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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45. 제자도와 권세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마태복음 18장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5절부터 20절을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마 18:15-20)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제자도 마흔다섯 번째로 제목은 “제자와 권세”입니다.
신약성경에 크리스찬이라는 단어, 즉 기독교인이라는 단어는 세 번밖에 안 나오지만 제자라는 단어는 170번이 넘게 나옵니다. 그리고 그 170번이 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사람의 제자라는 의미로는 한 번도 쓰이지 않습니다. 단 한 번 사도 바울의 제자라는 뉘앙스로 쓰인 경우가 사도행전에 있어요.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의 제자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하지만 원문은 그곳도 그의 제자가 아니고 그냥 메쎄테스입니다. 사도 바울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이지요.
신약성경의 말씀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하나님 덕분에 이 땅에서 기름진 복을 얻고 죽어서는 신령한 복을 얻는 것인가? 그 표현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약 백성들에게 주신다고 하신 그 복의 개념 자체가 제자도의 복입니다. 물론 크리스찬의 복이고 제자도의 복인데 크리스찬의 복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덕분에 횡재를 얻은 그런 식으로 보는 오류가 워낙 만연해 있어서 문제지요. “성경의 약속은 제자가 되는 약속이지 크리스찬이 되는 약속이 아니다”라고까지 표현하고 싶을 만큼 크리스찬에 대한 개념이 아주 이상하게 왜곡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복을 얻게 되는 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걷는 제자를 만드시는 것이 예수님이 원하신 일이고 하나님의 뜻인 것이지요. 우리가 그래서 제자도라는 제목으로 쭉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지난주와 이번 주에 보고 있는 것이 권세입니다. 이 권세는 엑수시아라는 단어인데 권능하고 상당히 헷갈리는 개념으로 사람들이 많이 보고 있어요. 권능은 뒤나미스입니다. 권능, 즉 뒤나미스는 power 개념이고 권세, 즉 엑수시아는 authority입니다. 영어성경 번역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KJV이 한 번 그걸 power로 번역한 오류가 있던데 우리 마태복음 10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마 10: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개역성경에는 권능으로 번역했지만 이건 권세, 즉 엑수시아인데 권능으로 번역을 한 것은 대단히 큰 오류입니다. KJV도 power로 번역했지만 NIV는 authority라고 제대로 번역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하실 때는 뒤나미스입니다. power지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authority와 power 두 가지입니다. 권세가 주어지고 권능이 주어져요.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봉독하겠습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질 권세의 핵심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 18:18-20)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을 보면 개신교에는 잘 안 맞는 것 같고 가톨릭에 잘 맞는 것 같죠? 가톨릭 신부들이 고해성사를 받을 때 신도가 “제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죄를 고백하면 신부가 안에서 듣고 있다가 “가서 주기도문을 천 번을 외우시오. 그러면 죄가 없어집니다” 뭐 이런 우스꽝스러운 짓들을 하고 있지요. 거기에 맞는 말씀으로 보이게도 되지만 그게 아니고 제자들에게 주실 권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무시무시한 권세지요. 과연 우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우리가 땅에서 풀면 진짜 하늘에서도 풀리는 것일까? 잘 엄두가 나지 않는 그런 말씀인데 이런 어마어마한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권세를 주시기가 참 어렵지요. 왜 어려울까요? 권세를 주면 황당한 짓을 할 위험성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먼저 피스티스를 주십니다. 신실함, 피스티스를 왜 먼저 주시느냐? 권세를 주어도 괜찮을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권세를 주어도 문제를 안 일으킬 사람으로 먼저 만드시는 과정이 피스티스를 주시는 과정입니다.
인간은 신실합니다. 누구에게? 자기에게. 오로지 자기에게만 신실합니다. 자기에게 신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도 신실치 못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신실치 못합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성경의 규정인데 오로지 자기에게만 신실한 사람에게 authority를 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뭐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인간이 되는 거지요. 그렇게 엉뚱한 인간이 권세를 받게 되면, 즉 오로지 자기에게 신실한 자가 권세를 얻게 되면 그 권세를 자기를 위해서 쓰게 되지요.
따라서 인간의 신실함을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교체하십니다. “피스티스가 너희에게 온 후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로 말미암아”, “피스티스로 피스티스에 이르게 하나니” 등의 말씀이 다 그에 대한 말씀입니다. 피스티스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권세를 맡기기 위해서라고까지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권세는 도대체 왜 주시려고 하시는 것일까? 제자들이 권세를 받아야 되는 이유는 무엇이고 하나님이 권세를 주시려고 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오늘 우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땅에서 맬 일은 매고 풀 일은 풀라고 권세를 주시는 것인데 그것이 권세인 이유는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게 되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게 되기 때문이지요.
요한일서를 먼저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1장 8절과 3장 6절을 봉독하겠습니다.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일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1장 8절에서는 우리는 죄를 짓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죄 없다고 하면 넌 거짓말장이다. 그런데 3장 6절에서는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도대체 이 모순된 두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요한 사도가 지금 지체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죄를 짓는 자라는 것이냐, 죄를 짓지 않는 자라는 것이냐?
여기서 키워드는 In Christ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지체들이 그 존재 자체로는 죄를 짓는 자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장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언제 죄를 짓지 않게 되느냐?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입니다. In Christ 상태에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지요. 3장 8절 보시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합치면 어떻게 됩니까? 마귀에게 속한 때는 죄를 짓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는 때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즉 마귀에게 속하느냐 그리스도에게 속하느냐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누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은요? 항상 마귀에게 속해 있지요. 그리스도의 제자들만이 오락가락하는 것입니다. 그럼 육에 속한 크리스찬은? 육에 속한 크리스찬은 항상 마귀에게 속해 있지요. 신학자들의 글을 보다 보면 이 사람들이 어디서 공통적으로 오류를 일으키냐 하면 로마서 8장 보십시오. 전체적인 인간론과 구원론의 오류가 어디서 나오냐 하면 로마서 8장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경 중의 성경 로마서, 로마서 중의 로마서 8장 1절과 2절입니다. 이 말씀을 세례 받은 기독교인에 대한 말씀으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론과 구원론이 전체가 엉망진창인 거예요. 이 말씀도 요한일서 말씀과 똑같지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In Christ 상태에 있는 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 받은 자에 대한 이야기로 보니까 요한일서 1장 8절과 3장 6절 말씀이 모순으로 보이는 거지요. 죄를 짓는다는 얘긴지 죄를 안 짓는다는 얘긴지 도저히 해결이 안 됩니다.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 자입니다”라고 누가 얘기를 하면 거짓말장이라는 거지요. 극단적으로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가 아직도 육에 속한 자로다” 하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꾸짖지요. “내가 매를 가지고 나가랴 사랑을 가지고 나가랴” 언제까지 너희가 그렇게 육에 속한 자로 있을 것이냐? 육에 속한 크리스찬과 영에 속한 크리스찬을 구분하는 아주 중요한 말씀인데 서구 신학자들은 크리스찬이냐 아니냐만 가지고 얘기를 한단 말이지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에 속한 크리스찬은 완벽한가? 아니지요. 영에 속한 크리스찬이야말로 오락가락하는 상태의 사람들입니다. 육에 속한 크리스찬과 세상 사람들은 항상 마귀에게 속한 자이고 영에 속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가 마귀에게 속했다가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납니까? 죄를 짓다가 짓지 않았다가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가 뭘까요? 이 죄가 뭐냐에서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뭐라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마귀의 것이 되었다가 예수의 것이 되었다가, 마귀에게 속했다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다가 한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라고 목청을 높이는 것이 죄가 뭔지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죄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신실한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대표선수로 연동흠 형제님을 선택하셔서 주신 메시지가 있잖아요? 연동흠 형제님이 얘기해 보시지요. “넌 너밖에 모르잖아.” 그렇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것, 자기에게 신실한 것 그것이 죄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짓지 않는 자는 누구에게 신실할까요? 하나님께 대해 신실하고 이웃에 대해 신실합니다. 그 이웃이 누구죠? 현재 하나님 나라의 지체와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지체가 이웃입니다. 하나님께 신실하고 이웃에게 신실한 상태가 죄를 짓지 않는 상태에요. 반면에 나에게 신실한 상태가 죄를 짓는 상태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In Christ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신실하고 하나님 나라 현재와 미래의 지체들에게 신실한데, 마귀에게 속하게 되면 그 즉시로 나 자신에게 신실해집니다. 그것이 성경의 마귀론입니다. 나에게 신실한 삶은 아담이 타락하면서 생긴 겁니다. 타락하면서 생기고 추방당하면서 형벌을 받아 생긴 거지요. 타락하면서 생긴 것이 어느 것이 선하고 어느 것이 악한지,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 어느 것이 의롭고 어느 것이 불의한 지를 내가 결정합니다. 그 선과 악의 기준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추방을 당하지요.
그리고 추방당할 때 받은 형벌이 결핍의 형벌과 사망의 형벌입니다. 이 형벌이 오면서 사람들이 뭘 하느냐 하면 유불리 계산을 하며 삽니다. 어떤 것이 나에게 유리하냐 어떤 것이 나에게 불리하냐 하는 거지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인간의 삶은 두 가지를 하면서 사는 삶인데 하나는 어떤 것이 선하고 어떤 것이 악하냐는 선악 판단을 자기가 하면서 사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것이 나에게 유리하고 어떤 것이 나에게 불리하냐는 유불리 판단을 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이 선악 판단과 유불리 판단이 바로 인간의 삶인데 이 삶이 바로 마귀에게 속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예를 들 듯이 아이들 만화영화에서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하얀 옷 입은 천사가 나오고 까만 옷 입은 마귀가 나와서 먹어라 먹지 말아라 하면서 서로 싸웁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악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은 선과 악 가운데에서 갈등한다고 하지만, 그래서 양심이 자기를 찌른다는 등 말하지만 그게 아니고 어떤 것이 유리하냐를 놓고 싸우는 것뿐입니다. 유불리 판단이지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나에게 유리하냐 아니면 절제를 하는 것이 나에게 유리하냐를 놓고 싸우는 겁니다.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을 놓고도 많이 싸우는데 그걸 보고 양심이 나를 찌른다 뭐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지요. 비도덕적인 결정을 내리고자 하는 나와 도덕적인 결정을 내리고자 하는 내가 나 안에서 둘이 싸운다, 선악이 내 안에서 싸운다 그렇지만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도 결국 유불리 판단입니다. 내가 여기서 이기적인 판단을 할 거냐 이타적인 판단을 할 거냐, 또는 공동체 지향적인 판단을 할 거냐를 놓고 사람들이 갈등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그건 무슨 갈등이냐 하면 셋 중에 어떤 것이 나에게 진짜 유리한가를 놓고 하는 갈등이에요. 양심이 어떻고 윤리 도덕이 어떻고 하지만 다 유불리 판단입니다. 따라서 선악 판단도 결국은 유불리 판단에 포함되는 겁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함께 보았던 마이클 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정의를 행복 추구, 자유 추구, 미덕 추구의 세 가지 정의로 나누면서 많은 예들을 드는데 들여다보면 전부 유불리 판단입니다. 어떤 게 나에게 더 유리하냐, 어떤 게 우리 공동체에 더 유리하냐, 어떤 것이 인류에게 더 유리하냐? 그런데 그 공동체에 내가 들어있고 그 인류에 내가 들어있는 거예요. 결국 어떤 것이 나에게 유리하냐에 대한 관점이 다른 것뿐이지 정의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사실은 어떤 게 나에게 유리하냐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정의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인간을 소경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인간은 유불리 판단밖에 못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서 취득한 주체적인 선악 판단 능력을 가지고 내 유불리 판단을 하는 겁니다. 선악 판단도 유불리 판단에 동원되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큰 구도에서 보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유불리 판단밖에 없는 것이지요. “너는 너밖에 모르잖아.”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죄고 그 시스템이 바로 마귀의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때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고 하시지요.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신령한 자도, 그리스도의 제자도 자기의 유불리를 생각하는 순간 마귀의 종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라고 여러 곳에서 말씀하지요.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세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을 위해서겠습니까? 사람들을 마귀의 종 상태에서 빼내오는 권세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모습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9장 1절 이하를 보시지요.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마 9: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 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라고 선포하시는 것이 권세를 행하시는 것입니다. “중풍 병자인 네가 네 침상을 들고 일어나 걸어라” 하시는 것이 권능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 권세와 권능을 우리 제자들에게 그대로 주신다고 하십니다.
권세는 죄를 사하는 권세인데 죄를 사하는 것이 무엇이냐? 죄 사함이 서구 기독교에서 구원파까지 굉장히 중요한 교리가 되어 있지요. 그런데 죄를 사한다는 말은 “압히에미”라는 동사를 쓰는데 그 의미는 leave, send away입니다. 죄에서 떠나게 한다는 겁니다. 네가 한 나쁜 짓들을 덮어준다는 것이 아니고 죄의 시스템에서 너를 분리해낸다는 겁니다. 죄와 사람을 분리시키는 것이 권세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속해있는 죄의 시스템에서 너를 뽑아내서 너와 죄 시스템을 분리시킨다, 너와 마귀를 분리시킨다 그겁니다. 그것이 권세입니다. 반면에 중풍 병자로 하여금 자리를 들고 일어나서 정상인이 되어서 걸어가게 만드는 것은 권능, 뒤나미스지요. 기적을 행하는 은사입니다.
제자들에게 권세와 권능을 주실 때 권세는 다른 사람들을 마귀와 분리시키는 권세입니다. 그것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권세에요.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심지어 예수님도 안 믿었는데 제자들을 믿겠습니까? 그러니까 강제로 믿게 만드시려고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권세를 행할 때 사람들이 꼼짝하지 못하고 그것을 수용하게 만들게 하려고 권능을 더해 주시는 거예요. 은사를 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 말씀한 것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을 봉독하겠습니다.
(히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것이 어떤 삶입니까? “너는 너밖에 모르잖아”입니다. 그것이 종노릇하는 삶이에요. 탐욕에 휩싸이고 공포에 휩싸여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마귀에게 붙들려 마귀의 종노릇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형벌이에요. 사망의 형벌과 결핍의 형벌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지 마귀가 아닙니다. 누가 위암에 걸렸습니다. 이 위암은 마귀가 만든 병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만드신 병입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병입니다. 암은 하나님이 만드신 병이에요. 암을 하나님이 왜 만드셨죠? 형벌을 주려고 만드신 거지요. 사망의 형벌입니다. 사람을 죽이시려고 만드신 게 위암이라는 병입니다.
그렇다면 마귀의 역할은 뭐냐 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주신 형벌이 인간에게 왔을 때 그 형벌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도록 만드는 것이 마귀의 역할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권세와 제자들의 권세로 마귀와 사람이 분리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냥 사건은 사건이에요. 그것이 공포와 두려움과 불행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의 형벌과 결핍의 형벌을 주어서 인간들로 하여금 고통 속에 신음하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형벌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 하나님이 주신 형벌에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걸 절대 잊으면 안 돼요. 하나님이 주신 형벌에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실 때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이 형벌의 법칙들을 다 없애시는 것이 아닙니다. 형벌의 법칙들, 즉 자연 세계의 법칙들은 그대로입니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면 암에 걸리고 발암 물질을 먹으면 암에 걸리고 그건 당연한 거예요. 하나님이 만드신 그 당연한 자연의 법칙을 하나님이 깨트리신다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 마귀에게서 분리된 사람들은 어떤 일이 진행되느냐 하면 길흉화복의 사건들이 희로애락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사건은 사건입니다. 오히려 그 사건들을 제자도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활용하는 사람들로 바뀌는 겁니다. 그 사건들에 휘둘리던 사람에서 그 사건들을 활용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거예요. 마귀에게 속했던 자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바뀌는 이동 지점이 바로 거기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게 되기 때문에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건도 없고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건도 없어요. 그냥 사건은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이제는 다른 사람을 해방시키는데 쓰는 거지요. 희로애락의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마귀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령한 자,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의 제자, 신의 성품을 받은 자 이런 사람이 어떤 일로 인해 기쁜 마음이 든다든가 슬픈 마음이 들면 뭡니까? ‘아! 내가 다시 마귀의 수중에 들어왔구나’ 하고 확인하면 됩니다. 그럼 즉시 회개해야지요. 즉시 회개하고 다시 성령 충만을 간구하는 순간 그리스도 안으로 다시 들어오게 됩니다. 그 사건은 그대로 있습니다. 이제는 그 사건을 활용하는 사람으로 즉시 바뀌지요.
제가 항상 흥미진진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이 그것입니다. 모든 사건은 우리에게 활용수단입니다. 그 사건 때문에 내가 기뻐할 일도 없고 그 사건 때문에 내가 슬퍼할 일도 없어요. 모든 사건은 나에게 활용의 대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했는데 야고보 사도는 항상 애통하라고 하지요. 그리고 전도서에서는 언제나 마음이 연락하는 집에 가있으면 안 되고 초상집에 가있어야 한다. 그럼 항상 기뻐하라는 건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항상 기뻐하는 것은 제자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에서 기뻐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마귀와 분리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나에게 시키셨기 때문에 기뻐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10장 17절 이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눅 10:17)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2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이에요? “귀신을 막 쫓아내고 그러니까 신나니? 기분 좋니? 그러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너희가 동원된 것일 뿐 너희가 기뻐할 일이 아니라는 거지요. 너희의 기쁨은 어디에 있어야 된다고 하시는 겁니까? 하늘의 생명책입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너희는 기뻐하는 것이지 너희가 성취하는 일 때문에 너희가 기뻐하면 안 된다 하는 겁니다. 귀신이 우리에게 항복하는 것도 사건입니다. 그 사건 때문에 기뻐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이 제자들이 왜 그렇게 기뻐했을까요? 자기네가 뭔가 된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기뻐하는 거지요. 꿀밤을 한 대씩 맞아야지요. 기뻐하긴 뭘... 귀신들이 항복하니 자기네 바벨탑이 얼마나 멋있어 보였겠어요. 그러니까 기뻐하는 거지요. 절대 용납될 수 없지요.
여기서 권세와 권능의 관계를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 본질입니까? 권세가 본질입니다. 권능은 그 권세가 행해질 때 보조수단으로 쓰이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권능을 받았다고 마구 설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 사람들은 그 권능을 엉뚱한데다 씁니다. “이 위암을 가지고 온 원수 사탄 마귀야 물러가라”라고 하는데 위암은 누가 준 거라고요?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심지어 베뢰아 김기동 씨는 “감기 귀신아. 물러가라”라고 한다는데 감기 인플루엔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거예요. 사람이 감기에 걸리고 심지어 독감에 걸려 죽기도 하고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형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사람을 괴롭히는 게 아니에요.
“이 위암 귀신아 물러가라”라고 하다가 그 사람이 결국 위암으로 죽으면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귀신이 위암을 주고 그 위암 때문에 죽었으면 귀신이 데려가는 거지, 거기서 갑자기 “하나님이 데려 가셔서 이제는 영원한 복락이 우리 형제님에게 시작됩니다”라고 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겁니다. 이것이 귀신론과 마귀론에 대한 오류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마귀가 하는 일에 대한 혼란이에요. 따라서 구원론도 엉망진창이 돼버리는 거지요.
권세의 핵심은 죄에서 분리시키는 권세입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라고 번역돼 있지만 하마르티아에서 압히에미, 즉 죄에서 분리시키는 권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묶는 행위와 푸는 행위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권세를 행하는 행위이고 그 권세를 행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지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권세를 가지셨다는 것은 우리가 당연히 인정을 하게 되지만 제자들이 그런 권세를 받는다? 모든 크리스찬이 제자인데 그 모든 크리스찬이 그런 권세를 가지게 되는 것인가? 정말 그런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너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다. 당연합니다. 왜 당연하냐 하면 첫째 예수님도 무수히 실패를 하셨습니다. 권세를 행하시는 장면에서 예수님도 무수히 실패를 당하셨어요. 예수님께서 이 권세를 행하실 때 실패하시는 모습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0절을 먼저 봉독합니다.
(마 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예수님께서 아무리 권능을 행하셔도 사람들이 까딱도 안 합니다. 심지어 어떤 장면이 나오냐 하면 마가복음 6장 5절과 6절을 봉독하겠습니다.
(막 6:5-6)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상히 여긴다는 단어는 다우마조인데 wonder라는 뜻입니다. 기이하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야! 정말 신기하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이 어찌나 완강한지 여기서는 아예 권능도 행하실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최종적으로 어떻게 되지요? 열두 명 남은 제자들까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열두 명 남은 제자에게까지도 실패하시는 걸로 되어 있어요.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 다 도망가 버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지요. 그럼 도대체 예수님의 권세라는 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렇게 다니면서 실패하시고 “야! 이상하다. 왜 이렇게 실패하지?” 이러시다가 제자들까지 다 도망가 버리고 죽으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신 건 도대체 어떤 논리냐 그거지요.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17장 9절을 봉독하겠습니다.
(요 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예수님의 권세는 누구를 향해서 행해지는 권세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을 향해서 행해지는 권세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자를 향해서만 예수님의 권세가 나갑니다. 제자들은 어떨까요? 20절을 보시지요.
(요 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예수님이 기도를 하시는데 누구를 위한 기도냐 하면 예수님의 권세가 미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이고 동시에 앞으로 제자들이 하는 말에 의해 권세가 미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하십니다. 이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자들에게 미치는데 예수님을 통해서도 그 권세가 행해지고 제자들을 통해서도 그 권세가 행해지는 겁니다.
이 권세는 죄와 분리시키는 권세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마귀에게서 분리시키는 권세지요. natural한 차원에서 표현하자면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을 돌려세우는 권세입니다. 자기의 유불리 판단만 하면서 사는 사람을 돌려세우는 권세입니다. 무엇을 향해서 돌려세우는 것입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만 생각하는 자로 돌려세우는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면 뭐가 하나님의 영광이냐에 대해서 다들 헷갈리기 때문에 이게 또 오리무중으로 들어가 버리지요. 극단적인 실용주의 기독교인들의 예를 들자면 자기가 사업에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렇게 나오는 판이니까 뭐 이건 하나마나한 소리가 돼 버리지요.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나를 위해 사업을 하는데 내 사업이 잘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니 이건 뭐 소통불가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을 하나님만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권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권세고 제자들이 행하는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 권세를 행하셨을 때 어떻게 됐다고요? 다들 그 권세가 안 통합니다. 심지어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지요. 그 권세가 안 통합니다.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서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맡는 자들이 있고 사망에 이르는 냄새를 맡는 자들이 있어서 두 그룹으로 나뉜다고 하는 거지요.
우리에게서 사망의 냄새를 맡는 자들은 우리가 아무리 권능을 행해도 우리에게 돌을 던집니다. 절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에요. 제자들을 죽이려고 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권세는 누구에게 통한다고요? 선택을 받은 자들이지요. 그리고 그 때가 된 자들입니다. 우리에게서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맡게끔 하나님께서 작정해 놓으신 자들에게 우리의 권능이 통하고 권세가 미치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권세를 행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 권세가 통하든지 통하지 않든지 말입니다.
사람들을 죄로부터 분리시키는 이 권세를 받게 된 제자들은 그 일을 하는 데에 목숨을 걸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모습 먼저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4절과 5절입니다.
(고전 5:4-5)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교회 밖으로 추방해서 세상으로 보냈다는 얘기라고 말씀드렸었지요. 다시 사단 품으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사단에게서 분리시키려고 그 사람을 데려왔는데 계속 그 사람이 자기밖에 모르는 삶을 살고 있으면 다시 그냥 공동체 밖으로 보내라는 거지요. 내보내드리라는 겁니다. 저주를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내보내드리라는 거지요. 다시 사단 품속으로 가서 자기를 위해서 살게 그냥 두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8장 17절입니다.
(마 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냥 세상 사람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치고 박고 싸울 일도 아니고 논쟁을 할 일도 없고 그냥 하나님이 하셨던 것처럼 내어버려두는 거지요. 사도 바울이 묶는 장면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냥 세상으로 마귀에게 그냥 보내버리는 거지요. 야고보 사도의 경우를 볼까요? 야고보서 5장 19절과 20절, 야고보서 마지막 말씀입니다.
(약 5:19-20)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가 다시 마귀의 품으로 돌아간 자입니다. 다시 자기밖에 모르는 삶으로 돌아간 자이고 자기 싸르크스만을 섬기는 자이지요. 그런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어디로? In Christ 상태로 돌아서게 하면, 즉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자로 돌아서게 하면.... 푸는 장면입니다. 거꾸로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 묶는 장면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요한 사도의 경우는 요한일서 2장 28절을 봉독하겠습니다.
(요일 2: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 거하라. 묶는 장면입니다. 그리스도께 묶는 장면. 요한일서 5장 14절에서 17절을 제가 봉독하고 이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 안에 제자들이 묶고 푸는 모습이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요일 5:14-17)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제자들이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시면 다 들어주시는데 제자들이 구하는 게 뭐냐면 묶고 푸는 겁니다. 묶고 푸는 권세를 행하는 거예요. 지금 마귀의 손아귀에 다시 들어가서 자기밖에 모르는 삶을 살고 있는데 그것이 사망에 이르는 죄의 수준은 아닌 경우에는 그들이 회복되기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가 다시 죄와 분리되는 것을 구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지요. 묶고 푸는 겁니다.
그런데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는데 그 죄를 범하는 자들을 향해서는 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구해봐야 소용없다. 너희의 권세가 통하지 않는다. 그 죄가 뭘까요? 그 죄는 히브리서에 정의되어 있지요. 히브리서 6장 4절에서 6절입니다.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히 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게 사망에 이르는 죄입니다. 이 사망에 이르는 죄를 예수님께서 성령을 훼방하는 죄로 규정하셨지요. 마태복음 12장 28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을 귀신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그 권세를 행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데 이어서 31절을 보겠습니다.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이것이 아까 요한 사도가 말씀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수준의 범죄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즉 죽음에 이르는 죄입니다. 32절을 봉독하겠습니다.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이렇게 죄를 두 가지로 나누셨습니다. 그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즉 예수님에게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야! 이거 그럴 수가 있나“ 싶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다 예수님에게 거짓말을 했지요. 동트기 전에 닭이 세 번 우는 그 사건이 상징적인 사건인데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거 다 용서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무엇이 용서를 받지 못하냐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한다. 제자들이 권세를 행할 때 성령께서 역사를 하시는 겁니다. 제자들이 권세를 행하는데 그 권세가 안 통한다.... 왜? 성령을 훼방하기 때문에. 왜 성령을 훼방할까요?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마귀의 시스템에서 절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을 향해서는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그냥 내버려두는 겁니다. 가서 저주를 퍼붓고 하는 것은 성경을 몰라서 하는 행동입니다. 그냥 조용히 물러나는 겁니다. 심지어 제자들이 피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돌아서라고 하셨지요. 내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도 여러 번 말씀하시지요. 저들을 부끄러운 일에 내어버려 두사...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내버려두라는 겁니다. 그것을 요한 사도가 저들을 죄에서 분리시키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경우와 기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로 구분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세를 주십니다. 사람들을 죄와 분리시키는 권세입니다. 이 권세를 행할 때 수단으로 동원되는 것이 권능입니다. 은사지요.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까지 다 동원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과 받은 것을 모두 동원해서 사람들을 죄에서 분리시키는 권세를 행하는 것이 바로 제자도입니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되면 제자들은 목숨을 걸게 됩니다. 다른 아무 것도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Out of Christ 상태로 순간적으로 빠져서 내 유불리 계산을 하게 되는 때가 수시로 옵니다. 오락가락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순간들이 수시로 오게 되는데 아무리 달콤한 것이 와도 그 자리에 안주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즉시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죄에서 분리시키는 권세를 행하는 삶으로 즉시 돌아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귀한 삶이 없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가 온갖 화려한 것을 다 내어놓지요. 40일을 굶주린 예수님에게 빵 한 조각을 만들어 먹으라고 합니다. 빵 한 조각이 얼마나 귀한 것이겠어요, 40일을 굶주렸는데. 또 천하만국을 다 보여주면서 더 너에게 준다고 했지만 온갖 화려한 것을 다 보여줘도 별 흥미가 생기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죄에서 분리시키는, 마귀에게서 분리시키는 권세를 행하는 삶이 통쾌해서도 아니고 멋있어서도 아니고 그 삶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기 때문에 잠깐 Out of Christ 상태가 되어서 마귀의 수중에 다시 떨어졌다 하더라도 즉시 회개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이 세상 어느 것도 나를 만족시킬 수 없어요. 이 세상 어느 것도 내 마음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게 됩니다. 이 권세를 받으면 이 권세를 행하는 데에 목숨을 걸게 됩니다. 그 네 가지 모습을 하나씩 꼽아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논리를 전하는 것이지요. 이 복음의 논리는 창조 사건, 타락 사건, 그리고 인간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 인간의 모습을 뒤에서 조종하는 마귀론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론과 성령론이 있어서 그리스도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데 그 구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마귀로부터 분리된 모습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 In Christ 상태라는 건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런 자들이 모여 있는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 교회론이지요. 그 다음에 종말론이 있어서 이상이 조직신학 전체입니다. 조직신학 전체를 그야말로 청산유수처럼 사람들에게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한 대로 누가 너희의 소망을 묻는 자들에게는 즉시 대답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 거지요.
두 번째는 증거의 제시입니다. 그 구원이 이루어진 나의 모습과 우리들의 모습을 증거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권능을 행하는 것인데 이 권능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요. 은사들이 다 권능인데 가장 중요한 것을 순서대로 꼽는다면 첫 번째는 로기온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말.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로기온. 신탁을 받아서 그 사람에게 비수를 날리는 권능이 있고 또 그 무쇠처럼 단단한 그 사람들의 철옹성을 깨트리는 데는 기적이 아주 효과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다 죽어가던 남편을 살려준다든가... 물론 그게 답은 아니지요. 답은 아니지만 상당히 효과적인 공격수단입니다. 마귀로부터 그 사람을 떼어내기 위한 공격수단이에요. 다 죽어가는 애를 살려놓는다든가... 쓸 만한 방법이지요. 물론 본질은 아니지요. 은사를 너무 과신하면 곤란해요. 다 아시는 이야기지만 제가 교회개척 초기에 네 살짜리 여자 아이 아토피 때문에 기도하고 그 다음날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부터 온 가족이 교회에 등록을 했어요. 그런데 6개월 후에 떠났습니다. 왜 떠났을까요? 가게를 팔아야 되는데 이 가게가 안 팔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난번에는 우연이었나보다 하면서 떠나는 겁니다. 그 분들은 계속 그 다음 로또가 당첨되기를 원하는 거지요. 저는 6개월 동안 죽어라고 부르짖으면서 외쳤어요. 회개하시라고. 안 되는 거지요.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은사와 권능에 대해서 너무 의존하면 대단히 큰 오류가 생깁니다. 죽은 사람 살려놓으면 뭔가 될 것 같지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안 됩니다. 그 다음 돈 벼락 맞기를 위해서 또 기도하고 있는데 뭐 안 되는 거지요.
마지막 네 번째가 중보기도입니다. 사람을 죄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결국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간절한 중보기도가 너무나 중요하지요. 중보기도 없이 내가 뭘 해서 끝장을 보겠다고 달려들면 백전백패입니다. 우리 능력으로 되는 건 아무 것도 없는 거지요. 예수님도 실패하시면서 “야! 이상하다 저 놈들이 왜 저러나. 이상하네”라고 하셨던 것을 잊지 말고 우리 열심과 능력으로 뭘 하겠다는 망상에서 벗어나 죽어라고 중보기도를 해야 됩니다.
이 네 가지가 바로 권세를 행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 하나가 있는데 바로 역할분담입니다. 비상시기라면 한 사람이 다 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역할분담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은사를 재능에 맞게 나누어서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이 있습니다. 특출한 재능들이지요. 그것을 살릴 수 있도록 그에 가장 적합한 은사를 주시고 그리고는 우리들이 역할을 분담해서 힘을 합쳐서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이제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제자도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 전쟁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마귀에게서 분리시키는 것이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선택하신 신약백성들 모두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논리의 일부를 깨달은 사람들이 영적 전쟁을 한다고 뛰어나가서 하나님이 주신 형벌을 대적하고 돌아다닌다든가... 그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지요. 대부분은 그걸 영적 전쟁이라고 봅니다. 마귀가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고 보는 것인데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 사건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그것을 고통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 바로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적 전쟁은 사건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는 마귀의 시스템에서 그 사람을 빼내오는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 자기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 그것이 영적 전쟁의 결과입니다.
그 영적 전쟁을 하라고 우리에게 권세, 엑수시아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 놀라운 일에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사용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뭐겠습니까? 나 자신 안에서 영적 전쟁이 먼저 진행이 돼야 됩니다. 신실한 자가 먼저 되어야 권세가 임합니다. 어린 아이에게 귀한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장성하고 훈련을 마치고 신실해진 자들에게 권세를 주십니다. 그 일을 이루시려고 지금까지 밟아야 할 때는 밟으시고 은혜를 주실 때는 은혜를 주시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정금 같은 신앙을, 신실함을 유지하게 만드시려고 우리에게 이 놀라운 많은 일들을 행하신 것을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모든 일들은 다 우리에게 권세를 주시기 위함이니 권세를 받아서 사람들을 죄로부터 분리시키는, 마귀로부터 분리시키는 삶을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인간들에게 죽음의 형벌과 결핍의 형벌을 주셔서 추방하신 이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시고자 이제는 예수님을 보내시고 또 성령님을 보내셔서 저희들이 마귀로부터 분리되고 죄로부터 분리되고 오로지 나에게만 신실했던 삶에서 분리시키셔서 이제는 세상 사람들을 마귀로부터 분리시키는 삶을 살게 하시는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이 권세를 이어받아서 행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저희들을 더욱 연단시켜 주시옵고 저희들을 더욱 신실한 자들로 나날이 만들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행하신 권세를 행하여 세상 사람들을 마귀로부터 건져내는 일에 우리의 목숨을 바치는 자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소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어지는 성찬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에게 신실함과 권세와 권능을 더욱 풍성하게 내려주실 것을 믿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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