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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화) ◈ 수 22:21-34 제단은 약속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안전장치.
오늘의 말씀 수 22:21-34
신앙의 결백을 해명
22:21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22:22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이 일이 만일 여호와를 거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께서는 오늘 우리를 구원하지 마시옵소서
22:23 우리가 제단을 쌓은 것이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 함이거나 또는 그 위에 번제나 소제를 드리려 함이거나 또는 화목제물을 드리려 함이거든 여호와는 친히 벌하시옵소서
큰 제단을 쌓은 목적
22:24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22:25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느니라 하여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22:26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한 제단 쌓기를 준비하자 하였노니 이는 번제를 위함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라
22:27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우리의 번제와 우리의 다른 제사와 우리의 화목제로 섬기는 것을 우리와 너희 사이와 우리의 후대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할 뿐으로서 너희 자손들이 후일에 우리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다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22:28 우리가 말하였거니와 만일 그들이 후일에 우리에게나 우리 후대에게 이같이 말하면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 조상이 지은 여호와의 제단 모형을 보라 이는 번제를 위한 것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한 것도 아니라 오직 우리와 너희 사이에 증거만 되게 할 뿐이라
22:29 우리가 번제나 소제나 다른 제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막 앞에 있는 제단 외에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고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려는 것은 결단코 아니라 하리라
대표단의 평가와 보고
22:30 제사장 비느하스와 그와 함께 한 회중의 지도자들 곧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의 말을 듣고 좋게 여긴지라
22:31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오늘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고
22:32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와 지도자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을 떠나 길르앗 땅에서 가나안 땅 이스라엘 자손에게 돌아와 그들에게 보고하매
22:33 그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거주하는 땅에 가서 싸워 그것을 멸하자 하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22:34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 주해: 성령님의 조명
요단강 동쪽으로 돌아간 르우벤, 갓, 므낫세 세 지파는 요단강 근처 언덕가에 큰 제단을 쌓았다. 이스라엘 아홉 지파와 같이 신앙의 단일성을 유지하려는 염원을 담아 쌓은 제단이다. 서쪽 지파들은 이 일을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대표단을 보내어 상황을 파악한다.
1. 제단은 약속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안전장치.
21-29절 동쪽 지파와 서쪽 지파는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살아야 했다. 동쪽 지파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후손들이 서로를 한 공동체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 생길까 염려했다.
동쪽 지파는 후손들에게 서쪽 지파와 한 혈통이며, 한 근본이며, 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길이길이 인식 시켜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안전장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막 앞에서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는 제단과 똑같은 제단을 쌓아 제사는 드리지 않고, 오직 증거가 되게 하기 위한 제단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제단을 보면서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도록 교육을 시키고, 전쟁의 미담을 들려주어 후손들이 자신들과 동일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증거로 세운 것이다.
서쪽 지파는 이런 의도를 알지 못한 채 동쪽 지파의 행동을 우상숭배로 오해하였다. 요단강 동쪽 지파는 먼 훗날 서쪽 지파 후손들이 여호와의 언약에서 동족 지파 후손들을 배제시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훗 날 서쪽 지파 후손들이 동쪽 지파 후손들에게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다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으로서, 증거로 삼기 위해 제단을 세웠다고 해명한다.
자칫하다가 동족끼리 커다란 전쟁이 일어날 뻔하였다. 동쪽 지파는 의분에 찬 서쪽 지파에게 전 후 사정을 차분하게 설명하며 그들을 안심시킨다.
동쪽 지파들은 전쟁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보았다. 약속의 하나님이 신실하게 이스라엘 편에서서 이기게 하시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자신들은 가족들과 노인들과 몸이 불편한 사람들과 짐승들을 안전하게 동쪽에 두고 왔던 것들이 감사했을 것이다.
서쪽 지파들은 가족들과 짐승들을 모두 이끌고 전장의 주변에 두었던 것들이 미안했을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싸워 이긴 형제들과 마음의 결을 같이 하고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기특한 마음이 있었다.
동쪽 지파는 후손들에게 신앙을 물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지나고 부모 세대들이 모두 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자녀 세대들에게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형제들과 단절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와 혈통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 줄 사명이 있었다. 우리도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한다.
지금도 여호와의 전쟁이 선포되고 전쟁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이기신 전쟁을 하고 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이다. 하나님의 전쟁을 이길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다. 이미 이긴 전쟁의 현장에 우리는 믿음으로 동참만 하여도, 주님은 내가 싸워 이긴 전쟁으로 간주해 주신다.
우리의 전쟁은 진리와의 전쟁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나갈라치면 마귀는 말씀앞에 나가지 못하도록 진리에서 떼어 놓으려고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방해한다. 건강으로, 환경으로, 자녀문제로, 재정으로, 관계로, 먹고 사는 문제로,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도록 혼란스럽게 하여 마음을 빼앗아 가버린다.
그러므로 해결할 일이 산처럼 쌓여있어도 말씀을 놓지 않으려고 진리 앞에 집중하여야 한다. 사단을 꾸짖으며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 진리로 전쟁해야 한다. 그러면 주님이 일하신다.
2. 서운하지만 겸손한 동쪽 지파들
동쪽 지파는 서쪽 지파들의 행동에 서운해 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오해를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진솔하게 진의를 설명했다.
그들은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다(22:24)”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심사숙고하고 회의를 거쳐 그들의 후손들을 위한 목적을 주의하여 생각하고 한 결정이었다.
이런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의 판단이 동쪽 지파를 오해했던 것이 풀리자, 어색하고 멋쩍은 분위기지만 서쪽 지파는 하나님을 높이며 함께 기뻐한다. 그 결과 긴장된 전쟁의 불씨가 사그라졌다. 오해를 바로잡는 해명이 공동체를 분열의 위험에서 건졌다.
동쪽 지파는 겸손하고 침착하게 그들을 인내하며, 서운한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진실한 대화로 오해를 풀어갔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극한 감정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라고 한다.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안에 있다. 감정은 신앙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거짓 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감정에 충실하다. 타인에 대한 느낌 감정 추측으로 자신의 정신적인 에너지를 낭비한다. 우리는 객관적인 태도로 감정을 지배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의 감정과 느낌을 객관화하여 나의 것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력한 자의 눈치를 보고 유력한 자의 말에 눌리게 된다.
이처럼 요단 서편에 남아있는 지파들까지 생각하고 배려하고 한 결정은 아니었지만, 오직 자신들과 후손들의 신앙을 위한 깊은 생각이었다.
훌륭한 생각과 훌륭한 결정과 훌륭한 대답을 한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 이지만,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뻐하셨을 것이다.
그들이 제단을 세운 목적은 “우리만”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를 위한 것이며,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려는 것은 결단코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는 것은 한 혈통이나 역사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우리 사이에 하나님이 되셔야 된다”는 “성경적인 하나됨”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교회가 하나 되고 성도들이 하나 되는 것은 지역이나 취미나 생활 수준이 같아서가 아니다. 또 한 셀에 속하였다는 것도 아니다.
오직 “우리 사이에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실 때” 교회는 하나가 된다. 서쪽 지파 사람들은 오히려 동쪽 지파에게 감사했다.
동쪽 사람들이 한 행동은 이스라엘 서쪽 지파에게도 일하셨음을 본다. 그들의 후손들이 장차 저질렀을 범죄를 미리 예방한 것에 대한 감사였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언제나 양쪽 쌍방간에 합당하게 일하신다. 일방적으로 한쪽 편에서서 일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달을 때 양쪽 모두 유익이 된다.
3. 인자와 신실하신 하나님
신앙의 힘은 마음에서 내적인 활동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어떠한 행동이라도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 감정과 행동을 완벽하게 분리하기는 어렵다. 신앙의 변화를 가져왔다면 그 사람의 지성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심령에도 감정적으로 깊이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감정은 절대적인 신앙의 표현은 아니다. 감정에는 신앙 감정이 있으며, 이것은 종교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종교적 에너지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믿음은 믿는 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선물이며, 믿음의 주체이신 하나님에게로 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앙의 힘은 지치지도 곤비하지도 않는다.
십자가와 고난과 죽음이 없는 영광은 없다. 고난 없는 그리스도의 영광은 기만이다. 사람은 깨닫는다고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고생했다고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완고해진다.
그리스도를 만나야 변화가 일어난다. 동쪽 사람들은 전쟁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믿음이 부어진 것이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다가 먼지 풀풀 날리는 광야를 거쳐 무기도 없지만 뭐 하나 제대로 다룰 줄 아는게 없는 오합지졸 같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인자와 신실하심으로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자비하신 하나님은 다칠세라 넘어질세라 친히 보호하시며, 추울 땐 불기둥으로, 더울 땐 구름 기둥으로 동행하셨다.
친히 이스라엘에게 믿음을 가르치시고 사랑을 가르쳐 주셨다. 사랑도 배우는 것이며, 믿음도 배우는 것이다.
믿음은 방법이 아니라 순종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우리 내면 안에는 반역성이 있다. 우리는 신앙을 회복하려고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곳엔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이 있는 동시에 아담의 반역성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기원은 창조 때부터가 아니라 창세 전으로 올라가야 한다. 창세 전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끝까지 언약에 신실하시다. 다시 새 언약을 약속하신 것이다.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된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눅 22:20).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요, 아들의 생명을 얻는다(고후 5:17; 요 3:15).
영생의 본질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이는 날마다 아들을 힘입어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 새 언약 백성의 표지는 팔레시아에 대한 복종이 그 본질이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제단이 결코 아니다.
팔레시아는 고대 그리스어로서 자신에게 불이익이 있어도 마음속에 있는 전부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용기와 담대함으로 자신의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절대 권력 앞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면 믿는 우리에게 절대 권력자는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내가 믿는 왕이신 하나님께 용기 다하여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나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내 꼬라지가 어떻든 담대하게 아버지 앞에 나아가 주저리 주저리 고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안심이 되고 신뢰가 가는가? 이분이 우리의 보호자 아버지다.
외적인 신앙행위, 교회의 직분, 탁월한 헌신, 사역의 성과, 열렬한 예배, 준법정신등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것들이다.
새 언약 백성의 팔레시아는 하루 중 첫 시간에 나타난다.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말씀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 안에 거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친밀함의 실재가 없다면,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아버지 집 밖에 있는 자는 무엇을 하여도 영적으로 죽은 자요,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다. 팔레시아로 담대히 아버지께 나아가 나의 사정을 고하면 하늘 아버지는 기쁘게 받아 주신다.
◈ 나의 묵상
나는 말로만 구원받은 자요, 구원의 도에는 정말 무지하였다. 구원의 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사는 것이다(롬 6:14)
그러나 나는 한국교회의 바리새적 신앙에 몰두하였다. 주일성수, 십일조, 전도에 매달렸고 그것을 열렬한 신자의 표지로 삼았다.
하지만 나의 신앙생활은 향방 잃은 채 표류하였다. 열심을 낼수록 안식, 평강, 기쁨, 성화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열심을 낼수록 탐심의 크기가 늘어났고 내적인 목마름, 공허함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다 보니 이곳저곳을 기웃거렸고 기독교 본질과 무관한 곁길로 나가는 자 되었다.
말씀을 묵상한다고 하나 형식에 치우쳤고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신앙에 빠져들게 되었다. 사역을 하나 곁길로 나가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역을 하였다. 인자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장에 심판하지 않으셨으며, 나의 죄악이 차기까지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셨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소경이요, 또 소경을 인도하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 진리대로 심판하셨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심판, 언젠가 받아야 하는 심판이 내게 이르렀다. 심판의 자리, 광야의 무덤에서 죽기를 구하였다. 그러나 내 인생이라도 내 뜻대로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의 이면에는 그의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이 있었다. 심판은 의를 기초로 다시 나를 세우는 자리였다.
말씀으로 죄와 어둠을 다 드러내시고 아들의 무덤에 연합되게 하셔서 생명으로 인도하셨다.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 안에 거하게 하셨다. 죽은 개와 같은 자를 왕의 식탁에 앉히시듯, 죽기에 합당한 자를 하늘 잔치로 초대하셨다.날마다 말씀 앞에 나아가는 일이, 내가 복종해야 할 사명이 되었다.
아침마다 아버지께 팔레시아를 준행한다. 영광의 왕 앞에 나아가 하루의 일을 보고하고 지혜를 구한다. 꾸짖지 않으시고 인자와 신실로 인도하신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끈이 말씀 묵상이다. 말씀 앞에 머물 때 비로소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린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나의 속사람이 기뻐 춤을 춘다.
형언 할 수 없는 은혜가 날마다 주어진다. 때로는 눈물이 복받쳐 감당키 어려울 때, 내가 언약 백성 된 유일하고도 확고한 팔레시아를 준행하며 나아간다.
◈ 묵상 기도
주님 나 자신의 말과 행실을 살펴봅니다. 늘 불완전하고 때로는 거짓과 진실하지 못하여 외식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있는대로 말하지 않고 부풀려 말하거나 변명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항상 죄 성에 따라 자신이 유리한 대로 말하고 행동하려는 유혹을 받으며 그렇게 행함으로 범죄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여, 내게 동쪽 지파처럼 신실하고 정직함을 허락하소서. 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팔레시아를 준행하게 하소서.
주께서 긍휼을 베푸시기를 간구합니다. 주의 도우심으로 항상 진실을 말하며 주 앞에서 거리낌이 없는 삶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오해가 화해가 될 때, 참된 회복이 일어납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주님을 통해 진정한 정직과 신실함에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나로 인해 수많은 고통을 안겨 준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를 생각하며 회개합니다. 거짓된 자아로 과장된 행동으로 인해 헛된 마음과 헛된 생각을 품은 죄를 회개합니다. 너그럽지 못하고 적대적인 감정을 조화롭게 풀지 못하여, 상처를 준 경우들에 대해 주의 자비와 용서를 구합니다.
지도자로서 진실하며 오해의 경우에 있어서 성실하게 대처함으로 주 안에서 참된 화해를 누리기를 간구합니다. 관계의 매듭을 푸는 법을 배우며 사랑하는 마음을 허락하사, 동쪽 사람들처럼 오해에 따른 손실이 줄어들고, 서로를 신뢰하는 바른 관계 맺는 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공동체를 주셨사오니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주시고,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며 주께서 자신을 내어주심 같이 지체들을 향해 내어 주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 안에서 팔레시아를 준행하게 하소서.
복음충신교회 성도들 어른에서 어린아이, 복중에 있는 생명까지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의 축복을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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