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활용하되 언어에 구애받지 말라
<34> 이참정에게 보내는 대혜선사의 답장 ①-1
[본문] 가르쳐 보이기를 “천주성(泉州城)에 돌아와서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자식을 안고 손자와 노는 것이 낱낱이 옛날 그대로지만 얽매이고 막힌 정은 이미 없어졌습니다. 또한 기특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숙세의 습기나 오랜 업장 또한 점점 가벼워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읽고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불교를 배우는 효험입니다.
[강설] 이 편지는 앞에서 이참정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대혜선사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불교는 물 먹은 솜옷처럼 무거운 인생을 깃털처럼 가뿐하게 하는 가르침이다. 여기저기 걸려서 부자유한 인생을 훌훌 다 벗어던지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하는 가르침이다.
처자권속으로부터도 자유로우며, 부귀영화로부터도 자유로우며, 생사거래로부터도 자유로우며, 심지어 부처와 중생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하는 가르침이다. 이것이 불교를 공부하는 효험이다.
세상 모든 유위법도 마찬가지
가장 중요한 가치는 중도정견
[본문] 만일 뛰어난 대인(大人)이 한번 웃는 가운데 백 가지나 깨닫고 천 가지나 알지 못했다면 능히 우리 불교에 과연 전할 수 없는 묘한 이치가 있는 줄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의심(疑)의자와 성낼(怒)노자라는 두 글자의 법문을 미래가 다할 때까지 끝내 깨트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설사 저 큰 허공이 운문(雲門)(대혜)의 입이 되고 초목과 기와나 돌이 모두 광명을 놓아서 도리를 설하더라도 또한 어찌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인연은 남에게 전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습니다. 모름지기 스스로 증득하고 스스로 깨달으며 스스로 긍정하고 스스로 쉬어야 비로소 철저하게 사무친다는 사실을 바야흐로 믿게 될 것입니다.
공은 지금 한 번 웃음으로 그동안 얻은 것을 한꺼번에 다 잊어버렸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강설]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깨달음의 경지란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경지라서 아무리 설법을 잘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설명할 수가 없다. 설명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도 표현하거나 서로 전해줄 수도 없다.
불교에는 이러한 이치가 있으므로 삿된 법은 힘써 배척하고 정법은 크게 드날리게 되는데, 대혜선사는 당시의 사대부들이 묵조사선(默照邪禪)에 빠져 있는 것을 비방하고 배척하였으므로 이참정은 한편 의심(疑)도 하고 한편 분노(怒)하였으리라는 점을 들어 깨달은 후에 오해가 없어지게 된 것을 말한 것이다.
“이 한 가지 인연은 남에게 전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습니다. 모름지기 스스로 증득하고 스스로 깨달으며 스스로 긍정하고 스스로 쉬어야 비로소 철저하게 사무친다는 사실을 믿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본문] 황면노자(黃面老子, 부처님)가 말씀하였습니다. “중생들이 말하는 일체 유위(有爲)인 허망한 일을 취하지도 말라. 비록 언어를 의지하지 아니하나 또한 언어가 없음에도 집착하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보내온 편지에 “이미 얽히고 막힌 정이 없고 또한 기특하다는 생각도 짓지 아니한다”라고 하였으니 부처님의 말씀과 은밀히 계합합니다. 이와 같은 말은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고 이와 달리 말하는 것은 곧 마왕파순(魔王波旬)의 말입니다.
[강설] 부처님의 이 말씀은 <화엄경> ‘십회향품’의 글이다. 불법의 진리를 전하는 데는 언어가 제일이다. 그러나 언어를 활용하되 언어에 구애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유위법에 대한 자세도 그러해야 한다. 그것이 곧 중도정견(中道正見)이다. 수행자의 사고와 생활이 이러한 중도의 이치에 맞으면 곧 부처님의 주장에 맞는 것이고 이와 다르면 그것은 마군의 주장이다.
[출처 : 불교신문 2012.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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