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협약, 취업규칙 및 근로계약의 내용이나 사용자의 행위가 근로기준법에 위반되는지를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사업장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모두 규율할 수 있도록 법령을 만들 수는 없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례와 정부의 행정해석은 법을 위반했는지를 판단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판례는 재판 과정에서 소중하게 활용되므로 행정해석보다 더욱 무게가 나간다.
법률적인 논쟁을 하다가 "최근의 대법원 판례를 보면 … 하다."라고 주장하면, 상대방은 십중팔구 움찔하면서 눈빛에서부터 힘을 빼기 시작한다.
이럴 때는 판례가 관우의 청룡언월도나 조자룡의 청홍도쯤 되는 것으로 느껴진다.
임금이분설과 언론파동
지금부터 십 여 년 전의 일이다.
법조계를 거쳐 국회의원으로 계신 분이 주위의 기대를 흠뻑 받으면서 노동부의 고위층으로 취임해온 지 며칠 후, 한 일간지와 인터뷰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노동문제 전문가가 노동행정의 책임을 지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임금은 기본급처럼 근로 제공과 관련이 있는 교환적 임금과, 가족 수당처럼 근로 제공과 관계없이 지급되는 보장적 임금으로 나눌 수 있다. 비록 파업기간중이라도 후자는 지급되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는데 이를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그 분은 "그런 게 있다면 따라야지요."라고 답변하였다.
당연하게 생각되는 이 한마디에 담당 기자는 회심의 미소를 띄웠고, 다음날 '노동부, 무노동무임금 포기'라는 제목의 1면 톱기사를 특종으로 내보내었다.
당시로서는 파업기간 중 임금지급 문제가 노·사 관계를 험악하게 만들 정도로 초미의 관심 사항이었다.
그 와중에 나간 특종 아닌 특종 기사는 그야말로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노동부 공무원들이 이를 수습하느라고 동분서주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재판이나 법령해석에 있어 판례가 갖는 위치는 무엇인가?
먼저, 판례는 당해 사건만을 구속하는 것이 원칙이다.
둘째로, 대법원 판례가 축적되면 법원(法源)으로 인정되어 재판과정에서 판단 근거로 활용된다.
앞에서 기자가 물은 내용은 임금이분설(賃金二分說)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최고재판소가 한 때 택하였던 입장이며,
우리 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인 적이 있다.
그러나 해프닝이 발생할 무렵에는 이미 일본과 우리 모두 이를 부정하는 후속 판례가 계속 나옴으로써, 임금이분설은 법원(法源)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따라서 노동부가 무노동무임금에 관한 입장을 바꾸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대법원 판례로서 축적되지 못한 판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
비록 법원(法源)으로 인정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선례가 없는 사건이라면, 대법원 판례는 물론이고 하급심 판례일지라도 법령해석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만, 비슷한 사건들인데도 서로 다른 견해의 판례들이 섞여 있으면, 이는 참 답답한 노릇이며 실제로 그러한 예를 꽤 발견할 수 있다.
이 경우 최근 들어 한 쪽으로 판례가 모아지거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면 그 방향으로 해석이 정리된다.
그렇지 않다면 대법원 판례라 하더라도 참고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행정해석의 작성
노동조합 관계자나 인사·노무관리자에게는 행정해석이 판례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근로자나 회사가 직접, 또는 지방노동관서가 법령해석에 관해 노동부 본부에 제출한 질의에 대한 노동부 장관의 답변을 유권해석 또는 행정해석이라고 한다.
담당자가 질의를 접수하면 사실관계를 자세히 검토한 후, 이미 나와 있는 판례나 행정해석을 모두 훑어본다.
이 때 선례가 있으면, 사정변경이 없는 한, 그에 따라 답변함으로써 행정해석이 축적된다.
선례가 없거나, 행정해석과 판례의 입장이 다르거나, 선례가 있더라도 견해를 바꾸어야 할만한 사정이 있다면, 학설과 외국의 예를 분석하고 전문가 의견을 청취하는 등 필요한 모든 작업을 다하게 된다.
약 십오년 전의 일이 생각난다. 조산(早産)·유산(流産)자에게 부여할 출산휴가 일수를 결정하기 위해 생경하기만 한 일본 서적을 뒤지던 기억이 새롭다.
그 때 같이 일하던 근로감독관은 임신 기간의 길이에 따라 산모(産母)의 신체 변화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한달 가까이 가정백과사전을 끼고 살면서 서울대 병원, 세브란스 병원 등을 뒤지고 다니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나를 보면 그 행정해석에 대한 지적재산권이 자기에게 있으니 인용 근거를 명확히 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그 일을 하면서 얻은 지식으로 두 아이를 너무나 훌륭하게 키운 이득은 생각지도 않고 말이다.
아무튼 지금도 새로 나오는 행정해석들을 보면 담당자들의 고생을 상기하게 된다.
행정해석의 효력
행정해석은 그 자체로 권리·의무의 변동을 가져오지 않으며, 행정법상 행정행위로 인정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서 행정쟁송이나 행정심판의 대상이 아니므로 취소·변경을 구하는 소(訴)를 제기할 수 없다.
아울러 행정해석은 재판과정에서도 판단 근거로 활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노동계 인사나 학자들은 은근히 행정해석을 무시하거나 폄하하기도 한다.
행정해석은 과연 별 효력이 없을까?
행정해석은 근로감독관에 대한 노동부장관의 업무 지침이나 명령의 성격을 가지므로, 법령 위반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가장 먼저 고려되는 기준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정해석과 판례의 입장이 다를 때 무엇을 따라야 할지를 묻는다.
행정해석은 작성될 때 판례와 맞지 않는 부분이 걸러지고, 새 판례가 나오면 다시 조정되는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행정해석에 반영되지 않은 판례는 당해 사건만 구속하고 아직 법원(法源)으로 인정될 만큼 자리를 잡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유로 양자가 서로 다르면 행정해석을 따르는 것이 현장에서 노동문제를 다루는 분들에게는 실질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같은 취지의 판례가 축적되어 있음이 명확하다면 그 판례가 행정해석에 우선하는 것이 당연하다.
행정해석의 역할
한편 행정해석은 노·사가 스스로 법령 위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미리 제공함으로써 민원이나 갈등을 줄일 수 있게 한다.
물론 이러한 예방 효과는 행정해석에 관한 정보가 충분하게 제공될 때 가능하다.
은퇴한 원로 감독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삼십 년 전에는 업무수첩에 행정해석을 빼꼼히 적어 가지고 다녔다 한다.
후배 감독관이 좀 베껴 적을라치면 여지없이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잔을 사야만 했다.
갖은 방법으로 각종 정보를 쏟아내는 요즈음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P.S> 여기에 연제하고 있는 노동법이야기는 노동부 하갑래 국장님의 글을 읽다고 같이 읽고 싶은 생각에 발췌해서 올리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