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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보살장정법경 제27권
[대비 여래]
그때 대비(大悲)여래께서는 설법하고 교화하여 무량 아승기의 유정들이 다 물러나지 않는 자리에 머물렀으며, 그들에게 좋은 이익을 주시고는 곧 반열반(般涅盤)에 드셨는데, 바른 법은 1구지 년 동안 세상에 머물렀다.
그 부처님의 사리는 세상에 널리 퍼졌는데, 그것은 내가 멸도한 뒤에 퍼지는 사리와 같아서 다름이 없었다.
사리자여, 이렇게 말할 때 여러 정사(正士)들은 용맹하고 광대한 정진을 일으키고 심사(尋伺)를 일으켜 세간을 관찰하고는 유정들을 이롭고 즐겁게 하면서 마음에 물러남이 없었다.
또 보살마하살들은 바른 생각을 일으키되 더욱 늘리어 마음에 간단이 없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였다.
이와 같이 무량 아승기겁 동안 나고 죽고 떠도는 동안에 유정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면서 부처의 보리를 구하기를 원하였었다.
사리자여, 나도 그때에 이런 원을 세웠다.
즉 나고 죽는 동안에 정진의 갑옷을 입고 유정들을 교화해 이롭게 하고, 일체 정진의 행원을 원만히 하기를 원하였으며, 용맹 정진하는 마음이 물러나지 않아 보리를 이루기를 원하였었다.
[물러나지 않는 용맹 정진]
또 사리자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물러나지 않는 용맹 정진인가?
보살마하살이 물러나지 않는 용맹 정진행을 행할 때 비록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불 무더기를 보더라도 여래의 정등보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용맹 정진을 일으켜 그 불 속에 들어가서도 잘 참고 게으름을 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 보살은 이 법을 들을 때에는 곧 1겁을 채우는 정진의 행을 초월하느니라.
또 그 보살이 이 법을 들을 때에는 물러나지 않는 용맹 정진에서 한량없는 선근을 더욱 자라게 하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살마하살이 물러나지 않는 용맹 정진을 행할 때에는
일체 유정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열반을 구하되, 순일하여 섞임이 없고 항상 굳세게 머물러 선과 불선에 대해 사랑과 동정을 일으키며, 모든 유정들에게 상응한 행을 행하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살마하살은 용맹 정진을 행하되,
모두 게으르지 않아 어디서나 발을 들거나 발을 내리거나 항상 보리심을 떠나지 않으며,
3보를 관찰하여 항상 눈앞에 두면서도 일체 유정들을 버리지 않으며,
또한 일체 번뇌를 따르지도 않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살마하살은 용맹 정진을 행하되
모두 게으르지 않으며, 이미 났거나 아직 나지 않은 모든 선근의 힘을 다 보리의 바른 도에 회향하며, 다시 선근을 늘리어 다함이 없게 하느니라.
사리자여, 비유하면 모든 냇물이 큰 바다로 들어가 그 물이 다함이 없는 것처럼
이제 이 선근을 보리로 회향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이 다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물러나지 않는 용맹 정진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살마하살이 물러나지 않는 용맹 정진을 행할 때에는
모두 게으르지 않고, 모든 바른 행에 있어서 일체지지(一切智智)로 선근을 모아 쌓으며, 다시 일체 유정들을 이롭고 즐겁게 하나니,
그러므로 물러나지 않는 용맹 정진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여, 나는 지금 보살마하살 내지 일체 유정이 얻는 복 더미와 내지 유학(有學)ㆍ무학(無學)ㆍ성문ㆍ연각이 얻는 복 더미를 대충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여래의 한 털끝만큼 얻는 복 더미에도 미치지 못하거늘 하물며 여래 온몸의 털구멍이 가진 복 더미이겠는가?
그것은 여래께서 무량겁 동안 광대한 복 더미를 수행하고 쌓아 모았기 때문이다.
비록 어떤 이가 광대하게 복 더미를 쌓아 모았다 하더라도 이런 행상의 백분 천분도 여래의 한 대인상(大人相)에도 미치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여래의 일체의 상호이겠는가?
\또 저 복 더미는 여래의 미간백호(眉間白毫)가 짓는 하나의 가월(珂月) 모양에도 미치지 못하거늘 하물며 백천으로 맴돈 백호 속의 공덕이겠느냐?
또 저 복 더미는 여래의 볼 수 없는 한 정수리 모양에도 미치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여래의 대장부상이겠으며……오슬이사(烏瑟貳沙)의 모든 기관의 상호가 내는 백천 구지의 공덕이겠는가?
또 저 복 더미는 여래의 큰 법라(法螺) 소리의 한 설법 모양에도 미치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여래의 광대한 법음(法音)이 한량없는 세계에 두루 가득 차 유정들로 하여금 모든 기관이 조화되어 모두 기뻐하게 하고, 그 훌륭한 이해를 따라 잘 조복하게 함이겠는가?
이런 얻기 어려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이해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은, 한량없는 세계에서 여래께서 큰 소리를 내어 유정들을 다 듣게 하는 것을 배우면서 정진의 갑옷을 입고 견고한 뜻을 가지고, 보살의 물러나지 않는 용맹 정진의 행을 즐겨 익히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살마하살이 정진행을 닦을 때에는 물러서지 않는다.
설령 삼천대천세계 일체 유정들로 하여금 훌륭한 이해와 지혜의 힘을 구족하게 하더라도,
만일 유정들이 이 보살장(菩薩藏)의 정법을 따라 지혜의 힘을 완전히 성취한 데 비하면 그 공덕은 백분 천분 백천만억분 내지 오파니살담분(烏波尼殺曇分)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요약해 말하면 이런 삼천대천세계 일체 유정들로 하여금 다 수다원(須陀洹)의 지혜의 힘, 사다함(斯陀含)의 지혜의 힘, 아나함(阿那含)의 지혜의 힘, 아라한(阿羅漢)의 지혜의 힘을 얻게 하고, 또 10신(信)ㆍ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回向)ㆍ불퇴전지(不退轉地)의 지혜의 힘과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의 자리를 얻게 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한량없는 세계의 일체 유정들로 하여금 다 일생보처 보살의 지혜의 힘을 얻게 하더라도,
만일 어떤 유정이 여래의 분별없고 또 분별 있는 지혜의 힘 등을 듣고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그때에 차례로 그 깊은 지혜의 힘을 즐거워하면 앞의 공덕은 이것의 백분 천분 백천만억분 아승기분 내지 오파니살담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보살은 용맹 정진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차라리 신명(身命)ㆍ머리ㆍ눈ㆍ골수ㆍ뇌와 일체 사지를 다 버릴지언정 여래의 지혜의 힘에 있어서 잠깐도 닦아 익히는 것을 끊기를 좋아하지 않고, 이와 같이 버리면서 용맹 정진하나니,
나는 이것을 보살의 물러서지 않는 용맹 정진행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물러나지 않는 자리를 닦고 배워야 하며,
나아가 한 마음을 일으켜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일체 유정들의 한량없고 가없는 마음의 차별에 두루 들어가야 한다.
만일 어떤 유정이 탐욕ㆍ분노ㆍ우치 등 일체의 번뇌를 두루 채웠다가 다시 보살의 마음으로 돌이켜 들어가면 그때 보살은 지혜의 힘으로 비유하고 말하여 갖가지로 추구한다.
이와 같이 용맹 정진을 일으켜 이 색상(色相)을 가진 일체 유정이 탐욕ㆍ분노ㆍ우치 등에 타는 것을 보고는
그때 보살은 온갖 방편으로 일체 번뇌를 두루 그치게 하되, 다 탄 재가 다 흩어져 남음이 없는 것처럼 하며, 다시 열반의 길을 닦아 나아가게 하나니,
나는 이것을 보살의 물러나지 않는 정진행이라 하느니라.
[3업이 정진]
또 사리자여, 보살마하살이 물러나지 않는 정진행을 닦을 때에는,
이른바 몸으로 선업을 짓고, 말로 선업을 지으며, 뜻으로 선업을 짓고, 나아가 일체 정진바라밀다는 다 몸과 말과 뜻의 업을 닦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3업이 정진을 내는 데에는 뜻이 제일이다.
어째서 뜻이 제일인가?
이른바 분별이 없음과 분별이 있음이다.
어떤 것을 분별이 없음이라 하는가? 이른바 보리심이다.
어떤 것이 분별이 있음인가? 이른바 일체 유정에 대해 대비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것이 분별이 없음인가? 이른바 인욕의 지혜로 무아(無我)의 이치를 깨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분별이 있음인가? 이른바 일체 유정을 잘 섭수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분별이 없음인가? 이른바 비록 일체 유정을 섭수하더라도 취하는 상이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이 분별 있음인가? 이른바 윤회를 싫어해 떠나는 것이다.
[주석] 위에서는 ‘분별 없음-분별 있음’이 쩍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뒤의 번역에서는 ‘분별 았음-분별 없음’의 짝으로 된 (접속문으로) 번역되어 있다. (한문 원문에는 분별 있음과 분별 없음에 대한 서술이 각각 독립된 문장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에 따르자면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삼계에 전연 소득이 없는 것이다.’에 대응하는 ‘분별 있음’의 짝이 없다. |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삼계에 전연 소득이 없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모든 재보를 즐거움을 따라 보시하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보시할 때 상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계율을 지님에 있어서 쌓아 모음이 있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계율을 지킬 때 상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괴로움을 달게 참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찰나에도 마음에 머무름이 없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모든 선근의 법을 일으키는 것이다.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항상 생각이 고요한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선정에 쌓아 모음이 있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항상 마음이 결정되어 편히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듣는 지혜를 닦아 만족함이 없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마음을 오로지 방편에 쏟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듣는 지혜로 모든 법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법의 성품을 전연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지혜에 닦음이 있는 것이다.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모든 법에 실없는 말이 없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모든 범행을 짓고 모으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모든 슬기의 성품을 다 버리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다섯 가지 신통을 잘 원만히 하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모든 유루(有漏)를 다 없애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관상(觀想)을 항상 생각하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마음으로 항상 바로 생각하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네 가지 정단(正斷)을 다 교묘히 하는 것이다.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일체 선근을 능히 초월하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문자의 상에 집착하여 출리를 구하려 하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광대한 복의 과보에 두루 상이 없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모든 유정들의 그 소질을 잘 아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모든 선근의 법을 잘 관찰하면서도 얻음이 없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모든 힘에 닦고 익힘이 있는 것이다.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옳은 것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능히 보리분법(菩提分法)을 내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모든 법을 분별하는 지혜를 떠나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바른 도를 잘 구하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온갖 신통 변화를 허공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선정의 문을 잘 쌓아 모으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사마타(奢摩他)에 머물러 오직 한 경계인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잘 쌓아 모으는 것이다.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법의 성품에 잘 들어가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인연법을 잘 이해해 들어가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인연법이 아닌 것을 잘 아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승의(勝義)의 소리에 집착하기 때문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바른 법의 행을 행하기 때문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법신을 장엄하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법신의 장엄을 버리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언어를 장엄하는 것이다.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모든 성인에 의지하여 항상 침묵하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세 가지 해탈문에 의지하여 욕심을 내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증상아(增上我)가 없기 때문이다.
또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네 가지 악마의 일을 멀리 떠나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번뇌와 습기(習氣)의 종자를 잘 버리기 때문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교묘한 방편을 잘 알기 때문이다.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지혜를 여실히 알고 보는 것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반연을 떠나 소견이 있기 때문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소견을 떠나 초월하기 때문이다.
분별이 있음이란 이른바 상념(想念)의 봄이 있는 것이며,
분별이 없음이란 이른바 뜻의 업의 견해이다.
이것을 의업의 정진이라 하나니, 정진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다.
나는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물러나지 않는 정진행이라 하느니라.
[다섯 가지 최상의 극히 묘한 법]
또 사리자여,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이 물러나지 않는 정진행을 행할 때에는
다섯 가지 최상의 극히 묘한 법을 행하여 위없는 정등보리를 빨리 증득하나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 최상의 극히 묘한 법인가?
첫째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심을 항상 생각하는 것이요,
둘째는 선지식(善知識)을 잘 친근하는 것이며,
셋째는 항상 좋은 때를 만나는 것이요,
넷째는 모든 선근의 법을 항상 쌓고 모아 항상 견고하게 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보살마하살의 구족한 계품(戒品)을 배워 원만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다섯 가지 최상의 극히 묘한 법이라 하며,
이로 말미암아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빨리 얻느니라.”
그때 존자 사리자는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혹 보살이 이 다섯 가지 최상의 극히 묘한 법을 버리더라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겠나이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리자여, 만일 보살이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심을 항상 생각하지 않고
선지식을 친근하지 않으며,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하고
선근의 법을 쌓고 모으지 못하거나 견고하게 하지 못하며,
보살마하살의 구족한 계품을 원만하게 하지 못하는 등
이런 다섯 가지 최상의 극히 묘한 법을 멀리 떠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빨리 얻지 못하나니, 그것을 어기고도 얻는다면 그럴 리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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