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하다. 정지용 시인의 고향으로 '향수'라는 노래만 들어도 떠오르는 곳, 동학농민혁명의 총지휘부가 있던 곳, 육영수 여사의 숭모제를 지내는 곳...
한곡리는 동학혁명 당시 동학의 2세 교조인 해월 최시형 선생이 문바윗골에 대도소(대도소)를 두고 전국의 동학교도들을 지휘하던 지역이다. 또한 1894년 9월 18일 일본군의 침략과 탐관오리에 대항하는 총기포령(총동원령)을 내리는 등, 동학농민혁명을 총지휘한 역사적 장소이다. 1893년 10월 이래로 이곳에서 제자 의암 손병희와 김연국 등 동학도들을 지도하였고, 이와 같은 힘으로 한때는 한곡리 일대에 수만의 동학군이 집결했다고 전해온다. 이곳에는 해월 선생이 살던 집이 남아있고, 또 문바위에는 동학군들이 결의를 다지기 위해 새긴 이름 등이 남아있다. 또 한곡리 일대와 문바윗골에는 동학군이 훈련장과 해월선생의 아들 최덕기의 묘소, 딸 최윤(정순철 모친)의 장취, 전적지 등이 남아있어, 이곳이 동학혁명의 가장 중요한 사적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안내문
낯익은 농촌풍경. 햇살은 따사롭고 들판에는 농부들의 손길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나무에 물오르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한가롭고 조용한 골짜기의 풍경. 곳곳에 진달래꽃을 비롯하여 들꽃들이 무더기로 피어있는데, 동학군의 숨결이 스며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느낌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한곡리 마을주차장. 옥천신문 이안재 상임이사님이 순례자들을 맞아 안내를 해주셨다. 평상시에도 옥천지역의 동학을 알고자 하는 순례자들이 있으면 열 일 제치고 안내봉사를 하곤 한다고 지역에 계신 분이 귀뜸을 해주신다.
동학세가 크게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동학은 유불선 삼교를 통합하고 심지어는 천주교 교리까지 흡수하여 만들어진 사상이었다. 당시 양반사회의 신분제를 부정하고 사람이 하늘이라는 사상을 설파한 종교가 딱 하나였고, 그게 백성들에게 스며들게 되었다."는 말씀을 시작으로 동학의 역사를 개괄해주셨다.
이필재의 영해(영덕) 반란과 숨어 다니면서 포교를 해야 했던 이야기, 교조신원운동, 상소운동 등... 숨어다니던 최시형 선생이 1893년 10월경 이곳에 들게 되고, 보은에 있던 동학군본부가 이곳 한곡리로 옮겨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최시형 선생이 머물면서 동학군들을 교육하고 훈련했던 집이다.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박승재 선생은 동학군의 후손이었다. 문바위에 새겨진 7분의 동학군 중 박회근 씨가 할아버지, 박창근씨가 작은할아버지라고 했다. 동학군과 그 가족에 대한 학살과 탄압 속에서 살아남은 가족이 있다는 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이 집의 바로 뒷편에 시멘트 수로가 있었는데, 동학군들이 쫒겨갈 때 관군과 민보군이 한곡리 전체를 불질렀는데, 그때 타다남은 밤나무 조각이 100년이 넘는 세월에도 남아있었다.
한편, 문바위골에는 최시형 선생의 아들 최덕기 묘소가 있다. 한편, 최시형 선생의 따님인 최윤 씨의 아들, 즉 최시형 선생의 외손자인 정순철 선생은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로 시작되는 <졸업식 노래>, "엄마 앞에서 짝짜꿍, 아빠 앞에서 짝짜꿍..."하던 <짝짜궁> 등의 동요를 작곡한 분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 등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 기념탑 바로 아래쪽에 있는 바위들. 바로 문바위다. 이 바위 사이로 동학군들은 훈련장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바위틈에 자라난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로운 장수처럼 서있었다. 바위에는 당시 동학군 지도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서울을 향해 출정하기 전 이곳에 이름을 새겨 "목숨을 건 굳센 결의"를 표하였을 그분들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하지만 그냥 먹먹하기만 하다.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은 아직 계속 정비중이라고 한다.
동학혁명의 횃불을 형상화한 기념탑 앞에서 묵념으로 추모의 마음을 올렸다.
수많은 풍상을 온몸으로 맞이했을 나무 아래 큰 바위에 앉았다. 아래로 보이는 너른 들판이 당시 동학군들의 훈련장이라고 한다. 이 바위에 앉아 농민군사들의 훈련을 지켜보던 지도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벼랑끝의 삶,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을 찾기 위해 이곳까지 일부러 모여든 군사들이니 사기는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젖먹던 힘과 땅을 파던 힘으로 보잘것 없는 죽창과 같은 무기로 탐관오리와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의 일대격전을 치러야 할 터.
진달래, 조팝나무, 할미꽃 등 많은 꽃들이 피어있는 너른 골짜기, 이곳에서 훈련하면서 품었을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을 새겨본다. 그저 저꽃들처럼 더불어 태어나고 더불어 살아가다 명을 다하면 돌아가는 세상... 한곡리 문바위골의 꿈을 뒤로 하고 청산면 소재지로 왔다.
보청천의 주변으로 보이는 농촌의 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보청천 옆에 있는 청산삼거리 공원에 도착했다.
사진 왼쪽은 애국지사 박재호 선생 공적비. 3.1만세운동 당시 청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분 중 한 분이다. 오른쪽은 과거 청산현의 현감을 비롯하여 관리들의 공덕비가 늘어서 있는데, 본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그외에도 각각 다른 내용을 가진 여러 비석들이 모여 있어서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깊은 밤이면 이 비석들이 서로 둘러 앉아 원탁회의를 하면서 조국의 미래가 아주 밝아지겠다는 상상도 해본다. ^^
옥천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마을자랑비와 같이 마을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기념물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청산에 살리라라는 비석도 그 중 하나. <청산예찬>의 내용을 읽어본다.
한편, 동학혁명의 심장부와도 같았던 곳인데, 정읍이나 보은 같은 지역에 비해 역사를 느끼고 배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해보인다. 옥천군에서 동학혁명을 기념하는 작업이 늦게나마 시작되었다고 하니, 모쪼록 정신과 역사가 제대로 기념할 수 있게 하여 미래로 나아가는 이정표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의 역사를 알고 살아가는 옥천군민들의 삶도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