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 당신도 울고 있네요 -
별
- 박영자
풀벌레도 깊이 잠든 밤
호올로
눈부신 하늘을 본다
차가운 밤
더 푸르러
목마른 기다림
아쉬운
그
리
움
별 밭에 포개우고
쏟아붓는 정이여!
차라리
별 되고저
*박영자 : 2003년 ‘시사문단’ 등단, 작품집 ‘아흔아홉 번 울고 한 번 웃었다’
201호가 그녀의 행동에 무척 당혹스러워했다.
“어, 어. 왜 저러실까. 따라가 봐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남편은 태연했다. 그는 자신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됐어요. 저 사람은 원래 저래요. 쓸데없는 감성만 남아 가지고선. 쯧. 자, 자. 사장님 수고하셨고요. 우리 건배 한번 합시다.”
남편의 제안에 나와 201호는 아무런 일도 없는 듯 술잔에 입을 댔다. 나는 한편으로 그녀가 걱정되었으나,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201호도 처음엔 걱정하는 척하더니, 이내 술독에 빠져 그녀가 어찌 되었든 아무 상관 없는 일로 여겼다. 시간이 흐르자 그가 시비조로 내게 말했다.
“아까, 그 노래가 김동환이 부른 ‘묻어버린 아픔’ 맞지요? 내 참! 사장님은 이 노래가 제 아내의 18번인지 어찌 아시고. 끅! 어쨌든 서울에 있을 때 와이프는 비만 오면 이 노래를 불렀다니깐. 글쎄. 청승맞게스리.”
그러자 201호가 맞장구쳤다.
“혹시 둘이 예전에 알던 사이 아닙니까? 아까 최 시인이 노래할 때 사모님도 함께 잘 따라 부르고 말이야. 하하. 나는 이 노래는 사실 오늘 처음 들었거든.”
나는 그의 말에 별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그는 조금 수그러드는 척하더니, 이내 반격했다.
“왜 눈을 찡그리고 지랄이야. 지랄이긴. 뭐 찔리는 것 있어?”
그의 말에 나는 창피하게도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정말 찔리는 것이 있는 것처럼 나는 그의 앞에 있는 술잔과 병 그리고 안주 접시를 두 손으로 쓸어버렸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분위기는 금방 돌변했다.
“왜 이래? 농담한 것 가지고.”
201호가 놀라 뒤로 물러섰다. 옆에 있던 남자도 이 상황이 심상찮은지 두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농담할 게 따로 있지. 어디서!”
“야, 야! 최 시인. 그만하자. 그만해. 이 쓰러져가는 민박집 마당이 자기 것이라고 지금 유세하는 거야?”
“다들 왜 이러십니까? 이게 다 제가 마누라를 잘 못 둬서 그렇습니다. 그만하시고 자리에 앉으십시오. 술이나 더합시다.”
다행히 남자의 중재로 더는 험악한 상황을 벌어지지 않았으나, 201호나 나나, 기분은 비참하리만큼 우울했다. 그 상태로 술을 마셨으니 우리는 꽤 취해버렸고 결국, 그곳에서 자정이 다 되었을 때까지 술을 퍼마신 그와 201호는 막판에 녹초가 되어 펜션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자리엔 파편처럼 흩어진 술자리의 잔해와 함께 나 홀로 남게 되었다.
그녀는 그길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여태껏 펜션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짐작으로 그녀도 개울가에 나처럼 혼자 앉아 쓸쓸한 추억을 곱씹는 것 같았다. 어둠에 둘러싸인 밤은 사위가 을씨년스러웠고, 밤하늘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따금 흩뿌리는 빗방울을 봐선, 한바탕 비가 내리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개울 쪽을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내가 있는 이곳을 스쳐 펜션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걱정되었지만,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는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를 만나는 게 두려웠다. 서로의 과거와 둘만의 끝나지 않은 상처를 들쑤셔내어 마지막 밤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에게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먹구름이 서로 부딪치면서 빛을 만들어내더니 이내, 천둥소리가 들리면서 비가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다소 술이 깬 나는 어쩔 수 없이 안내실로 가서 랜턴과 우의 그리고 우산을 챙겼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개울로 가는 길은 온통 흙탕물이 되어 있었다. 이따금 내리치는 번개와 세상을 삼킬 듯한 천둥소리에 온몸이 떨리면서 두려웠지만, 나는 그녀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과연 그녀는 물이 불어나 꼼짝할 수도 없는 개울 중간 바위 무리에 불안하게 서 있었다. 랜턴을 비추자 그녀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오돌오돌 떨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랜턴을 비추는 이가 나인지, 남편인지 아직 분간이 안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한심스럽게 생각되었다. 이 순간에 자신을 구하러 온 사람이 누구든 간에 우선, 큰소리로 자신의 상황을 알려야 했음에도 그녀는 눈치를 보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나야!”
나는 큰소리로 그녀에게 고함을 질렀으나, 그녀는 세찬 빗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별수 없이 나는 랜턴을 내 쪽으로 비추어 나임을 알렸다. 그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 같았지만, 지금 상황은 솔직히 여의치 않았다.
“꼼짝하지 말고 거기 그대로 서 있어! 아니, 아니. 그래. 그 제일 큰 바위를 잡고 그쪽에 기대면 돼. 내 곧 그리로 갈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위 무리 중에서 그녀 키의 절반 정도 우뚝 솟은 바위가 두어 개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바위 무리에 가는 길은 물살이 너무 심해 자칫 들어가기만 하면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밧줄이 필요했다. 지금 그렇다고 펜션으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다급했다. 그때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펜션과 개울 중간쯤에 작년에 만들어놓은 젓갈 저장용 토굴이 생각났다. 그곳에 가면 장독과 장독을 잇기 위해 준비해둔 빨랫줄이 있었다. 나는 급한 나머지 그녀에게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서서 뛰었다.
나무기둥에 줄을 묶고 난 뒤 반대편 줄 끝에 돌멩이를 달았다. 그녀가 잘 받을지 의문이었지만 별 대안은 없었다.
“잘 잡아야 해.”
그나마 그녀가 내 의도를 이해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간신히 돌멩이를 단 줄을 잡은 그녀는 줄을 바위에 묶었다. 팽팽한 것을 확인하고 나는 개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새, 하늘은 구멍이 났는지 세찬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고 번개와 천둥은 시도 때도 없었다.
무사히 도착하자 그녀는 무작정 날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은 공포와 쓸쓸함 그리고 연민이 짙게 배어있었다. 얼마나 충격에 휩싸였는지 그녀는 한참 동안 내 품 안에서 떨고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그녀의 헝클어진 머릿결을 쓰다듬으면서 그녀가 안정을 찾도록 꼭 껴안아 주었다. 번개가 한 번 더 세차게 칠 때 그녀는 내 품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
“돌아가지 않을래요.”
그녀가 가쁜 숨을 쉬며 내게 속삭였다. 하지만 강한 비와 천둥소리로 인해 나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자 그녀는 다시 한번 또렷하게 말했다.
“서울에 안 갈거라구요.”
나는 이 철부지 같은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로맨틱한 결정을 하는 것에 무리가 있었다. 개울 위쪽에서 산사태가 났는지 물이 점점 더 불고 있었다.
“알았어. 나중에 얘기하고, 지금은 얼른 이곳을 벗어나야 해.”
나는 바위에 묶여 있는 줄을 풀어 재차 단단하고 팽팽하게 묶었다. 건너편까지 불과 2~3m밖에 되지 않았지만, 건너올 때보다 물이 더 불어있어 위험했다. 게다가 랜턴이 있긴 하지만 행여 앞부분을 자세히 비추지 않으면 컴컴한 어둠 속에서 자칫 물살에 빨려 들어갈 수도 있었다. 나는 허리띠와 윗옷을 벗어 띠로 만들어 그녀와 연결했다. 출발 전에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목적으로 그녀를 한 번 더 안아주면서 먼저 출발했다. 첫발을 내디디자 물이 가슴팍까지 찼다. 나는 한 손으로 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론 랜턴을 비추었다. 그녀도 내 뒤를 이어 첫발을 디딘 것 같았다. 이제 무조건 건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천천히 그녀를 앞장서 중간쯤 왔을 때 문제가 생겼다. 개울 위쪽에서 물에 휩쓸린 통나무가 내려오더니 우리를 덮친 것이다. 다행히 나는 몸을 숙여 머리 위쪽만 타격을 당했지만, 내 뒤에 따라오던 그녀는 통나무를 온몸으로 맞아버렸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악’하는 외마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그만 줄을 놓아버렸다. 순간 나까지 휘청, 하면서 그만 나도 줄을 놓치고 말았다.
물살에 빨려 내려가면서 나는 잠시 정신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나는 멀리 터널 쪽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 혼자가 아니라, 그녀가 내 옆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나는 그녀와 손을 잡고 그 터널을 벗어나기 위해 천천히 걸었다. 마침내 터널을 벗어나자, 이 세상에 없던 꽃과 나무들이 펼쳐진 새 세상이 우리 눈앞에 보였다. 나는 그녀의 두 손을 부여잡고 빙글빙글, 아름다운 춤을 추며 너무 행복했다.
“이제 정신이 드냐?”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201호였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링거 수액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나는 오른쪽 팔과 다리에 붕대를 감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어찌?”
“이틀 만에 깨어났다. 그날 폭우 속에서 둘이 물살에 실려 간 모양이야. 다행히 개울 하류 쪽 비탈 모래밭에서 발견되었어. 정말 운 좋았어.”
나는 무엇보다 그녀가 궁금했다. 그녀 역시 나와 발견되었으면 이 병원,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유희는?”
내가 그녀의 이름을 묻자 그는 날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혀를 찼다.
“유희? 너! 그 여자, 예전에 알고 지냈던 사이지? 내 눈은 못 속인다.”
나는 그의 뜬금없는 말에 짜증을 냈다.
“어찌 되었냐니까!”
“어찌 되긴. 어제 퇴원하여 남편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물살에 실려 가면서 네가 그 여자를 계속 물 밖으로 나오게 한 모양이야. 그녀는 네 덕분에 너만큼 물을 안 먹었고 다치지 않았어. 네 꼴을 봐라. 넌 한동안 오른팔과 다리를 못 쓸 거야.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다.”
나는 그의 말 중에 그녀가 남편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는 사실에 눈물이 나왔다. 그날 분명히 그녀는 서울에 가지 않겠다고 내게 말했다. 잠시나마 희망에 부풀어 있던 내 마음은 풍선에 바람빠지 듯 쪼그라들고 말았다.
“난 알고 있었어. 그날 우리 술 마실 때 그녀가 널 바라보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거든. 게다가 네가 부르던 노래를 따라부를 때, 난 직감적으로 느꼈지. 예전에 둘이 뭔가가 있었다는 걸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사연이야? 내게는 말해줄 수 있잖아.”
나는 그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이쯤 되자 나는 내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그녀와의 사연을 그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말하지 않으면, 나는 이쯤에서 미칠 것 같았다.
“듣고 싶어?”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 좀 일으켜 줘. 휠체어 있지? 그것 타고 우리, 밖에 나가자. 날씨가 좋을 것 같아.”
담배를 몹시 피우고 싶었다. 여름은 한층 깊어가고 있었고 햇볕은 따가웠다. 하지만 나는 시원한 넝쿨나무 밑에서 찬란한 매미 소리를 들으면서 그에게 ‘나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첫댓글 그 사랑 이야기가 슬픔을 넘어 여생에
용기와 희망 에찬 아름 다운 이야기로 승화 되시길 바랍니다.
네, 감사합니다. 꼭 제이야기라곤 단정할 수 없는 게, ㅎㅎ. 소설은 있을법한 이야기를 작가의 상상으로 풀어나가니까요.
그럼에도 회장님의 격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