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3일 서울 양재동에서 작은 모임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캠프 아라리’를 주장하면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 중 당사자인 부모님들과의 첫 모임이었습니다. 생각 만큼 많은 분이 오시지는 않았지만 가족적인 분위기로 그리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그 모임을 준비하며 만날 장소와 다과, 저녁까지 준비한 서준 엄마 그리고 바쁜 중에도 많은 프린트를 준비하는 열성을 보인 서준 아빠 이런 분들이 있으니 반드시 ‘캠프 아라리’가 만들어져 우리아이들의 인권이 제대로 확보되리라는 기대가 나를 흥분되게 한 하루 였습니다.
이날 이야기의 제목은
한국형 자립 복지 공동체 “캠프 아라리”의 방향성에 대한 이해 였고
목차는
1, 우리가족 소개
2, 캠프 아라리를 생각하게 된 이유
3, 캠프 아라리 생각의 배경
4, 현재의 교육 시스템으로 본 지적장애인의 현재와 미래
5, 자립 공동체 “캠프 아라리” 란?
6, 꿈을 이루기 위한 부모들의 준비
이었습니다. 내용이 많아 한 단원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가족 소개
상욱이 탄생이후부터 정선에 가기 전 까지.
우리가족은 저와 저의 아내 그리고 상욱이 누나와 상욱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는 순수회화를 전공했고 아내는 음악을 전공했습니다. 남들이 말하는 C C 즉 캠퍼스 커플이었습니다. 저의 꿈은 평생을 여행만 다니며 그림만 그리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고등학교 미술선생님이 되어 방학 때는 여행 다니고 그림 그리며 살려고 생각 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를 만난 겁니다. 아내의 어머니는 그림이나 그리는 놈 에게는 절대 딸을 줄 수 없다고 반대를 하셔서 궁여지책으로 대학원을 갑니다. 결혼한번 해 보려고 대학원에서는 건축미술을 전공했습니다. 그래도 반대를 하셔서 할 수 없이 우리들만의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저를 믿어주고 제 뜻을 따라주는 아내와 함께 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당장 필요한 것이 대학원 학비와 생활 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하며 생활비를 벌다가 미술학원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사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젊은 작가들은 그림만 그리고 먹고살기 힘든 우리나라의 미술시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어서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실컷 그리겠다. 하나도 안 팔고” 하는 독기를 품은 겁니다.
그런데 딸애가 태어나고 - 그 애는 태어나자마자 너무 예뻐서 주변에서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라고 할 정도로 예뻤습니다. 하얀 피부에 얼굴에 까만 진주만 세 개있다고 할 정도로 눈이 컸었습니다. - 이상할 정도로 사업이 잘 되었습니다. 집도 사고, 사업가로서의 이름도 주변에 알리고 나라가 주는 유통대상, 정통부 장관상 등 상도 많이 받으며 승승장구 했습니다. 그러다가 싱욱이가 태어났습니다. 다운 증후군이라는 병이 아닌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아내와 나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어찌 할 바를 몰랐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께!” 하고 “당신은 집에서 아이 잘 돌보고 있어. 난 돈을 좀 벌어야겠어.” 상욱이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돈을 벌겠다고 시작 했다가 그냥 돈이 있으니까 사회의 대접이 달라지는 맛에 그냥 돈의 노예가 되었었는데 이젠 상욱이를 위해서 돈을 벌겠다는 목표가 생긴 겁니다. 그 전까지는 돈을 즐기며 벌었었는데 이젠 돈을 허겁지겁 벌려고 했습니다. 많이 벌어야 했으니까요. 그 ‘많이’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또 아무리 많이 벌어봐야 소용없는 것도 모르고 그냥 ‘많이’ 벌면 뭔가 될 것 같았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것입니다.
저의 아내는 병원에 굉장히 익숙합니다. 오히려 집 보다 병원생활이 더 편해 보일 정도였습니다. 상욱이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약해서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크고 작은 수술을 많이 했습니다. 그 중에서 심장수술은 시기를 놓쳐 정말 오래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폐도 잘라 냈구요. 그리고 일반 초등학교에 특수반이 없는 학교를 다녀서 아내도 학교를 같이 갔었고 아예 학교에서는 보조선생 역할을 했었습니다. 심지어는 상욱이가 아파서 학교를 못 갈 때도 아내는 학교를 가야할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육체적인,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병에 걸린 겁니다. 갑상선 암이라더군요. 그리고 약 2년 반 뒤에 또 유방암 그리고 또 다른 암. 세 개의 죽을지도 모르는 큰 수술을 했습니다. 그게 5년 정도 사이에 다 벌어진 일입니다. 물론 지금은 건강 합니다. 아내는 저와 결혼해서 사는 동안 아마 집보다는 병원에 더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내의 첫 번째 수술 후 우리는 이제 우리의 고민을 들어 내놓고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이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상욱이에 대한 대책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말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나 이후의 상욱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니 결국은 현 시스템에서는 시설이더군요. 그러면서 보니까 장애에 대한 복지가 우리나라에서는 정말 아니더라구요. 복지 선진국이라 불리는 영국이나 독일 등의 경우 정말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쪽을 계속 알아보니 신흥 경제대국인 미국보다는 전통이 있는 유럽 쪽이 좀 더 나은 것 같았고 그 계통에서도 뉴질랜드나 캐나다가 제가 가고 싶은 곳 이어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내가 돌 볼 수 있을 때 까지는 함께 살고 그 다음에는 ‘캠프힐’이나 ‘라 르쉬’ 같은 복지시설에 보낸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그곳을 가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캐나다 이민을 결정했고 그중에서도 지상낙원이고 유럽인들의 로망이라는 캐나다 벤쿠버의 빅토리아 섬으로 가기로 하고 우선 현지답사를 갔습니다. 정말 아름답고 환상적인 섬 이었습니다. 우리는 여행이 아니라 현지답사이기 때문에 현지인과 같이 살기로 하고 거기서 살고 있는 후배에게 부탁해서 일반주택을 4개월 빌리고 중고차를 한 대 사고해서 그냥 살았습니다. 슈퍼 가서 시장보고 집에서 요리해서 먹고, 구경 가고, 여행 다니고, 운동하고 등등 돈 버는 거 외에는 다 해 보았습니다. 정말 좋았습니다. 상욱이도 너무 좋아하는 것 이었습니다. 몇 마디 할 줄 모르는 영어로 나 보다 친구를 많이 사귀는 것 이었습니다. ‘하이’ 나이스 투 밑 유' ‘ 딜리셔스’ ‘굿 모닝‘ ’땡 큐‘ 등 몇 마디 안 되는 영어와 웃음으로 친구를 사귀는 상욱이를 보고 우리는 이민을 결심 했습니다. “그래, 아는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 새로 시작 하는 거야!“ 하고 말입니다.
이민을 상담 하면서 처음의 환상적인 선입견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 했습니다. 우선 지적장애인이 이민 오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들은 모든 걸 돈을 중심으로 생각 했습니다. 상욱이가 이민을 오게 되면 학교를 다니게 되고 그러면 통학비용, 보조교사 2명에 대한 비용, 의료 비용, 생활대책 비용, 그리고 성인이나 노후에 대한 비용을 자기네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 할 수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지만 결국 여기서도 아이들에 대한 복지가 그냥 잘 돌봐주는 시스템은 발달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아이들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은 한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나마 여기가 여러 시설들이 한국보다는 좋으니까 하는 생각에 그들과 협상을 하였습니다. 나의 한국에서의 활동을 이야기 해 주고 우리 가족을 받아들이면 캐나다에 상당한 이익이 될 거라 설득하고 현금을 가지고 오는 투자 이민으로 하겠다고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증명으로 통장에 잔고를 남겨두고, 딸과 나는 대학에 등록하고 등등 거기서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겠다는 언질을 받고 한국에 돌아와 수속을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수속중 하나인 종합검진에서 아내의 유방암이 발견 되었습니다. 수술을 준비하며 우리는 이민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앞이 깜깜했습니다.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아내가 이제는 상욱이 보다 더 걱정이 되는 것 이었습니다. 결국 유명한 S대 의대교수 선배를 만나 상담을 하였습니다. 결론은 바꾸던지 포기 하든지 였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방식, 먹는 거, 사는 거, 집, 운동, 공기, 물, 걱정거리 등 모든 걸 바꾸든지 아니면 아내를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전이가 아니라 다행이지만 다른 종류의 암이 약 2년만에 생겼다면 벌써 몸이 암에 익숙해져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대로 두면 다음에는 조금 더 빨리 또 암이 생길 거고 그때부터는 정말 일어나기 힘들 거라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국을 약 4개월간 돌아다니며 이사 갈 곳을 찾아보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여기 정선을 선택 하였습니다.
상욱이 탄생과 함께 우리가족은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의 진로가 바뀌고 병이 생기고 주변의 시선이 우리를 불쌍하다고 보고 기피하기 까지 했습니다. 심지어는 친하다는 방송국에 있는 친구까지 위로주 라고 사면서 “이건 천형이야.”라고 말해 싸우고 두 번 다시 안 본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아이 때문 일 까요? 아닙니다. 모든 게 이 사회의 이 아이에 대한 잘못된 편견 때문인 것입니다. 나 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 아이들은 축복 받아야 할 탄생부터 억울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저도 막연하게 억울하기만 했지 뭐가 문제인지 뭐가 잘못됐는지를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첫댓글 인생엔 편안한 길과 험한 길이 교차하지요!/
저도 아팠을 때 7년간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시골에 들어왔는데
지나고 보니 인생에서 마이너스더군요!
이젠 다 나아서 교류하지만
자격지심이었던 것 같아요!
다 자기마음인 거죠.
내마음에 따라 지옥과 천당이 왔다갔다 하는거라고 생각 합니다.
지금저는 제인생 어느때 보다 활기차 있습니다.
가야할 방향과 목표가 이렇게 강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네요.^^
가족이란 뭘까... 상념에 잠기게 합니다.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들고요...
아~~상욱아빠 대단하시며 멋찌신 남편과 가장이십니다
존경스럽네요 전 이런상황에서 심하게 흔들렸을껍니다
아빠를 사랑하는 가족에게 힘의 원천이시네요 화이팅~~
누구나 마찬가지 일 겁니다. 주어진 상황이 대단해 보이는 거죠.^^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