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좌(?)상 류무석 평전
- 불우한 천재이자 정신병자들을 위한 헌사-
본인도 야욕이 많은 사람이라 오늘부터 우상화 작업에 착수해야겠다. 북한 권력의 3대 세습과 남한 권력의 3대 세습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안경이 없어 함부로 막 쓰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란다.
울 아버지는 전지전능하셨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하고 예수님을 아버지라고 막 부른다. 심지어 술 처먹고도. 아버지(유교, 불교, 무당, 도교, 기독교, 천주교 안 가리신다. 술, 담배만 좋아하면 그냥 붙어 다니셨다.), 어머니(모태 불교환자), 형(울 형도 술만 좋아하면 종교의 차이 그런 거는 가볍게 무시하신다.)을 가장 존경하는데, 모두 술고래다. 큰 여동생 유혜정도 술고래에다 담배까지 막(?) 피운다.
울 아버지는 가난한 소작농이셨다. 병자년 쥐띠. 운명이다.
경남 의창군 동면 무성리 출신이시다. 이 또한 운명이다.
조부님은 미남이셨단다. 경찰 추산이 아니라 주최측 주장이라 다 믿을 순 없지만, 아버지를 보면 사실이었던 것 같다. 조모님도 미인이셨단다. 근데 혹부리셨단다. 조부님은 가난한 천재이고 야망이 커서 마호메트처럼 전주 이씨 회안대군파 집안의 부잣집 혹부리 딸에게 장개가서 처가살이를 하셨다. 젊은 날 천날만날 술과 시와 노래와 벗하셨단다. 자연이 좋아서 노상방뇨를 밥먹듯이 하신 대유셨다. 때론 기생도 끼고 노셨단다. 근데 아다라시는 돈을 주고 사지 않으셨다. 남의 아내도 절대 탐하지 않으셨다. 왜냐면 우리 집안이 문화 류씨 좌상공파이기 때문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임을 용서하시기 바란다.
무성리의 천하의 한량이자 달건이자 정신병자셨던 조부는 어느날 문득 ‘할’ 하고 대오각성하신 모양이다.
혹부리 조모에게 가훈을 정하셨단다. “자고로 선비와 무사는 처갓집과 통시를 멀리 해야 한다.”시며,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고조부님, 고조모님이 사셨던 곳인 경남 김해 송촌마을로 따라나설 것인지를 물으셨단다. 부잣집 혹부리 할머니는 “존명”이라 하셨단다. 회안대군은 무반이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절대 “여필종부”라고 하지 않으셨다.
고난의 행군의 시작이다. 할매 저거 아버지는 절대 친일을 하지 않으셨다. 쪽바리들도 선수를 알아보기 때문이다. 불우한 젊은 천재에게 삽 한 자루와 괭이 한 자루, 원앙금침과 왕족이 쓰는 놋그릇을 선물하셨단다. 호부, 꼴랑!
할배와 할매는 뼈빠지게 일하셨단다. 관폐를 피하기 위해 산골짝 깊은 곳에서 개간하셔서 복숭아 농장을 일구셨다. 밭농사와 과수원만 하시며 우울하게 사시다 쉰 다섯에 가셨다. 운명이다. 누구도 탓하지 않고 가셨단다. 학처럼 그렇게 가셨다. 논농사 하는 것들 중에 사람 같은 거는 직접 낫들 줄 아는 반계 같은 집안의 큰 어른하고, 마름, 소작농밖에 없다 하셨다. 류형원, 류관순처럼만 살라 하셨단다.
유성용처럼 살지 말고!
반풍수는 되셨던지 공동묘지에 가셨다. 벌초하러 가기가 힘들지만 백부님과 울 아버지는 한 번도 이장을 검토하지 않으셨다. 그 어른의 기개가 소인배가 아니라서 민초들과 함께 묻히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비석도 세우지 마라 하셨단다. 그래서 비석이 없어 가끔 개고생을 한다. 잡초 우거진 골에 자는듯 누웠단다. 고이 가셨다. 단 한 방에! 그 어른은 문무를 겸한 분이기 때문이다.
문약하지 않으셨다. 일본 순사들이 할배가 술 먹고 낫 들면 다 도망가셨단다. 할배는 절대 사람을 찌르지는 않으셨단다. 겁먹게만 하셨단다. 꽃으로도 사람을 때리지 말라고 하셨단다. 강자들 뺨은 늘 때리셨단다. 여자 때리고 함부로 따먹고, 거지 때리는 것들하고는 상종도 하지 말라셨다. 다 주최측 주장이다. 경찰 추산은 안 한다.
시, 서, 화, 노래와 태껸, 검도, 국궁을 즐겨 하셨단다. 가끔 승마도 하시고. 낫 들고 부터는 일체 끊으셨단다. 북소리를 제일 사랑하셨단다. 징하고! 반풍수는 되셨는데 ‘토정비결’ 말고는 절대 보지 않으셨고, 1원 이상은 받지 않으셨단다.
할배 얘기가 길었다. 아버지로 간다. 그전에 잠깐 더 사족을 달아야 겠다.
아버지는 1녀 3남 중 차남이다.
다산하자고 할매가 우기셨다는데, 너거는 왕족이라 그래도 되지만 우리는 반계 집안이라 안 된다고 하셨단다. 기갈이 보통이 넘는 여걸인 할머니는 이 때는 여필종부하셨다.
4개 국어에 능통하셨는데, 한번도 통역을 하지 않으셨다. 민중들이 물을 때만 답하셨단다.
가방 끈 길면 교만해진다고, 음풍농월만 갈카주시고 학교를 제대로 안 보내셨다. 백부는 겨우 이작소학교를 마쳤고(한 개를 갈카주면 두 개는 아셨단다), 울 아비는 실수로 1등을 한 번 한 죄로 4학년 중퇴시키셨다. 여자한테 이겼다는 죄로! 애비 잘 못 만난 죄로 불우하게 가신 고모님, 제일 장수하고 계신 서울 삼촌은 소학교는 마치게 해주셨다.
국제정세도 좀 아셨는지 고모와 아버지는 부산으로 보내고, 삼촌은 서울에 나가 크게 출세(?)하셨다. 정직한 노동의 댓가로.
아버지가 가방 끈이 제일 짧다.
근데 혼, 창, 통이 있는 어르신이다. 4개 국어는 하셨는데, 잠깐 말고는 영어로 밥벌이를 하지 않으셨다. 천출이라 잘 붙어드셨지만 오래 하지 않으셨다. 하야리야부대 군무원, 동국제강 노동자를 하셨지만 오래 하진 앟으셨다.
지금부터 소농작이자 개간의 귀재인 울 아버지와의 시간 여행을 떠난다.
1965년 음력 7월 13일 장남 유국태 초량동에서 출생.
약력: 주촌초교, 김해중, 김해농고 1년 중퇴(꼴랑 큰 소 두 마리 갖고 어리버리한 망구 쌩이 꼬시가 진영장에 내다 팔고 가출), 쌍권총 차고 휴가 보내 준다는 말에 속아서 북파공작원 잠깐 다녀옴. 모 양아치 7급 비서로 잠깐 여의도 소풍 갔다 오심. 그것도 내가 겨우 꼬시가.
1967년 음력 8월 14일 차남 류광태 남. 본인 생일은 늘 국가공휴일이다. 본인의 탄생을 경축하기 위해! 부처님과 예수님 내 생일만 쉰다.
동국제강 다니실 때였단다. 초량에서 동국제강까지 보리밥 도시락 작대기에 걸쳐 메고 휘적휘적 걸어다니셨단다. 퇴근 때는 맨날 꼬린 상태로! 술친구가 낮술 먹고 일하다가 병신 됐다고, 임신 8개월의 만삭 아내와 세 살배기 큰 도적질을 잘 하는 성님을 데불고 바로 귀농해버리셨다.
경남 김해군 주촌면 내삼리 본동(내삼부락) 382번지.
382번. 손기정 옹 등번호다. 맞나 꼬리가 써니까? 이해하시라!
내삼리는 내가 세 개 있다. 얼마나 물이 맑고 좋았으면 내 세 개가 합쳐지는 위치에 옥수골도 있다. 김(김해 김씨) 수로왕께서 옥수골에서 한 대집이 하시면서 주촌(술마을)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셨단다. 주촌면은 국회의원을 현재까지 꼴랑 네 명 배출했는데, 둘은 잘 붙어먹고(김두한파), 둘은 도꼬다이(시라소니파)로 사셧다. 천하의 150만표 박찬종이 주촌면 출신이다. 그가 92년 도꼬다이로 와이에써, 디제이하고 한판 뜰 때 주촌면에서만은 압도적 1위를 차지했었다. 김대중이는 김해 김가고, 종필이도 김해 김가고, 영삼이 마누라는 진영 출신임에도!
우리 마을에는 주촌초교가 있다. 아버지의 자존심이다. 비가 오면 어른 1천명이 피할 만하고, 굶주린 아 들 100명은 먹여살려준 큰 포구나무가 내삼교회 옛터 옆에 아직도 서계시다. 집집이 서당이었고, 주논개 영정이 걸려 있는 주씨 재실이 있다. 주씨 재실 지기인 내삼면 5대 주당 중 한 분의 아들인 주창연이라는 친구와 단짝이라 늘상 우리 놀이터로 썼다. 민화투와 고스톱, 육백, 도로 찌꾸땡이, 나이롱 뽕, 카드놀이 등 온갖 주색(색은 안했다. 이건 공갈이다.)잡기는 주논개 영정 앞에서 배웠다. 그 때만 우리는 주논개를 기생이라고 우긴다. 놀고 나면 주논개를 제일 존경한다고 우기면서 그가 명문 사대부가의 일족임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그 어른은 우리에게 참된 단심이 뭔지를 알려주셨다. 사실은 대마초도 거기서 피우는 성들도 많았는데, 대마에 찌든 상태에서도 절대 주논개를 논개라 부르지 않았다. 가끔 그렇게 부르는 형들은 전부 호색한으로 살더라! 그것도 지 팔자겠지 하고 자랐다.
세설이 또 길었다. 우상화의 길은 참 멀고도 어렵다.
쉬엄쉬엄 해야겠다. 컵라면 값도 없는데, 고신대 출신 신수현 공에게나 가봐야겠다. 참 그 형도 나처럼 정신병자다. 그것도 국립정신병원에서 가장 환영 받는 과대망상증 환자자. 아참 하나만 더 보고 드린다. 대중이 아제도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공천 받아줬다. 87년 대선 때! 나는 육군공병학교 위관(상병 방위-노태우, 노무현과 계급이 같다.) 장교 출신이라 자유롭게 나쁜 짓을 할 때였는데, 당시 제가 우리 동네 출신 중 혼또로 존경하는 장효규(87년 이후 김해 지역운동은 대부분은 그 형과 형수(사임당을 빼닮은 김사임 누부) 아이디어가 주효한 결과가 많다.), 천하의 장효규를 배신해야 했다. 부산대 정외과 학생장 출신인 그 성이 “대중이 아제 찍자!”고 오더를 주었는데, 울 아버지는 한마디로 “대중이는 야바위꾼”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난 몰래 기완 아제한테 붙어먹었었지. 허영호 선배도 모르게. 백구라 선생님이 사퇴하자마자 대중이 아제한테 붙어먹었었지. 울 아버지는 내가 선택했다고 그 싫어하는 빨갱이를 도와주셨었지. 엄마는 손명순 여사 후배라 와이엣쓰 하고, 두 어른들 야망 덕에 집안이 콩가루 집안이 되었었지.
똥개도 1만원 짜리 지폐를 물고 다닐 때였는데, 우리 집은 네 표나 되는데 십원짜리 구경도 못했었지. 민정당만 했으면 우리집 똥개가 최소한 500은 물고 다녔을텐데. 오호애재라!
본인은 방위 근무 중일 때도 천연덕스럽게 나쁜 짓을 많이 했었지.
문반이지만 성균관 혼또 유생 출신이라 나하고 배포 맞차가 부재자투표 거부한 성연호 상병(현역)하고 백주대낮에 CA 공부하고, 밤에는 장효규한테 붙어가 NLPDR인척 하고. 그래도 나는 절대 단파라디오는 안 들었다.
제대 말년에 심심해서 단파라디오 듣다가 제대도 못한 백 모 병장 꼴 나기 싫어서.
밥은 작폐하고 참 이슬만 강조하시는 참 주사파 동네에 살면서도 주논개의 단심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아버지는 늘 내 뜻대로 해주셨다. 온갖 고난을 이겨내시면서도 무덤덤하게, 그렇게!
영어를 잘 하시면서도 미군 짚차를 보면 “양키 고 홈”만 하셨고, 운전병 출신이시면서도 면허증을 따지 않으셨다. 왜! 반계가 남명보다 낫다고 생떼를 쓰시는 분이기에! 아참 ! 또 한가지 더 있다. 주당들과 합심해서 일 작폐하실 때는 “예쓰까? 노까?”도 자주 하셨다. 너무 많이 하셔서 늘 문제였지만. 우찌할꼬! 시대와의 불화인 것을! 버부리나 반버부리가 많은 동네라서 예쓰까 노까면 망사형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