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종교시대 종교의 살길은 영성으로의 과감한 전환”
‘영성(靈性, spirituality)의 실현이 인간성의 완성이다.’
인간의 본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유전자나 뇌의 작용으로 본다거나, 혹은 인간의 본성이 악(惡)하냐 선(善)하냐는 수준에서 머무는 현대사회. 신(神)에 대한 관념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신을 갈망하고 신을 찾고 신을 사랑하는 영성은 인간의 본성이기에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길희성 서강대 종교학과 명예교수가 펴낸 영성 탐구의 역작 『영적 휴머니즘-종교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아카넷, 2021)는 영성의 실현이야말로 인간성을 완성하는 길이라고 정의한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적 빈곤의 문제를 넘어 세속적 휴머니즘의 현대사회에 사상적·철학적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 길 교수는 ‘영적 휴머니즘’을 제시한다. 이 책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관(神觀)과 신앙(信仰)을 과감히 재해석하고 불교(佛敎)와 힌두교, 유학(儒學)과 도가(道家) 사상 그리고 현대 과학에 이르기까지 인간 영성의 실현을 위한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새로운 신관은 새로운 영성을 요구한다. 새로운 영성의 요구가 새로운 신관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제 한 지역, 한 시대, 한 사상의 틀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영성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지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탈종교시대 종교의 살길은 종교에서 영성으로의 과감한 전환…영성이 종교의 핵”
“탈종교시대에 종교가 아직 살길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에서 영성으로의 과감한 전환이다. 영성이야말로 종교의 핵이다.”
기독교 신자이면서 불교학을 전공한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가 50여년 동안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나들며 피력해 온 탈종교시대의 ‘종교론(宗敎論)’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한 책 『영적 휴머니즘』은 그의 학문 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책이 될 수 있다는 심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촉발된 전 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 온 내가 도착한 정착역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탈종교시대에서 종교가 아직 살길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에서 영성으로의 과감한 전환이며, 영성은 종교의 핵”임을 강조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종교 간 그리고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넘어서는 제3의 길, ‘초종교적 영성’을 제안함으로써 유일신론(唯一神論)을 넘어서는 ‘포월적 신관(包越的 神觀)’을 제시한다. 인간 본연의 순수한 영성인 영적 휴머니즘을 회복하고 심화할 필요성과 종교의 유무(有無)를 떠나 개인의 진정한 ‘참나’를 찾을 수 있는 열린 종교로의 전환을 거듭 강조한다.
I부 ‘영적 휴머니즘’에서는 세속적 휴머니즘과 영적 휴머니즘을 비교하면서, 두 가지 형태의 휴머니즘이 지닌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이 손을 잡고 함께 현대문명을 주도해 나갈 시대적 사명을 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II부 ‘성서적 신앙, 형이상학적 신관, 세속적 휴머니즘’에서는 세속적 휴머니즘이 등장하여 근대 문명을 주도하게 된 과정을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성서적 신앙의 성격과 붕괴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사상사적으로 고찰한다. 아울러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의 붕괴와 정신적 공백에서 오는 위기, 특히 목적론적 세계관의 붕괴를 초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근대과학의 기계론적 사고와 세계관의 도전, 그리고 이로 인한 현대인들의 정신적 위기를 삶의 무의미성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고찰한다.
III부 ‘자연적 초자연주의: 영적 휴머니즘의 신관’에서는 이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초자연주의적인 신관에 있다는 판단 아래 ‘자연적 초자연주의’ 신관 혹은 ‘포월적 신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 신관을 제시한다. 자연적 초자연주의 신관에 따르면, 신에게는 양면적 본성(the bipolar nature of God)이 있어 신의 ‘로고스’와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이라고 불렀다. 이 두 개념은 신의 양면적 본성을 가리키는 말로서, 새로운 신관의 두 축이다. 둘은 물질과 정신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적 사고로는 결코 잡히지 않는다.
IV부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에서는 새로운 신관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한다. 첫째, 영적 휴머니즘의 길이 오늘의 세계를 주도하는 세속적 휴머니즘적 상식과 이성에 따른 가치들에 반하지 않고, 오히려 세속적 휴머니즘보다 더 성숙하고 힘이 있는 진정한 휴머니즘이라는 점을 논한다. 둘째, 영적 휴머니즘의 직접적인 사상적 토대가 되는 영적 인간관과 신관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는 영적 삶의 근본 성격을 논한 다음, 이러한 영적 휴머니즘의 영성을 가르침과 삶 속에서 실현한 영적 휴머니스트 네 명(예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임제 의현 선사, 해월 최시형)을 소개하고 살펴 본다.
길희성 교수가 평생에 걸친 작업을 『영적 휴머니즘』으로 집대성했다. 924쪽에 달하는 두툼한 이 책은 탈종교시대에 영적 휴머니즘으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존의 세속적 휴머니즘은 인간의 이성과 도덕을 통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나 신이 없이도 개인은 휴머니즘을 추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길 교수의 『영적 휴머니즘』은 영적 휴머니즘과 세속적 휴머니즘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고 초월적 인문주의를 주창한다. 근대과학에 기반한 이성과 윤리가 아닌, 포괄적이고 초종교적인 인문주의를 주창하는 셈이다. 영적 인간관은 누구나 갖고있는 그런 개념일지 모른다. 예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임제 의현 선사, 해월 최시형 등이 영적 휴머니스트의 사례로 제시된다.
이 책은 기존의 종교와 과학관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영적 휴머니즘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조금 산만하고 반복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길 교수가 그동안 써왔던 책들의 개념들이 중복되어서 나오다 보니 그런 것 같다. 특히 영적 휴머니즘이라는 개념이 너무 광범위해서 학술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애매한 부분도 있다. 깨달음은 고통을 통해서든 수련을 통해서든 개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이다.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영적 휴머니즘은 이런 측면에서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다.
●책속에서 - 종교와 휴머니즘은 같이 갈 수 있을까
영성이란 신을 향한 갈망이며 신과의 일치를 위한 노력이다. 영성과 영적 삶은 종교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종교는 현대 세계에서 사라질지 모르지만, 영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본성상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배경을 지니고 영적 인간관에 바탕을 둔 영적 휴머니즘(spiritual humanism)은 서구 근대의 세속화된 인간관에 기초한 세속적 휴머니즘(secular humanism)과 여러 점에서 다르지만, 둘은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함께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P. 30
영적 휴머니즘은 성령을 받고 싶어 하고 성령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에 내재하는 선험적인 영적 본성이라고 본다. 이 영적 본성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험적(a priori)인 것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혹은 하늘이 부여한, 성령을 갈구하고 성령을 받고 성령에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인간 모두에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이고, 사람이면 모두에게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수용할 수 있는 잠재적이고 선험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성리학적으로 말하면, 성령은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본연지성(本然之性)이고 천성이다. 간단히 말해, 성령은 인간학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 P. 118
성육신 사상과 사건이 말하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인간과 하느님의 완벽한 일치(divine-human unity, 신인합일神人合一)가 이루어졌다는 진리다. 문제는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러한 본성상의 합일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교 한 사람에게서만 이루어졌다는 배타적 주장에 있다. 앞으로 우리는 성육신이 모든 사람의 잠재적 가능성이라는 시각, 즉 보편적 성육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견해 ―논란을 일으킬 만한 견해―를 제시하게 될 것임을 여기서 미리 말해 둔다. -P. 161
나는 세계를 신의 유출 내지 현현으로 보는 진화적 창조 개념에 따라 예수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만물이 신에서 출현한, 혹은 신이 낳은 자식과도 같은 신의 육화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실로 ‘파격적인’ 보편적 성육신 사상임을 나 자신도 잘 안다. 천지만물이 하느님으로부터 출현하는 장구한 세월에 걸친 진화적 창조의 정점에서 출현한 인간은 모두가 예외 없이 하느님의 성육신이라는 귀하디 귀한 존재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2천 년 전에 유독 예수라는 한 사람에서만 일어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 해당하는 보편적 의미와 진리를 가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성육신 사건보다 더 놀라운 사건은 우주 138억 년의 진통 끝에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존재가 출현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P. 214
인간의 무서운 편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종교로‘부터’ 오는 편견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에 ‘대한’ 세속주의의 편견이다. 영적 휴머니즘은 이 두 가지 편견 모두로부터 자유를 주장하는 제3의 길이다. -P. 319
영적 휴머니즘의 신관은 또 성령에 대한 초자연주의적인 관념, 유독 기독인들에게만 ―그것도 일부 신앙인에게만 선별적으로 주어진다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의 선물로 주어진다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성령 이해를 과감히 지양한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모든 인간에 내재하는 영성의 근본이고 원천이라는 보편주의적인 성령 이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성령을 과감하게 인간 본성의 제3의 요소로 간주하는 ‘영적 인간관’의 시각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P. 647
우리는 휴머니즘이라고 하면 흔히 르네상스 휴머니즘(Renaissance Humanism)을 연상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중세의 신본주의에서 근세 인본주의로의 전환을 초래한 운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다. 중세 사회와 문화의 근본문제는 신본주의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 신본주의는 호도이고 포장일 뿐, 중세 사회와 질서의 진짜 문제는 신본주의를 가장한 봉건주의 사회체제와 타율적 문화(heteronomy)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타율적 문화와 사회질서를 뒷받침해준 가톨릭교회의 사제 중심적인 권위주의에 있었고 성직자 중심의 사회와 문화에 있었다. 영적 휴머니즘은 서양 중세가 신본주의 혹은 신율적(theonomous) 시대였다는 견해는 그릇된 생각이라고 본다. 진정한 신본주의와 진정한 인본주의는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 - P. 747
진화적 창조론과 형이상학적 일원론을 결합한 새로운 신관은 무엇보다도 동서양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영성의 복원을 요구한다. 존재와 생명의 뿌리이자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의 원천으로 만물에 내재하는 신성은 우주만물의 성스러운 깊이의 차원이다. 인간을 비롯하여 천지만물이 모두 신성하지만, 인간과 천지만물의 차이는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와 생명의 뿌리인 신을 그리워하고 자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바로 이러한 능력 자체가 신성(神性)의 일면이라는 것, 더 정확히 말해 인간에 내재하는 신성 내지 신의 현존이고 신의 빛이라는 것이 동서고금의 영성가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P 789
“제도 종교의 시대는 막내려…이젠 종교에서 영성으로 가야”
“제도 종교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제는 종교에서 영성으로 가야 한다.” 길희성(79) 서강대 명예교수는 강화도 내가면에 있는 심도학사(尋道學舍)에서 지내고 있다. 그가 사재(私財)를 털어 직접 마련한 심도학사는 고전과 경전을 공부하며 ‘삶의 길(道)’을 찾는 곳이다. 길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예일대 신학부에서 석사,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세인트올라프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그가 말하는 ‘종교와 영성’은 뭘까.
-“종교에서 영성으로” 가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 서구 사회의 종교를 보라. 유럽의 교회당이 박물관이나 음악당처럼 되어버렸고, 심지어 나이트클럽에 팔린 곳도 있다. 미사와 예배를 볼 때에는 교회 안이 텅텅 빈다. 왜 그렇겠나. 사람들이 제도화된 종교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외면하는 종교란 어떤 것인가. “종교는 본래 제도나 조직을 위해 생겨난 게 아니다. 사람들의 목마름, 사람들의 근원적인 갈망을 채워주기 위해 생겨났다. 그게 영성이다. 예수도 그랬고, 붓다도 그랬다. 영성을 중심에 두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종교에서 ‘영성’이 빠져버렸다. 그 자리를 종교의 제도와 조직이 대신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진정한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다. 예수밖에 없다’며 이를 비판했다.”
길희성 교수는 “그러니 사람들이 종교를 외면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나. 서구는 벌써부터 ‘탈근대·탈종교의 시대’를 살고 있다”며 “역사의 뒤편으로 이미 넘어간 ‘제도 종교의 시대’가 이상하게 한국에서만 ‘성업’ 중”라고 지적했다.
-한국에서 성업 중인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나는 그것이 ‘기복주의 신앙’ 때문이라고 본다. 기독교도, 불교도 모두 복을 달라고 빌지 않나. 복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무엇을 복으로 생각하는가에 있다. 예수님과 부처님이 오늘날 그들의 이름으로 성업 중인 종교를 본다면 기가 막히지 않겠나.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했다. 요즘은 교회에서 누구도 ‘마음의 가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지구촌에서 제도 종교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
-그러면 인간에게 왜 종교가 필요한가. “이 물음에 심리학자이자 사상가였던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이라고 답했다. 나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동물들은 DNA(유전자)에 프로그램돼 있는 대로 산다. 동물은 인간처럼 고민하지 않는다. 우울증도 없다. 내가 강화도에서 살다 보니 집 주위에서 고라니를 종종 본다. 고라니는 우물쭈물하는 게 없다. 방황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냥 먹이를 좇아 산다. 그런 고라니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고민이 없으니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인간은 다르니까. 인간은 항상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니까.”
-인간은 왜 헤맬 수밖에 없는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나. 그게 동물과 인간의 큰 차이점이다. 죽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면 어떻겠나.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억울하고, 부자는 부자대로 억울한 거다. 그 많은 재산을 두고 가려니 얼마나 억울하겠나. 자신의 죽음을 아는 인간은 결국은 참된 행복에 대한 갈망을 품게 된다. 그것이 종교이고 영성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에 답하기 위함이다.”
길 교수는 “인간은 종교를 벗어나 살 수는 있지만, 영성 없이는 못 산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 내가 왜 여기 있나. 그 이유가 뭔가. 온갖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이러한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게 영성이다. 그래서 영성은 종교의 핵심이자 존재 이유다. 기복신앙은 세속적 복락을 추구한다. 세속적 복락은 결국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 영성은 제도권 안에 있나, 밖에 있나, “영성은 제도권 종교 내에 머물기도 하고, 초월하기도 하고, 종교와 비종교의 경계선을 허무는가 하면, 종교 간의 장벽도 뛰어넘을 수 있는 매우 유연하고 무정형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종교는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가 되어야 한다.”
- 젊었을 때 가진 신앙은? “집안이 개신교였다. 외조부는 목사님이었다. 황해도였던 외가에 교회 장로도 여럿 있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자랐다. 그런데 나의 마음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지 않더라.”
- 왜 생동감이 없었나. “뭔가 답답했다. 전통적 신학의 틀이 왠지 갑갑했다. 그때 부목사로 오신 홍동근 목사님이 물꼬를 터줬다. 그분은 카를 마르크스 이야기도 하고, 사회정의도 이야기했다. 성경 해석도 자유롭고 진보적이었다. 나는 거기서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길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신학을 하기 위해서 철학과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당시 홍 목사님과 주위 여러분의 조언이 그랬다. 신학을 하려면 철학을 먼저 하라고 했다. 그건 신학의 경직된 울타리 안에 갇히지 말라는 충고였다.”
-그 조언, 지금 돌아보면 어땠나. “결국 나의 삶을 바꿔 놓았다. 내가 입학하던 시절, 철학과에는 논리실증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또 언어 분석적인 메타 윤리학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거기에는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등 삶에 대한 큰 물음이 빠져있었다. 대신 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심취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무엇을 찾았나. “플라톤은 본질주의자다. 사물에는 본질이 있다. 책이라면 책의 본질이 있고, 대학에는 대학의 이념이 있다. 그게 본질이다. 나는 플라톤의 개념 철학, 본질 철학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은 나의 기독교 신앙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지향점이 있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건 지금까지도 내가 포기하지 않는 진리다.”
길 교수는 학부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미국 예일대 대학원 신학부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 3년간 신학 공부를 했다. 석사 과정이었다. 당연히 박사 학위도 신학으로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심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뜻밖에도 그는 하버드대 비교종교학과에서 불교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크게 방향을 전환했다. 심적인 변화는 무엇이었나. “예일대에서 공부하며 깨달았다. 서양 사람들은 데카르트나 칸트를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그들의 사고가 철학적이구나. 동양 사람들은 공자와 노자를 공부하지 않아도 사고의 밑바탕에는 동양철학이 흐르는구나. 특히 스탠리 와인슈타인(Stanley Weinstein) 교수의 학부 불교사 강의를 수강하면서 불교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해를 하게 됐다. 나는 기독교가 세계 종교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당시 하버드대에는 켄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1916~2000)교수라는 세계 종교학의 거장(巨匠)이 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이슬람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이슬람학에 정통했다. “그분의 세계 종교사를 보는 눈에 큰 영향을 받았다.” 길 교수는 스미스 교수의 학부 강의 조교도 했다. “그때 나는 이슬람과 유일신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됐다. 기독교 신학을 넘어서서 세계 종교를 이해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켄트웰 교수의 안목 중 가장 놀라웠던 대목은 뭔가. “그분은 세계 5대 종교를 이렇게 꼽았다.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마르크시즘, 세속적 휴머니즘(Secular humanism). 그는 마르크시즘과 세속적 휴머니즘도 하나의 종교로 봤다. 이런 견해에 나는 깜짝 놀랐다. 종교를 바라보는 나의 눈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건 궁극적 삶의 의미와 토대에 관한 인간의 모든 게 종교적이라는 깊은 통찰이었다.”
-세속적 휴머니즘이 뭔가. “인간은 인간이란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어떤 종류의 차별도 없이 존중받아야 하는 가치 있는 존재다. 종교적 차별마저 넘어서는 휴머니즘이다. 서구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비판을 받았고, 그 결과 인간의 이성과 윤리에 중심을 두는 탈(脫)종교화한 휴머니즘이 생겨났다. 그게 세속적 휴머니즘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어떤 문제인가. “세속적 휴머니즘에만 머물면 삶의 의미, 삶의 토대가 공허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세속적 휴머니즘이 아니라 영적 휴머니즘으로 가야 한다고 본다.”
-영적 휴머니즘의 핵심은 뭔가. “데카르트는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되어 있고, 세계는 물질과 정신으로 돼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세계를 이분법으로 쪼개고 대립적으로 봤다. 기독교를 위시한 유일신 신앙의 종교들 역시 이분법적 사고의 영향을 극복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본다.”
-유일신 신앙의 이분법은 어떤 것인가. “신을 초자연적 존재로만 본다. 그래서 초자연과 자연이 대립한다. 신과 인간, 성(聖)과 속(俗)이 이원적으로 대립한다. 게다가 자신들처럼 그걸 명확하게 나누지 않는 다른 종교를 범신론이라고 비판한다. 여기에서 유일신 신앙의 배타성이 나온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이걸 바꿔야 한다고 본다.”
-어떻게 바꿔야 하나. “둘로 쪼개져 있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야 유일신 신앙이 살 수 있다. 그걸 나는 ‘포월적 신관(包越的 神觀)’이라 부른다. ‘포월’은 감싸면서 초월한다는 뜻이다. 만물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 자연적 초자연주의(超自然主義)라고도 할 수 있다. 인류의 종교 전통들에는 이런 안목을 갖고 살았던 영적 휴머니스트들이 실제 있었다.”
길 교수는 네 명의 영적 휴머니스트를 꼽았다. 예수와 중세의 수도자이자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 중국 선불교의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선사와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98)이다. 그는 먼저 예수를 꼽았다. “예수는 말과 행동으로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대변인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하늘 아버지의 모습을 너무나 닮았다고 하여, 그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 예수는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자 진정한 사람의 아들이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어땠나. “그런 예수를 알아보고 가감 없이 말했던 신학자다. 전통적인 기독교는 예수는 하느님의 외아들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입양된 양자라고 말한다. 독생자는 예수님 뿐이라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이런 장애를 완전히 넘어선 분이었다.”
-에크하르트는 뭐라고 했나. “예수와 우리가 모두 똑같은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했다. 에크하르트는 그사이에 한 치의 차이도 인정하지 않은, 내가 아는 한 거의 유일한 신학자였다. 그는 기독교의 공고한 신학적 장벽과 교리의 장벽을 속 시원하게 돌파해 허물어 버린 수도자이자 신비주의자다.”
-임제 선사와 해월 최시형은 왜 영적 휴머니스트인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ㆍ다다른 곳마다 주인이 돼라,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을 강조한 임제 선사는 참다운 인간의 주체성을 거침없이 설했다. 또 사인여천(事人如天ㆍ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다)을 주창한 해월 최시형은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고 하지 말고 하느님이 강림했다고 말하라’고 할 만큼 영적 휴머니스트였다.”
길 교수는 ‘주체적 생각’에 대해서 짚었다. “1958년 ‘사상계’에 함석헌 선생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권두언이 실린 걸 봤다. 그게 엄혹한 군사정권하에서 민주주의 운동의 시발탄이 됐다. 나는 그걸 패러디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생각하는 신자라야 종교가 산다.’ 이제는 종교에서 영성으로 넘어가야 한다. 제도 종교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길희성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 후 미국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비교종교학)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2011년부터 현재까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다. 주요 저서로 『종교10강』, 『종교에서 영성으로』,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인도 철학사』, 『일본의 정토 사상』, 『지눌의 선禪 사상』, 『보살예수』, 『범한대역 바가바드 기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 사상』, 『인문학의 길: 소외를 넘어』, 『일본의 종교문화와 비판불교』(공저) 등이 있다. 길희성 전집(『종교와 영성 연구』 약 22권)을 순차적으로 출간 중이다. 현재 강화도 고려산 자락에 ‘심도학사-공부와 명상의 집’을 열어 종교간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영성을 추구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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