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비열전 21-2
제21대 영조(이금)의 여자들
정순왕후 김씨!
영조 21년(1745년) 11월 경주 김씨
김한구(金漢耉)와 원주 원씨 사이에 태어났다.
1757년 정비인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영조는 부왕인 숙종의 유지에 따라 후궁들
중에서 새 왕비(王妃)를 책봉하지 않았다.
왜~? 숙종이 장희빈에게 디어서...^^
1759년, 정식 중전간택을 통해
김한구(金漢耉)의 딸을 새 왕비(王妃)로
그해 6월 22일, 창경궁에서 혼례를 올렸다.
당시 영조의 나이는 66세 정순왕후는 15세로
조선 개국 이후 가장 나이 차가 큰 혼인이었고
그녀가 왕비(王妃)에 책봉될 때
부모 내외와 조부 김선경도 생존하고 있었다.
사실 정순왕후 할아버지보다
영조가 네 살이나 더 많았다.
할아버지와 손녀뻘이 혼인한 것이다.
참참 나 원!
이런 경우를 뭐라케야(?) 하나~?
심지어 1735년에 태어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보다 10살이나 어렸다.
간택 당시의 일화로 영조는 간택 규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다른 규수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
라는 답을 했지만 유독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 라고 답하여
영조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목화꽃은 비록 멋과 향기는 빼어나지 않으나
실을 짜 백성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꽃이니
가장 아름답다.'라는 말로 영조를 감탄시켰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고개가 뭐냐고 묻자,
'백성들이 굶주리는 보릿고개'가 가장
견디기 어렵기 때문에 넘기 힘든 고개라고 했다.
이 정도면 면접시험 결과는 뻔하지 않는가~?
그런데 보릿고개~?
요새 젊은 사람들은 이 말을 알아 들을까~?
밥 없으면 빵 먹으면 되고..
빵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된다는 세대이니
참~ 격세지감을 느낀다..
왕비 책봉 이후에도 상궁이 옷 치수를 재려고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답하여 어린 나이에도 왕비(王妃)의 체통을
중시하였던 그녀의 면모를 알 수 있다.
남편인 영조의 총애는 깊었지만,
대군은 커녕 공주도 소생하지 못하였으며
임신했다는 기록도 유산했다는 기록도 없다.
나이차가 많아 임신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정조 시대에는 영조 후기 영조의 양대
척신 가문인 정순왕후의 친정 오라비 김귀주 및
경주 김씨측과 혜경궁 홍씨 친정 풍산 홍측은
영조 말년에 계속적으로 대립을 했다.
남편 영조가 승하하고 손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왕대비(王大妃)로 승격되었으며 홍인한,
정후겸 등 영조 척신 일파의 숙청을 단행했다.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는 영조 시기에
후일 정조가 중용하는 청명당과 함께 행동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한성판윤을
제수받고 홍인한 , 정후겸 탄핵에 동참했다.
그런데 정조는 홍인한 , 정후겸에 대한 처분이
마무리 되자 마자 김귀주가 혜경궁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흑산도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완전 팽이다!
이날 연석에서 정조는 김귀주를 귀양 보낸
실제 이유는 영조때 김귀주가 외조부
홍봉한을 탄핵한데 있음을 밝혔다.
이로 인해 정조와 정순왕후 사이에
어떤 긴장 관계가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홍인한, 정후겸 처분에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홍보하기 위한 책 명의록을
편찬하였을 때 이 책 속에서 '세손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내전이 안에서 세손을 도와 세손이
무사하게 되었다'라는 내용을 수록하여,
그가 정조 즉위에 공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대내외에 밝혔다.
세간에는 정순왕후와 정조가 극심한
대립관계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득록' 에는
정순왕후를 향해 친밀한 감정을 나타내는
기록이 전하고 정순왕후는 정조의 행록을 쓰며
정조가 자신을 극진히 공양했음을 과시하고 있다.
순조 시대에는 1800년, 손자 정조가 승하하고
증손자인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대왕대비(大王大妃)로 승격되었으며
정순왕후는 왕실의 제일 큰 윗전 즉
대왕대비로서 4년 동안 수렴청정을 행하였다.
이 시기에 정순왕후가 여군(女君),여주(女主)를
자칭하는 것을 두고 본인이 여자국왕,
여자임금 임을 자처한 것이라는 해석이
한동안 주류를 이뤘으나 이는 완전한 오류이다.
정순왕후는 정조 생전에도 여군(女君)을
자칭한 기록(정조10년 12월 1일)이 있으니
이것이 '여자 임금'이라는 의미일 수는
없는 것인데 전술한 통설은
이러한 점을 완전히 간과한 오류를 범하였다.
정순왕후는 자신과 대립되는
소론 시파들을 대거 숙청하였으며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과 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을 처형시켰다.
그리고 정조가 설치한 장용영을 폐지하였으며
정조가 묵인하던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해
남인과 소론 시파들을 축출하였다.
또한 정조가 내쳤던 김관주와 김용주등의
노론 벽파 관료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1802년, 정조의 유지에 따라 김조순의 딸을
순조 왕비로 책봉하고 김조순을
영안부원군에 봉하고 관직을 제수하였다.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점 찍은 것은
정조의 최대의 실수 중에 하나였는데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그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풍양 조씨까지 합하여 향후 60년을
두 집안이 조선왕조를 다 물말아 드셨다. ㅠㅠ
1803년 음력 12월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자 순조의 장인이자
정조의 친위세력이었던 김조순에 의해
대부분의 벽파 관료가 숙청되고
자신의 영향력도 약화되었다.
정순왕후, 허망한 말년을 보냈고
1년 뒤인 순조 5년(1805년) 1월 61세로
경복궁 교태전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원릉(元陵)으로 영조와 함께 묻혀 있다.
정순왕후 김씨!
46년간을 왕실에서 권력을 누렸다.
그런데 ''과연 그녀는 행복했을까~?''
자신의 할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남편
그리고 청상과부 생활 30년, 자신보다
열살이나 많은 명목상의 자식과 며느리
왕위를 위한 권력투구의 조정..
그리고 외로움과 고독.
우리는 평범함의 미덕을 모르고 산다.
그곳에 진정한 행복이 깃들어 있음을..
신유박해에 대하여...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천주교를 묵인한 정조와는
달리 천주교를 강경하게 탄압하였다.
급기야는 1801년 음력 1월 10일,
사학(邪學, 천주교)의 엄금을 하교하여
세계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큰 교회 박해인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켰다.
아래는 1801년 음력 1월 10일, 천주교
엄금에 관해 정순왕후가 하교한 내용이다.
“선왕(先王)께서는 매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듣건대, 이른바 사학이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
서울에서부터 기호(畿湖)에 이르기까지
날로 더욱 치성(熾盛)해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서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와 수령은 자세히 효유하여 사학을 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번연히 깨우쳐 마음을
돌이켜서 개혁하게 하고, 사학을 하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며 징계하여
우리 선왕께서 위육(位育)하시는
풍성한 공렬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와 같이 엄금한 후에도
개전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마땅히
역률(逆律)로 종사(從事)할 것이다.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統內)에서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劓罰)을 시행하여
진멸함으로써 유종(遺種)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이 하교를 가지고 묘당(廟堂)에서는
거듭 밝혀서 경외에 지위(知委)하도록 하라.”
이러한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정책은 천주교를
묵인하던 정조의 천주교 해법론을 오히려
천주교를 확산시키는 무능한 해법으로 규정하여
정조의 천주교 해법론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노론 벽파의 정적인 남인과
시파(時派)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 숙청이었다.
이로 인해 남인 출신인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과 이승훈이 처형되었으며
이미 배교한 이가환도 장살당하였으며
정약용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신유박해 이후 정약현(정약용 맏형)의
사위인 황사영(黃嗣永)에 의해
황사영 백서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조선 내에서의 천주교 탄압은 더 거세어졌다.
※ 더 관심 있는 분은 김훈의
<흑산>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내일 또 계속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