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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1·26 ‘SGI의 날’ 기념 제언 - “생명의 세기를 향해 크나큰 조류”
지난 1월 26일, 제26회 ‘SGI의 날’을 기념하여 이케다 SGI회장은 “생명의 세기를 향해 크나큰 조류”라는 테마로 제언을 발표했다.
제언에서는 우선 20세기의 역사를 공죄(功罪) 양면에서 총괄하여 수많은 외면적 진보가 있었던 반면, 근대사회의 병리라고도 할 수 있는 ‘생명 배제’의 사상이 극심해짐에 따라 수많은 비극이 발생한 세기였다고 지적. 이 ‘정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와 연대를 복권시키는 세계관(世界觀)이 불가결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거기서 불법의 연기사상(緣起思想:인과 연이 서로 관계해서 하나의 현상이 생겨나는 사상을 말함)을 통해 ‘생명 존엄’의 내실을 부각시키면서, 현대의 시류(時流)가 된 글로벌리즘(globalism:세계화)과 IT(정보기술)혁명의 과제에 대해 언급.
21세기의 키워드로서 ‘공생(共生)’과 ‘내발(內發)’을 제시하면서 여성이 완수해야 할 역할이나 가정의 재생(再生)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어 초점이 되고 있는 헌법개정문제에 관해 제9조의 이념에 입각하여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전망하고 있다. 또 인류 공동투쟁의 중핵을 짊어진 유엔의 기본자세로서 ‘대화와 협조의 소프트파워를 중시하는 운영’과 ‘시민사회와 협동체제를 확립’하는 일의 필요성을 강조. 아울러 재정안정화를 위해 ‘유엔 민중펀드’의 창설 등을 제안하고 있다.
또 유엔이 추진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로서 빈곤과 환경문제를 들고 있으며, 빈곤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지구포럼’의 설치를 제창. 아울러 ‘지구헌장’을 전 인류의 규범으로 그 비중을 높여 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역적인 관점에서 중국, 인도의 역할과 통합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은 아프리카의 미래에 대해 언급. 각국이 그 정신적 전통을 살려 모럴 파워(moral power:도덕의 힘)의 창조적 경쟁에 도전해 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대화’의 힘으로 평화와 인도의 연대를 구축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공생(共生)과 내발(內發)의 정신력으로
인간을 위한 새로운 문명을
드디어 막을 올린 21세기―이 새로운 세기가 어떠한 시대로 될 것인가, 작년 부터 수많은 전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생명공학이나 정보공학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대가 모아지는 한편, 정치나 경제면의 향후 방향에 대한 불투명성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습니다.
‘기대’와 ‘불안’이라는 이 두 가지 대조는 세기의 전환기에만 볼 수 있는 특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20세기의 개막과 비교했을 때, 당시의 그 낙관적인 분위기는 자취를 감춰버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 배경에는 “20세기는 인류에게 도움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입밖으로 꺼내는 일조차 아주 무색할 정도의 환멸감이 한몫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진보로 많은 혜택을 누리는 반면,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 아직껏 없었던 비극이 되풀이된 시대의 깊은 어둠이 사람들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어둠을 걷어낼 수 있는 빛은 도대체 무엇인가. 21세기는 과연 무엇을 기조로 해서 준비해야만 하는가.
이 테마를 생각했을 때, 가슴 속에 떠오르는 것은 ‘현대 화학의 아버지’라이너스 폴링 박사와 나눈 추억의 대담입니다.
박사와 엮은 대답집 속에서 제가 “21세기를 ‘생명의 세기’로”라는 오랜 지론을 말씀드리자 박사는 전적으로 찬동해 주시며, “그것이 뜻하는 바는 인간 생명 그 자체에 지금보다 더 많은 초점이 맞춰져, 인간의 행복과 건강이 중요시되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1901년에 태어나 말 그대로 20세기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과학자로서 또 평화운동가로서 인간과 사회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 오신 박사의 말씀인 만큼 크나큰 무게를 느꼈습니다.
그 대담집의 타이틀을 《‘생명의 세기’에 대한 탐구》라고 한 것도 생명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인류가 진정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도, 또 나아가야 할 길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쫷 식자들의 회고
그렇다면 역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되돌아봤을 때 20세기는 우리들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역사가 에릭 홉스봄 씨의 대저(大著) 《20세기 역사》는 그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 책입니다. 머릿글에는 ‘12명이 본 20세기’라는 타이틀로 세계를 대표하는 식자들의 견해를 열거하고 있는데 비통한 외침에 가까운 말들이 계속 나열되고 있는 것이 저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금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세기였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영국의 노벨상 수상자, 작가 윌리엄 골딩)
“나는 그것을 학살과 전쟁의 세기로밖에 보지 않는다.”(프랑스의 생태학자 르네 뒤몽)
홉스봄 씨는 이들의 의견을 소개한 다음, “성찰력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왜 만족하지 못한 채, 그리고 미래에 대한 확신 없이 20세기를 회고하는 것일까”라고 자문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20세기가 그 세기에 점철된 전쟁의 규모와 빈도, 기간 모든 면에 있어서 의심할 여지 없이 역사상 가장 잔혹한 세기이며, (중략) 가장 혹심한 기근에서 조직적인 대학살에 이르기까지 20세기가 낳은 인간이 저지른 인간 파멸의, 일찍이 전례가 없었던 그 규모의 거대함에 있어서도 그러했기 때문이다”라고.
외면적인 진보와 시대정신의 퇴영(退纓)
물론 이러한 역사의 어두운 부분에만 빛을 비추는 것은 공정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20세기의 발자취 속에는 진보와 발전이라는 승리의 개가를 올린 측면도 많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제국주의나 식민지주의가 지구상을 방약무인(傍若無人:사람이 없는 것 같이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것)격으로 구는 것이 묵인된 시대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아직 많은 과제를 안고 있긴 하지만 국제연합이라는 세계정치의 시스템은 그 수명이 짧았던 국제연맹에 비해 이 반세기 동안 계속 기능을 발휘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여러 가치에 대해 맞서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줄어들었고, 특히 여성의 지위향상, 사회진출은 아직 많이 미흡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지난 세기의 괄목할만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功)과 죄(罪)가 거의 반반인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어서도 물질적 풍요(부의 편재라는 아포리아〈해법이 없는 난관〉를 안고 있지만), 교통·통신, 의학·위생 등의 공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20세기 초와 세기말의 우리들을 둘러싼 인권의 현주소 하나만 보더라도 법률면, 제도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20세기에 있어서 인간이 인간을 너무도 많이 죽였다는 사실만은 지울 수 없습니다. 실로 16세기 이후 5백 년에 걸친 전사자(戰死者) 3분의 2는 20세기의 전사자가 차지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만, 그야말로 ‘메가데스(megadeath)’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역사상 미증유의 대살육의 시대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 20세기는 인간의 생명을 너무나 가볍게 다루어 왔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는 ‘생명 쇠약의 세기’이자 ‘생명 고갈의 세기’‘생명 모독의 세기’였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생명의 배제’가 초래한 20세기의 비극
앞서 열거한 20세기가 안겨준 메리트(merit:이점, 장점)를 보더라도 대부분이 외면적인 진보이며, 마찬가지로 시대정신이라는 의미에서는 퇴영적 상황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생명은 축소 일로를 걷고, 불법적으로 말하면 인간상호간의, 혹은 대우주와 연결고리가 끊겨 ‘소아(小我)’ 속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한 시류(時流)를 ‘생명 존엄의 세기’로 어떻게 전환해 갈 것인가 하는 것이 폴링 박사와 제가 공유한 문명사적 과제였습니다.
때가 때인 만큼 최근에는 역사서적 이외에도 다양한 20세기론이 세상에 선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제가 살펴본 결과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몇 사람이 언급하고 있는 프랑스의 문인 폴 발레리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이야기한 ‘정신의 위기’라는 말입니다.
1919년에 발표된 같은 이름의 논고(論考)에서 발레리는 사상 최초의 총력전인 제1차 대전이 초래한 정신적 충격―영화(榮華)를 자랑했던 서구문명의 멸망조차 예감케 한, 끝이 보이지 않는 위기감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발레리가 부각시킨 것은 지식의 무력함, 과학 응용의 잔인함, 목표 상실 등의 문제였습니다. 모두 현대적 과제이며, 서구 근대정신의 파탄을 심층까지 꿰뚫어본 그의 안목은 20세기 말까지도 내다보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그가 깊어만 가는 위기를 주시하면서 발표한 소논문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자신들의 우주에서 모든 생명을 배제하는 일에 철학을 적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열의로, 옛사람들은 우주 속에 생명을 만연케 하는 일에 자신들의 철학을 적용했다”라고. 하나의 반시대적 고찰이라고는 하지만 실로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시류의 본질을 파헤친 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의도적으로 생명을 배제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언어의 코스몰로지(cosmology:우주관) 형성 능력이 현저하게 쇠약해진 20세기에 있어서 철학뿐만이 아니라 문학도 언어의 복권, 언어을 통한 의미론적 생명공간의 재구성을 목표로 모색하고 신음하며 그리고 좌절을 되풀이해 왔다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특히 생명의 배제라는 점에 있어서는 과학기술이 기여한 거대한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근대과학이 자연을 인간과 분리된 조작 가능한 객체로서 정의 내리는 기계론적 자연관을 주무기로 장족의 진보를 해 온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마지막 4반세기에 이르러 갑자기 부각된 지구환경의 위기라든지, 21세기 지(知)의 프론티어라고는 하나 클론(clon:복제)기술과 같이 조금만 운용을 잘못하면 인간이 인간이라는 사실의 근본까지도 붕괴될 우려가 있는 유전자 공학 등의 발달도 있어서, 과학분야에서도 패러다임(인식의 체계) 전환의 필요성을 느껴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고 정의를 내리는 주객 일체의 자연관, 생명관을 근저에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듯합니다.
마쓰이 다카노리 씨(도쿄대학 대학원 교수)는 기계론적 자연관의 초석이 되어온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주1〉에서 “나는 어울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혹은 “나는 관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변형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만 저도 크게 찬동하는 바입니다.
‘목숨’‘마음’에 높아지는 관심
그것은 4년 전 ‘SGI의 날’ 기념제언에서 제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스페인의 철학자) 철학의 정수(精髓)로서 소개한 “나는 나와 나 자신의 환경이다. 그리고 만약 이 환경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도 구제할 수 없다”는 논제와 똑같은 지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시류 때문인지 ‘밀레니엄’의 일본에서도 ‘생명’이라고 해서 단순한 생물학적인 생명이 아니라 발레리가 말하는 ‘생명’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늘고 있는 듯합니다. 그것도 ‘생명’이라는 말보다도 ‘목숨’‘마음’‘혼’과 같이 한자 표기보다는 히라가나 표기로 쓰여 있는 것이 돋보입니다.
아이들의 세계에 빈발하는 문제행동이나 흉악범죄가 계기가 되어 논의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그러한 표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시대정신의 보다 더 깊은 곳에 숨쉬는 미묘하면서도 희미한 감수성의 표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쏟는 방법, 가치관이 그 뭔가를 예감하면서 천천히 크게 변모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번의 만남을 통해 서로 흉금을 터놓고 지냈던, 경애하는 선배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고(故) 예후디 메뉴인 씨가 즐겨 인용하신 미국 시애틀의 인디언 추장의 편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19세기 중엽 백인들에게 토지의 매수를 요구받았을 때 당시의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에게 보낸 것입니다. 아주 장문의 편지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만.
“만약 내가 (토지 매수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조건을 하나 달겠습니다. 그것은 이 땅의 동물을 백인은 자신의 형제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략) 나는 대평원 위에서 부패해 가는 많은 들소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백인들이 그 곳을 지나는 열차 안에서 사살하여 버리고 간 것입니다. 저는 야만인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먹고 살기 위해 죽이는 들소보다도 왜 연기를 내뿜는 기관차가 더 소중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동물이 없으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요?
만약 모든 동물들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면 인간은 커다란 혼의 고독감 때문에 죽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물의 신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인간의 신상에도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재난을 비롯하여 땅을 덮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땅 위의 자손들까지도 덮치는 법입니다.”
사회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유대의 분단’
도다 제2대회장의 ‘옥중체험’에서 깨달은 것
모든 존재와 연결하고 소생하는 ‘연기적(緣起的) 세계관’의 복권을
메뉴인 씨도 ‘인디언 추장의 글은 현대에 ― 모든 시대에 ― 정말 잘 맞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이런 감성, 감수성을 원시적 애니미즘〈주2〉이라고 업신여기거나 목가적(牧歌的)인 낭만이라고 잘라버릴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인디언에게서 토지를 강제적으로 빼앗고 보호구역에 몰아넣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처럼, 재미삼아 들짐승을 때려 죽이고도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감정은 인간을 차별하는 감정에 통하는 것이며, 이처럼 ‘생명의 세기’에 상반(相反)되는 행동을 하는 무연(無緣)한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삼라만상 속에 차이의 장벽을 만들고 그것에 따라 가치의 서열을 매기는 행위는, 삼라만상 상호간의 연결을 끊어 한쪽을 일방적으로 억압하고 수탈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모독할 뿐입니다.
불법이 설하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리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느 인디언 추장의 감성(感性)을 공유하면서 불법(佛法)의 지견(知見)은 그런 장벽을 허무는 생명의 진실한 모습, 실상으로 다가서는 것을 최우선 명제로 했습니다. “일념삼천은 정(情), 비정(非情)에 미치느니라” 다시 말해 ‘일념’이라는 극치의 생명작용에 ‘삼천’이라는 모든 현상세계가 들어 있다는 법리는 유정(有情)인 인간이나 동물뿐만 아니라 산천초목 등의 비정(非情)의 세계에도 통용한다는 뜻입니다. 또 “일체중생은 하나도 빠짐없이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념’이나 ‘불성’의 엄밀한 정의(定義)는 제쳐 두고라도, 우선 ‘생명’과 거의 동의어라고 이해해도 좋습니다. ‘생명’이 생물학적인 협의(狹義)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다만 소박한 애니미즘의 감성을 공유하면서도 불법에서 설하는 ‘생명’의 세계가 약간 뉘앙스가 다른 것은, ‘생명’의 세계는 가만히 앉아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계점에 달한 정신투쟁 끝에 활연히 열리는 풍요롭고 맑은 세계라는 점입니다.
데카르트의 ‘회의(懷疑)적 방법’은 아닙니다만, 그것은 모순과 부조리로 꽉 찬 세상에서 지(知)·정(情)·의(意)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든 의문을 구사하면서 생(生)의 의미를 계속 묻고 고뇌하고 사색한 끝에 열리는 경지이며, 그런 특유의 생명감각을 연마한 구도(求道)의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무차별·평등의 세계입니다.
또 동시에 무차별이라 해도 그것은 밋밋한 비인칭적, 비개성적인 세계가 아니라 만물이 서로 ‘연(緣)’에 따라 각각 연결되면서 생기(生起:생겨나는 일, 발생)와 멸진(滅盡:멸해서 없어짐)을 반복하고 있는 ‘연기(緣起)’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충일(充溢:가득 차서 넘침), 집중, 긴장, 조화, 균형, 통일… 어느 것 하나도 그 세계를 형용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고, 불전(佛典)에 “언어도단(言語道斷)하여 심행소멸(心行所滅)한다”고 교시되어 있는 대로 석존처럼 깨달은 자도 사람들의 몰이해와 오해를 두려워하여 설하는 것을 크게 망설일 정도로 미묘한 오달의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십사비(三十四非)’로 표현한 세계
은사 도다 조세이 창가학회 제2대회장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무렵 군부권력의 종교탄압으로 투옥되었을 때, 혹독한 옥중생활 속에서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여 회득(會得)하신 경지도 바로 이 ‘생명’의 세계였습니다.
은사는 옥중투쟁을 계속하던 어느 날, 법화경을 신독(身讀)하기로 발심합니다. 하루에 1만 번의 창제를 거듭하며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고 있었는데, 법화경의 개경(開經)인 무량의경(無量義經)의 어느 대목에서 마치 암초에 걸린 듯이 사색의 실마리가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부처를 찬탄하는 게(偈)의 구절로
“그(부처)의 신(身)은 유(有)도 아니고 또한 무(無)도 아니다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고 자타(自他)도 아니다
방(方)도 아니고 원(圓)도 아니고 단장(短長)도 아니다”에서 시작하여
“피(彼)도 아니고 차(此)도 아니고 거래(去來)도 아니다
청(靑)도 아니고 황(黃)도 아니고 적백(赤白)도 아니다
홍(紅)도 아니고 자(紫) 종종(種種)의 색도 아니다”로 끝나는 12행입니다.
그 속에 ‘… 이 아니고’가 무려 34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집요할 정도로 언어의 표현을 거절한 끝에 나타난 ‘부처’란 도대체 무엇인가.
극도로 정신을 집중하여 사색한 속에 은사가 회득한 것은 ‘부처’란 ‘생명’이라는 위대하고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이자 달관(達觀)이었습니다.
그 상세한 내용은 저의 졸저 《인간혁명》(제4권‘생명의 정원’)에 맡기기로 하고, 저는 거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도다 조세이가 전개한 이 때의 순간은 장래 세계의 철학을 변모시키기에 충분한 순간이었다고 해도 좋다. 그것은 세월의 급속한 흐름과 함께 이윽고 밝혀질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집필 당시(1968년 1월)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저의 신념이며 사실 오늘날 163개국·지역까지 넓혀진 SGI(창가학회 인터내셔널) 운동이 대하의 흐름으로 된 것도 전적으로 은사의 옥중체험이라는 원류(源流)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금세기를 ‘생명의 세기’‘생명 존엄의 세기’로 만들어야겠다고 깊이 기약하는 저의 결의도, 종파성이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 인류의 정신사에 공헌해 갈 것이라는 은사의 매우 소중한 체험을 시대의 폐색상황을 무너뜨리는 돌파구로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심각해지는 사회와 흔들리는 가족
이전에 역사가 토인비 박사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일상적인 것에서 눈을 돌려 “물밑에서 활동하여 강바닥까지 스며드는 완만하고 눈에 보이지 않고 저울에 달 수도 없는 움직임”을 주시하도록 호소했습니다. 《시련에 선 문명》
제가 ‘목숨’‘마음’‘혼’ 등의 말을 자주 하는 배경에는, 사람들의 감수성이나 관심의 방향에 시류(時流)의 깊은 곳에서 생기는 변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가치관을 비롯하여 모든 기구와 시스템에 ‘동요(動搖)’가 현저한 가운데 아이덴티티(identity:자기 정체성)를 찾는 것이고, 반응이 있는 리얼리티(reality:현실성)를 모색하는 것이라 해도 좋습니다.
IT(정보기술)혁명이라는 것을 몹시 선전하고 있습니다만, 예를 들어 IT사회가 도래한다 해도 그것을 책임진 사람은 어디서 아이덴티티를 찾으면 좋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손도 안 댄 상태입니다.
자칫하면 기다리는 것은 장미빛 미래는커녕 ‘목숨’‘마음’ 그리고 ‘혼’의 질식사일지도 모릅니다 ― 사람들은 이런 불안감에 흔들려 ‘내면으로 향한 여행’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적어도 저는 일부의 미디어 논객처럼 네트혁명이 가져오는 커뮤니케이션의 확대를 대책없이 환영하는 낙관론에 편승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아마도 인류의 정신사적 스팬(span:시간적 간격)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이 ‘동요’가 얼마나 ‘물밑에서 활동하여 강바닥까지 스며드는’ 모양의 거대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공동체이자 인간사회를 동물의 무리에서 분리하는 분수령인 가족조차 현재 격렬한 지각변동에 힙쓸려 있는 모습을 보더라도 알 수 있겠지요.
가족 붕괴나 장래를 묻는 테마는 ‘목숨’‘마음’‘혼’ 등과 관련되어 반복하여 언급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드러난 냉엄한 사실은, 가족은 다른 인간관계와는 달리 자신이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숙명적인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족의 유대조차도 ‘동요’에 직면하여 리얼리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부터 20여 년 전, 많은 여성신도가 가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예수의 방주(方舟)’사건 무렵부터 서서히 나타났다고 생각하는데, 최근 속출하는 이상한 소년범죄도 확실히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상식의 틀을 훨씬 뛰어넘은 그들의 배후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정과 가족의 ‘동요’ 혹은 ‘붕괴’가 잠재해 있습니다.
현재의 가정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곳이 아니라 짜증나고 답답한 밀실의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은 많은 식자들이 입을 모아 지적하고 있는 바입니다.
‘살아가는 의미’를 잃은 인간
버추얼 리얼리티(가상현실)라는 말은 직접적으로는 텔레비전이나 PC, 인터넷 등이 가져오는, 인간이 직접 접하지 않는 허구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족의 유대를 비롯하여 인간끼리나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를 연결하는 모든 유대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리얼리티를 상실하고 점점 가상적으로 되고 있는 듯합니다. 인간기피증, 집에 틀어박히기, 실어증, 인정불감증, 개성의 위기 등등 특히 현대 일본의 젊은층에 눈에 띄는 병리현상은 그 증거가 아닐까요.
그런 정신상태 아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는 말 따위는 이미 빈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리하여 진실한 리얼리티는 몇 겹의 가상현실에 덮여 ‘뿌리의 파괴’에 직면한 사람들은 확실한 생(生)의 의미를 찾아 ‘자기 탐구’의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목숨’ ‘생명’ ‘혼’ ‘가족’이 직면한 위기적 상황의 본질은 그런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존엄’이라는 것을 시대정신으로 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진실과 구극의 리얼리티임이 틀림없는 ‘생명’‘연기’의 세계 ― 파우스트와 함께 “그 순간이여, 멈춰라. 너는 정말 아름답다”라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그 세계의 광원(光源)에서 역조명(逆照明)을 통해 우리를 둘러싼 모든 연대를 소생시켜, 살고 그리고 죽어가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재구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 이 집에…”
“왜, 남자(여자)로…”
“왜, 이런 일을…”
― 그 중의 극치에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가’가 위치하고 있을 것이라는 모든 질문에 도저히 응답할 준비를 할 수 없게 되면, 새로운 세기는 미궁을 헤맬 뿐일 것입니다. ‘생명의 세기’에 당장 해결해야 할 초미의 관심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세기’를 열기 위해 ‘생의 자세’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한 마디 한다면, 파우스트가 “그 순간이여, 멈춰라”고 말한 것처럼 여하튼 ‘지금’의 순간이 전부이자 승부라는 것입니다.
첫째, 왜 ‘전부’인가 하면 ‘생명’이나 ‘연기’의 세계에서 진실, 리얼리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순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에는 많든 적든 가상성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는 말할 것도 없고, 과거의 사건이라고 해도 일상적, 역사적 혹은 과학적인 시간이라는 인위적 틀에 따라 구축된 것으로 참된 의미의 리얼리티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전(佛典)에는 “과거의 인(因)을 알려거든 현재의 과(果)를 보라, 미래의 과를 알려거든 현재의 인을 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축에 따른 인과관계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현재’의 순간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대의 어둠을 걷어 내는 ‘강성한 마음’(자기규율의 정신)
생명의 약동은 ‘강성한 마음’의 체현(體現) 속에
은사가 사색한 것처럼 리얼리티를 뒤덮는 온갖 인위적인 틀, 그 중에서도 언어의 허구성을 파고든 끝에 열리는 것이 ‘생명’‘연기’의 세계입니다. 그것도 ‘연기 ― 연에 따라 일어난다’고 하듯이 거기에는 모든 ‘개(個)’가 ‘연(緣)’에 따라 결합하고 있으며, 지금은 지구의 반대쪽에 살고 있는, 얼굴도 모르는 ‘소연(疎緣:연이 먼)한’ 사람까지도 1천 년, 2천 년 전에는 어떠한 관계의 ‘연’이 있었는지 모르는 일이고 어쩌면 ‘친척’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무수한 ‘연’으로 이어진 자아의 무한한 확대를 불법에서는 ‘대아(大我)’라고 부릅니다.
동양사상에도 조예가 깊은 칼 융은 “예를 들어 법률적으로는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해도, 직접 자기가 하지 않았다고 해도, 인간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도 역시 잠재적 범죄자인 것이다”《현재와 미래》 라고 통찰하고 있습니다. 한편 뜻밖이라고 느껴질 것 같은 언어도 ‘연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논리적 귀결입니다.
둘째, 왜 ‘지금’의 순간이 ‘승부’인가 하면 ‘생명’‘연기’의 세계는 그 충일(充溢:가득 차서 넘침)과 농밀(濃密)의 정도에 따라 정신의 패잔병이라고 할 수 있는 안일이나 나태와는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고, 끊임없는 정신투쟁으로 순간순간을 쟁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전에는 “월월(月月)·일일(日日) 강성해지시라. 조금이라도 해이한 마음이 있다면 마(魔)가 틈탈 것이니라”(어서 1190쪽)고 설하고 있습니다. ‘강성한 마음’ 즉 마음을 북돋아 일어서서 끊임없는 전진과 비상(飛翔)을 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리얼리티의 자장(磁場)에 접할 수 있고, 반대로 ‘해이한 마음’에 몸을 맡기면 마음은 긴장감을 잃어 공포와 증오, 질투나 겁 등의 약한 정(情)에 먹히고 말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강성한 마음’의 사람이란 석존이 끊임없이 설한 자기규율의 달인이라 해도 좋겠지요.
“비폭력에는 패배 따위는 없다. 이에 비해 폭력의 결말은 반드시 패배한다” 《나의 비폭력1》라며 결코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마하트마 간디는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세기’를 향한 위대한 선구자였습니다.
‘패배 따위는 없다’― 자신을 이긴다는 일점에 흔들리지 않는 자부심과 자신감에 가득찬 이 성자의 세계는 항상 광채가 빛나는 영광과 개가(凱歌)에 감싸여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고, 그 일점만 미동하지 않는다면 결국 승리는 약속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의 세계에서 비폭력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과제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간디의 이 신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풍조의 시대’에 숨어 있는 위험성
그런데 이와 같은 ‘생명’‘연기’라는 배광성(背光性:식물체가 빛의 자극을 받았을 때 빛의 반대쪽으로 뻗는 성질)에서 21세기의 시대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경향성의 흐름을 상상해 보면, 거기서 어떤 속성이 떠오를까요.
저는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을 담아 ‘공생’과 ‘내발(內發)’이라는 두 가지 지표를 추출해 보고자 합니다. 동시에 ‘생명’과 ‘연기’는 대단히 친근하며, 양자(兩者)만큼 20세기 시대정신의 흐름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것은 없다고 통감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는 뭐니뭐니해도 파시즘이나 볼셰비즘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친 시대입니다. 20세기가 사상 최대의 대량살육시대로 각인된다면, 그 참화를 가져온 최대의 요인은 이데올로기의 석권(席卷)이 아니었는가,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의 특징이 ‘공생’‘내발’과는 정반대의 말인, 나쁜 의미의 ‘경쟁’이며 ‘외발(外發)’이 아닐까요. 파시즘이나 볼셰비즘에 국한하지 않고 이데올로기 전반에 통하는 폐단으로서, 인간이나 사회 속에 외면적인 차이의 장벽을 만들어 그것을 고정화하여 자신의 서열을 높이 매기면서 남을 배제하고 억압하려는 경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종종 사회의 혼란에 편승하여 광신적인 슬로건으로 바뀌어 ‘경쟁’은 원래 숨어 있는 ‘대립과 배제의 논리’를 두드러지게 하고, ‘외발’은 ‘외압과 강제의 논리’라는 하드파워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시체가 널려 있는 20세기의 역사는 바로 그 산 증거였습니다.
오르테가의 《대중의 반역》은 20세기의 대중사회의 병리현상을 일찍이 척결한 기념비적 명저로서 알려져 있는데, 그는 그 속에서 “현대는 ‘풍조’의 시대이며 ‘끌려다니는 시대’”라고 갈파했습니다. 《오르테가 저작집2》
겟베루스의 “거짓말도 백 번하면…”이라는 너무나도 유명한 말이 시사하듯이 그런 시대에는 ‘대립과 배제의 논리’‘외압과 강제의 논리’의 위험성은 가속도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파시즘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 볼셰비즘의 계급주의적 이데올로기는 ‘풍조의 시대’의 악마적 소산에 불과합니다.
지금의 세계를 뒤덮는 글로벌리즘(세계화)도 그것이 ‘주의(主義)’로서 이데올로기로 될 위험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서 글로벌리즘이 가져오는 장점을 평가하는 데 인색하지 않습니다만, 무조건 환영할 정도의 낙관론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국제 표준)라는 것을 금과옥조(金科玉條:소중히 여기고 꼭 지켜야 할 법률)로 하고, 그것과 맞지 않는(차이가 있는) 세계나 사회에 대해서는 ‘대립과 배제의 논리’‘외압과 강제의 논리’를 행사할 위험성은 없는가 ―. 글로벌리즘이라는 미명 아래 확대해 가는 국가간, 개인간의 빈부격차 혹은 자본주의의 제품생산을 소홀히하는 금융자본주의, 카지노자본주의 등 그 어두운 부분은 일부의 낙관론에 찬물을 끼얹기에 충분합니다.
21세기를 ‘생명의 세기’로 열어가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의 그런 성격을 ‘반면교사(反面敎師)’〈주3〉로 삼아 ‘경쟁’이 아닌 ‘공생’을, ‘외발’이 아닌 ‘내발’을 장기적인 지표로서 착실한 행보를 추진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개별성이 아니라 사물의 관계성을 가장 우선으로 하는 ‘연기관’은 ‘공생’과 거의 동의어(同義語)라고 해도 좋습니다. 또 언어에 의한 사물의 고정화를 거부하고 언어의 허구성을 꿰뚫어, 진실한 리얼리티를 고생 끝에 찾은 ‘생명’의 작용을 불전(佛典)에는 “작작발발(作作發發)하게 행동한다”(내발적인 촉구에 따른 순간순간 심신<心身>의 작용이나 행동을 한다)고 설하는 것처럼, ‘생명의 세기’를 여는 것은 ‘내발적’으로밖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표가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흡수되어 정의를 내린다면 ‘생명의 세기’는 전쟁과 전쟁의 막간이 아닌 참된 의미의 ‘평화의 세기’로서 20세기와 결별하는 것이 가능하겠지요.
파탄을 가져온 ‘경쟁’‘외발(外發)’의 이데올로기
‘힘의 문명’을 전환하는 여성의 세기를
흔들리는 ‘가족’의 재생은 인류사적 과제
타고르가 기대한 역할
그런 21세기로 행보를 시작함에 즈음하여 제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여성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과 그렇게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데올로기에 수반하는 ‘대립과 배제의 논리’와 ‘외압과 강제의 논리’가 남성을 연상시키는 데 비해 여성의 특질은 ‘생명의 세기’가 지향하는 공생이나 내발, 나아가 결합과 조화 그리고 평화 등의 이미지를 방불케 합니다.
그런 점에서도 간디와 그의 동지 타고르는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평화창출이라는 점에서 간디가 여성에 건 기대는 참으로 솔직하고 명쾌합니다.
“여성은 자신들이 나약한 성(性)에 속해 있다는 것만 잊으면 남성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반전(反戰)행동을 취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가령 위대한 병사나 장군의 아내와 딸 그리고 어머니들이 어떤 형태의 군국주의와도 협력하는 것을 반대한다면 그 병사나 장군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대답해 보라.” 《저항하지 말라, 굴복하지 말라》
또 타고르는 문명론적인 관점에서 남성 중심의 ‘힘의 문명’을 ‘정신적인 문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힘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기대를 걸었습니다.
“다음 시대의 문명은 경제적, 정치적 경쟁과 이용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사회적 협동에 기반을 두고, 능률이라는 경제적 이상(理想)이 아니라 호혜(互惠)라는 정신적 이상 위에 수립되는 것을 우리는 바라고 있다. 그것을 실현했을 때, 여성은 자신의 참된 위치를 발견할 것이다.” 《타고르 저작집 제9권》
지금 모든 면에서 뚜렷이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비롯한 남성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낸 가치관이고 원리입니다. 그것들이 예외없이 그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추궁하고 있을 때 부각된 것이 앞에서 말한 ‘목숨’이고 ‘마음’‘혼’‘가족’입니다.
모두 ‘여성적인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21세기에 여성이라는 존재의 무게는 법률이나 경제면의 ‘해방’(그것도 중요합니다만)을 훨씬 뛰어넘는 문명사적(文明史的) 의미가 있습니다.
보스턴 21센터의 도전
그러므로 21세기가 기조로 해야 할 ‘생명의 세기’란 ‘여성의 세기’의 이명(異名)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제가 창립한 평화연구기관 ‘보스턴 21세기센터’에서는 1993년 창설 이래, 이런 ‘여성의 역할’을 둘러싼 연구를 주요활동으로 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유엔의 개혁과 지구환경문제, 평화의 문화 등 수많은 테마를 다루어 왔습니다만, 연구를 진행할 때는 여성의 견해가 반영되도록 토의를 거듭해 왔습니다.
그것은 이 센터가 여성의 견해나 여성의 역할에 관한 고찰을 빼놓고는 유익한 접근방법을 이끌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해결의 방향성을 오판할 위험이 있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이 센터가 내걸은 지침 중에 ‘생명의 세기를 비추는 등대이어라’가 있습니다만, 앞으로도 특히 ‘여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평화연구의 네트워크를 넓혀 ‘생명의 세기’의 대해원(大海原)을 계속 밝게 비추길 염원하는 바입니다.
‘여성의 세기’를 향한 조짐은 가족과 가정의 동요, 붕괴라는 중대한 대사(大事)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중대한가’ 하면, 그것이 인간이라는 가장 본바탕이 되는 부분의 붕괴로 이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재작년 《대붕괴의 시대》(F. 후쿠야마 저)라는 책에서 작가는 말했습니다. ‘인간의 본질과 사회질서의 재구축’이 부제(副題)인 이 책의 중심 테마는 가정의 붕괴와 재구축이었습니다. 《역사의 종말》에서와 마찬가지로 후쿠야마 씨의 역사의 동향에 대한 날카로운 시대감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류 탄생의 역사와 ‘가족의 기원’
한편 영장류(靈長類) 학자인 가와이 마사오 씨는 모자(母子) 관계는 2억 년 전 포유류의 탄생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아버지의 역사는 인류가 탄생한 이후의 일로 고작 5백만 년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5백만 년 전, 수컷이 아버지가 되고 암컷이 어머니가 됨에 따라 포유류의 ‘무리’에서 인간특유의 ‘가족’으로 변모했기 때문에 가족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같은 스팬(시간적 간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가족의 붕괴는 ‘사람이 사람이 아닌 것,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현대는 인류가 인류사 500백만 년 가운데 처음으로 직면한 비정상적인 시대’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추세에 ‘제동’을 걸며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일 없이, 인간이기를 계속 원한다면 원리적인 부모의 힘이 상조(相助)·호혜(互惠)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모의 역할은 ‘연기’이며 ‘공생’의 관계가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상조·호혜관계를 성립시켜 가면서 주도권을 잡아가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여성이 아닐까요. 남성은 좋은 파트너, 협력자일 뿐 주역은 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의 견문과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하는 배경에는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현명한 어머니의 존재, 뒷받침이 있습니다.
물론 기업사회의 가정을 지켜온 ‘현모양처’형의 어머니상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어머니상, 가정상의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 현대입니다. 인류사와 함께 과거 가족의 역사를 살펴보면, 여성의 불가사의한 능력에 대해 어떠한 경우에도 가볍게 봐서는 안 될 무게와 깊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괴테는 남성적인 근대적 자아로서, 유례가 없는 체현자(體現者)인 파우스트의 파멸에 대하여 최후에는 ‘영원한 여성’으로서 구제의 손길을 뻗친 것이 아닐까요.
헌법 제9조 ‘평화주의’의 세계적인 개화를
국민적 합의를 위해 끈기 있는 논의를
화제를 바꾸어 다음으로 ‘생명의 세기’를 평화로써 많은 결실을 거두기 위해 피해갈 수 없는 테마인 일본국 헌법을 둘러싼 논의를 하고자 합니다.
작년 1월, 중의원과 참의원에 ‘헌법조사회’를 설치하여 국회에서 현행 헌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똑같이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의 차원에서 신헌법으로 재출발한 독일이 오늘날까지 몇 번이고 헌법에 손을 대고 있는 것처럼, 시대와 사회 변화에 호응하여 일국의 최고법규인 헌법을 적절히 검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헌법 논의라고 하면, 제9조에만 초점을 맞추어 ‘개헌이다’ ‘호헌이다’는 등 단편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현 헌법 제정 후, 사회 변화 속에서 발생한 새로운 환경문제와 다양하게 바뀌는 인권문제, 정보화 사회의 대응, 나아가 직접 민의(民意)를 묻는 국민투표제와 수상의 공선제(公選制) 도입 등 21세기의 일본의 민주주의 형태에 관련된 몇 가지 테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제 등을 눈여겨 보면서 더 좋은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헌법을 수정하는 일은 중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른바 ‘헌법 논의’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기적 전망이나 이념이 결여된 상태에서 성급하게 개정(改正)하거나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지 않은 채, 정치적 의도를 앞세워 개정을 추진하는 것은 엄격히 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추진방법은 종종 ‘무엇을 위한 개정이었는가’하는 화근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전제에서 말씀드리면, ‘평화헌법’이라는 통칭이 보여 주듯이 전문(前文)과 제9조에 들어 있는 평화주의, 국제협조주의의 이념은 일본 헌법의 근간이 되는 의미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의 안전보장을 위한 구체적인 대책에 대해서는 여러 시점에서 논의해도 되겠지만, 저는 무엇보다 평화헌법의 이념과 정신성이 풍화(風化)되어 버리는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런 입장에서 제9조에 관해서는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줄곧 주장해 왔으며 그 신념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일본이 이 반세기 동안 헌법의 근간을 이루는 이 ‘평화주의’의 메시지를 얼마나 세계에 발신해 왔는가 하면, 국제적으로 볼 때 참으로 미약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나름대로 노력한 것은 인정해도 뿌리 깊은 복고주의적 움직임이나 과거의 침략전쟁을 긍정하려는 데 일부 세력도 거들었기에, ‘평화주의’의 윤곽으로서 일본발(日本發) 메시지는 이웃 아시아 여러 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 그다지 전달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일국의 평화주의’의 함정을 뛰어넘어
이것은 평화를 주창하는 쪽도 마찬가지로, 내향성(內向性)의 논의에 치우친 나머지 세계를 바꾸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으로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국제사회의 동향, 타국의 시선 등에 상관없이 자신들만 안온하면 된다는 이기주의적인 ‘일국의 평화주의’로 가는 것은 평화와 흡사하나 분명 잘못된 것이며, 모든 인류의 평화적 생존권을 구가하는 헌법 전문의 정신과도 동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의 세기’로 각인된 20세기와 새로운 세기를 확연히 결별시키기 위해서도 일본은 이런 정체상황(停滯狀況)을 타파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관점과 현실적인 사고(思考)를 조절하면서 제9조의 이념과 정신을 새로운 생명력으로 넓혀 간다 ― 이것이 21세기의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기억에도 선명한 모리 아리마사 씨의 말이 생각납니다.
“세계는 자기규율의 경쟁이다. 정치가 군사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다. 또 평화의 진정한 의미가 거기에 있다.”《나무들은 빛을 받고》
경청해야 할 식견입니다. 헌법 논의에 국한하지 않고 전후 일본의 정치문화에 가장 결여된 것이 이 ‘자기규율’ 정신이며 ‘신념’이고 앞에서 언급한 ‘강성한 마음’이 아닐까요.
전후(戰後) 오랫동안 계속된 냉전구조하에서 일본의 지도자층 중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타율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행보를 계속해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냉전 후에도 별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제2의 패전’이라는 거품경제 붕괴 후에도 ‘자기규율’이나 ‘신념’과는 거리가 먼 ‘해이한 마음’ 그대로 이완된 심정을 초래하고 만 것은 아닐까요.
헌법 논의에 있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헌법을 일관하는 ‘평화주의’를 ‘자기규율의 형태’‘신념의 체계’에 따라 극히 세밀하게 전개해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제9조에 관련해서 말하면 저는 조문을 개정하지 않아도 그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9조 제1항에서 ‘파리부전조약’〈주4〉의 정신을 계승하여 인류의 비원(悲願)인 전쟁의 근절이라는 이상(理想)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것과 국권이 발동하는 전쟁(무력에 따른 위협 또는 무력행사를 포함)을 포기하도록 국가주권을 굳이 제한하고 있습니다. ‘반주권성(半主權性)’은 반대로 말하면 그것을 국제기구(유엔)에 위임한다는 약속 아래 성립했다는 것에서 볼 때 그 출발에서도 분명한 것이지요.
‘보편성’에 입각한 ‘개(個)’에서의 발상
저는 제9조에 투영되어 있는 전쟁이나 무력행사에 관한 국가주권의 자기한정적 사고를 발판으로 유엔 등과 밀접하게 연계하는 형태로 항구평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헌법 전문이나 유엔헌장의 정신에 걸맞는 길이고, ‘보편성’에 입각한 ‘개(個)’의 자리매김이라는 열린 자세에서 ‘평화국가·일본’의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유엔이 주도하는 보편적 안전보장과 분쟁예방조치의 환경정비·확립을 21세기에는 반드시 실현해야 하며, 일본이 그 길잡이의 주도적 역할을 해내야 한다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비(非)군사적인 면에서 국제이해와 협조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수정의 여지가 많지 않을까요. 민생의 향상이나 개발, 교육·문화·스포츠면의 교류 등등 모든 면에서 ‘자기규율의 형태’‘신념의 체계’를 발신해 가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사람 한사람이 ‘해이한 마음’과 결별하고 ‘강성한 마음’을 구현해 가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전쟁이 없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일본이 그런 인류사적 실험을 향한 키잡이가 되어 주길 염원해 마지 않습니다.
유엔이야말로 인류가 결집하여 공동투쟁하는 중심축(中心軸)
시민사회와 협동하여 ‘소프트파워’를 중시하는 운영을
재정 안정화를 위해 유엔 민중펀드를 창설
이러한 일본의 도전과 깊이 연관하여 생각해 봤을 때, 초점이 되는 것이 유엔 본연의 모습입니다.
21세기를 ‘평화의 세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쟁과 비극을 낳는 원인인 국익 우선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인류 이익’과 ‘지구 이익’에 입각한 국제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그것이 일체의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핵심이 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유엔일 것입니다. 평화·군축 문제뿐만 아니라 환경문제나 빈곤문제도 뿌리 깊음을 생각하면 국가의 입장을 초월한 ‘협력’과 ‘협조’, 나아가 ‘인류 공동투쟁’의 흐름이 요청될 것은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도 근 반세기 동안 ‘세계공통의 대화의 장’으로 국제적인 합의를 만들어 내는 데 힘쓰고 세계 각지에서 인도적 지원 활동을 계속 담당해 온 유엔에 눈을 돌리는 이외에 역시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 면에서 한계와 과제를 안고 있다 해도 유엔을 중심축으로 인류가 결속하는 길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의 개막을 앞둔 작년 9월, 세계 각지의 수뇌가 모여 개최한 ‘밀레니엄 서밋’에서 채택한 선언의 의의는 크다고 하겠습니다.
선언에는 각국이 책임을 분담하고 지구적 과제에 대처할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또한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기관으로서, 유엔은 그 중심적인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 다시 한번 유엔 창설에 담긴 정신, 즉 “우리 일생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애를 인류에게 두 번이나 가져온 전쟁의 참해(慘害)에서 장래의 세대를 구제하고”(헌장 전문) 라는 숭고한 목적을 상기하여 ‘전쟁 없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유엔을 중심으로 인류 공동투쟁의 기본체제를 만들기 위해 힘차게 전진을 개시해야 합니다.
유엔 본연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이 어떠한 세계를 목표로 하여, 지금 직면해 있는 지구적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테마에 그대로 직결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가장 명심해야 할 대전제로 생각하는 것은 유엔의 본질이 ‘대화’와 ‘협조’를 기축으로 하는 소프트파워에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헌장에는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정한 제6장과 함께 강제 조치를 정한 제7장이 있는 것처럼 군사적 조치를 포함한 하드파워 행사(行使)도 상정(想定)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평화적 해결의 선행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하드파워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국면일 경우에 쓰는 ‘최종 수단’이어야 하고, 유엔의 근본적인 사명은 어디까지나 소프트파워를 통한 세계 평화와 안정에 있을 것입니다.
두 번의 대전(大戰)을 교훈으로 하여 태어난 유엔이기에 이러한 유엔의 탄생 배경에 비추어 보더라도, 또 21세기를 ‘공생(共生)’과 ‘내발(內發)’을 바탕으로 한 ‘생명의 세기’로 만들기 위해서도 이 원칙에서 벗어나서는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안전보장이사회의 역할은 역할로서 인정하는 바이지만, 21세기의 유엔이 지향해야 할 길은 하드파워를 통한 사후적(事後的)인 문제해결 방법이 아니라 예방과 안정을 중시한 소프트파워의 충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도 경제사회이사회나 인도적인 분야의 여러 기관이 더욱 적극적으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50년 이상 쌓아온 경험과 교훈을 운용면에서 충분히 살리면서 ‘인간의 안전보장’을 추진하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올해 9월에는 유엔에서 어린이를 위한 특별총회를 개최하는데, 미래를 담당할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진지한 논의와 결실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국가의 연합체’에서 탈피하기를
이러한 소프트파워를 중시하는 자세와 표리일체의 관계에서, 앞으로 유엔을 생각하는 데 있어 제외해서는 안 되는 기둥은 NGO(비정부기구)를 비롯한 시민사회와 유엔의 흔들리지 않는 협동체제 확립, 즉 ‘민중의, 민중이 주도하는, 민중을 위한 유엔’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각 나라가 국익지상주의라는 20세기의 마이너스 유산(遺産)을 떠안고 가는 상태에서 유엔이 ‘대립과 배제의 논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기능불능에 빠지거나, ‘외압과 강제의 논리’에 쉽게 치우쳐 화근을 남기거나, 신뢰를 잃는 그러한 길로 들어서지 않기 위해서도 민중을 근본으로 한 ‘인간을 위한 유엔’ 건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민중을 주역으로 한 유엔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21세기의 인류 운명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한 시대의 방향성은 전에 언급한 밀레니엄 선언에도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유엔 강화라는 제목의 장(章)에서 “민간 분야, NGO와 시민사회 전반이 유엔의 목표와 프로그램 실현에 공헌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할 것”이라고 시민사회가 유엔의 파트너로서 꼭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이는 국가의 모임에 지나지 않던 종래의 유엔에서 ‘탈피’할 것을 명확히 지향한 선언이라는 것에 그 의의가 있습니다.
저는 민중이 계획에 참여하는 것은 단지 유엔을 활성화하는 최상의 방법이라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유엔이 ‘국가간의 연합체’의 한계를 타파하고 ‘지구시민사회를 결집하는 축’으로서 발전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민중의 광범위한 힘을 결집함으로써 유엔에 ‘인간적 면모’가 한층 더 돋보이도록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유엔이 걸어가야 할 대도(大道)이어야 합니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이 방향성에 어긋나지 않게 실행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밀레니엄 서밋에 앞서 작년 5월에 열린 ‘밀레니엄 NGO포럼’〈주5〉에서 제안한 내용을 기본으로 검토해 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채택된 문서에는 ‘세계적인 시민사회 포럼’을 창설할 것과 총회를 비롯한 유엔기구에 대한 NGO의 접촉과 협의권의 확대 등의 항목이 들어 있습니다. 어떠한 제안이든 그 동안 제가 제창해 온 계획과 일치하며 하루라도 빨리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창립한 도다기념국제평화연구소에서도 작년에 유엔개혁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라트로베대학교와 태국의 글로벌사우스연구소(츄라론콩대학교)의 공동 프로젝트로 갈리 전(前) 유엔사무총장 등 지식인과 전문가로 이루어진 두 그룹에서 추진해 온 연구 성과를 한데 모은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민주화’를 개혁의 한 지주로서 인정하고, 시민사회에 개방된 유엔 시스템으로 만들기 위해 대담하게 개혁을 추진하는 ‘민중총회’ 창설을 비롯한 구체적인 제안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찍이 평화학자인 갈퉁 박사는 나와 나눈대담 속에서 민중총회 등의 구상에 대하여 “아이디어다운 아이디어가 거의 나오지도 않고 마지막에는 투표로 결정하여 승자와 패자가 나오는 단기간의 토의보다는 새로운 발상과 합의를 낳도록 장기적으로 대화하는 편이 좋다”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이렇듯 민중이 참가하는 새로운 제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패자를 낳지 않기 위한 장기적인 ‘전망’이며,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고려하는 ‘대화’입니다. 이와 같은 계획은 여러 단체에서 제창하고 있고, 또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크게 한 걸음 내딛어야 할 때를 맞이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NGO는 결코 국가의 연합체를 보완하는 ‘조연(助演)’이 아니라 ‘공생’과 ‘내발’의 흐름에 따른 새로운 국제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주역’입니다. 이런 민중의 손으로 만드는 유엔이어야만, 비로소 한사람 한사람의 인간존엄과 안전을 지키는 기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덧붙이면, 유엔의 오랜 과제인 재정에 대해서도 ‘세계의 민중이 지지하는’ 제도를 만드는 일이 핵심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유니세프에서 도입하고 있는 제도 등을 참고로 하면서 개인이나 단체, 기업에서 내는 기부금을 적극적으로 모아 인도적인 분야를 중심으로 한 활동자금에 충당하는 ‘유엔 민중펀드’라고 할 수 있는 제도를 검토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가맹국의 갹출금에 의존하기 때문에 즉각 응해야 하는 활동이나 중점적으로 착수할 과제에 지장이 생기는 현상을 감안하여 시민사회에서 나오는 기금을 또 하나의 기반으로 유엔 재정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계에서 12억 인구가 극심한 빈곤에
아울러 저는 유엔을 중심으로 민중이 주도하여 인류가 함께 착수해야 할 매우 긴요한 과제로서 ‘빈곤’과 ‘환경’을 들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첫번째는 빈곤 극복입니다.
세계은행의 작년도 개발보고에 따르면 하루 평균 1달러 이하의 생활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계 인구의 약 20%를 차지하는 12억 인구에 달하고 그 수는 감소하기는커녕 증가하는 추세라고 합니다.
또 세계은행에서는 이러한 통계 자료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의 소리’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년에 발표했습니다. 이는 10년에 걸쳐 60개국 6만 명에게서 직접 듣고 조사하여 완성한 노작(勞作)이고,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육성(肉聲)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 어디에 문제의 소지가 있으며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부각한 내용입니다.
세계은행에서는 그들의 목소리를 분석하면서 ① 사람들이 가난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경제적인 ‘기회 제공’ ② 스스로 직업 등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익히는 ‘엠파워먼트(empowerment:힘을 부여하는 일)’ ③ 기본적인 생활 기반을 갖추게 하고 재해나 혼란 시, 그 사람들을 지원해 주는 ‘보장’, 이런 점들에 유의하여 정책이나 원조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빈곤 ― 고통받는 사람들의 소리를 반영하는 ‘지구포럼’ 설치를
환경 ― ‘지구헌장’을 한사람 한사람의 다짐으로
이 점에 대해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 박사는 “적절한 사회적 기회를 부여받으면 개개의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효과적으로 구축하고 서로 돕는 일도 가능하다. 인간을 오로지 기술적인 개발계획이 낳는 이익의 수동적인 수익자로서 간주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을 원조나 개발의 (결과물을 받는) ‘수익자’가 아니라 변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위치를 부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러므로 원조나 개발을 추진함에 있어서도 거의 일방적으로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 세계은행의 보고서가 지향한 것처럼 ‘직접 목소리를 듣고 그 의견을 반영케 하는’ 접근방법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각국의 민주화 촉진과 더불어 국제사회에서도 현실적으로 괴로워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헤아리는 장소를 설치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선진국에서는 각국 수뇌로 이루어진 서밋이나 주요 정계(政界) 재계(財界) 인사가 모여 개최하는 ‘세계 경제포럼’의 연차총회(다보스회의)〈주6〉 등이 있어 국제정치와 국제경제의 방향성을 검토하는 장(場)이 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이러한 회의와 개발도상국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완수하면서 공정하게 인간 본위의 지구사회를 목표로 대화·협의하는 ‘지구포럼’이라고도 할 만한 장을 설치하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개발도상국의 정부와 시민의 대표 그리고 유엔사무총장을 비롯하여 유엔의 여러 기관의 책임자가 모여 각국과 여러 기관의 성공 사례나 교훈을 서로 제공하면서, 개발도상국측을 배려한 글로벌화와 모든 요청에 부응한 인간개발 촉진 등을 도모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회의는 연 2회 정도 실시하고 대표가 그 성과와 요망 안건을 가지고 서밋이나 다보스회의에 참석하여 의견이 협의내용에 반영되도록 힘쓰는 형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작년의 ‘규슈·오키나와 서밋’에서는 서밋 역사상 처음으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대표가 모인 가운데 수뇌급 대화가 실현되었는데, 이러한 시도를 궤도에 오르게 하여 그 ‘대화’의 틀을 서밋의 큰 기반으로 삼아 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지구환경 파괴가 불러오는 것
두번째 과제는 지구환경 문제입니다.
1992년의 ‘지구 서밋(유엔 환경개발회의)’ 개최를 계기로 지구차원의 국제협력을 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지구온난화방지조약 등 몇 가지 조약도 성립했습니다.
그러나 지구환경 파괴는 이러한 대응을 훨씬 능가하는 속도로 진행하고 있어 사태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지지부진하게 진행할 것이라면 조만간 큰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를 일이고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근본적인 의식변혁을 도모하는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전부터 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 일행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고 있는 ‘지구헌장’ 제정의 취지에 찬동하고 계속 협력해 왔습니다.
SGI도 세계 각지에서 지원행사를 열어 왔고, 보스턴 21세기센터에서도 초안 작성에 다각적인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회의와 세미나를 잇따라 열었습니다.
지구헌장의 최종안은 작년에 완성했는데, 이는 배경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이나 세계 각 지역 사람들의 소리를 폭넓게 참작하면서 끈기 있게 계속 검토해 온 성과이자 지구적 규모의 광범위한 대화에서 나온 ‘결정(結晶)’입니다.
모두 4장 16항목으로 되어 있고, ‘생명공동체에 대한 존경과 배려’‘생태계 보전(保全)’이라는 환경문제에 관한 장(章)과 ‘사회와 경제의 공정’‘민주주의, 비폭력과 평화’의 장을 포함하여 지구사회를 형성하는 데 따른 행동규범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지구헌장이야말로 ‘공생’과 ‘내발’을 기본으로 한 ‘생명의 세기’를 여는 초석이 되리라 강하게 확신하는 바입니다.
지구 서밋 10주년에 해당하는 내년 유엔총회에서 정식으로 지구헌장을 채택하기를 희망합니다만, 이를 단순한 국가간의 합의문서로 끝낼 것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행동규범으로서 뿌리를 내리게 해야 합니다.
SGI에서는 이것을 정식으로 채택하는 기간까지 민중차원의 의식계발을 위해 힘쓰는 한편, 채택한 후에도 지구헌장이 ‘한사람 한사람의 맹세’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기획전시의 개최를 포함하여 폭넓은 운동을 추진해 가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공생’과 ‘내발’을 기본으로 한 ‘생명의 세기’의 관점에서 21세기에 필요한 세계상(像)을 구상하기 위해 지역적인 관점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해 언급해 두려 합니다.
아시아에 관하여 특히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중국과 인도가 맡은 역할입니다. 양국은 단지 인구나 규모, 혹은 세계 안전보장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문명적인 관점에서도 해가 갈수록 중요한 위치에 설 것이 틀림없습니다.
21세기에 더욱 역할이 커진 중국과 인도
세계에서 ‘모럴 파워’의 창조적 경쟁을
한반도, 계속적인 대화가 평화의 초석
중국에 대한 토인비 박사의 기대
먼저 중국에 관하여 말하면, “중국이야말로 세계의 절반은 물론이고 세계 전체에 정치통합과 평화를 가져다 줄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라고 하신 토인비 박사의 말씀을 저는 그립게 떠올립니다.
이 말씀에는 박사의 장대한 이론을 일관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즉, 현재의 사상(事象)만에 눈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역사를 만드는 ‘물밑의 느슨한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미래는 전망할 수 없다는 확신이 맥동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미래를 주시하고 중일국교정상화와 중국의 유엔가입을 제창한 저도 진심으로 공감했습니다.
제가 염원하던 중국 방문을 처음으로 실현한 것은 박사와 런던에서 대담을 마친 이듬해인 1974년이었습니다.
이래로 민간차원에서 문화와 교육교류의 길을 솔선하여 개척하고 중국과 우호를 깊이 다져 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깊이 느낀 것은 토인비 박사가 중국문명의 정신적 유산으로서 언급한 수많은 미질(美質:아름다운 성질)이 사회변화에 부응하여 형태를 바꾸면서 숨쉬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나는 대립보다도 조화를, 분열보다도 결합을 지향하는 세계정신이고, 또 하나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실천을 통하여 ‘더 좋은 선택이 가능한 여러 답’을 모색하는 인간주의적 발상입니다.
전자(前者)는 내가 중국사회과학원에서 강연했을 때, 강력하게 호소한 대동사상(大同思想:만민의 신분적 평등과 공평한 분배, 인륜의 구현이 특징인 인류의 이상적인 사회형태)으로 상징되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길러진 지혜라고도 해야 할 ‘공생(共生)의 에토스(ethos:기풍, 정신)’입니다.
후자(後者)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실험에서 볼 수 있는 점진주의(漸進主義)적인 개혁의 기반이 되는 현실감각이라고 하겠습니다. 홍콩과 마카오 반환에 따른 ‘일국이체제(一國二體制)’의 시도도 그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에 관련하여 ‘교과서 문제’ 등을 통해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역사를 부정하는 듯한 언동(言動)을 간혹 듣는 것은 무척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2차대전이 끝난 지 50년이 된 1995년에 수상의 담화에서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을 표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언동을 되풀이하는 것은 기만(欺瞞)일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품위를 의심할 일이므로 엄하게 삼가야 합니다.
인도에 살아 숨쉬는 인간주의적 전통
중국과 마찬가지로 인도도 오랜 역사를 통해 지니게 된 훌륭한 정신성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세히 논하지는 않겠지만 석존과 아소카대왕 그리고 간디로 이어지는 위대한 정신의 계보(系譜)에는, 인간을 계속해서 왜소하게 생각해 온 근대적 휴머니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우주적 휴머니즘이라고 할 만한 넓이를 가진 인간정신의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힘의 정복’이 아니라 ‘달마(法:법)에 바탕을 둔 공생’을 지향하고, 차별이나 배타로 인한 분단이 아니라 ‘다양성을 존중한 조화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융이 “인도에서는 일찍이 몇십 만 번 정도 태어난 적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은 듯하다” 라고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연기(緣起)’의 세계 그 자체입니다.
최근에는 핵무기 보유와 IT선진국 등의 측면만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인도나 중국 역사의 지하수맥에 흐르는 정신의 힘이 바로 21세기를 소프트파워의 시대로 만드는 하나의 원동력으로 이어져 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양국의 역사를 모두 미화할 생각은 없습니다. 양국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과제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호소하고 싶은 것은, 양국이 오랜 역사를 통해 배양해 온 정신적 유산을 잃지 말고 시대정신을 헤아려 창조적으로 개화시켜 가는 것이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문제는 많든 적든 간에 양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나 있는 법이며, 서로 마이너스 면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좋은 영향을 미치는 플러스 경쟁을 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가는 것이 가치적이지 않겠습니까. 이전에, 현행의 서밋에 양국을 가담시켜 ‘책임국 수뇌회의’가 되도록 발전적인 개편을 제창한 것도 그러한 생각에서였습니다.
20세기가 패권을 다투는 경쟁이 심한 시대였다고 한다면, 21세기는 어느 나라가 중심이 되는가, 하는 것보다는 어느 나라가 인도적인 의미에서 모범을 보일 것인가, 하는 도덕과 정신의 ‘내발적인 힘’을 보여 줄 ‘공생’의 시대로 궤도를 수정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요.
남북최고수뇌의 직접적인 대화가 실현
이러한 패권 경쟁에서 세계가 탈피하기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대화’입니다. 작년은 그런 의미에서 이 ‘대화’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남북최고수뇌가 역사적인 대화를 실현한 것입니다.
작년 6월,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에서 사흘 동안 회담을 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미래에 대해 대담했습니다.
저는 15년 이상 전부터 남북의 최고수뇌가 직접 대화할 것을 거듭 호소해 왔습니다. 작년의 제언에도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이야말로 냉전상태를 종결짓는 절호의 기회”라고 호소한 바, 이번에 대화가 실현된 것은 감개무량한 일입니다.
오랜 세월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고 본격적으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라도, 분단역사상 처음으로 성사된 이번 일과 같은 최고수뇌의 직접적인 대화는 계속 이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남북공동선언’〈주7〉에서 약속한 김 위원장의 서울방문이 조기에 실현되어 최고수뇌의 대화가 정착하고 신뢰가 조성되면서 양국이 ‘한반도의 부전화(不戰化)’를 위하여 더욱 전진하기를 절실히 염원하는 바입니다.
냉전 후에 확산되는 지역분쟁의 재해
아시아와 더불어 세계의 평화를 생각할 때 초점이 되는 곳이 아프리카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냉전종식 후에 각지에서 지역분쟁과 내전이 일어나, 사람들의 생활과 안전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냉전 후에 1천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무력분쟁은 108건에 이르고 대부분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이 분쟁들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난민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늘고 있어 UNHCR(유엔난민문제 고등판무관사무소)에서는 그 수가 6백 20만 명에 달한다(2000년 1월 현재)고 발표했습니다.
또 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에서는 기아에 허덕이는 지역이 확산되어 FAO(유엔 식량농업기구)의 작년도 백서에 따르면, 분쟁이 원인이 되어 식량부족에 빠진 나라는 19개국에 이르고, 자연재해로 인한 식량부족 국가와 비교하여 현저히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아프리카 사람들이 오랫동안 고통받고 있는 빈곤문제도 생각처럼 개선되지 않고, 선진국들의 ‘원조기피(援助忌避)’와 더불어 비관론이 팽배하고 있는 것이 염려됩니다. 그 결과, 위기적인 상황과 반비례하는 형태로 아프리카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은 낮아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글로벌화가 진행되는 세계의 평화를 전망해 볼 때 아프리카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피할 수 없는 과제이며, 또 이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간과하는 것은 인도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궁핍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遠因:간접적인 원인) 즉 열강제국에 의한 식민지 지배와 일방적인 영토확장 등, 아프리카가 오랫동안 처해 온 역사적 상황을 감안해 보면 이러한 ‘마이너스 유산’을 그대로 미래에 되풀이하여 물려 주지 않는 것이 인류 공통의 책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류발상지’라고 불리는 아프리카는 오랜 옛날부터 풍요로운 문명을 꽃피우고 사상과 과학 분야에서도 인류에게 수많은 은혜를 베풀어 온 ‘희망의 대륙’이었습니다.
나도 이전부터 ‘21세기는 아프리카의 세기’라는 생각을 강하게 품어왔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 중의 하나는, 지금부터 40년 전에 유엔본부를 처음 방문했을 때 총회나 위원회에서 토의하는 아프리카 각국 대표의 발랄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해, 1960년은 아프리카의 17개국이 잇달아 독립을 쟁취한, 이른바 ‘아프리카의 해’이고 내가 창가학회의 제3대회장에 취임한 해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태동을 느낀 저는 그 이후로 아프리카 각국의 지도자와 식자들과 우호를 깊이 다지면서 ‘아프리카의 세기’를 향한 길을 개척하기 위해 미력하나마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또 소카대학교와 민주음악협회의 창립자로서 교육, 문화 교류를 민중차원에서 광범위하게 추진하기 위한 노력도 거듭해 왔습니다.
SGI로서도 특히 UNHCR이 추진하는 난민구조활동을 지원하는 운동에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난민조약’ 제정 50주년을 맞는 올해도 SGI는 UNHCR 등과 연계하여 지원활동을 계속하고 싶습니다만, 같은 ‘연기(緣起)’의 세계의 주민인 아프리카의 영속적인 평화는 누구에게나 친밀한 과제일 것입니다.
통합에 착수한 아프리카
희망과 신뢰의 연대로 ‘인도(人道)의 세기’를 향해
지금까지도 아프리카 내외에서 여러 가지 건설적인 계획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나의 은크루마 초대대통령 등 범(汎)아프리카주의(主義) 운동의 지도자들이 일찍이 제창한 ‘아프리카합중국’의 구상, 다시 말해 각국이 강하게 연대하여 평화와 번영을 함께 희구하기 위한 구상을 식민지 독립 후의 여명의 산물이라 해서 과거의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합중국’의 구상에 대해서는 2년 전에 나이지리아의 오바산조 대통령을 만나 뵈었을 때에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사이에서도 연대 강화를 추구하는 기운은 계속 높아지고 있습니다.
OAU(아프리카 통일기구)에서는, 작년 7월에 토고에서 개최한 수뇌회의에서 ‘아프리카연합’을 창설하기 위한 합의문서를 채택했습니다. 이 ‘아프리카연합’은 EU(유럽연합) 형태의 점진적인 통합을 지향하는 것으로 아프리카 의회와 법원, 중앙은행을 설치하는 것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창설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지만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가 ‘연합’ 창설이라는 목표에 일치를 보게 된 의의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OAU는 지역의 독자적인 인권헌장과 비핵화조약 제정을 비롯하여 최근에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토리아의 국경분쟁을 중개하여 정전(停戰)으로 이끄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경험과 교훈을 살리면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가 더한층 연대 강화를 목표로, ‘아프리카연합’ 창설이라는 새로운 단계에 착수하는 것에 국제사회는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전(不戰)의 대륙’을 향해 커다란 도전을
지역통합의 선구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EU는, 작년에 발표한 보고서 가운데 “EU는 한 번 전화(戰禍)로 찢어진 대륙에도 평화와 번영을 이끌 수 있다는 ‘산 증거’가 되었다”라며 반세기에 걸쳐 통합을 위해 도전해 왔는데 50년, 100년의 간격에서 보면 EU에서 가능한 일이 아프리카에서 가능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일찍이 은크루마 대통령은 아프리카합중국을 전망하며 “공포, 질투, 의혹이 아니고 또 타(他)를 희생하여 얻은 것도 아니라 희망, 신뢰, 우정에 서서 전 인류의 복지를 목표로 하는 까닭에 패하지 않는 위대한 대국(大國)으로 나타날 것이다”《자유를 위한 자유》 라고 호소했습니다.
은크루마 대통령이 아프리카의 사명으로 강조한 이 평화적인 연대의 구상 속에 오직 21세기의 지역통합이 나아가야 할 왕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공포’‘질투’‘의혹’은 ‘대립과 배제의 논리’에 의한 경쟁과 ‘외압과 강제의 논리’에 의한 외발적인 것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한편 ‘희망’‘신뢰’‘우정’은 공생과 내발을 지향하는 인간정신이 약동하는 가운데 길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금년은 유엔이 정한 ‘인종주의, 인종차별, 배외(排外)주의 그리고 불관용(不寬容)에 반대하고 동원(動員)하는 국제해’에 해당하며, 9월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세계회의도 열립니다. 여기서는 정부간의 회의와 병행하여 NGO포럼이 열릴 예정인데, SGI도 여기에 참가하여 특히 인권교육의 중요성을 호소해 갈 생각입니다.
아프리카의 경우만이 아니라 21세기의 열쇠는 민중이 강해지고 현명해지고 연대해 가는 데 있습니다. 또 거듭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의 ‘열린 대화’입니다.
‘대화’란 사람들을 서로 맺어 주고 상호간의 신뢰를 만들어 내기 위한 아주 소중한 ‘자장(磁場)’이자 선(善)한 힘의 내발적인 훈발(薰發)을 통해 상호간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소생시켜 가는 힘의 이명(異名)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의 쓰디쓴 비극의 대부분은 이 ‘대화’의 정신이 사회의 확고한 토양이 되지 못한 데 기인하고 있는 바가 큽니다.
올해는 유엔 ‘문명간 대화의 해’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대화’를 21세기의 커다란 조류(潮流)로 고양시켜, 모든 사람이 존엄성을 빛내면서 가능성을 충분히 꽃피우고 함께 평화와 행복을 승리로 이끌어 내는 시대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SGI 회원 한사람 한사람은 좋은 시민으로서, 새로운 지구문명의 창조로 이어지는 ‘대화’를, 나날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서 ‘평화’와 ‘인도(人道)’의 민중연대를 세계에 넓히는 도전에 기꺼이 노력해 가고자 합니다.
어구해설
주1 = 데카르트의 ‘코기토’
프랑스어의 ‘코기토 에르고 숨’의 줄임말로 데카르트가 ‘방법서설(方法序說)’로 사용한 말.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회의(懷疑)한 끝에 의식하는 ‘아(我)’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이 원리를 스스로 철학의 출발점에 두었다.
주2 = 애니미즘
종교의 원시적인 초자연관의 한 형태. 자연계의 모든 존재는 구체적인 모습이나 형태를 가지면서 제각기 내적으로 영혼이나 정혼(精魂)을 갖고 있고, 갖가지 현상은 모든 사물의 의사(意思)나 움직임에 따른 것이라고 보는 신앙이나 사상.
주3 = 반면교사(反面敎師)
부정적인 것을 보임으로써 긍정적인 것을 한층 더 분명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물
주4 = 파리부전(不戰)조약
1928년, 프랑스의 외상 브리앙과 미국의 국무장관 켈로그의 제안으로 성립한 조약. 제1차 세계대전 후 ‘전쟁의 위법화’과정에서 국제법상 획기적인 의미를 가진다. 분쟁해결이나 국가의 정책수단으로서 전쟁을 포기할 것을 제정한 항목 등 모두 3조(條)로 되어 있다.
주5 = 밀레니엄 NGO포럼
‘21세기의 유엔’을 테마로 세계 각지에서 NGO 등의 시민사회의 대표가 모여 유엔본부에서 열린 회의. 평화, 빈곤, 인권, 환경 등의 지구적 문제군을 해결하기 위해 채택한 문서는 ‘민중측의 제언’으로서 ‘밀레니엄 서밋’등에 제출되었다.
주6= 다보스회의
1971년 이래, 스위스 동부의 다보스에서 매년 열리는 국제회의. 처음에는 경제계 중심이었지만 1980년대에는 정치지도자도 참석, 수뇌회담의 장으로도 주목받게 되었다. 최근에는 글로벌화의 과제 등을 주요 의제로 채택하고 있다.
주7= 남북공동선언
수뇌회담의 성과로 합의를 본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등 5개 항목으로 구성된 선언. 1972년의 공동성명, 1992년의 기본합의서에 이어 남북간의 문서지만 최고수뇌끼리 직접 회담하고 서명한 점에서 비중이 있다. 그 후, 이산가족의 재회와 각료급회담 등을 추진하게 되었다.
정의를 위하여
열심히 투쟁하는
전 동지에게 감사!
명랑하게
완벽한 승리의 정상을 향해!
이상에 살아라! 사명에 살아라!
자기답게 살아라!
거기에 후회없는 인생이 빛난다!
지난 1월 26일, 제26회 ‘SGI의 날’을 기념하여 이케다 SGI회장은 “생명의 세기를 향해 크나큰 조류”라는 테마로 제언을 발표했다.
제언에서는 우선 20세기의 역사를 공죄(功罪) 양면에서 총괄하여 수많은 외면적 진보가 있었던 반면, 근대사회의 병리라고도 할 수 있는 ‘생명 배제’의 사상이 극심해짐에 따라 수많은 비극이 발생한 세기였다고 지적. 이 ‘정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와 연대를 복권시키는 세계관(世界觀)이 불가결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거기서 불법의 연기사상(緣起思想:인과 연이 서로 관계해서 하나의 현상이 생겨나는 사상을 말함)을 통해 ‘생명 존엄’의 내실을 부각시키면서, 현대의 시류(時流)가 된 글로벌리즘(globalism:세계화)과 IT(정보기술)혁명의 과제에 대해 언급.
21세기의 키워드로서 ‘공생(共生)’과 ‘내발(內發)’을 제시하면서 여성이 완수해야 할 역할이나 가정의 재생(再生)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어 초점이 되고 있는 헌법개정문제에 관해 제9조의 이념에 입각하여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전망하고 있다. 또 인류 공동투쟁의 중핵을 짊어진 유엔의 기본자세로서 ‘대화와 협조의 소프트파워를 중시하는 운영’과 ‘시민사회와 협동체제를 확립’하는 일의 필요성을 강조. 아울러 재정안정화를 위해 ‘유엔 민중펀드’의 창설 등을 제안하고 있다.
또 유엔이 추진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로서 빈곤과 환경문제를 들고 있으며, 빈곤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지구포럼’의 설치를 제창. 아울러 ‘지구헌장’을 전 인류의 규범으로 그 비중을 높여 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역적인 관점에서 중국, 인도의 역할과 통합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은 아프리카의 미래에 대해 언급. 각국이 그 정신적 전통을 살려 모럴 파워(moral power:도덕의 힘)의 창조적 경쟁에 도전해 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대화’의 힘으로 평화와 인도의 연대를 구축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공생(共生)과 내발(內發)의 정신력으로
인간을 위한 새로운 문명을
드디어 막을 올린 21세기―이 새로운 세기가 어떠한 시대로 될 것인가, 작년 부터 수많은 전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생명공학이나 정보공학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대가 모아지는 한편, 정치나 경제면의 향후 방향에 대한 불투명성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습니다.
‘기대’와 ‘불안’이라는 이 두 가지 대조는 세기의 전환기에만 볼 수 있는 특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20세기의 개막과 비교했을 때, 당시의 그 낙관적인 분위기는 자취를 감춰버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 배경에는 “20세기는 인류에게 도움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입밖으로 꺼내는 일조차 아주 무색할 정도의 환멸감이 한몫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진보로 많은 혜택을 누리는 반면,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 아직껏 없었던 비극이 되풀이된 시대의 깊은 어둠이 사람들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어둠을 걷어낼 수 있는 빛은 도대체 무엇인가. 21세기는 과연 무엇을 기조로 해서 준비해야만 하는가.
이 테마를 생각했을 때, 가슴 속에 떠오르는 것은 ‘현대 화학의 아버지’라이너스 폴링 박사와 나눈 추억의 대담입니다.
박사와 엮은 대답집 속에서 제가 “21세기를 ‘생명의 세기’로”라는 오랜 지론을 말씀드리자 박사는 전적으로 찬동해 주시며, “그것이 뜻하는 바는 인간 생명 그 자체에 지금보다 더 많은 초점이 맞춰져, 인간의 행복과 건강이 중요시되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1901년에 태어나 말 그대로 20세기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과학자로서 또 평화운동가로서 인간과 사회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 오신 박사의 말씀인 만큼 크나큰 무게를 느꼈습니다.
그 대담집의 타이틀을 《‘생명의 세기’에 대한 탐구》라고 한 것도 생명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인류가 진정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도, 또 나아가야 할 길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쫷 식자들의 회고
그렇다면 역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되돌아봤을 때 20세기는 우리들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역사가 에릭 홉스봄 씨의 대저(大著) 《20세기 역사》는 그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 책입니다. 머릿글에는 ‘12명이 본 20세기’라는 타이틀로 세계를 대표하는 식자들의 견해를 열거하고 있는데 비통한 외침에 가까운 말들이 계속 나열되고 있는 것이 저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금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세기였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영국의 노벨상 수상자, 작가 윌리엄 골딩)
“나는 그것을 학살과 전쟁의 세기로밖에 보지 않는다.”(프랑스의 생태학자 르네 뒤몽)
홉스봄 씨는 이들의 의견을 소개한 다음, “성찰력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왜 만족하지 못한 채, 그리고 미래에 대한 확신 없이 20세기를 회고하는 것일까”라고 자문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20세기가 그 세기에 점철된 전쟁의 규모와 빈도, 기간 모든 면에 있어서 의심할 여지 없이 역사상 가장 잔혹한 세기이며, (중략) 가장 혹심한 기근에서 조직적인 대학살에 이르기까지 20세기가 낳은 인간이 저지른 인간 파멸의, 일찍이 전례가 없었던 그 규모의 거대함에 있어서도 그러했기 때문이다”라고.
외면적인 진보와 시대정신의 퇴영(退纓)
물론 이러한 역사의 어두운 부분에만 빛을 비추는 것은 공정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20세기의 발자취 속에는 진보와 발전이라는 승리의 개가를 올린 측면도 많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제국주의나 식민지주의가 지구상을 방약무인(傍若無人:사람이 없는 것 같이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것)격으로 구는 것이 묵인된 시대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아직 많은 과제를 안고 있긴 하지만 국제연합이라는 세계정치의 시스템은 그 수명이 짧았던 국제연맹에 비해 이 반세기 동안 계속 기능을 발휘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여러 가치에 대해 맞서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줄어들었고, 특히 여성의 지위향상, 사회진출은 아직 많이 미흡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지난 세기의 괄목할만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功)과 죄(罪)가 거의 반반인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어서도 물질적 풍요(부의 편재라는 아포리아〈해법이 없는 난관〉를 안고 있지만), 교통·통신, 의학·위생 등의 공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20세기 초와 세기말의 우리들을 둘러싼 인권의 현주소 하나만 보더라도 법률면, 제도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20세기에 있어서 인간이 인간을 너무도 많이 죽였다는 사실만은 지울 수 없습니다. 실로 16세기 이후 5백 년에 걸친 전사자(戰死者) 3분의 2는 20세기의 전사자가 차지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만, 그야말로 ‘메가데스(megadeath)’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역사상 미증유의 대살육의 시대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 20세기는 인간의 생명을 너무나 가볍게 다루어 왔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는 ‘생명 쇠약의 세기’이자 ‘생명 고갈의 세기’‘생명 모독의 세기’였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생명의 배제’가 초래한 20세기의 비극
앞서 열거한 20세기가 안겨준 메리트(merit:이점, 장점)를 보더라도 대부분이 외면적인 진보이며, 마찬가지로 시대정신이라는 의미에서는 퇴영적 상황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생명은 축소 일로를 걷고, 불법적으로 말하면 인간상호간의, 혹은 대우주와 연결고리가 끊겨 ‘소아(小我)’ 속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한 시류(時流)를 ‘생명 존엄의 세기’로 어떻게 전환해 갈 것인가 하는 것이 폴링 박사와 제가 공유한 문명사적 과제였습니다.
때가 때인 만큼 최근에는 역사서적 이외에도 다양한 20세기론이 세상에 선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제가 살펴본 결과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몇 사람이 언급하고 있는 프랑스의 문인 폴 발레리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이야기한 ‘정신의 위기’라는 말입니다.
1919년에 발표된 같은 이름의 논고(論考)에서 발레리는 사상 최초의 총력전인 제1차 대전이 초래한 정신적 충격―영화(榮華)를 자랑했던 서구문명의 멸망조차 예감케 한, 끝이 보이지 않는 위기감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발레리가 부각시킨 것은 지식의 무력함, 과학 응용의 잔인함, 목표 상실 등의 문제였습니다. 모두 현대적 과제이며, 서구 근대정신의 파탄을 심층까지 꿰뚫어본 그의 안목은 20세기 말까지도 내다보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그가 깊어만 가는 위기를 주시하면서 발표한 소논문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자신들의 우주에서 모든 생명을 배제하는 일에 철학을 적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열의로, 옛사람들은 우주 속에 생명을 만연케 하는 일에 자신들의 철학을 적용했다”라고. 하나의 반시대적 고찰이라고는 하지만 실로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시류의 본질을 파헤친 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의도적으로 생명을 배제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언어의 코스몰로지(cosmology:우주관) 형성 능력이 현저하게 쇠약해진 20세기에 있어서 철학뿐만이 아니라 문학도 언어의 복권, 언어을 통한 의미론적 생명공간의 재구성을 목표로 모색하고 신음하며 그리고 좌절을 되풀이해 왔다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특히 생명의 배제라는 점에 있어서는 과학기술이 기여한 거대한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근대과학이 자연을 인간과 분리된 조작 가능한 객체로서 정의 내리는 기계론적 자연관을 주무기로 장족의 진보를 해 온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마지막 4반세기에 이르러 갑자기 부각된 지구환경의 위기라든지, 21세기 지(知)의 프론티어라고는 하나 클론(clon:복제)기술과 같이 조금만 운용을 잘못하면 인간이 인간이라는 사실의 근본까지도 붕괴될 우려가 있는 유전자 공학 등의 발달도 있어서, 과학분야에서도 패러다임(인식의 체계) 전환의 필요성을 느껴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고 정의를 내리는 주객 일체의 자연관, 생명관을 근저에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듯합니다.
마쓰이 다카노리 씨(도쿄대학 대학원 교수)는 기계론적 자연관의 초석이 되어온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주1〉에서 “나는 어울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혹은 “나는 관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변형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만 저도 크게 찬동하는 바입니다.
‘목숨’‘마음’에 높아지는 관심
그것은 4년 전 ‘SGI의 날’ 기념제언에서 제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스페인의 철학자) 철학의 정수(精髓)로서 소개한 “나는 나와 나 자신의 환경이다. 그리고 만약 이 환경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도 구제할 수 없다”는 논제와 똑같은 지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시류 때문인지 ‘밀레니엄’의 일본에서도 ‘생명’이라고 해서 단순한 생물학적인 생명이 아니라 발레리가 말하는 ‘생명’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늘고 있는 듯합니다. 그것도 ‘생명’이라는 말보다도 ‘목숨’‘마음’‘혼’과 같이 한자 표기보다는 히라가나 표기로 쓰여 있는 것이 돋보입니다.
아이들의 세계에 빈발하는 문제행동이나 흉악범죄가 계기가 되어 논의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그러한 표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시대정신의 보다 더 깊은 곳에 숨쉬는 미묘하면서도 희미한 감수성의 표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쏟는 방법, 가치관이 그 뭔가를 예감하면서 천천히 크게 변모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번의 만남을 통해 서로 흉금을 터놓고 지냈던, 경애하는 선배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고(故) 예후디 메뉴인 씨가 즐겨 인용하신 미국 시애틀의 인디언 추장의 편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19세기 중엽 백인들에게 토지의 매수를 요구받았을 때 당시의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에게 보낸 것입니다. 아주 장문의 편지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만.
“만약 내가 (토지 매수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조건을 하나 달겠습니다. 그것은 이 땅의 동물을 백인은 자신의 형제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략) 나는 대평원 위에서 부패해 가는 많은 들소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백인들이 그 곳을 지나는 열차 안에서 사살하여 버리고 간 것입니다. 저는 야만인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먹고 살기 위해 죽이는 들소보다도 왜 연기를 내뿜는 기관차가 더 소중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동물이 없으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요?
만약 모든 동물들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면 인간은 커다란 혼의 고독감 때문에 죽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물의 신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인간의 신상에도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재난을 비롯하여 땅을 덮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땅 위의 자손들까지도 덮치는 법입니다.”
사회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유대의 분단’
도다 제2대회장의 ‘옥중체험’에서 깨달은 것
모든 존재와 연결하고 소생하는 ‘연기적(緣起的) 세계관’의 복권을
메뉴인 씨도 ‘인디언 추장의 글은 현대에 ― 모든 시대에 ― 정말 잘 맞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이런 감성, 감수성을 원시적 애니미즘〈주2〉이라고 업신여기거나 목가적(牧歌的)인 낭만이라고 잘라버릴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인디언에게서 토지를 강제적으로 빼앗고 보호구역에 몰아넣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처럼, 재미삼아 들짐승을 때려 죽이고도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감정은 인간을 차별하는 감정에 통하는 것이며, 이처럼 ‘생명의 세기’에 상반(相反)되는 행동을 하는 무연(無緣)한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삼라만상 속에 차이의 장벽을 만들고 그것에 따라 가치의 서열을 매기는 행위는, 삼라만상 상호간의 연결을 끊어 한쪽을 일방적으로 억압하고 수탈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모독할 뿐입니다.
불법이 설하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리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느 인디언 추장의 감성(感性)을 공유하면서 불법(佛法)의 지견(知見)은 그런 장벽을 허무는 생명의 진실한 모습, 실상으로 다가서는 것을 최우선 명제로 했습니다. “일념삼천은 정(情), 비정(非情)에 미치느니라” 다시 말해 ‘일념’이라는 극치의 생명작용에 ‘삼천’이라는 모든 현상세계가 들어 있다는 법리는 유정(有情)인 인간이나 동물뿐만 아니라 산천초목 등의 비정(非情)의 세계에도 통용한다는 뜻입니다. 또 “일체중생은 하나도 빠짐없이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념’이나 ‘불성’의 엄밀한 정의(定義)는 제쳐 두고라도, 우선 ‘생명’과 거의 동의어라고 이해해도 좋습니다. ‘생명’이 생물학적인 협의(狹義)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다만 소박한 애니미즘의 감성을 공유하면서도 불법에서 설하는 ‘생명’의 세계가 약간 뉘앙스가 다른 것은, ‘생명’의 세계는 가만히 앉아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계점에 달한 정신투쟁 끝에 활연히 열리는 풍요롭고 맑은 세계라는 점입니다.
데카르트의 ‘회의(懷疑)적 방법’은 아닙니다만, 그것은 모순과 부조리로 꽉 찬 세상에서 지(知)·정(情)·의(意)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든 의문을 구사하면서 생(生)의 의미를 계속 묻고 고뇌하고 사색한 끝에 열리는 경지이며, 그런 특유의 생명감각을 연마한 구도(求道)의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무차별·평등의 세계입니다.
또 동시에 무차별이라 해도 그것은 밋밋한 비인칭적, 비개성적인 세계가 아니라 만물이 서로 ‘연(緣)’에 따라 각각 연결되면서 생기(生起:생겨나는 일, 발생)와 멸진(滅盡:멸해서 없어짐)을 반복하고 있는 ‘연기(緣起)’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충일(充溢:가득 차서 넘침), 집중, 긴장, 조화, 균형, 통일… 어느 것 하나도 그 세계를 형용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고, 불전(佛典)에 “언어도단(言語道斷)하여 심행소멸(心行所滅)한다”고 교시되어 있는 대로 석존처럼 깨달은 자도 사람들의 몰이해와 오해를 두려워하여 설하는 것을 크게 망설일 정도로 미묘한 오달의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십사비(三十四非)’로 표현한 세계
은사 도다 조세이 창가학회 제2대회장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무렵 군부권력의 종교탄압으로 투옥되었을 때, 혹독한 옥중생활 속에서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여 회득(會得)하신 경지도 바로 이 ‘생명’의 세계였습니다.
은사는 옥중투쟁을 계속하던 어느 날, 법화경을 신독(身讀)하기로 발심합니다. 하루에 1만 번의 창제를 거듭하며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고 있었는데, 법화경의 개경(開經)인 무량의경(無量義經)의 어느 대목에서 마치 암초에 걸린 듯이 사색의 실마리가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부처를 찬탄하는 게(偈)의 구절로
“그(부처)의 신(身)은 유(有)도 아니고 또한 무(無)도 아니다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고 자타(自他)도 아니다
방(方)도 아니고 원(圓)도 아니고 단장(短長)도 아니다”에서 시작하여
“피(彼)도 아니고 차(此)도 아니고 거래(去來)도 아니다
청(靑)도 아니고 황(黃)도 아니고 적백(赤白)도 아니다
홍(紅)도 아니고 자(紫) 종종(種種)의 색도 아니다”로 끝나는 12행입니다.
그 속에 ‘… 이 아니고’가 무려 34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집요할 정도로 언어의 표현을 거절한 끝에 나타난 ‘부처’란 도대체 무엇인가.
극도로 정신을 집중하여 사색한 속에 은사가 회득한 것은 ‘부처’란 ‘생명’이라는 위대하고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이자 달관(達觀)이었습니다.
그 상세한 내용은 저의 졸저 《인간혁명》(제4권‘생명의 정원’)에 맡기기로 하고, 저는 거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도다 조세이가 전개한 이 때의 순간은 장래 세계의 철학을 변모시키기에 충분한 순간이었다고 해도 좋다. 그것은 세월의 급속한 흐름과 함께 이윽고 밝혀질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집필 당시(1968년 1월)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저의 신념이며 사실 오늘날 163개국·지역까지 넓혀진 SGI(창가학회 인터내셔널) 운동이 대하의 흐름으로 된 것도 전적으로 은사의 옥중체험이라는 원류(源流)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금세기를 ‘생명의 세기’‘생명 존엄의 세기’로 만들어야겠다고 깊이 기약하는 저의 결의도, 종파성이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 인류의 정신사에 공헌해 갈 것이라는 은사의 매우 소중한 체험을 시대의 폐색상황을 무너뜨리는 돌파구로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심각해지는 사회와 흔들리는 가족
이전에 역사가 토인비 박사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일상적인 것에서 눈을 돌려 “물밑에서 활동하여 강바닥까지 스며드는 완만하고 눈에 보이지 않고 저울에 달 수도 없는 움직임”을 주시하도록 호소했습니다. 《시련에 선 문명》
제가 ‘목숨’‘마음’‘혼’ 등의 말을 자주 하는 배경에는, 사람들의 감수성이나 관심의 방향에 시류(時流)의 깊은 곳에서 생기는 변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가치관을 비롯하여 모든 기구와 시스템에 ‘동요(動搖)’가 현저한 가운데 아이덴티티(identity:자기 정체성)를 찾는 것이고, 반응이 있는 리얼리티(reality:현실성)를 모색하는 것이라 해도 좋습니다.
IT(정보기술)혁명이라는 것을 몹시 선전하고 있습니다만, 예를 들어 IT사회가 도래한다 해도 그것을 책임진 사람은 어디서 아이덴티티를 찾으면 좋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손도 안 댄 상태입니다.
자칫하면 기다리는 것은 장미빛 미래는커녕 ‘목숨’‘마음’ 그리고 ‘혼’의 질식사일지도 모릅니다 ― 사람들은 이런 불안감에 흔들려 ‘내면으로 향한 여행’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적어도 저는 일부의 미디어 논객처럼 네트혁명이 가져오는 커뮤니케이션의 확대를 대책없이 환영하는 낙관론에 편승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아마도 인류의 정신사적 스팬(span:시간적 간격)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이 ‘동요’가 얼마나 ‘물밑에서 활동하여 강바닥까지 스며드는’ 모양의 거대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공동체이자 인간사회를 동물의 무리에서 분리하는 분수령인 가족조차 현재 격렬한 지각변동에 힙쓸려 있는 모습을 보더라도 알 수 있겠지요.
가족 붕괴나 장래를 묻는 테마는 ‘목숨’‘마음’‘혼’ 등과 관련되어 반복하여 언급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드러난 냉엄한 사실은, 가족은 다른 인간관계와는 달리 자신이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숙명적인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족의 유대조차도 ‘동요’에 직면하여 리얼리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부터 20여 년 전, 많은 여성신도가 가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예수의 방주(方舟)’사건 무렵부터 서서히 나타났다고 생각하는데, 최근 속출하는 이상한 소년범죄도 확실히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상식의 틀을 훨씬 뛰어넘은 그들의 배후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정과 가족의 ‘동요’ 혹은 ‘붕괴’가 잠재해 있습니다.
현재의 가정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곳이 아니라 짜증나고 답답한 밀실의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은 많은 식자들이 입을 모아 지적하고 있는 바입니다.
‘살아가는 의미’를 잃은 인간
버추얼 리얼리티(가상현실)라는 말은 직접적으로는 텔레비전이나 PC, 인터넷 등이 가져오는, 인간이 직접 접하지 않는 허구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족의 유대를 비롯하여 인간끼리나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를 연결하는 모든 유대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리얼리티를 상실하고 점점 가상적으로 되고 있는 듯합니다. 인간기피증, 집에 틀어박히기, 실어증, 인정불감증, 개성의 위기 등등 특히 현대 일본의 젊은층에 눈에 띄는 병리현상은 그 증거가 아닐까요.
그런 정신상태 아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는 말 따위는 이미 빈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리하여 진실한 리얼리티는 몇 겹의 가상현실에 덮여 ‘뿌리의 파괴’에 직면한 사람들은 확실한 생(生)의 의미를 찾아 ‘자기 탐구’의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목숨’ ‘생명’ ‘혼’ ‘가족’이 직면한 위기적 상황의 본질은 그런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존엄’이라는 것을 시대정신으로 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진실과 구극의 리얼리티임이 틀림없는 ‘생명’‘연기’의 세계 ― 파우스트와 함께 “그 순간이여, 멈춰라. 너는 정말 아름답다”라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그 세계의 광원(光源)에서 역조명(逆照明)을 통해 우리를 둘러싼 모든 연대를 소생시켜, 살고 그리고 죽어가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재구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 이 집에…”
“왜, 남자(여자)로…”
“왜, 이런 일을…”
― 그 중의 극치에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가’가 위치하고 있을 것이라는 모든 질문에 도저히 응답할 준비를 할 수 없게 되면, 새로운 세기는 미궁을 헤맬 뿐일 것입니다. ‘생명의 세기’에 당장 해결해야 할 초미의 관심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세기’를 열기 위해 ‘생의 자세’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한 마디 한다면, 파우스트가 “그 순간이여, 멈춰라”고 말한 것처럼 여하튼 ‘지금’의 순간이 전부이자 승부라는 것입니다.
첫째, 왜 ‘전부’인가 하면 ‘생명’이나 ‘연기’의 세계에서 진실, 리얼리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순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에는 많든 적든 가상성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는 말할 것도 없고, 과거의 사건이라고 해도 일상적, 역사적 혹은 과학적인 시간이라는 인위적 틀에 따라 구축된 것으로 참된 의미의 리얼리티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전(佛典)에는 “과거의 인(因)을 알려거든 현재의 과(果)를 보라, 미래의 과를 알려거든 현재의 인을 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축에 따른 인과관계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현재’의 순간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대의 어둠을 걷어 내는 ‘강성한 마음’(자기규율의 정신)
생명의 약동은 ‘강성한 마음’의 체현(體現) 속에
은사가 사색한 것처럼 리얼리티를 뒤덮는 온갖 인위적인 틀, 그 중에서도 언어의 허구성을 파고든 끝에 열리는 것이 ‘생명’‘연기’의 세계입니다. 그것도 ‘연기 ― 연에 따라 일어난다’고 하듯이 거기에는 모든 ‘개(個)’가 ‘연(緣)’에 따라 결합하고 있으며, 지금은 지구의 반대쪽에 살고 있는, 얼굴도 모르는 ‘소연(疎緣:연이 먼)한’ 사람까지도 1천 년, 2천 년 전에는 어떠한 관계의 ‘연’이 있었는지 모르는 일이고 어쩌면 ‘친척’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무수한 ‘연’으로 이어진 자아의 무한한 확대를 불법에서는 ‘대아(大我)’라고 부릅니다.
동양사상에도 조예가 깊은 칼 융은 “예를 들어 법률적으로는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해도, 직접 자기가 하지 않았다고 해도, 인간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도 역시 잠재적 범죄자인 것이다”《현재와 미래》 라고 통찰하고 있습니다. 한편 뜻밖이라고 느껴질 것 같은 언어도 ‘연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논리적 귀결입니다.
둘째, 왜 ‘지금’의 순간이 ‘승부’인가 하면 ‘생명’‘연기’의 세계는 그 충일(充溢:가득 차서 넘침)과 농밀(濃密)의 정도에 따라 정신의 패잔병이라고 할 수 있는 안일이나 나태와는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고, 끊임없는 정신투쟁으로 순간순간을 쟁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전에는 “월월(月月)·일일(日日) 강성해지시라. 조금이라도 해이한 마음이 있다면 마(魔)가 틈탈 것이니라”(어서 1190쪽)고 설하고 있습니다. ‘강성한 마음’ 즉 마음을 북돋아 일어서서 끊임없는 전진과 비상(飛翔)을 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리얼리티의 자장(磁場)에 접할 수 있고, 반대로 ‘해이한 마음’에 몸을 맡기면 마음은 긴장감을 잃어 공포와 증오, 질투나 겁 등의 약한 정(情)에 먹히고 말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강성한 마음’의 사람이란 석존이 끊임없이 설한 자기규율의 달인이라 해도 좋겠지요.
“비폭력에는 패배 따위는 없다. 이에 비해 폭력의 결말은 반드시 패배한다” 《나의 비폭력1》라며 결코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마하트마 간디는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세기’를 향한 위대한 선구자였습니다.
‘패배 따위는 없다’― 자신을 이긴다는 일점에 흔들리지 않는 자부심과 자신감에 가득찬 이 성자의 세계는 항상 광채가 빛나는 영광과 개가(凱歌)에 감싸여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고, 그 일점만 미동하지 않는다면 결국 승리는 약속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의 세계에서 비폭력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과제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간디의 이 신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풍조의 시대’에 숨어 있는 위험성
그런데 이와 같은 ‘생명’‘연기’라는 배광성(背光性:식물체가 빛의 자극을 받았을 때 빛의 반대쪽으로 뻗는 성질)에서 21세기의 시대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경향성의 흐름을 상상해 보면, 거기서 어떤 속성이 떠오를까요.
저는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을 담아 ‘공생’과 ‘내발(內發)’이라는 두 가지 지표를 추출해 보고자 합니다. 동시에 ‘생명’과 ‘연기’는 대단히 친근하며, 양자(兩者)만큼 20세기 시대정신의 흐름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것은 없다고 통감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는 뭐니뭐니해도 파시즘이나 볼셰비즘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친 시대입니다. 20세기가 사상 최대의 대량살육시대로 각인된다면, 그 참화를 가져온 최대의 요인은 이데올로기의 석권(席卷)이 아니었는가,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의 특징이 ‘공생’‘내발’과는 정반대의 말인, 나쁜 의미의 ‘경쟁’이며 ‘외발(外發)’이 아닐까요. 파시즘이나 볼셰비즘에 국한하지 않고 이데올로기 전반에 통하는 폐단으로서, 인간이나 사회 속에 외면적인 차이의 장벽을 만들어 그것을 고정화하여 자신의 서열을 높이 매기면서 남을 배제하고 억압하려는 경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종종 사회의 혼란에 편승하여 광신적인 슬로건으로 바뀌어 ‘경쟁’은 원래 숨어 있는 ‘대립과 배제의 논리’를 두드러지게 하고, ‘외발’은 ‘외압과 강제의 논리’라는 하드파워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시체가 널려 있는 20세기의 역사는 바로 그 산 증거였습니다.
오르테가의 《대중의 반역》은 20세기의 대중사회의 병리현상을 일찍이 척결한 기념비적 명저로서 알려져 있는데, 그는 그 속에서 “현대는 ‘풍조’의 시대이며 ‘끌려다니는 시대’”라고 갈파했습니다. 《오르테가 저작집2》
겟베루스의 “거짓말도 백 번하면…”이라는 너무나도 유명한 말이 시사하듯이 그런 시대에는 ‘대립과 배제의 논리’‘외압과 강제의 논리’의 위험성은 가속도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파시즘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 볼셰비즘의 계급주의적 이데올로기는 ‘풍조의 시대’의 악마적 소산에 불과합니다.
지금의 세계를 뒤덮는 글로벌리즘(세계화)도 그것이 ‘주의(主義)’로서 이데올로기로 될 위험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서 글로벌리즘이 가져오는 장점을 평가하는 데 인색하지 않습니다만, 무조건 환영할 정도의 낙관론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국제 표준)라는 것을 금과옥조(金科玉條:소중히 여기고 꼭 지켜야 할 법률)로 하고, 그것과 맞지 않는(차이가 있는) 세계나 사회에 대해서는 ‘대립과 배제의 논리’‘외압과 강제의 논리’를 행사할 위험성은 없는가 ―. 글로벌리즘이라는 미명 아래 확대해 가는 국가간, 개인간의 빈부격차 혹은 자본주의의 제품생산을 소홀히하는 금융자본주의, 카지노자본주의 등 그 어두운 부분은 일부의 낙관론에 찬물을 끼얹기에 충분합니다.
21세기를 ‘생명의 세기’로 열어가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의 그런 성격을 ‘반면교사(反面敎師)’〈주3〉로 삼아 ‘경쟁’이 아닌 ‘공생’을, ‘외발’이 아닌 ‘내발’을 장기적인 지표로서 착실한 행보를 추진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개별성이 아니라 사물의 관계성을 가장 우선으로 하는 ‘연기관’은 ‘공생’과 거의 동의어(同義語)라고 해도 좋습니다. 또 언어에 의한 사물의 고정화를 거부하고 언어의 허구성을 꿰뚫어, 진실한 리얼리티를 고생 끝에 찾은 ‘생명’의 작용을 불전(佛典)에는 “작작발발(作作發發)하게 행동한다”(내발적인 촉구에 따른 순간순간 심신<心身>의 작용이나 행동을 한다)고 설하는 것처럼, ‘생명의 세기’를 여는 것은 ‘내발적’으로밖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표가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흡수되어 정의를 내린다면 ‘생명의 세기’는 전쟁과 전쟁의 막간이 아닌 참된 의미의 ‘평화의 세기’로서 20세기와 결별하는 것이 가능하겠지요.
파탄을 가져온 ‘경쟁’‘외발(外發)’의 이데올로기
‘힘의 문명’을 전환하는 여성의 세기를
흔들리는 ‘가족’의 재생은 인류사적 과제
타고르가 기대한 역할
그런 21세기로 행보를 시작함에 즈음하여 제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여성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과 그렇게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데올로기에 수반하는 ‘대립과 배제의 논리’와 ‘외압과 강제의 논리’가 남성을 연상시키는 데 비해 여성의 특질은 ‘생명의 세기’가 지향하는 공생이나 내발, 나아가 결합과 조화 그리고 평화 등의 이미지를 방불케 합니다.
그런 점에서도 간디와 그의 동지 타고르는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평화창출이라는 점에서 간디가 여성에 건 기대는 참으로 솔직하고 명쾌합니다.
“여성은 자신들이 나약한 성(性)에 속해 있다는 것만 잊으면 남성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반전(反戰)행동을 취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가령 위대한 병사나 장군의 아내와 딸 그리고 어머니들이 어떤 형태의 군국주의와도 협력하는 것을 반대한다면 그 병사나 장군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대답해 보라.” 《저항하지 말라, 굴복하지 말라》
또 타고르는 문명론적인 관점에서 남성 중심의 ‘힘의 문명’을 ‘정신적인 문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힘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기대를 걸었습니다.
“다음 시대의 문명은 경제적, 정치적 경쟁과 이용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사회적 협동에 기반을 두고, 능률이라는 경제적 이상(理想)이 아니라 호혜(互惠)라는 정신적 이상 위에 수립되는 것을 우리는 바라고 있다. 그것을 실현했을 때, 여성은 자신의 참된 위치를 발견할 것이다.” 《타고르 저작집 제9권》
지금 모든 면에서 뚜렷이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비롯한 남성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낸 가치관이고 원리입니다. 그것들이 예외없이 그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추궁하고 있을 때 부각된 것이 앞에서 말한 ‘목숨’이고 ‘마음’‘혼’‘가족’입니다.
모두 ‘여성적인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21세기에 여성이라는 존재의 무게는 법률이나 경제면의 ‘해방’(그것도 중요합니다만)을 훨씬 뛰어넘는 문명사적(文明史的) 의미가 있습니다.
보스턴 21센터의 도전
그러므로 21세기가 기조로 해야 할 ‘생명의 세기’란 ‘여성의 세기’의 이명(異名)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제가 창립한 평화연구기관 ‘보스턴 21세기센터’에서는 1993년 창설 이래, 이런 ‘여성의 역할’을 둘러싼 연구를 주요활동으로 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유엔의 개혁과 지구환경문제, 평화의 문화 등 수많은 테마를 다루어 왔습니다만, 연구를 진행할 때는 여성의 견해가 반영되도록 토의를 거듭해 왔습니다.
그것은 이 센터가 여성의 견해나 여성의 역할에 관한 고찰을 빼놓고는 유익한 접근방법을 이끌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해결의 방향성을 오판할 위험이 있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이 센터가 내걸은 지침 중에 ‘생명의 세기를 비추는 등대이어라’가 있습니다만, 앞으로도 특히 ‘여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평화연구의 네트워크를 넓혀 ‘생명의 세기’의 대해원(大海原)을 계속 밝게 비추길 염원하는 바입니다.
‘여성의 세기’를 향한 조짐은 가족과 가정의 동요, 붕괴라는 중대한 대사(大事)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중대한가’ 하면, 그것이 인간이라는 가장 본바탕이 되는 부분의 붕괴로 이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재작년 《대붕괴의 시대》(F. 후쿠야마 저)라는 책에서 작가는 말했습니다. ‘인간의 본질과 사회질서의 재구축’이 부제(副題)인 이 책의 중심 테마는 가정의 붕괴와 재구축이었습니다. 《역사의 종말》에서와 마찬가지로 후쿠야마 씨의 역사의 동향에 대한 날카로운 시대감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류 탄생의 역사와 ‘가족의 기원’
한편 영장류(靈長類) 학자인 가와이 마사오 씨는 모자(母子) 관계는 2억 년 전 포유류의 탄생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아버지의 역사는 인류가 탄생한 이후의 일로 고작 5백만 년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5백만 년 전, 수컷이 아버지가 되고 암컷이 어머니가 됨에 따라 포유류의 ‘무리’에서 인간특유의 ‘가족’으로 변모했기 때문에 가족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같은 스팬(시간적 간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가족의 붕괴는 ‘사람이 사람이 아닌 것,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현대는 인류가 인류사 500백만 년 가운데 처음으로 직면한 비정상적인 시대’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추세에 ‘제동’을 걸며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일 없이, 인간이기를 계속 원한다면 원리적인 부모의 힘이 상조(相助)·호혜(互惠)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모의 역할은 ‘연기’이며 ‘공생’의 관계가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상조·호혜관계를 성립시켜 가면서 주도권을 잡아가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여성이 아닐까요. 남성은 좋은 파트너, 협력자일 뿐 주역은 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의 견문과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하는 배경에는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현명한 어머니의 존재, 뒷받침이 있습니다.
물론 기업사회의 가정을 지켜온 ‘현모양처’형의 어머니상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어머니상, 가정상의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 현대입니다. 인류사와 함께 과거 가족의 역사를 살펴보면, 여성의 불가사의한 능력에 대해 어떠한 경우에도 가볍게 봐서는 안 될 무게와 깊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괴테는 남성적인 근대적 자아로서, 유례가 없는 체현자(體現者)인 파우스트의 파멸에 대하여 최후에는 ‘영원한 여성’으로서 구제의 손길을 뻗친 것이 아닐까요.
헌법 제9조 ‘평화주의’의 세계적인 개화를
국민적 합의를 위해 끈기 있는 논의를
화제를 바꾸어 다음으로 ‘생명의 세기’를 평화로써 많은 결실을 거두기 위해 피해갈 수 없는 테마인 일본국 헌법을 둘러싼 논의를 하고자 합니다.
작년 1월, 중의원과 참의원에 ‘헌법조사회’를 설치하여 국회에서 현행 헌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똑같이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의 차원에서 신헌법으로 재출발한 독일이 오늘날까지 몇 번이고 헌법에 손을 대고 있는 것처럼, 시대와 사회 변화에 호응하여 일국의 최고법규인 헌법을 적절히 검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헌법 논의라고 하면, 제9조에만 초점을 맞추어 ‘개헌이다’ ‘호헌이다’는 등 단편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현 헌법 제정 후, 사회 변화 속에서 발생한 새로운 환경문제와 다양하게 바뀌는 인권문제, 정보화 사회의 대응, 나아가 직접 민의(民意)를 묻는 국민투표제와 수상의 공선제(公選制) 도입 등 21세기의 일본의 민주주의 형태에 관련된 몇 가지 테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제 등을 눈여겨 보면서 더 좋은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헌법을 수정하는 일은 중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른바 ‘헌법 논의’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기적 전망이나 이념이 결여된 상태에서 성급하게 개정(改正)하거나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지 않은 채, 정치적 의도를 앞세워 개정을 추진하는 것은 엄격히 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추진방법은 종종 ‘무엇을 위한 개정이었는가’하는 화근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전제에서 말씀드리면, ‘평화헌법’이라는 통칭이 보여 주듯이 전문(前文)과 제9조에 들어 있는 평화주의, 국제협조주의의 이념은 일본 헌법의 근간이 되는 의미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의 안전보장을 위한 구체적인 대책에 대해서는 여러 시점에서 논의해도 되겠지만, 저는 무엇보다 평화헌법의 이념과 정신성이 풍화(風化)되어 버리는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런 입장에서 제9조에 관해서는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줄곧 주장해 왔으며 그 신념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일본이 이 반세기 동안 헌법의 근간을 이루는 이 ‘평화주의’의 메시지를 얼마나 세계에 발신해 왔는가 하면, 국제적으로 볼 때 참으로 미약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나름대로 노력한 것은 인정해도 뿌리 깊은 복고주의적 움직임이나 과거의 침략전쟁을 긍정하려는 데 일부 세력도 거들었기에, ‘평화주의’의 윤곽으로서 일본발(日本發) 메시지는 이웃 아시아 여러 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 그다지 전달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일국의 평화주의’의 함정을 뛰어넘어
이것은 평화를 주창하는 쪽도 마찬가지로, 내향성(內向性)의 논의에 치우친 나머지 세계를 바꾸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으로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국제사회의 동향, 타국의 시선 등에 상관없이 자신들만 안온하면 된다는 이기주의적인 ‘일국의 평화주의’로 가는 것은 평화와 흡사하나 분명 잘못된 것이며, 모든 인류의 평화적 생존권을 구가하는 헌법 전문의 정신과도 동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의 세기’로 각인된 20세기와 새로운 세기를 확연히 결별시키기 위해서도 일본은 이런 정체상황(停滯狀況)을 타파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관점과 현실적인 사고(思考)를 조절하면서 제9조의 이념과 정신을 새로운 생명력으로 넓혀 간다 ― 이것이 21세기의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기억에도 선명한 모리 아리마사 씨의 말이 생각납니다.
“세계는 자기규율의 경쟁이다. 정치가 군사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다. 또 평화의 진정한 의미가 거기에 있다.”《나무들은 빛을 받고》
경청해야 할 식견입니다. 헌법 논의에 국한하지 않고 전후 일본의 정치문화에 가장 결여된 것이 이 ‘자기규율’ 정신이며 ‘신념’이고 앞에서 언급한 ‘강성한 마음’이 아닐까요.
전후(戰後) 오랫동안 계속된 냉전구조하에서 일본의 지도자층 중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타율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행보를 계속해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냉전 후에도 별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제2의 패전’이라는 거품경제 붕괴 후에도 ‘자기규율’이나 ‘신념’과는 거리가 먼 ‘해이한 마음’ 그대로 이완된 심정을 초래하고 만 것은 아닐까요.
헌법 논의에 있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헌법을 일관하는 ‘평화주의’를 ‘자기규율의 형태’‘신념의 체계’에 따라 극히 세밀하게 전개해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제9조에 관련해서 말하면 저는 조문을 개정하지 않아도 그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9조 제1항에서 ‘파리부전조약’〈주4〉의 정신을 계승하여 인류의 비원(悲願)인 전쟁의 근절이라는 이상(理想)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것과 국권이 발동하는 전쟁(무력에 따른 위협 또는 무력행사를 포함)을 포기하도록 국가주권을 굳이 제한하고 있습니다. ‘반주권성(半主權性)’은 반대로 말하면 그것을 국제기구(유엔)에 위임한다는 약속 아래 성립했다는 것에서 볼 때 그 출발에서도 분명한 것이지요.
‘보편성’에 입각한 ‘개(個)’에서의 발상
저는 제9조에 투영되어 있는 전쟁이나 무력행사에 관한 국가주권의 자기한정적 사고를 발판으로 유엔 등과 밀접하게 연계하는 형태로 항구평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헌법 전문이나 유엔헌장의 정신에 걸맞는 길이고, ‘보편성’에 입각한 ‘개(個)’의 자리매김이라는 열린 자세에서 ‘평화국가·일본’의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유엔이 주도하는 보편적 안전보장과 분쟁예방조치의 환경정비·확립을 21세기에는 반드시 실현해야 하며, 일본이 그 길잡이의 주도적 역할을 해내야 한다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비(非)군사적인 면에서 국제이해와 협조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수정의 여지가 많지 않을까요. 민생의 향상이나 개발, 교육·문화·스포츠면의 교류 등등 모든 면에서 ‘자기규율의 형태’‘신념의 체계’를 발신해 가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사람 한사람이 ‘해이한 마음’과 결별하고 ‘강성한 마음’을 구현해 가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전쟁이 없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일본이 그런 인류사적 실험을 향한 키잡이가 되어 주길 염원해 마지 않습니다.
유엔이야말로 인류가 결집하여 공동투쟁하는 중심축(中心軸)
시민사회와 협동하여 ‘소프트파워’를 중시하는 운영을
재정 안정화를 위해 유엔 민중펀드를 창설
이러한 일본의 도전과 깊이 연관하여 생각해 봤을 때, 초점이 되는 것이 유엔 본연의 모습입니다.
21세기를 ‘평화의 세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쟁과 비극을 낳는 원인인 국익 우선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인류 이익’과 ‘지구 이익’에 입각한 국제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그것이 일체의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핵심이 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유엔일 것입니다. 평화·군축 문제뿐만 아니라 환경문제나 빈곤문제도 뿌리 깊음을 생각하면 국가의 입장을 초월한 ‘협력’과 ‘협조’, 나아가 ‘인류 공동투쟁’의 흐름이 요청될 것은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도 근 반세기 동안 ‘세계공통의 대화의 장’으로 국제적인 합의를 만들어 내는 데 힘쓰고 세계 각지에서 인도적 지원 활동을 계속 담당해 온 유엔에 눈을 돌리는 이외에 역시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 면에서 한계와 과제를 안고 있다 해도 유엔을 중심축으로 인류가 결속하는 길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의 개막을 앞둔 작년 9월, 세계 각지의 수뇌가 모여 개최한 ‘밀레니엄 서밋’에서 채택한 선언의 의의는 크다고 하겠습니다.
선언에는 각국이 책임을 분담하고 지구적 과제에 대처할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또한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기관으로서, 유엔은 그 중심적인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 다시 한번 유엔 창설에 담긴 정신, 즉 “우리 일생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애를 인류에게 두 번이나 가져온 전쟁의 참해(慘害)에서 장래의 세대를 구제하고”(헌장 전문) 라는 숭고한 목적을 상기하여 ‘전쟁 없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유엔을 중심으로 인류 공동투쟁의 기본체제를 만들기 위해 힘차게 전진을 개시해야 합니다.
유엔 본연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이 어떠한 세계를 목표로 하여, 지금 직면해 있는 지구적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테마에 그대로 직결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가장 명심해야 할 대전제로 생각하는 것은 유엔의 본질이 ‘대화’와 ‘협조’를 기축으로 하는 소프트파워에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헌장에는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정한 제6장과 함께 강제 조치를 정한 제7장이 있는 것처럼 군사적 조치를 포함한 하드파워 행사(行使)도 상정(想定)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평화적 해결의 선행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하드파워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국면일 경우에 쓰는 ‘최종 수단’이어야 하고, 유엔의 근본적인 사명은 어디까지나 소프트파워를 통한 세계 평화와 안정에 있을 것입니다.
두 번의 대전(大戰)을 교훈으로 하여 태어난 유엔이기에 이러한 유엔의 탄생 배경에 비추어 보더라도, 또 21세기를 ‘공생(共生)’과 ‘내발(內發)’을 바탕으로 한 ‘생명의 세기’로 만들기 위해서도 이 원칙에서 벗어나서는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안전보장이사회의 역할은 역할로서 인정하는 바이지만, 21세기의 유엔이 지향해야 할 길은 하드파워를 통한 사후적(事後的)인 문제해결 방법이 아니라 예방과 안정을 중시한 소프트파워의 충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도 경제사회이사회나 인도적인 분야의 여러 기관이 더욱 적극적으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50년 이상 쌓아온 경험과 교훈을 운용면에서 충분히 살리면서 ‘인간의 안전보장’을 추진하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올해 9월에는 유엔에서 어린이를 위한 특별총회를 개최하는데, 미래를 담당할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진지한 논의와 결실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국가의 연합체’에서 탈피하기를
이러한 소프트파워를 중시하는 자세와 표리일체의 관계에서, 앞으로 유엔을 생각하는 데 있어 제외해서는 안 되는 기둥은 NGO(비정부기구)를 비롯한 시민사회와 유엔의 흔들리지 않는 협동체제 확립, 즉 ‘민중의, 민중이 주도하는, 민중을 위한 유엔’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각 나라가 국익지상주의라는 20세기의 마이너스 유산(遺産)을 떠안고 가는 상태에서 유엔이 ‘대립과 배제의 논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기능불능에 빠지거나, ‘외압과 강제의 논리’에 쉽게 치우쳐 화근을 남기거나, 신뢰를 잃는 그러한 길로 들어서지 않기 위해서도 민중을 근본으로 한 ‘인간을 위한 유엔’ 건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민중을 주역으로 한 유엔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21세기의 인류 운명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한 시대의 방향성은 전에 언급한 밀레니엄 선언에도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유엔 강화라는 제목의 장(章)에서 “민간 분야, NGO와 시민사회 전반이 유엔의 목표와 프로그램 실현에 공헌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할 것”이라고 시민사회가 유엔의 파트너로서 꼭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이는 국가의 모임에 지나지 않던 종래의 유엔에서 ‘탈피’할 것을 명확히 지향한 선언이라는 것에 그 의의가 있습니다.
저는 민중이 계획에 참여하는 것은 단지 유엔을 활성화하는 최상의 방법이라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유엔이 ‘국가간의 연합체’의 한계를 타파하고 ‘지구시민사회를 결집하는 축’으로서 발전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민중의 광범위한 힘을 결집함으로써 유엔에 ‘인간적 면모’가 한층 더 돋보이도록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유엔이 걸어가야 할 대도(大道)이어야 합니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이 방향성에 어긋나지 않게 실행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밀레니엄 서밋에 앞서 작년 5월에 열린 ‘밀레니엄 NGO포럼’〈주5〉에서 제안한 내용을 기본으로 검토해 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채택된 문서에는 ‘세계적인 시민사회 포럼’을 창설할 것과 총회를 비롯한 유엔기구에 대한 NGO의 접촉과 협의권의 확대 등의 항목이 들어 있습니다. 어떠한 제안이든 그 동안 제가 제창해 온 계획과 일치하며 하루라도 빨리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창립한 도다기념국제평화연구소에서도 작년에 유엔개혁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라트로베대학교와 태국의 글로벌사우스연구소(츄라론콩대학교)의 공동 프로젝트로 갈리 전(前) 유엔사무총장 등 지식인과 전문가로 이루어진 두 그룹에서 추진해 온 연구 성과를 한데 모은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민주화’를 개혁의 한 지주로서 인정하고, 시민사회에 개방된 유엔 시스템으로 만들기 위해 대담하게 개혁을 추진하는 ‘민중총회’ 창설을 비롯한 구체적인 제안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찍이 평화학자인 갈퉁 박사는 나와 나눈대담 속에서 민중총회 등의 구상에 대하여 “아이디어다운 아이디어가 거의 나오지도 않고 마지막에는 투표로 결정하여 승자와 패자가 나오는 단기간의 토의보다는 새로운 발상과 합의를 낳도록 장기적으로 대화하는 편이 좋다”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이렇듯 민중이 참가하는 새로운 제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패자를 낳지 않기 위한 장기적인 ‘전망’이며,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고려하는 ‘대화’입니다. 이와 같은 계획은 여러 단체에서 제창하고 있고, 또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크게 한 걸음 내딛어야 할 때를 맞이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NGO는 결코 국가의 연합체를 보완하는 ‘조연(助演)’이 아니라 ‘공생’과 ‘내발’의 흐름에 따른 새로운 국제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주역’입니다. 이런 민중의 손으로 만드는 유엔이어야만, 비로소 한사람 한사람의 인간존엄과 안전을 지키는 기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덧붙이면, 유엔의 오랜 과제인 재정에 대해서도 ‘세계의 민중이 지지하는’ 제도를 만드는 일이 핵심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유니세프에서 도입하고 있는 제도 등을 참고로 하면서 개인이나 단체, 기업에서 내는 기부금을 적극적으로 모아 인도적인 분야를 중심으로 한 활동자금에 충당하는 ‘유엔 민중펀드’라고 할 수 있는 제도를 검토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가맹국의 갹출금에 의존하기 때문에 즉각 응해야 하는 활동이나 중점적으로 착수할 과제에 지장이 생기는 현상을 감안하여 시민사회에서 나오는 기금을 또 하나의 기반으로 유엔 재정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계에서 12억 인구가 극심한 빈곤에
아울러 저는 유엔을 중심으로 민중이 주도하여 인류가 함께 착수해야 할 매우 긴요한 과제로서 ‘빈곤’과 ‘환경’을 들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첫번째는 빈곤 극복입니다.
세계은행의 작년도 개발보고에 따르면 하루 평균 1달러 이하의 생활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계 인구의 약 20%를 차지하는 12억 인구에 달하고 그 수는 감소하기는커녕 증가하는 추세라고 합니다.
또 세계은행에서는 이러한 통계 자료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의 소리’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년에 발표했습니다. 이는 10년에 걸쳐 60개국 6만 명에게서 직접 듣고 조사하여 완성한 노작(勞作)이고,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육성(肉聲)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 어디에 문제의 소지가 있으며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부각한 내용입니다.
세계은행에서는 그들의 목소리를 분석하면서 ① 사람들이 가난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경제적인 ‘기회 제공’ ② 스스로 직업 등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익히는 ‘엠파워먼트(empowerment:힘을 부여하는 일)’ ③ 기본적인 생활 기반을 갖추게 하고 재해나 혼란 시, 그 사람들을 지원해 주는 ‘보장’, 이런 점들에 유의하여 정책이나 원조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빈곤 ― 고통받는 사람들의 소리를 반영하는 ‘지구포럼’ 설치를
환경 ― ‘지구헌장’을 한사람 한사람의 다짐으로
이 점에 대해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 박사는 “적절한 사회적 기회를 부여받으면 개개의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효과적으로 구축하고 서로 돕는 일도 가능하다. 인간을 오로지 기술적인 개발계획이 낳는 이익의 수동적인 수익자로서 간주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을 원조나 개발의 (결과물을 받는) ‘수익자’가 아니라 변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위치를 부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러므로 원조나 개발을 추진함에 있어서도 거의 일방적으로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 세계은행의 보고서가 지향한 것처럼 ‘직접 목소리를 듣고 그 의견을 반영케 하는’ 접근방법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각국의 민주화 촉진과 더불어 국제사회에서도 현실적으로 괴로워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헤아리는 장소를 설치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선진국에서는 각국 수뇌로 이루어진 서밋이나 주요 정계(政界) 재계(財界) 인사가 모여 개최하는 ‘세계 경제포럼’의 연차총회(다보스회의)〈주6〉 등이 있어 국제정치와 국제경제의 방향성을 검토하는 장(場)이 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이러한 회의와 개발도상국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완수하면서 공정하게 인간 본위의 지구사회를 목표로 대화·협의하는 ‘지구포럼’이라고도 할 만한 장을 설치하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개발도상국의 정부와 시민의 대표 그리고 유엔사무총장을 비롯하여 유엔의 여러 기관의 책임자가 모여 각국과 여러 기관의 성공 사례나 교훈을 서로 제공하면서, 개발도상국측을 배려한 글로벌화와 모든 요청에 부응한 인간개발 촉진 등을 도모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회의는 연 2회 정도 실시하고 대표가 그 성과와 요망 안건을 가지고 서밋이나 다보스회의에 참석하여 의견이 협의내용에 반영되도록 힘쓰는 형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작년의 ‘규슈·오키나와 서밋’에서는 서밋 역사상 처음으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대표가 모인 가운데 수뇌급 대화가 실현되었는데, 이러한 시도를 궤도에 오르게 하여 그 ‘대화’의 틀을 서밋의 큰 기반으로 삼아 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지구환경 파괴가 불러오는 것
두번째 과제는 지구환경 문제입니다.
1992년의 ‘지구 서밋(유엔 환경개발회의)’ 개최를 계기로 지구차원의 국제협력을 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지구온난화방지조약 등 몇 가지 조약도 성립했습니다.
그러나 지구환경 파괴는 이러한 대응을 훨씬 능가하는 속도로 진행하고 있어 사태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지지부진하게 진행할 것이라면 조만간 큰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를 일이고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근본적인 의식변혁을 도모하는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전부터 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 일행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고 있는 ‘지구헌장’ 제정의 취지에 찬동하고 계속 협력해 왔습니다.
SGI도 세계 각지에서 지원행사를 열어 왔고, 보스턴 21세기센터에서도 초안 작성에 다각적인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회의와 세미나를 잇따라 열었습니다.
지구헌장의 최종안은 작년에 완성했는데, 이는 배경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이나 세계 각 지역 사람들의 소리를 폭넓게 참작하면서 끈기 있게 계속 검토해 온 성과이자 지구적 규모의 광범위한 대화에서 나온 ‘결정(結晶)’입니다.
모두 4장 16항목으로 되어 있고, ‘생명공동체에 대한 존경과 배려’‘생태계 보전(保全)’이라는 환경문제에 관한 장(章)과 ‘사회와 경제의 공정’‘민주주의, 비폭력과 평화’의 장을 포함하여 지구사회를 형성하는 데 따른 행동규범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지구헌장이야말로 ‘공생’과 ‘내발’을 기본으로 한 ‘생명의 세기’를 여는 초석이 되리라 강하게 확신하는 바입니다.
지구 서밋 10주년에 해당하는 내년 유엔총회에서 정식으로 지구헌장을 채택하기를 희망합니다만, 이를 단순한 국가간의 합의문서로 끝낼 것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행동규범으로서 뿌리를 내리게 해야 합니다.
SGI에서는 이것을 정식으로 채택하는 기간까지 민중차원의 의식계발을 위해 힘쓰는 한편, 채택한 후에도 지구헌장이 ‘한사람 한사람의 맹세’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기획전시의 개최를 포함하여 폭넓은 운동을 추진해 가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공생’과 ‘내발’을 기본으로 한 ‘생명의 세기’의 관점에서 21세기에 필요한 세계상(像)을 구상하기 위해 지역적인 관점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해 언급해 두려 합니다.
아시아에 관하여 특히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중국과 인도가 맡은 역할입니다. 양국은 단지 인구나 규모, 혹은 세계 안전보장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문명적인 관점에서도 해가 갈수록 중요한 위치에 설 것이 틀림없습니다.
21세기에 더욱 역할이 커진 중국과 인도
세계에서 ‘모럴 파워’의 창조적 경쟁을
한반도, 계속적인 대화가 평화의 초석
중국에 대한 토인비 박사의 기대
먼저 중국에 관하여 말하면, “중국이야말로 세계의 절반은 물론이고 세계 전체에 정치통합과 평화를 가져다 줄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라고 하신 토인비 박사의 말씀을 저는 그립게 떠올립니다.
이 말씀에는 박사의 장대한 이론을 일관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즉, 현재의 사상(事象)만에 눈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역사를 만드는 ‘물밑의 느슨한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미래는 전망할 수 없다는 확신이 맥동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미래를 주시하고 중일국교정상화와 중국의 유엔가입을 제창한 저도 진심으로 공감했습니다.
제가 염원하던 중국 방문을 처음으로 실현한 것은 박사와 런던에서 대담을 마친 이듬해인 1974년이었습니다.
이래로 민간차원에서 문화와 교육교류의 길을 솔선하여 개척하고 중국과 우호를 깊이 다져 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깊이 느낀 것은 토인비 박사가 중국문명의 정신적 유산으로서 언급한 수많은 미질(美質:아름다운 성질)이 사회변화에 부응하여 형태를 바꾸면서 숨쉬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나는 대립보다도 조화를, 분열보다도 결합을 지향하는 세계정신이고, 또 하나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실천을 통하여 ‘더 좋은 선택이 가능한 여러 답’을 모색하는 인간주의적 발상입니다.
전자(前者)는 내가 중국사회과학원에서 강연했을 때, 강력하게 호소한 대동사상(大同思想:만민의 신분적 평등과 공평한 분배, 인륜의 구현이 특징인 인류의 이상적인 사회형태)으로 상징되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길러진 지혜라고도 해야 할 ‘공생(共生)의 에토스(ethos:기풍, 정신)’입니다.
후자(後者)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실험에서 볼 수 있는 점진주의(漸進主義)적인 개혁의 기반이 되는 현실감각이라고 하겠습니다. 홍콩과 마카오 반환에 따른 ‘일국이체제(一國二體制)’의 시도도 그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에 관련하여 ‘교과서 문제’ 등을 통해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역사를 부정하는 듯한 언동(言動)을 간혹 듣는 것은 무척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2차대전이 끝난 지 50년이 된 1995년에 수상의 담화에서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을 표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언동을 되풀이하는 것은 기만(欺瞞)일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품위를 의심할 일이므로 엄하게 삼가야 합니다.
인도에 살아 숨쉬는 인간주의적 전통
중국과 마찬가지로 인도도 오랜 역사를 통해 지니게 된 훌륭한 정신성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세히 논하지는 않겠지만 석존과 아소카대왕 그리고 간디로 이어지는 위대한 정신의 계보(系譜)에는, 인간을 계속해서 왜소하게 생각해 온 근대적 휴머니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우주적 휴머니즘이라고 할 만한 넓이를 가진 인간정신의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힘의 정복’이 아니라 ‘달마(法:법)에 바탕을 둔 공생’을 지향하고, 차별이나 배타로 인한 분단이 아니라 ‘다양성을 존중한 조화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융이 “인도에서는 일찍이 몇십 만 번 정도 태어난 적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은 듯하다” 라고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연기(緣起)’의 세계 그 자체입니다.
최근에는 핵무기 보유와 IT선진국 등의 측면만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인도나 중국 역사의 지하수맥에 흐르는 정신의 힘이 바로 21세기를 소프트파워의 시대로 만드는 하나의 원동력으로 이어져 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양국의 역사를 모두 미화할 생각은 없습니다. 양국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과제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호소하고 싶은 것은, 양국이 오랜 역사를 통해 배양해 온 정신적 유산을 잃지 말고 시대정신을 헤아려 창조적으로 개화시켜 가는 것이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문제는 많든 적든 간에 양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나 있는 법이며, 서로 마이너스 면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좋은 영향을 미치는 플러스 경쟁을 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가는 것이 가치적이지 않겠습니까. 이전에, 현행의 서밋에 양국을 가담시켜 ‘책임국 수뇌회의’가 되도록 발전적인 개편을 제창한 것도 그러한 생각에서였습니다.
20세기가 패권을 다투는 경쟁이 심한 시대였다고 한다면, 21세기는 어느 나라가 중심이 되는가, 하는 것보다는 어느 나라가 인도적인 의미에서 모범을 보일 것인가, 하는 도덕과 정신의 ‘내발적인 힘’을 보여 줄 ‘공생’의 시대로 궤도를 수정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요.
남북최고수뇌의 직접적인 대화가 실현
이러한 패권 경쟁에서 세계가 탈피하기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대화’입니다. 작년은 그런 의미에서 이 ‘대화’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남북최고수뇌가 역사적인 대화를 실현한 것입니다.
작년 6월,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에서 사흘 동안 회담을 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미래에 대해 대담했습니다.
저는 15년 이상 전부터 남북의 최고수뇌가 직접 대화할 것을 거듭 호소해 왔습니다. 작년의 제언에도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이야말로 냉전상태를 종결짓는 절호의 기회”라고 호소한 바, 이번에 대화가 실현된 것은 감개무량한 일입니다.
오랜 세월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고 본격적으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라도, 분단역사상 처음으로 성사된 이번 일과 같은 최고수뇌의 직접적인 대화는 계속 이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남북공동선언’〈주7〉에서 약속한 김 위원장의 서울방문이 조기에 실현되어 최고수뇌의 대화가 정착하고 신뢰가 조성되면서 양국이 ‘한반도의 부전화(不戰化)’를 위하여 더욱 전진하기를 절실히 염원하는 바입니다.
냉전 후에 확산되는 지역분쟁의 재해
아시아와 더불어 세계의 평화를 생각할 때 초점이 되는 곳이 아프리카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냉전종식 후에 각지에서 지역분쟁과 내전이 일어나, 사람들의 생활과 안전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냉전 후에 1천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무력분쟁은 108건에 이르고 대부분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이 분쟁들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난민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늘고 있어 UNHCR(유엔난민문제 고등판무관사무소)에서는 그 수가 6백 20만 명에 달한다(2000년 1월 현재)고 발표했습니다.
또 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에서는 기아에 허덕이는 지역이 확산되어 FAO(유엔 식량농업기구)의 작년도 백서에 따르면, 분쟁이 원인이 되어 식량부족에 빠진 나라는 19개국에 이르고, 자연재해로 인한 식량부족 국가와 비교하여 현저히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아프리카 사람들이 오랫동안 고통받고 있는 빈곤문제도 생각처럼 개선되지 않고, 선진국들의 ‘원조기피(援助忌避)’와 더불어 비관론이 팽배하고 있는 것이 염려됩니다. 그 결과, 위기적인 상황과 반비례하는 형태로 아프리카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은 낮아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글로벌화가 진행되는 세계의 평화를 전망해 볼 때 아프리카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피할 수 없는 과제이며, 또 이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간과하는 것은 인도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궁핍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遠因:간접적인 원인) 즉 열강제국에 의한 식민지 지배와 일방적인 영토확장 등, 아프리카가 오랫동안 처해 온 역사적 상황을 감안해 보면 이러한 ‘마이너스 유산’을 그대로 미래에 되풀이하여 물려 주지 않는 것이 인류 공통의 책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류발상지’라고 불리는 아프리카는 오랜 옛날부터 풍요로운 문명을 꽃피우고 사상과 과학 분야에서도 인류에게 수많은 은혜를 베풀어 온 ‘희망의 대륙’이었습니다.
나도 이전부터 ‘21세기는 아프리카의 세기’라는 생각을 강하게 품어왔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 중의 하나는, 지금부터 40년 전에 유엔본부를 처음 방문했을 때 총회나 위원회에서 토의하는 아프리카 각국 대표의 발랄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해, 1960년은 아프리카의 17개국이 잇달아 독립을 쟁취한, 이른바 ‘아프리카의 해’이고 내가 창가학회의 제3대회장에 취임한 해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태동을 느낀 저는 그 이후로 아프리카 각국의 지도자와 식자들과 우호를 깊이 다지면서 ‘아프리카의 세기’를 향한 길을 개척하기 위해 미력하나마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또 소카대학교와 민주음악협회의 창립자로서 교육, 문화 교류를 민중차원에서 광범위하게 추진하기 위한 노력도 거듭해 왔습니다.
SGI로서도 특히 UNHCR이 추진하는 난민구조활동을 지원하는 운동에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난민조약’ 제정 50주년을 맞는 올해도 SGI는 UNHCR 등과 연계하여 지원활동을 계속하고 싶습니다만, 같은 ‘연기(緣起)’의 세계의 주민인 아프리카의 영속적인 평화는 누구에게나 친밀한 과제일 것입니다.
통합에 착수한 아프리카
희망과 신뢰의 연대로 ‘인도(人道)의 세기’를 향해
지금까지도 아프리카 내외에서 여러 가지 건설적인 계획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나의 은크루마 초대대통령 등 범(汎)아프리카주의(主義) 운동의 지도자들이 일찍이 제창한 ‘아프리카합중국’의 구상, 다시 말해 각국이 강하게 연대하여 평화와 번영을 함께 희구하기 위한 구상을 식민지 독립 후의 여명의 산물이라 해서 과거의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합중국’의 구상에 대해서는 2년 전에 나이지리아의 오바산조 대통령을 만나 뵈었을 때에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사이에서도 연대 강화를 추구하는 기운은 계속 높아지고 있습니다.
OAU(아프리카 통일기구)에서는, 작년 7월에 토고에서 개최한 수뇌회의에서 ‘아프리카연합’을 창설하기 위한 합의문서를 채택했습니다. 이 ‘아프리카연합’은 EU(유럽연합) 형태의 점진적인 통합을 지향하는 것으로 아프리카 의회와 법원, 중앙은행을 설치하는 것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창설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지만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가 ‘연합’ 창설이라는 목표에 일치를 보게 된 의의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OAU는 지역의 독자적인 인권헌장과 비핵화조약 제정을 비롯하여 최근에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토리아의 국경분쟁을 중개하여 정전(停戰)으로 이끄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경험과 교훈을 살리면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가 더한층 연대 강화를 목표로, ‘아프리카연합’ 창설이라는 새로운 단계에 착수하는 것에 국제사회는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전(不戰)의 대륙’을 향해 커다란 도전을
지역통합의 선구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EU는, 작년에 발표한 보고서 가운데 “EU는 한 번 전화(戰禍)로 찢어진 대륙에도 평화와 번영을 이끌 수 있다는 ‘산 증거’가 되었다”라며 반세기에 걸쳐 통합을 위해 도전해 왔는데 50년, 100년의 간격에서 보면 EU에서 가능한 일이 아프리카에서 가능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일찍이 은크루마 대통령은 아프리카합중국을 전망하며 “공포, 질투, 의혹이 아니고 또 타(他)를 희생하여 얻은 것도 아니라 희망, 신뢰, 우정에 서서 전 인류의 복지를 목표로 하는 까닭에 패하지 않는 위대한 대국(大國)으로 나타날 것이다”《자유를 위한 자유》 라고 호소했습니다.
은크루마 대통령이 아프리카의 사명으로 강조한 이 평화적인 연대의 구상 속에 오직 21세기의 지역통합이 나아가야 할 왕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공포’‘질투’‘의혹’은 ‘대립과 배제의 논리’에 의한 경쟁과 ‘외압과 강제의 논리’에 의한 외발적인 것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한편 ‘희망’‘신뢰’‘우정’은 공생과 내발을 지향하는 인간정신이 약동하는 가운데 길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금년은 유엔이 정한 ‘인종주의, 인종차별, 배외(排外)주의 그리고 불관용(不寬容)에 반대하고 동원(動員)하는 국제해’에 해당하며, 9월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세계회의도 열립니다. 여기서는 정부간의 회의와 병행하여 NGO포럼이 열릴 예정인데, SGI도 여기에 참가하여 특히 인권교육의 중요성을 호소해 갈 생각입니다.
아프리카의 경우만이 아니라 21세기의 열쇠는 민중이 강해지고 현명해지고 연대해 가는 데 있습니다. 또 거듭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의 ‘열린 대화’입니다.
‘대화’란 사람들을 서로 맺어 주고 상호간의 신뢰를 만들어 내기 위한 아주 소중한 ‘자장(磁場)’이자 선(善)한 힘의 내발적인 훈발(薰發)을 통해 상호간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소생시켜 가는 힘의 이명(異名)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의 쓰디쓴 비극의 대부분은 이 ‘대화’의 정신이 사회의 확고한 토양이 되지 못한 데 기인하고 있는 바가 큽니다.
올해는 유엔 ‘문명간 대화의 해’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대화’를 21세기의 커다란 조류(潮流)로 고양시켜, 모든 사람이 존엄성을 빛내면서 가능성을 충분히 꽃피우고 함께 평화와 행복을 승리로 이끌어 내는 시대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SGI 회원 한사람 한사람은 좋은 시민으로서, 새로운 지구문명의 창조로 이어지는 ‘대화’를, 나날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서 ‘평화’와 ‘인도(人道)’의 민중연대를 세계에 넓히는 도전에 기꺼이 노력해 가고자 합니다.
어구해설
주1 = 데카르트의 ‘코기토’
프랑스어의 ‘코기토 에르고 숨’의 줄임말로 데카르트가 ‘방법서설(方法序說)’로 사용한 말.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회의(懷疑)한 끝에 의식하는 ‘아(我)’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이 원리를 스스로 철학의 출발점에 두었다.
주2 = 애니미즘
종교의 원시적인 초자연관의 한 형태. 자연계의 모든 존재는 구체적인 모습이나 형태를 가지면서 제각기 내적으로 영혼이나 정혼(精魂)을 갖고 있고, 갖가지 현상은 모든 사물의 의사(意思)나 움직임에 따른 것이라고 보는 신앙이나 사상.
주3 = 반면교사(反面敎師)
부정적인 것을 보임으로써 긍정적인 것을 한층 더 분명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물
주4 = 파리부전(不戰)조약
1928년, 프랑스의 외상 브리앙과 미국의 국무장관 켈로그의 제안으로 성립한 조약. 제1차 세계대전 후 ‘전쟁의 위법화’과정에서 국제법상 획기적인 의미를 가진다. 분쟁해결이나 국가의 정책수단으로서 전쟁을 포기할 것을 제정한 항목 등 모두 3조(條)로 되어 있다.
주5 = 밀레니엄 NGO포럼
‘21세기의 유엔’을 테마로 세계 각지에서 NGO 등의 시민사회의 대표가 모여 유엔본부에서 열린 회의. 평화, 빈곤, 인권, 환경 등의 지구적 문제군을 해결하기 위해 채택한 문서는 ‘민중측의 제언’으로서 ‘밀레니엄 서밋’등에 제출되었다.
주6= 다보스회의
1971년 이래, 스위스 동부의 다보스에서 매년 열리는 국제회의. 처음에는 경제계 중심이었지만 1980년대에는 정치지도자도 참석, 수뇌회담의 장으로도 주목받게 되었다. 최근에는 글로벌화의 과제 등을 주요 의제로 채택하고 있다.
주7= 남북공동선언
수뇌회담의 성과로 합의를 본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등 5개 항목으로 구성된 선언. 1972년의 공동성명, 1992년의 기본합의서에 이어 남북간의 문서지만 최고수뇌끼리 직접 회담하고 서명한 점에서 비중이 있다. 그 후, 이산가족의 재회와 각료급회담 등을 추진하게 되었다.
정의를 위하여
열심히 투쟁하는
전 동지에게 감사!
명랑하게
완벽한 승리의 정상을 향해!
이상에 살아라! 사명에 살아라!
자기답게 살아라!
거기에 후회없는 인생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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