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9:18-27, 어디든지 주를 따라. 25.1.5, 박홍섭 목사
2025년 새해 한우리 성도들의 가정 가정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작년에 우리는 누가복음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어디든지 주를 따르겠다’라고 믿음의 경주를 해왔습니다. 24장까지 있는 누가복음의 진도가 9장까지밖에 못 나갔으므로 올해도 계속 누가복음의 말씀을 나눌 계획입니다.
누가복음이 다른 공관복음보다 많이 강조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 중에 이루신 구원을 설명하면서 그 구원이 구약 이스라엘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만민을 위한 선물이라고 이방 선교를 강조합니다(2:30-31, 4:25-27, 7:5, 9, 9:51-56, 10:12-14, 25-37, 11:30-32, 17:11-19, 24:46-47). 특별히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면서 잃어버린 자들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섬김의 복음을 강조합니다(1:52-53, 4:18-19, 5:27-32, 6:20, 7:22, 29, 18:9-14, 19:1-10). 또한 누가는 여성들의 존재와 역할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의 증인으로 남자와 여자를 함께 배열하고 남자와 여자를 대조할 때도 여자를 긍정적으로 묘사하여 구원역사의 중요한 목격자와 모본으로 제시합니다.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점은 이 복음서가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성령 하나님을 부각시키며 기도를 강조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여 올해도 표어를 작년과 같이 제자도를 의미하는 ‘어디든지 주를 따라’로 정했습니다. 작년에는 가정과 사회와 교회에서 어떻게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지를 목표로 삼았다면 올해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요구되는 조금은 더 개인적인 세 가지의 내용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1.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9:23), 2. 미루지 말고 오늘 즉시 주님을 따르고(9:57-62), 3. 믿음의 계산을 하고 주님을 따르자는(14:25-35) 목표입니다. 해당 본문에 이르면 조금 더 자세하게 그 구절들을 강론하겠지만 새해 첫 주인 오늘은 전체적 개괄로 주님을 따르는 의미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믿게 되면 곧바로 예수를 따라오라는 요구가 주어집니다. 주님은 황제의 도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입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주님을 따른다는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다니엘서 7:13-14에 예언된 인자라고 하면서 이 인자가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권을 받기 위하여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배척과 고난을 받고 죽으며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주로 믿는다면 이렇게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말은 그냥 물리적으로 몸만 따라 다니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과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그 삶에 깊이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며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린 섬김의 삶을 사셨듯이 우리도 자신의 욕망과 편리를 내려놓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삶을 위해 섬김과 고난과 희생을 감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위해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따라 우선순위를 새롭게 조정하고, 일상 속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말은 외적인 종교적 열광이 아닌 내적인 변화와 헌신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에게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린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지금 예수님 곁에는 무리와 제자들이 섞여 있습니다. 이 두 부류가 언제 구별됩니까?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요구 앞에서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무리에 속한 자들은 결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자기의 길을 고집하면서 자기 소원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전형적인 우상 신앙의 형태를 지닐 뿐입니다. 우리 안에 다 이런 우상 신앙의 타락한 종교성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만 앞세우는 이기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이런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
그럼 기독교는 금욕의 종교입니까? 매일 이런 고난과 고통과 자기부정만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4-27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합니까? 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에 대해 죽으라고 합니까? 그 길이 진정한 삶과 복과 생명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선하신 하나님을 맛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에 대해 죽으면 하나님에 대해 살게 됩니다.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죽음 후에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 변화 산 사건이 나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면 이런 영광이 준비되어 있으니 잘 따라오라는 뜻입니다. 필요할 때만 주님을 따르다가 필요가 채워지거나 고난이 오면 떠나는 무리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지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어서 선하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맛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9:57-62). 우리는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알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에 가장 우선순위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이 아니라 삶의 본질입니다. 본질이므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미룹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서도 ‘어디로 가든지 따르겠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궁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는 길을 가신다고 합니다. 그래도 따라오겠냐는 뜻입니다. 제자의 길은 양지만 있지 않습니다. 희생의 음지가 더 많습니다. ‘인자’는 종말론적인 영광을 받기 위해 그 길을 가십니다. 이 땅의 영광과 칭찬과 박수를 바라고 주님을 따른다면 결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렇게 서기관을 돌려보낸 주님은 다른 사람을 부르십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를 장사하게 해달라고 합니다(59-60). 예수님은 그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시면서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가혹한 거절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부친을 장사하게 해 달라는 말은 지금 자신의 부친이 돌아갔으니 그 장례를 치르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직 부친이 살아 있으니 지금은 그 부친을 봉양하고 돌아가시면 그때 주님을 따르겠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그 일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나중에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의 변명을 아십니다. 이런 변명은 누가 합니까?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가 합니다. 그래서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지금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끝없이 변명만 하고 오늘 주님을 따르는 삶을 내일로 미룹니다.
다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61-62). 이 사람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가족들에게 인사하겠다고 합니다. 이 역시 지금은 따르지 않고 나중에 따르겠다는 자기 합리화와 변명입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했으면 옛 삶에 매달리거나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인간적인 가치보다 가장 가치로운 것이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래서 가장 우선순위에 자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앞서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지금 아버지를 봉양하면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지금 장사하고 지금 공부하면서 주님의 뜻을 내 뜻보다 더 따라야 합니다.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내일도 따르지 못합니다. 오늘 핑계를 대면 내일 또 다른 핑계가 생깁니다. 우리는 오늘 못해도 내일 곱빼기로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런 법은 없습니다. 오늘을 심어야 내일을 거둡니다. 오늘을 심지 않고 내일 곱빼기로 거둘 수 있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믿음도 동일합니다. 미루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미루지 않고 주님을 따르려면 자신의 신앙 여정을 진지하게 평가하는 믿음의 계산이 필요합니다(14:25-35). 이를 위해 주님은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합니다. 망대를 세우려는 사람(14:28-30)과 전쟁에 나가려는 왕의 비유입니다(31-32). 두 비유 다 무엇인가를 하기 전에 자신에게 그런 여력이 있는지를 미리 따져보라고 합니다. 이런 신중한 고찰 없이 섣부르게 실행에 옮긴 계획은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해버립니다. 망대를 세울 때도 그렇고 전쟁에 나갈 때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은 한순간의 감정이나 열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깊은 이해와 성찰이 필요합니다. 제자는 자신의 신앙을 진지하게 평가하고, 그에 따른 결단을 내릴 때 믿음의 계산을 잘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받는 보상과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로 계산하면 답이 없습니다. 이 삶의 결국은 종말론적입니다.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어찌 계산하지 않고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힘과 우리 결단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실력으로 미루지 않고 오늘 결단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지혜로 종말론적 영광을 바라는 믿음의 계산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기도를 강조하고 성령을 강조합니다. 기도로 성령의 감동과 도우심을 구하라고 합니다. 눅 11:9-13을 찾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제자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자신의 힘과 열정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살고 성령을 의지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어디든지 주를 따라가는 성도의 삶, 제자의 삶을 잘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