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숨을 걸고 행동해야만 승리가!
1998/07/04 희망의 21세기로 (한국)
창가대학과 창가여자단기대학의 창립자인 이케다 SGI회장이 4일, 한국 충청대학의 ‘명예교수’에 취임했다. 하치오지의 도쿄 마키구치기념회관에서 거행된 추대식에는 동 대학의 정종택 학장, 충청학원의 오경호 이사장이 참석했다. 식전이 끝난 후 SGI회장 부부는 창대의 오카야쓰 이사장, 고무로 학장, 단대의 와키에 학장 등과 함께 일행과 화기애애한 간담의 한때를 갖고 ‘민중에게 봉사’를 관철해 온 정 학장의 반평생을 칭송했다.
SGI회장 이곳 마키구치 기념회관은 우리들이 마키구치 초대회장을 현창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마키구치 회장은 한평 반의 좁은 감옥에 갇혀 73세로 일본의 군국주의에 목숨을 빼앗기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기념회관은 넓직하게 만들어 선양해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종택 학장 저는 이케다 선생님의 그 마음에 감동합니다.
후계자란 자칫하면 선대(先代)를 깎아내리는 경우가 많은 법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마키구치 회장, 도다 회장을 언제나 선양하고 계십니다.
SGI회장 황송합니다.
정 학장이야말로 “이렇게 훌륭한 분이 있었는가” 하며 모두가 감동하고 있습니다.
학장 그렇게 과대평가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국SGI의) 박이사장은 우리들보다 훨씬 훌륭한 분으로 모두의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SGI회장 학장께서 껴안아 주시듯이 한국의 멤버를 소중하게 대해 주시는 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용장 아래 약졸 없다”
학장 저는 다만 열심히 사회를 위해 활동하고 계시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고 ‘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여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용장 아래 약졸(약한 병사) 없다”고 합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훌륭한 분이시기 때문에 한국멤버의 훌륭한 모습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GI회장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학장의 깊은 인간관, 사제관, 인생관에 감명받았습니다.
학장 제가 처음으로 SGI의 실제 모습을 본 것은 1996년 가을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환경부장관을 하고 있었습니다.
진천군에서 대청결운동이 있었는데 각종 단체 중에서 SGI여러분이 특히 열심히 청소하시고 있었습니다. 몇 시간 동안이나 말입니다. 3천 명 정도였을까요.
저는 대단히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SGI에서 ‘환경예술제’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꺼이 응해 주셨습니다. <다음 해인 1997년에 개최>
이케다 회장님은 한국을 ‘문화 대은인의 나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회장의 평화·문화·교육의 사상도 매우 훌륭하다. 그리고 실제로 열심히 사회봉사를 하시고 있는 여러분이 있다―.
저는 ‘SGI의 진실된 모습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SGI를 모르면서도 비난하는 사람에게는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하찮고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말고 전체의 모습을 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SGI회장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학장 경희대학의 조영식 학원장은 서울대학 법대의 제 선배입니다.
그래서 5월에 이케다 선생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도 어떻게 맞이해 드리면 좋은가를 함께 이야기 나눴습니다. <이 때 이케다 회장은 경희대학의 ‘명예철학박사’로>
SGI회장 배려해 주셔서 감동했습니다.
작년에 정 학장과 오사카에서 만났을 때는 짧은 시간이였지만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직감했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나의 아내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충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학장 만나 뵐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오사카의 문화제에 불러 주셔서(1997년 11월 18일), 오사카돔에서 이케다 선생님을 처음 만나 뵈었습니다.
또한 5만 명의 문화제는 굉장히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저 정도로 굉장한 제전(祭典)이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니. 이미 ‘인간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세이쿄신문에 ‘식자의 소리’로서 실어 주셨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여러 사람에게 그 때의 감동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SGI회장 황송합니다.
문화제 때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으니 오늘은 부디 많은 독자를 위해서도 제가 ‘학생’이 되어 정 학장에게 조금 듣고 싶은 바입니다.
학장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웃음).
겨울에도 ‘맨발에 짚신’으로 통학
SGI회장 정 학장이 초등학생일 때입니다.
일본은 아직 귀국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학장은 1935년 태생>
어린 학장은 엄격한 일본인 교장 밑에서 양말도 운동화도 신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겨울에도 ‘맨발에 짚신’을 신고 통학하셨습니다.
6킬로미터의 통학길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발이 얼어 학교까지 걷지 못하고 몇 번이고 제방 아래 멈춰서서 결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렇게 들었습니다.
학장 그렇습니다. 그런 적도 있었습니다.
―깊게 머리를 끄덕이는 정 학장은 현재 63세.
지금까지 노동부장관, 농수산부장관, 정무장관, 환경부장관 등, 국가의 다수의 요직을 역임해 왔다.
1997년에 충청대학의 제5대 학장에 취임.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이며 민중에게 봉사하는 ‘행동인’이다.
SGI회장 초등학교 5학년일 때 일본이 패하고 조국이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이번에는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서울대학 법대에 입학하셨습니다.
학비를 버느라 만족스럽게 학교에 출석할 수 없었고 4학년 때는 1년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사회, 영어, 독일어를 가르친 적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학장은 후에 이 고학시절을 회고하며 말하고 있다.
“이 때부터 ‘생즉사, 사즉생’이라는 것을 신조로 살아왔다”라고.
‘무슨 일이든 목숨을 걸어야 성공하는 것이다!’라는 결심이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SGI회장 졸업 후도 우선은 관공서의 임시직원에서부터 출발.
학장은 거기에서 실력을 연마하여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재정과(財政課) 시절에 ‘지방교부세의 증가’에 분주하셨던 것은 유명합니다.
이로써 지방재정이 굉장히 원활해졌습니다.
학장 이케다 선생님은 참으로 자세히 알고 계시는군요.
―당시, 한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강력히 추진되어 지방예산은 영세했다.
학장은 ‘지방재정의 곤궁함을 구제하기’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을 찾아가 그 필요성을 설명하며 다녔다.
새벽 4시에 집을 나오면 밤 12시가 지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매일 미친 듯이’ 일했다.
노력의 결과 갖가지 간섭도 극복하여 지방교부세의 대폭확충을 실현. 지방재정은 한국 역사상 괄목할 만한 성과를 달성했다.
학장 방해나 압력도 있었지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SGI회장 뭔가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면 반드시 반동의 ‘파도’가 일어나는 법입니다.
그 후 학장은 박대통령이 제창한 ‘새마을운동’의 추진자가 되셨다. 농촌의 개발에 의해 농촌의 소득을 증대시켜 도시와의 경제격차를 시정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새마을의 ‘새’는 ‘새롭다’, ‘마을’은 ‘동네’.
‘새마을운동’이란 ‘새로운 마을만들기 운동’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경희대학의 조 학원장의 이념이 근저(根底)에 있다고 한다>
학장은 ‘새마을운동’의 추진을 위해 “윗물이 혁신되야지만 아랫물도 따른다”는 신념 아래, 우선 (윗물인) 공무원들 정신교육부터 착수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고위급 공직자들로부터 원망을 심하게 사고 비난과 중상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결단코 멈추지 않고 ‘새마을운동’의 승리를 쟁취하셨다. 훌륭한 역사입니다.
‘정신의 변혁운동’과 ‘사회의 개발운동’이 일체로 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의 운동과 공통되고 있습니다.
‘자전거지사’ ‘빗자루지사’
SGI회장 이후 41세의 젊은 나이로 충청북도의 지사가 되셨습니다.
―젊은 지사의 가슴 속에는 고향을 위해 일하는 기쁨에 넘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을 격려하며 돌아다닌다.
환경미화에도 스스로 솔선하여 행동했다.
“여론을 의식한 쇼다” “보름쯤 가면 그만 둘 것이 뻔하다”는 조소도 있었다.
그러나 지사로 재임하는 3년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자전거를 타고 서민과 함께 땀을 흘렸다.
마침내 사람들로부터 ‘자전거지사’ ‘빗자루지사’라는 흠모를 받으며 악의의 비판을 칭찬으로 바꾸어 버렸다.
SGI회장 지사가 되셨을 때 아버님, 어머님은 건재하셨습니까?
학장 네. 부모님께 불효만 했습니다만…….
(집을 나와) 공직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에 부모님께 정성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그래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만이 효도는 아닙니다.
제가 지사가 되어 고향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 부모님께는 무엇보다 큰 기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조금은 불효한 몫을 갚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만…….
―학장의 업적을 말해 주는 에피소드는 셀 수 없을 정도다.
1979년에는 ‘전국소년체육제전’을 실시.
그 때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선수와 임원의 무료민박’을 실현했다.
선수단으로부터 감사를 담은 높이 13미터의 ‘우정의 탑’을 기증받았다.
SGI회장 지사 재임 중에 공복인 공무원의 이권을 전부 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을 정산(精算)하여 대부분을 장학금으로 활용하셨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행동입니까!
학장 말씀하신 대로 당시는 공직자에게 부정이 많았던 때입니다.
제가 지사로서 “과거의 일은 묻지 않겠으니 현재, 부정이 있다면 자주적으로 신고하세요”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부정을 저지를 돈이 있다면 전부 장학금으로 씁시다!”라고 말해 모두에게 찬동을 얻었던 것입니다.
SGI회장 중대한 이야기입니다. 정 학장의 신념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합니다.
올해 3월 3일, 충청대학의 입학식에서 학장은 신입생을 격려하셨습니다.
“자유 속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의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회에 공헌하는) 인재로 성장하려면 끊임없는 자기 관리가 필요합니다.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학장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어
오경호 이사장 오늘은 이케다 선생님과 사모님, 그리고 두 아드님을 뵙고 저는 매우 불가사의한 기분이 듭니다.
아드님(히로마사 씨)과 같은 나이라는 것도 있습니다만 저는 이케다 선생님과 아버지가 겹쳐집니다.
―오 이사장의 부친인 오범수 씨와 충청대학의 창립자. 1919년에 태어나 작년 78세로 타계하셨다.
이사장 아버지는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일본에 왔는데 얼마 안 되어 ‘만주(현재의 중국 동북부)’로 옮겼습니다.
식민지 시절 당시, 일본의 학교 선생님이 우리나라의 욕을 해서 친구들과 함께 그 선생님을 때리고 도망쳤던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버지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닛폰대학의 토목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생전의 아버지는 일본을 좋아하셨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일제시대(일본에 의한 식민지 시절)에 교육을 받아 일본어를 잘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저희 가정이 특별하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부모님 세대는 일본의 교육, 저희 세대는 미국의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일을 하는 제게 “일본을 보고 배워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미국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해서 항상 논쟁이 되었습니다(웃음).
아버지와 정 학장님은 고향의 선후배 관계를 평생 동안 소중히 간직했습니다.
저희 대학의 학장에 정 학장님을 추천한 것은 다름아닌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정 학장님의 학장 취임식 이틀 전에 돌아가셔서 취임식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제가 정 학장님을 소중한 선배로 받들어 모실 것입니다.
정 학장님이 계시는 한 저희 대학은 걱정 없습니다.
또한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오늘의 일을 기뻐해 주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SGI회장 훌륭한 말씀입니다.
선친의 유지를 이어 일어선 그 모습을 나는 찬탄하고 싶습니다.
이사장 감사합니다.
SGI회장 아버님이 대학창립에 뜻을 두신 마음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이사장 아버지가 대학창립의 뜻을 품으신 것은 20년 전입니다.
아버지가 30대일 때 사업이 성공하여 재산을 얻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박 대통령이 등장하자 ‘군정반대’의 선두에 서서 싸웠습니다.
박 대통령은 입각을 권했지만 아버지는 거절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그 후 정부로부터 압박을 받았습니다.
사업조차 할 수 없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후계의 인재를 만들자”고 대학설립을 구상하셨던 것입니다.
불가사의하게도 대학을 설립할 때 정 학장님이 정무장관을 하고 계셔서 애를 많이 써 주셨습니다.
학장님은 이 때부터 이미 저희 학교의 발전에 인(因)을 만들어 온 것입니다(웃음)
또 하나 불가사의한 것은 아버지의 묘는 학장님이 태어나신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SGI회장 깊은 인연이군요.
그런데 아버님과 어머님 중 어느 쪽이 엄하셨습니까?
이사장 두분 다 엄하셨습니다―아버지는 교육적으로 어머니는 윤리적으로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도 정 학장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둘이서 나란히 앉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제 아버지의 교육입니다.
연상의 분을, 훌륭한 분을 존경하도록 저에게 철저히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오늘 창가대학을 견학하고 느낀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함께 만든 저희 대학은 아직 15년의 역사밖에 안 됩니다. 앞으로 40년 동안 제가 (아버지의 유지를 계승하여) 저희 대학을 성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SGI회장 무엇보다도 ‘건설’할 때의 모습이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다. 또 ‘삶의 보람’도 있습니다.
이미 완성된 것은 좋게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생각해서는 진보도 사라집니다.
이사장 제 일생의 과제는 ‘청년의 문화’의 연구입니다.
세계의 많은 대학이 지금 젊은이들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창가대학을 방문하여 느낀 점은 ‘이 대학은 다른 학교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창립자인 이케다 선생님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또 대학의 여러분들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SGI회장 위대한 분은 겸허하십니다.
오 이사장은 연세대학의 경영대학원을 마치신 후 미국의 캘리포니아주립대학 경영대학원에서 유학하셨습니다.
왜 미국을 유학하는 곳으로 선택하셨습니까?
이사장 제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미국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 세대는 미국에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학하는 100명 중 80명은 미국, 15명은 유럽, 나머지가 일본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또 제가 대학을 졸업했을 무렵에는 무역회사에 들어가 무역업을 하는 것이 최고의 직업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대학의 ‘국제화’ ‘정보화’를 추진
SGI회장 오 이사장은 ‘국제화’ ‘정보화’ ‘산업화’ ‘지방화’를 대학의 이념으로 들고 계십니다.
앞으로의 일본도 이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대학의 국제화’에는 우선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국제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어학교육’에 힘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이것이야말로 ‘급소‘입니다.
작년의 이사장 취임식의 스피치도 들었습니다.
“이 15년 동안의 충청대학의 눈부신 실적이 앞으로의 발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시며 “21세기로 발전할 수 있는 미래상, 구체적인 행동이 중요”하며 “인류의 장래는 전면적으로 교육에 달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 “교육자의 고매한 인격과 자세가 학생에게 보다 좋은 감화를 준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전면적으로 찬성합니다.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학벌보다 실력을 우선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학은 ‘미래의 주인공’을 육성하는 장이다.”
“인간에게는 희로애락이 있고, 언제 어떤 때라도 현실과 이상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교육은 현실의 불만을 버리고 백년대계의 사명을 추구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불멸의 말씀이다.
오 이사장 이렇게 지금 들으니 나도 원고를 잘 썼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폭소)
충청대학 교가 “내일의 새일꾼을 찾는 그 곳”
SGI회장 귀대학의 교가도 훌륭합니다.
어둠을 물리치고 먼동이 텄네
할 일 많은 이 땅에
새 날이 왔네
우렁찬 저 소리를 그대는 듣는가
내일의 새일꾼을 찾는 그 곳은
배움의 전당일세 충청대학
어느 분이 만드셨습니까?
이사장 작사는 한갑수 씨로 한국을 대표하는 한글학자입니다. 아버지의 우인이시며 특별히 이 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작곡은 김동진 씨로 한국에서는 대단히 유명한 작곡가며 지금도 건재하십니다.
SGI회장 대학의 꽃은?
이사장 철쭉입니다. 아버지가 매우 좋아하는 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의 꽃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시즌에는 캠퍼스 전체에 화려하게 핍니다.
SGI회장 그렇습니까. 창가대학에도 아름다운 철쭉꽃이 핍니다.
“붉게 활짝 피어 있는 캠퍼스 언덕을”이라고 학생가에도 있습니다.
충청대학이 있는 청원군에는 약용으로 유명한 약수가 있다고 합니다. <세계3대 광천의 하나>
15세기 한글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세종대왕이 눈병을 치료하기 위해 찾아가 그 곳에 체재하면서 한글을 완성켰다고도 합니다만.
이사장 그렇습니다. 세종대왕은 눈이 나빠 자주 치료를 하러 왔었습니다. 효과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500년 동안 이어진 조선왕조 중에서 가장 위대한 대왕이었습니다.
부디 충청대학에 방문을
학장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만.
SGI회장 네, 하십시오.
학장 부디 이케다 선생님께서 우리 충청대학에 와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근처에 국제공항도 완성되었습니다.
한국 SGI의 진천연수센터도 학교에서 가깝습니다.
또한 불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습니다.
충청도에는 백제의 왕도였던 부여나 공주가 있습니다. 불교에 연이 깊은 땅을 꼭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SGI회장 감사합니다.
나는 우리들은 귀국의 발전을 언제나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본디 고래부터 일본의 중추는 귀국에서 온 사람이 많았습니다. 교토나 나라도 그렇다고 합니다.
귀국은 일본의 ‘대은인’의 나라입니다. 그러한 역사를 일본인은 더욱 배워야만 합니다.
―이케다 회장은 정 학장의 반평생을 칭송하며 <대은의 보토(寶土) 마음 깨끗한 대인(大人)>이라는 시를 드렸다.
학장은 말했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그것은 ‘전쟁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영토를 서로 빼앗고 서로 죽이고―그 반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평화의 실현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것은 위대한 이케다 선생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행동이 커다란 파동을 넓히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방명록에는 두 사람의 서명과 함께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케다 회장의 염원인 세계평화가 반드시 달성될 것을 기원드립니다.”
(7.4)
먼저 지도자가 솔선을
‘위’가 변하면 ‘아래’는 바뀐다
창가대학과 창가여자단기대학의 창립자인 이케다 SGI회장이 4일, 한국 충청대학의 ‘명예교수’에 취임했다. 하치오지의 도쿄 마키구치기념회관에서 거행된 추대식에는 동 대학의 정종택 학장, 충청학원의 오경호 이사장이 참석했다. 식전이 끝난 후 SGI회장 부부는 창대의 오카야쓰 이사장, 고무로 학장, 단대의 와키에 학장 등과 함께 일행과 화기애애한 간담의 한때를 갖고 ‘민중에게 봉사’를 관철해 온 정 학장의 반평생을 칭송했다.
SGI회장 이곳 마키구치 기념회관은 우리들이 마키구치 초대회장을 현창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마키구치 회장은 한평 반의 좁은 감옥에 갇혀 73세로 일본의 군국주의에 목숨을 빼앗기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기념회관은 넓직하게 만들어 선양해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종택 학장 저는 이케다 선생님의 그 마음에 감동합니다.
후계자란 자칫하면 선대(先代)를 깎아내리는 경우가 많은 법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마키구치 회장, 도다 회장을 언제나 선양하고 계십니다.
SGI회장 황송합니다.
정 학장이야말로 “이렇게 훌륭한 분이 있었는가” 하며 모두가 감동하고 있습니다.
학장 그렇게 과대평가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국SGI의) 박이사장은 우리들보다 훨씬 훌륭한 분으로 모두의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SGI회장 학장께서 껴안아 주시듯이 한국의 멤버를 소중하게 대해 주시는 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