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아프리카에서 맞는 식목일.
오전 9시. 텐더를 타고 부두로 나와 인근 700미터 떨어진 지부티 사와디 마켓으로 출발했다. 헉. 아침에 내린 비로, 비포장도로가 시루떡처럼 신발에 붙어 떨어진다. 발자국만큼 진흙이 발바닥에 붙고 그 아래는 마른 땅이다. 신기하다. 리나의 유모차가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바퀴에 진흙이 들러붙고 흙받이에 진흙이 떡처럼 붙어 바퀴가 굴러가지 않는다. 낭패다. 좀 덥더라도 700미터 걷는 데야 문제없는데, 할 수 없이 대기 중인 택시를 탔다. 먼저 가격은 500지부티 프랑.
문제는 깨끗한 쇼핑 몰에 들어가기엔 신발도 유모차도 온통 진흙투성이다. 일단 밖에서 어느 정도 털고 실내로 들어가니, 미색 타일 바닥에 여기저기 검은 진흙들이 많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진가 보다. 최첨단 쇼핑몰에 진흙투성이 신발. 묘하게도 지부티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다. 서둘러 화장실에 가서 수도 호스로 진흙을 다 닦아낸다. 신발 바닥의 흙도 닦아낸다. 그런 후 시간 제약 없는 쇼핑 중이다. 먼저 샅샅이 구경하고 시간을 보내다가 배로 돌아갈 때쯤 물건을 사기로 했다. 마트에 들어가려니 리나 아기용품이 든 백팩을 맡기란다.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 쇼핑. 앵커리지로 돌아가면 무섭게 더운, 좁은 배가 있다. 우리 가족은 이 마켓에서 하루 종일 머물 생각이다. 에어컨이 아주 시원하다. 아내도 아아주 느긋하게 마켓 안을 구경중이다.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다. 한국서 장 볼 때는 늘 아내에게 재촉했는데, 시간 무제한 장보기라니, 나조차 느긋해진다. 이런건 한국 가서도 해봐야겠다. 하지만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지친다. 리나를 데리고 쇼핑몰 벤치에 앉아 놀아준다. 리나는 모처럼 넓은 공간을 마구 뛰어다닌다. 자꾸만 남의 사무실에 들어가 파란 의자에 앉는다. 다행이 직원들이 리나에게 미소를 지어준다. 참 선량한 웃음.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이 간절한데 라마단이다. 문을 닫았다. 버거킹도 마찬가지. 마켓에서 음식을 살 수는 있어도 먹을 수는 없다. 이들의 종교와 관습도 중요하다. 다들 굶고 있는 앞에서 버젓이 뭘 먹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어쩌면 불법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아내도 대단하다. 3시간째 신나게 마트 구경 중이다. 지치지도 않는다.
1시. 도저히 배가 고파 안 되겠다. 아내에게 이만 물건을 사서 돌아가자고 한다. 다음에 또 와서 사면된다고 설득한다. 아내와 함께 장을 본다. 나는 식량에 몰두하고, 아내는 리나 옷과 실내 꾸미기 물건을 자꾸 본다. 나는 그런 건 한국 가서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일단 항해에 필요한 물건에만 집중하자고 말한다. 그래서 리나 간식과 식빵, 음료수, 옷가지 몇 벌을 사니 또 23만원이다. 어제와 오늘 사이 50만원 가까지 장을 봤다. 한국에서는 전부 20만원 조금 넘을 량이다. 한국 신라면과 너구리가 있는데 각각 개당 5,000원씩이다. 라면 10개 사면 5만원이 되는 거다. 그래서 안 샀다. 아니 못 샀다. 한국에 계신 분들은 라면 맛나게 드시라. 외국 나오면 비싸서 못 먹는 물건이다. 비자카드 사용은 아주 원활하다.
2시. 양손에 물건을 잔뜩 들고 택시를 타러 갔다. 500지부티프랑을 말하니 1,000지부티프랑이란다. 돌아가는 길은 더 멀다는 주장이다. 거절하고 곁의 택시를 타려니 지들끼리 순식간에 담합한다. 이런 개 싸가지들. 양손에 짐 가득에 유모차까지 있으니 약점을 발견한 거다. 정상적인 택시기사들이 순식간에 하이에나로 변했다. 할 수 없이 택시를 탄다. 돌아가는 길은 300미터쯤 더 가서 유턴을 한다. 그거로 택시비를 두 배 받는 거다. 이런 야비한 양아치 짓 넌덜머리난다. 일부러 부두 1미터 앞까지 간다. 부두에 있던 사람들이 짐을 들어준다며 친절을 베푼다. 나는 거절한다. 그러나 아산의 친구라는 말에, 짐 두 개는 그냥 들려 같이 간다. 한국에서의 나였다면, 사람들의 친절을 의심하고 거절하는 나를 부끄러워했을 거다. 그러나 이번 항해를 하며 달라졌다. 아프리카에서는 언제, 무슨 일로, 돈을 뜯으려 할지 모르니 당연히 거절한다. 나는 야멸찬 사람이 아니라, 경험 많고 조심하는 사람이다. 의심하고 거절해라. 그래야 당하지 않는다.
2시 30분. 텐더보트를 타고 돌아오는 데 파도가 심하다. 아내가 무섭다고 난리다. 다시는 장에 안 간단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착해서 짐정리를 하다 보니 아차! 아까 맡겨둔 아내의 가방을 두고 왔다. 번호표가 있으니 찾으러 가면 된다. 나는 마트에서 산 이집트 빵(넓적한 밀가루 전병)에 잼을 발라 두 개를 뚝딱 먹어 치운다. 뭐라도 먹으니 힘이 난다. 혼자 마트로 간다. 이번에는 걸어서 간다. 아무리 아프리카가 뜨거워도 700미터 못 걸어갈까? 바람불면 시원하다. 잠깐 걸어 마트에 도착했다. 택시기사들이 나를 보고 무슨 일이냐? 는 표정이다. 무시하고 마트로 들어간다.
아내가 카톡으로 보낸 몇 가지 물건을 더 사고 카드로 계산한 후, 가방을 찾는다. 그리고 ATM에서 달러를 찾으려니 안 된다. 지부티프랑도 안 된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이런 일을 너무 많이 당했다. 내일 아내 카드로 다시 해보자. 이도 저도 안 되면 아산에게 달러대신 웨스트유니언으로 직접 송금하면 된다. 아산도 웨스트유니언 계좌를 가지고 있다니 걱정은 없다. 이것도 이번 항해 중에 배운 거다.
가방을 메고 양손에 비닐 백을 들고 마트를 나서니 택시기사들이 난리들이다. 나는 그대로 걸어서 길을 걷는다. 너희들이 탐욕을 부리지 않았으면, 나는 왕복 1,000 지부티 프랑을 지불했겠지. 하지만 나는 이 짧은 거리를 걷고 말지, 양아치들에게 또 당하진 않는다. 또 잠깐 걸어 앵커리지에 거의 다 왔는데, 택시가 빵빵 거린다. 보니 아침의 그 택시기사다. 공짜로 마리나 까지 태워 준단다. 감사하다. 지부티에 담합을 일삼는 녀석들 말고 좋은 택시기사도 있긴 하다. 배로 돌아오는데 알란의 프랑스배가 움직인다. 가까이 가서 물어보니 지금 수에즈로 출항한단다. 하긴 알란에겐 바람이 좋으니... 나는 역풍이라 더 기다려야 하는데. ‘본 보야지’ 크게 인사한다. 지부티에선 알란과만 가까이 지내고 신세를 졌는데. 뭔가 아쉽고 섭섭하다.
제네시스에 오르니, 아내가 닭다리 백숙을 준비 중이다. 여기서는 생닭 한 마리는 구할 수 없고 닭다리 냉동포장육만 있다. 오늘이 리나 탄생 20개월째다. 아까 리나 여름옷도 샀고 우리는 닭다리 백숙으로 조촐한 파티다. 아프리카 지부티 앵커리지에서 순풍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냈다. 고향은 아득히 멀다.
오후 6시. 스턴으로 가서 바닷물로 샤워를 하려니, 또 다른 세일요트가 출항이다. 바람이 맞으니 가는 배가 많다. 수돗물로 마무리하고 팬티를 빨아 콕핏에 넌다. 여자가 둘이니, 나만이라도 물을 더 아끼자. 점점 항해에 익숙해진다.
오후 7시. 아내의 닭다리 백숙은 일품이다. 나도 두 개 먹고, 아내도 두 개. 리나도 맛나게 먹는다. 온가족이 완전 영양보충이다. 아내는 오이 무침도 만들었다. 국수가 당기는 맛이다. 배불리 식사를 마치고 바람을 쐬러 나가보니. 마스트 등이 5개다. 불 꺼진 배 한 척까지 총 6척. 그제 카타마란까지 세 척의 배가 한꺼번에 빠지니 앵커리지가 쓸쓸하다. 다시 윈디나 살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