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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5권. 18세기, Le XVIIIe siècle 273-506
제05장, 18세기 전기(1700-1740) (연속): 장-밥티스트 비코, 그의 역사철학
- Première Periode (1700-1740) (suite): Jean-Baptiste Vico, sa philosophie de l’histoire, 324-329
“철학자들은, 명석 판명한 그들의 지각작용을 도서관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치지도 소비하지도 않고서 발견한다고 주장하면, 데카르트의 방법과 더불어 정신들을 마비시겼다(engourdir)‥… 데카르트는 우리의 인간적 자연의 연약함[부족함] 덕분에 커다란 연속을 이루었다. 이 인간적 자연의 연약함이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그리고 최소한의 수고로 모든 것을 알고자 원했다.” 이처럼 나폴리의 젊은 동향인들 속에서 1726년에 짧은 수단을 비판했던 이는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 1668-1744)[fr. Jean-Baptiste Vico]였다. 이런 수단이 그들 속에서 데카르트주의가 되게 했다. 비코의 눈에는 명석한 관념은 아마도 적용의 영역이지만, 매우 제한되어 있다. 이 과념은 수학들에게, 그리고 물리학의 가장 추상적인 용어들에게 알맞다. 게다가 정신이 이 용어들은 제작했고, 정신은 이 용어들로부터 출발하고 또한 정신은 이에 만족한다. 다른 곳 도처에서 명석과 판명은 “인간의 덕목이라기보다 오히려 인간적 추리(raison)의 악덕이다.” 명석 관념은 유한한 관념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나의 고뇌(ma souffrance, 고, 苦)로부터, 나는 형상[이데아]과 한계[페라스]를 파악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고뇌로부터 갖는 지각작용은 무한하다. 이런 무한성은 인간적 자연의 크기를 증거한다.” (324)
자연의 어슴프레하며 깊이 있고 무한한 모든 측면을, 인간의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삶을 설명하는 역사가들과 시인들의 직관이 관통하고 있다. 그 모든 측면이, 그의 작품 새로운 과학(Scienza Nuova, 1725)(La Science nouvelle)에서 비코의 대상이다. 이 책은 매우 오랫동안 잘못 알려졌고, 게다가 잘못 정돈되었으며, 그리고 매우 혼동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모든 국가들의 발전에 공통하는 일반적인 특성드을 규정하고자 애썼다. 그에 대해 진보의 철학자들이, 즉 헤르더(Herder, 1744-1803), 미슐레(Michelet, 1798-1874), 꽁트(Comte, 1798-1857) 같은 이들이 행한 찬사들은, 무엇보다 관념론자인 한 인간의 학설 속에서, 우리에게 잘못 방향을 잡게 할 위험이 있다. (325)
우선 비코는 크리스트교인이다. 그런데 역사에 대한 크리스트교의 개념작업이 있다. 즉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의 것과 보쉬에(Bossuet, 1627-1704)의 것이 있다. 비코는 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아담의 타락, 유대 민족에게 예약된 특별한 임무, 육신화, 이것들은 인간에 비추어서 신의 특별한 섭리의 그만큼 많은 특성들이다. 그는 이것도 인정했다. 그러나 이런 이법 자체 때문에 그는 이것을 신중하게 자기의 탐구 밖으로 내놓았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기적적인 개입과는 독립적인 역사의 자연적 법칙들을 규정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이렇게 유대 경전이 그에게 제공하는 모든 증거 자료들을 스스로 포기했다). (325)
더욱이 비코는 플라톤주의자였다. 그는 사물들의 영원한 질서를, “모든 민족들의 숙명들이, 즉 태어나서 진행하고 몰락하고 종말을 맞는 숙명들이 의존하는 영원한 법칙들의 이상적 역사를” 탐구했다. 어떤 꽁도르세(Condorcet, 1743-1794) 또는 어떤 꽁트에게서처럼, 인류의 일체 속에서 파악된, 인류의 무한정한, 진보를 정식화하는 법칙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민족의 각각이 그 고유한 삶의 비속을 위하여 따로 참여하는 이상적인 법칙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로마의 역사는 왕들의 우화시대 이래로 바르바르족들에 의해 제국의 멸망에까지 완전한 전체들 중의 하나를 형성한다. 우리가 곧 지적하게 될 이런 연속적인 국면은 모든 다른 민족의 역사에서도 재발견될 수 있고 되어야한 한다. 따라서 시대는 원환적인 형식이며, 그 자체로 돌고 다시 돈다(tournant et retournant, corsi e ricorsi). 역사는 각 민족과 더불어 다시 시작한다. 이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자들에게서 시대에 대한 친숙한 관점이다. (325)
그런데, 이런 근본적인 관념은 비코의 조사연구(l’investigation)의 방법을 규정한다. 이 방법은 많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로 하여금 가장 근대적인 탐구들에 대한 진실한 선구자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가 말했듯이 문헌학을 철학과 일치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고, 다시 말하면, 이집트, 그리스, 로마의 다른 민족들로부터 오는 기록 자료들의 비교에 의해, 민족들 각각에서 발전 법칙의 동일성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교 방법의 범위에 관하여 강조하자. 합리주의 철학자자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모든 사람들과 자기들에게 공통하는 이법의 통일성만을 인정한다. 모든 인간에게서 이법에 맞지 않는 모든 것, 상상작용과 정념(수동)인 모든 것은 인간들 그 자체들 사이에서 따로 있을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런 이법을 인간들은 사유의 의해서 인류성의 여명의 시기에 옮겨놓는다. 우선 왜냐하면, “멀리 있고 또한 알려지지 않은 사물들의 관념을 스스로 형성될 수 없는 그들은[인간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들에 따라서 이것들을 스스로 그려보기” 때문이고, 그리고 “박학다식자들의 과학을 혼성[조성]하는 모든 것이 그 자신들의 것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기를 원했으리라는 박학다식자들의 오만이 원인이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법칙들을 법제적 현자들의 이법(la raison)에 부여했다. 그 당시에 매우 빈번히 등장했던 사회 계약의 이론 모두는 비코에 따르면 동일한 오류를 증거 한다. (326)
그런데, 특히 그것은 문헌학에 지지를 받으면서 새로운 과학(1725)이 뒤엎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책은, 몽떼뉴(Montaigne, 1533-1592)가 비슷한 주목을 했던 것인데, 인간들 사이에는 이법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동일성이, 즉 상식(un sens commun)이, 다시 말하면 계급 전체에 의해, 인민 전체에 의해, 민족 전체에 의해 또는 인간 종 전체에 의해 일반적으로 지니고 느끼는 반성없는 판단(un jugement sans réflexion)이 있다는 것을 소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이리하여 “일률적인 관념들(des idées uniforme)은 알려지지 않는 전 민족들에게서 서로서로 동시적으로 태어났다”는 데 이른다. 이때부터 그러기 위해서 법칙들이 이법에 기인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민족들의 형성작용에서 일률적인 법칙들이 있을 수 있다. 일종의 (플라톤적) 직관은 심지어 각 민족이 실현하는 이상적 법칙의 현존을 우리에게 보증한다. 그러나 시민적이고 정치적인 사실들을 다루는 귀납법만이, 마치 베이컨이 자연의 사실들을 다루듯이, 이 법칙들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제시할 수 있다. (326)
비코가 매우 먼 과거에 관하여 이런 귀납법을 위하여 사용한 재료들은 민중적인 신화적 전통들이다. 그 전통들에는 비록 왜곡되었을 지라도, 인민들로부터 가장 멀리 있었던 역사, 호메로스의 것과 같은 가장 오랜 시들, 로마 12표법의 것과 같은 초기의 법제정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들에 대한 기원적 성격에 관하여 비코의 착각이 어떤 것일지라도, 자료들이 어떤 정신에서 선택되었는지를, 어떻게 그의 사유가 르네상스의 유사한 사색들에 비해 유리하게 더 잘 구별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16세기에 우리들에게 우화 같은 옛 과학을 폭로하도록 이행해왔던 모든 기록 자료들을 내려놓았다. 즉 칼데아의 신탁, 오르페우스의 시들, 퓌타고라스의 금박 시구들, 이것들이 이집트 왕조 말기의 거짓들이라는 것을 그는 안다. 인류의 기원들이 “사소하고 모호하며 조잡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그는 소위 수수께끼로서 정식화된 과학이 기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는 신화 속에서 적합한 해석에 의해 추리적 과학을 발견하는 알레고리적 방법을 더 이상 바라지 않았다. 한마디로 거기에 비교할 수 없는 그의 위대함이 있으며, 그 때는 사람들 어떤 점에서 길이 새로웠는지를 생각할 때이다. 그는 과거의 문헌자료들(les documents) 속에서 그것들이 역사에 관하여 부여할 할 수 있는 것들만을, 종교적 신앙들, 법률적 사용들, 풍습들, 이것들을 우리에게 전했던 자들의 언어를 탐구했다. 확실히 그의 귀납법의 기초는 좁았고, 심지어는 그의 시대에 적절한 것보다 더 좁았다. 왜냐하면 그는 경전의 자료들과 당시에 극동 인민들과 야생인들에 관하여 물밀듯이 들어오는 정보들을 젖혀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어음부터 완전했으며, 그 방법은 인류성을 귀납법에 의하여 또한 인류의 진보에서 정의하는데 있었으며, 인류성에 대해 정태적이고 무매개적인 정의를 또는 가설적 구축을 찾는데 있지 않았다. (327)
그가 도달한 결과물들은, 어떤 홉스 또는 어떤 로크의 결과물들과 비교하여 그의 방법만큼이나 대조가 된다. 이 후자들에게서 사회의 형성작업은 합리적 인간들에 의해 탐구되어 발견된 추리적 문제의 해결이었다. 모든 것은 인간의 지혜에 유래한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비코는, 국가와 문명이 이미 있지 않았다면 현자들도 철학자들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우리의 문헌 자료들에게 그것들의 구체적인 풍부성을 부여하는 것은 사물들[사정들]의 아주 다른 국면이다. 사람들은 이때에, [유대경전 속에] 대홍수 이후로 인간들은 세상의 광활한 숲을 가로질러 방황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의심을 품는다. 그런데 단지 종교적 공포, 상상작용의 열매는 야만적이고 맹폭한 거인들을 길들이기 시작할 수 있었다. 천둥치는 쥬피터[제우스]에 대한 경외심은 동굴 속에 숨어서 그를 체험하여 터득한 자들을 [밖으로 나가게] 강요했다. 그리하여 고정된 초기 주거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주거지들과 더불어, 서로들 사이에 각각의 품행을 규정하는 종교적 용도들과 의례를, 그리고 일처일부제 결혼제도를 창안했다. 비코는 이런 제도 속에서, 그의 발상에서부터, 의례들을 담당했던 법률적 제도를 보았고, 그 의례들의 각각이 종교적인 존경을 부과한다. 이리하여 서로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가정들이 태어나고, 각각의 가정은 각자의 자연적 은신처 안에 있다. 종교의 강제적 힘 이외 다른 강제적 힘은 없었다. 그것이 신정제(神政制) 또는 신들의 지배이다. 이런 가정들의 각 가정에 손님(une clientèle, 고객)이 결합하는데, 손님이 다소 많기도 하고, 원시적 숲에서 법없이 종교없이 남아있었던 부랑자들로 형성되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가정들은 도시들 안에서 재통합된다. 도시는 권리[자연권]와 법률[시민법]이 현존하는 가장들(가정의 우두머리들)로, 그리고 법률 밖에 있는 평민 고객들로 형성된다. 모든 도시는 기 기원에서 족장들과 평민들로 구성된 귀족정이다. 이 평민들은 처음에는 짐승들과 동등하게 취급되었고 그리고 삶에 필수적인 것들에만 권리[자연권]을 갖는다. 로마에서 오랫동안 사람들은 족장들이 평민들을 거부하여, 그들과 결혼들에서 합법적인 성축식까지도 거부했다는 것을 본다. 마지막으로 제3 시대, 이법의 시대가 온다. 이 시대에서 자연권의 관계들은 인간들 사이에 보편적이 된다. 로마 제국에서 실현된 국가인데, 이 국가는 야만인들의 침공들로 붕괴되었다. (328)
사람들은 계속의 도식을 흘낏 본다. 즉 신들의 시대, 영웅들의 시대, 인간들의 시대;그리고 신정체, 귀족정체, 인간적 정부(이것은 가꿈은 군주정체이며, 군주제이다. 나중에 볼테르(Voltaire, 1694-1778), 마블리(Mably, 1709-1785), 다른 많은 공법학자들이 이것을 주목했던 대로, 이들은 자연권들의 평등성을 보장하였다)이다. 비코는 직업적으로는 법률학자였으며, 로마 권리[자연권]을 다루기를 그치지 않았다. 로마 자연권은 저 시대들의 각각이 각 시대의 자연권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한다. 그리고 종교적 자연권에서는 모든 것은 신들의 고유성이다; 영웅적 자연권은 종교에 의한 힘의 권리를 완화한다; 인간적 자연권도 있으며, 이 인간적 자연권의 권리는 추론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연권의 상태들의 각각은 완전하게 구별되고 독창적인 정신의 자연으로부터 파생한다는 것을 덧붙여야만 한다. 시적 지혜(이 지혜는 경제, 정치, 과학을 포함하며, 호메로스의 시들은 이것들의 완성된 전형이다)와 철학적 지혜 사이에 대조의 세부사항들 속에 들어감이 없이, 우리는 다음을 말하자: 이 둘을 대립시키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상상작용과 이법의 역전된 발전이다. 그리고 아마도 남는 것은 비코의 토지적 특성인데, 이것은 그가 시대를 정의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 시대에는 모든 사회적 관계들이 거의 오로지 상상작용에 기인하는 신앙들 위에 기초되어 있었다. 또한 시대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섭리적인 법률이 있고, 이 법률 없이 인류성은 존속할 수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단지 강한 상상작용에 의해 일으킨 불안의 폭력이, 욕구들의 폭력을 억누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말브랑쉬가 그의 빈정거림에 대해 추적 했던 상상작용을 이렇게 복원했다. 이법은 인류성 안에서 단지 뒤늦은 출현이었다. 게다가 인류성이 너무 조속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순수 추론의 과학들에, 형이상학과 대수학에 너무 빨리 몰입하게 했던 젊은이들이 탐구적이고 섬세한 인간[성인(成人)]들이 되지만 그러나 위대한 작업들을 할 수 없는 인간들이 된다. 비코에 따르면 한 단계를 불 질렀던 민족들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야만에서 세련미로 이행 없이 거쳐 왔던 그리스인들도, 그리스인들의 아테네 문화를 재생산하는 프랑스인들도 마찬가지이다.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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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Bibliographie 329.
G. B. Vico(1668-1744), Opera, éd. Ferrari, 6 vol., Milan, 1835-1837, et 8 vol., Napoles, 1858-1869; Oeuvres choisies, avec un Discours sur le système et la vie de Vico, par Michelet, Paris, 1837. ㅎ.ㅠ
B. Croce(1866-1952), La filosofia di G. B. Vico, Bari, 1911 (cf. Jankélévitch, La philosohie de Vico d’apres B. Crice, Revue de synthèse historique, XXIII). (
G. Gentile(1875-1944), Studi Vichiani, Messine, 1914. Per il secondo centenario della Scienza nuova, réunion de dix-huit articles sur Vico, Rome, 1925.
M. Cochery(s.d.), Les grandes lignes de la philosophie historique et juridique de Vico, Paris, 1923.
C. E. Vaughan(1854–1922), Studies in the history of political philosophy, vol. I, chap. V, Manchester, 1925[유고 출판], 2e éd., 1936.
I. Berlin(1909-1997), The philosophical ideas of Giambattista Vico, Art and Ideas in Eighteenth-Century Italy, Rome, 1960 (Instituto italiano di cultura, IV). (57NLA)
(5:17, 57N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