였다.
또 아난은 스스로 맹세하기를
“나는 오늘 밤에는 반드시 샘이 다함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역시 보살이 도량에서 스스로 맹세하듯 하였거늘 누가 아난과 같은 이런 힘을 가진 이가 있겠는가? 모두가 많이 들었던 힘이다.
장애가 없다 함은 이른바 세 가지 장애로서 업의 장애[業障]와 과보의 장애[報障]와 번뇌의 장애[煩惱障]이다.
만일 사람이 이 세 가지 장애만 없으면 어려운 곳[難處]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만일 모든 어려운 곳을 여의면 도를 받을 만하다.
또 이 사람을 네 가지 바퀴[輪]를 구족하였다 하리니 좋은 국토와 어진 사람에게 의지함과 스스로 바른 원을 세움과 전생의 복덕이다.
또 네 가지 수타원의 분수를 성취하나니, 어진 사람에게 친근하는 일과 기뻐하면서 바른 법을 듣는 일과 스스로 바르게 기억하는 일과 법에 따라 행하는 일이다.
또 탐심 등의 세 가지 법을 버리는 일이니,
경전 중에서
“세 가지를 끊지 아니하면 늙고 병들고 죽음을 뛰어나지 못한다”고 함과 같다.
집착하지 아니한다 함은 이쪽 언덕에도 집착하지 않고 저쪽 언덕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중류(中流)에 빠지지도 않고 육지에 나오지도 않으며,
사람에 대한 고집이거나 사람 아닌 것에 대한 고집도 하지 않고 소용돌이에 들지도 않으며 스스로가 썩어서 문드러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쪽 언덕이라 함은 안의 여섯 가지 감관을 말한다.
저쪽 언덕이라 함은 바깥의 여섯 대경을 말하며
중류라 함은 탐하고 기뻐함을 말하며
육지라 함은 아만을 말하며
사람에 대한 고집이라 함은 재가와 출가의 화합을 말하며,
사람 아닌 것에 대한 고집이라 함은 계행을 지켜서 천상에 나기 위한 것이며,
소용돌이라 함은 계행을 버리는 것을 말하며,
썩어서 문드러진다 함은 중한 계율을 깨뜨리게 됨을 말한다.
만일 사람이 안 감관에서 나라는 생각을 내면 곧 바깥 대경에서 내 것이라는 마음을 내며
안팎의 감관으로부터 탐심과 기쁨을 내면 바로 그 안에 빠지게 되며, 이로부터서는 아만을 낸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이 몸에 집착하면 느낌에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와서 경멸하거나 헐뜯으면 교만을 내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나와 내 것과 탐심과 기쁨과 아만 때문에 그 마음을 산란하게 하므로 그 밖의 일을 이루게 된다.
[문] 여기서 무엇 때문에 물로써 비유를 삼는가?
만일 여덟 가지 거룩한 도를 물로써 삼는다면 안팎의 여섯 가지 감관으로 언덕을 삼거나 기쁨과 탐냄 따위로 중류를 삼지 않아야 하며,
또한 소용돌이와 썩어 문드러짐도 있지 않아야 한다.
만일 탐애로써 물을 삼는다면 어떻게 이에 따라서 열반에 이를 수 있겠는가?
[답] 여덟 가지 거룩한 도로써 물을 삼는다는 비유가 반드시 전부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이 나무토막이 여덟 가지 어려움을 여의면 반드시 큰 바다에 이른다는 것과 같다.
비구도 그와 같아서 모든 흐름의 난(難 )을 여의면 여덟 가지 거룩한 도라는 물을 따라서 열반의 바다에 흘러드는 것이니,
마치 젖[乳]은 조개와 같다는 말은 다만 그 빛을 취했을 뿐이요, 단단하거나 부드러움을 취한 것이 아니며,
얼굴이 달 같다는 말은 다만 둥실둥실함을 취했을 뿐이요, 모양을 취한 것이 아님과 같다.
또 수행하는 이가 거룩한 도를 벗어난 뒤에 안팎 감관에 집착한다면 이 나무가 물속에서 이 쪽 저 쪽 언덕에 닿으면서 썩어 문드러지는 것보다 못하다.
어떤 논사는 말하기를
“항하수가 반드시 큰 바다에 도달하듯이 여덟 가지 거룩한 도는 반드시 열반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비유가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요약하여 열한 가지 선정의 밑받침을 설명하였다.
만일 이 법이 있게 되면 저절로 선정을 얻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