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높다/ 추수 끝난 우리나라 들판 길을/ 홀로 걷는다./ 보리씨 한 알 얹힐 흙과/ 보리씨 한 알 덮을 흙을/ 그리워하며 나는 살았다.’ (졸시 ‘보리씨’ 전문)
들판을 누렇게 물들였던 벼들이 다 떠났습니다. ‘다 떠났다’가 맞다는 듯이 들판은 이제 텅 비었습니다. 논두렁에 억새들만 저무는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신 손짓처럼 하늘거립니다. 들 끝에서 들 끝까지 쓸쓸하고 적막합니다.
이렇게 텅 비어가는 들에 서 보면 옛날이 절로 생각납니다.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닙니다. 내 나이 스무 살 무렵, 벼들이 베어져 누웠다가 들을 떠나면 농부들은 쟁기로 논을 갈아엎고 보리씨를 뿌리고 거름을 뿌리고 비료를 뿌리고 쟁기질로 뒤집어진 흙덩이를 쇠스랑이나 괭이로 텅텅 패 보리씨를 덮었지요.
소가 끄는 쟁기와 소를 따르는 농부의 굽은 등과 보리씨를 덮는 쇠스랑으로 흙을 텅텅 패던 농부들이 들판에 가득했지요. 보리씨는 대충 덮어도 싹이 잘 납니다. 보리씨는 자기 몸이 다 덮어지지 않아도 흙덩이에 기대 하얀 뿌리를 땅에 내리고 하늘로 싹이 어김없이 솟아납니다. 보리 싹은 외떡잎입니다. 외떡잎의 작고 여린 연두색 싹이 나오면 아침저녁으로 이슬이 내리고 서리가 내려 눈물처럼 반짝였답니다.
그렇게 보리 싹이 나고 하늘에 늦가을 달이 훤하게 떠오르면 우리들은 동네 아무 집이나 들어가 곶감서리를 해 가지고 빈 들을 지나 신작로 가에 있는 주막으로 술을 마시러 갔습니다. 텅 빈 들길에 하얗게 쏟아진 달빛, 산이 눈 뜨는 것 같은 산 아래 마을 불빛들, 신작로 가 술집의 불빛들은 따사롭고도 정다웠습니다. 그렇게 텅 빈 들 가에 배추나 무 잎은 어찌 그리 싱싱한지요.
가을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우리들은 주막에 앉아 술을 마시고 늦은 밤 다시 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거나한 술기운과 서산으로 기울어가는 달, 달빛을 받은 보리 싹들의 반짝이는 모습은 때로 여린 시인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어느 날 밤 그렇게 보리 싹들을 보며 집으로 돌아와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나 단번에 나는 시 한편을 썼습니다. 그 시가 바로 ‘보리씨’입니다. 나는 그때 그랬지요. 보리씨처럼 자기 몸 하나 덮을 흙과 자기 몸 하나 얹힐 흙을 그리워하며 살았었지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가난한 한 마을의 외로운 청년의 그 도도한 시 정신을 떠올리곤 합니다. 아무런 부러움도 두려움도 없는 그 청춘 시절 달빛을 받은 푸른 어깨를 말입니다. 우리들 앞에는 달빛 외에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었지요.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을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보면/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달빛 산 빛을 머금으며/서리 낀 풀잎들을 스치며/ 강물에 이르면/ 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 가만가만 어는/ 살 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 땅을 향한 겨울 풀들의/몸 다 뉘인 이 그리움/ 당신,/ 아, 맑은 피로 어느/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졸시 ‘섬진강15-겨울 사랑의 편지’ 전문)
그 무렵, 그러니까 시 ‘보리씨’를 쓸 그 무렵 나는 월급날이 되면 전주로 나갔습니다. 책을 사기도 하고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생들을 만나기 위해서였지요. 나는 책에 목말라 했습니다. 나는 늘 책에 허덕였지요. 오죽 책에 목이 말랐으면, 내 소원 중의 하나가 돈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대로 책을 사보는 것이었겠습니까. 월급을 탄 일요일이면 나는 살 수 없는 문학 잡지들의 시들을 책방에 서서 다 읽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읽은 글들은 내게 꿀처럼 다디달았지요. 물 묻은 바가지에 참깨가 달라붙듯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가 좋아하는 한 여인과 밤늦게까지 놀다가 막차를 타고 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전주에서 우리 집까지 2시간 정도가 걸렸지요. 막차는 10시가 넘어서야 나를 신작로 ‘그 술집’에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어깨에는 책으로 가득 채운 가방이 메어져 있었습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들판 가득 하얗게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사는 집까지 30분쯤 걸었습니다.
마을의 불빛들은 거의 다 꺼지고 어두운 산 아래 먼 마을에서는 이따금 개 짖는 소리가 들의 적막을 깨우곤 했습니다. 다문다문 살아 있는 불빛들은 이슬 먹은 밤공기 속에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었습니다. 보리 싹들이 달빛 아래 반짝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여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써서 부치고 나서 편지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편지 글이 너무나 시적이었습니다. 나는 바로 또 편지를 썼습니다. 방금 내가 보낸 편지를 다시 나에게 보내 달라고 했지요. 며칠 후에 그 편지가 되돌아왔습니다. 나는 그 편지글을 다시 고쳤습니다. 그 글이 바로 ‘겨울 사랑의 편지’가 되었습니다.
아! 가을 달빛 속에 빛나던 그 여린 보리 싹들을 이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 달빛 아래 검은 산, 그 산 아래 반짝이던 마을 불빛들도, 들 끝에서 우리들을 기다리던 따사로운 주막의 불빛도 사라졌습니다. 달빛을 하얗게 받아 빛나던 그 구불구불한 길도 사라졌습니다. 겨울 강물 속에 얼어 있던 그 풀빛 같던 사랑도 사라졌습니다. 나의 가난한 사랑 노래도 이제는 오래 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김용택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