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상원사와 월정사를 둘러보고 진고개를 넘어 강릉 시내로 들어왔다.
강릉역은 예전에 내가 알고 있는 역이 아니다. 강릉 시내 철로와 탑승구는 지하화되었다.
강릉역 주변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굴산사지가 있는 학산리로 향했다.
사굴산 굴산사(지址) / 사굴산문, 사적 제448호
-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847년(문성왕9) 통효通曉대사 범일梵日이 창건한 것으로 추정.
굴산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모양이다. 고려 말 또는 조선 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
1936년 대홍수로 그 터가 드러났고, 1984년 이후 현재까지 발굴 조사 중이다.
1990년 강릉에서 지낼 때 이런 절 터가 있는 지 몰랐다.
학산리엔 군부대가 있다. A/S 반장을 따라 군부대를 여러 번 방문했다.
백두대간 산 아래 너른 밭과 솔숲이 울창한 동네로 기억하고 있다.
학산리 전체가 절 터인 것 같다. 당간지주와 승탑의 거리는 500~600m이다.
또한 주위에 범일선사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처녀가 해를 보고 임신, 아이를 낳아 산 중턱 바위 위에 버렸다.
며칠 뒤 처녀의 어머니가 아이를 찾으러 가니 백학이 그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아이가 성장하여 선승이 되었는데 그 승려가 범일선사였다.
이런 유사한 전설은 대한민국 곳곳에 있다.
마을회관에 주차를 하고 절 터, 석천石泉, 학바위, 승탑僧塔(부도)을 보고 돌아나와
성황당, 당간지주, 석불(3곳에 있다고 하는데 나는 한 곳만 봤다.)을 보고 다시 마을회관으로.
'굴산사'란 절이 있지만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그렇게 2시간 가량 걸었다.
이 주위엔 예전 서울대 교수, 서울시장, 경제 부총리를 지낸 '조순'의 생가가 있다.
학산리 마을회관, 강릉학산 오독배기 전수관 앞에서 야영을 했다.
오독배기.....아리랑 같다.
마을회관 건너편에 이 안내판이 서 있다. 철책 안에 모아진 유물들이 있다. 주로 기와조각이다.
석천石泉
양가의 규수가 이곳 물을 떠 마시려 하는데 물바가지에 해가 떴다.
그래서 물을 버리고 다시 뜨니 또 해가 뜨기를 반복하였다.
규수는 결국 물을 마셨고, 14개월 후에 아이를 낳으니 그가 범일선사였다.
(대충 이런 내용이 안내판에 적혀 있다)
200m쯤 올라왔다. 입구 학바위란 안내판이 있지만 바위 앞엔 없다.
그래서 이 바위가 학바위라고 생각하고 촬영을 했다.
강릉 굴산사지 승탑 / 보물 제85호
통효대사 범일의 승탑(부도)으로 추정한다.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승탑 앞의 보호수인 소나무, 운치가 있다.
승탑 앞에 보이는 너른 터가 절 터인 것으로 추정한다. 큰 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성황당(서낭당)이라고 안내되어 있다.
강릉 단오제의 주신主神은 범일선사이다. 범일선사가 '대관령 국사성황'이다.
매년 음력 4월 15일 단오제 때 '국사성황'행차 시 이곳에 들려 굿을 올린다.
그리고 대관령에 있는 '대관령국사여성황사'로 간다.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 / 보물 제86호
높이 5.4m로 국내에서 큰 편에 속한다. 신라 말 또는 고려 초 제작되었다.
강릉 굴산사지 석불좌상 /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8호
당간지주 중심으로 500m 이내 서, 남, 북에 석불이 있다고 하지만.....
많이 훼손되어 있다. 비로자나불이다.
* 통효대사 범일(810~889)
속성은 김 씨, 경주(계림) 출신.
15세 출가, 20세 구족계를 받음. 831(흥덕왕 6) 왕자 김의종을 따라 당나라로 감.
중국의 여러 고승들을 만나던 중 제안(齊安)을 만나 성불(成佛)하는 법을 물었다.
제안이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곧 도이다”라 함. 이 말에 범일은 대오(大悟)하였다.
제안의 문하에서 6년 동안 머물다가 유엄(惟儼)을 찾아가 선문답(禪問答)을 나누고 인가를 받았다.
임종 직전에 “내 이제 영결하고자 하니 세속의 부질없는 정분으로 어지러이 상심하지 말 것이며, 모름지기 스스로의 마음을 지켜 큰 뜻을 깨뜨리지 말라”고 당부한 뒤 입적(入寂).
시호는 통효대사(通曉大師), 탑호는 연휘(延徽)이다.
그가 독특하게 주창한 것으로는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
진귀조사설은 진성여왕이 불교의 선(禪)과 교(敎)의 뜻을 물은 데 대한 대답이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오직 존귀한 것은 자아(自我)뿐이라
하였으며, 뒷날 설산(雪山)으로 들어가 수행하다가 새벽 샛별을 보고 진리를 깨달았으나
궁극의 경지가 아님을 느꼈다.
그 뒤, 진귀조사를 만나 교 밖에 따로 전하는 선지(禪旨)를 얻고 대오하였다는 것.
신라의 무염(無染)이 『능가경(楞伽經)』을 배우다 조사의 길이 아니라고 하여 이를 버리고
당나라로 가서 선법을 익힌 것이나,
도윤(道允)이 『화엄경』을 읽다가 심인(心印)의 법과 같지 않다 하고 당나라로 가서 선을 공부한
것 등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석가모니가 샛별을 보고 도를 깨우친 뒤 진귀조사에게서 선을 배웠다는 것은 불교의 정설에는
없는 것이며,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達磨)의 밀록(密錄)에만 있는 것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크게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에 대한
구별이 범일이 처음으로 제시되었다는 사실만은 주목되는 일이다.
(다음 - 다음백과에서 발췌)
송담서원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4호
- 강릉시 강동면
율곡 이이를 배향한다고 되어 있는데 문이 잠겨 있다.
1624년(인조 2)에 강릉부사와 유생들이 구정면 학산리에 '석천묘石川廟'를 건립하기 시작.
1630년(인조 8)에 완공하여 율곡 이이를 봉안하였다.
1652년(효종 3)에 현재 이곳으로 이전하고 '송담서원'이라고 개칭하였다.
1660년 3월, 송담서원이란 편액을 국가로부터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고 1905년부터 복원되어 지금에 이른다.
(안내판의 내용을 정리함)
칠성산 법왕사(七星山法王寺)
- 강릉시 구정면 어단리
전통사찰인가 싶었다. 문화재에 대한 안내는 없다. 계곡은 좁지만 계류는 힘차다.
이 사찰에 주차하고 칠성산 원점회귀 산행을 하면 좋겠다.
칠성산은 7개의 바위가 칠성과 닮았다고 하여 그리 부른다.
칠성암이 있어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서 칠성신께 무병장수와 재난 소멸을 기원하였다.
1946는 승려 청우가 칠성암을 법왕사로 고치고 중창을 하였다. 법왕은 석가모니를 뜻한다.
(다음백과 - 대한민국구석구석 참조)
오래되어 보이는 승탑 2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