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몽(1950, 羅生門) : 강렬한 주제의식과 간결미 압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줄거리 : 전란이 난무하는 헤이안 시대, 억수같은 폭우가 쏟아지는 라쇼몽의 처마 밑에서 나뭇꾼과 스님이 “모르겠어. 아무래도 모르겠어”라며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 잠시 비를 피하러 그곳에 들른 한 남자가 그 소리를 듣고 궁금해 한다. 이들은 이 남자를 상대로 최근에 그 마을에 있었던 기묘한 사건을 들려준다.
사건이 벌어진 배경은 녹음이 우거진 숲속. 사무라이 타케히로(모리 마사유키)가 말을 타고 자신의 아내 마사코(교 마치꼬)와 함께 오전의 숲속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늘 속에서 낮잠을 자던 산적 타조마루(미후네 도시로)는 슬쩍 마사코의 예쁜 얼굴을 보고는 그녀를 차지할 속셈으로 그들 앞에 나타난다. 속임수를 써서 타케히로를 포박하고, 타조마루는 마사코를 겁탈한다. 오후에 그 숲속에 들어선 나무꾼은 사무라이 타케히로의 가슴에 칼이 꽂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관청에 신고한다. 곧 타조마루는 체포되고, 행방이 묘연했던 마사코도 불려와 관청에서 심문이 벌어진다.
문제는 겉보기에는 명백한 듯한 이 사건이 당사자들의 진술을 통해 다양한 진실을 들려준다는 점이다. 즉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먼저 산적 타조마루는 자신이 속임수를 썼고, 마사코를 겁탈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무라이와는 정당한 결투 끝에 죽인 것이라고 떠벌린다. 하지만 마사코의 진술은 그의 것과 다르다. 자신이 겁탈당한 후, 남편을 보니 싸늘하기 그지없는 눈초리였다고 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자신을 경멸하는 눈초리에 제정신이 나간 그녀는 혼란 속에서 남편을 죽였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무당의 힘을 빌어 강신한 죽은 사무라이 타케히로는 또 다른 진술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배신했지만, 오히려 산적 타조마루가 자신을 옹호해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결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엇갈리는 진술 속에는 각자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담겨 있다. 좀처럼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없는 이때, 실은 그 현장을 목격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나무꾼이다. 그는 마사코가 싸우기 싫어하는 두 남자를 부추겨서 결투를 붙여놓고 도망쳤고, 남은 두 남자는 비겁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는 개싸움을 벌였다는 것이다. (하략)
일본 영화가 국제무대에서 처음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년 8월 개봉)이 1951년에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고부터였다. 이후 일본 영화는 미조구치 겐지,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등이 잇따라 세계영화제를 석권하면서 패전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일본인들에게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 주었다.
완성 당시만 해도 일본 안에선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채 지나쳤던 <라쇼몽>이 서구인들에게 높이 평가받은 이유는 색다른 동양문화였기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 주제의식과 영화적 미학의 뛰어남 때문이었다. 이는 지난 1982년에 베니스 영화제 역대 대상(황금사자상) 수상작 가운데 최고 작품으로 선정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도 이 작품은 강렬한 주제의식과 뛰어난 형식미 때문에 영화학도들에게 교과서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라쇼몽>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라쇼몽」(1915)과 「숲속에서」(1921) 두 편을 묶어 각색한 영화다. 작품의 배경은 내전으로 피폐한 12세기 헤이안조 시대다. 숲 속에서 한 무사가 살해되고 그의 아내가 산적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절반쯤 쓰러져가는 라쇼몽에서 승려와 나무꾼, 행인이 그 사건을 회상한다. 법정에서 무사의 아내, 살인 강간 혐의로 잡혀 온 산적(미후네 도시로), 무당을 통해 증언하는 죽은 무사의 혼령, 목격자 나무꾼이 증언하는데, 그들은 그 사건을 서로 다르게 이야기한다. 모두가 자기 말이 진실인 듯 말하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끝까지 알 수 없다.
영화는 ‘살인범은 누구인가?’라는 미스터리 모티브로 시작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사건은 분명 하나인데 사람에 따라 자기중심적 입장에서 다르게 증언한다. 바로 여기에서 핵심 주제인 인간의 이기주의와 진실의 상대성을 읽을 수 있다. 구로사와는 각색 과정에서 원작에 나타난 허무주의와 인간에 대한 냉소적인 관점을 휴머니즘으로 변화시키고자 후반부에 (원작에 없는) 어린아이를 등장시켜 인간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제시한다. 휴머니즘, 인간에 대한 탐구와 따뜻한 애정은 구로사와 영화 전반에 나타나는 주제의식이다. 그는 카메라로 해를 직접 찍는 것을 금하던 당시의 틀을 깨고 숲 사이로 비친 해를 과감히 찍음으로써 조명의 새로운 미학적 효과를 창출했을 뿐 아니라 몽타주의 적절한 사용, 정교한 카메라 움직임, 고전적인 일본 연극의 인물 배치에서 착안한 화면 구도, 서양음악을 재해석한 음악과 음향 효과의 적절한 사용을 통해 영화 미학을 진일보시키는 데 공헌했다.
<라쇼몽>은 당대 일본 영화의 대가들인 오즈나 미조구치의 영화와 비교해 서구적 스타일의 영화로 자주 언급된다. 물론 카메라 움직임이나 복합적인 스토리 구성, 음악 등에서 서구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긴 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 숨어 있는 일본적인 구도나 이미지를 간과해선 안 된다. 특히 재판관을 생략한 채 증언자들만 보여주면서 그들을 양식화된 화면 구도로 잡아내는 법정 장면이나 일부 정적인 분위기들은 순수하게 일본적이다. 구로사와에게는 서구적 기법을 자신의 일본적 이미지 속에 융화시키는 재주가 있다.
그는 또 ‘단순화는 현대 예술의 중요한 미학적 테크닉의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최소한의 등장인물(엑스트라 포함 9명)과 단 몇 군데의 공간(라쇼몽, 법정, 숲 속, 강가)만으로 경제적인 화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ㅡ이정국(영화감독)
출처: 이승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