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의 뿌리,대한제국군(大韓帝國軍) 이야기(2)
아들아, 대한제국군에 대한 두번째 이야기..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 군대 해산의 그날을 얘기해 보려고 한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제국주의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의 정점을 찍는 것이 바로
군대해산이었다. 군대가 없는 나라가 있느냐..군대 없는 나라는 망한 나라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연달아 승전하고 거기에 미국과 영국의 후원과 묵인까지
제국주의 일본은 거칠게 없었다.
국제사회에서 철저하게 버림받은 대한제국 집어삼키는게 무슨 어려운 일이었을까.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은 정해진 수순이었고, 아마도 고종황제의 마지막 시도..
헤이그 밀사 사건은 일제의 그런 결심을 굳히고 시기를 더 앞당기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일제는 사전작업으로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허수아비 순종황제를 즉위시켰다.
그리고 서서히 그의 목을 죄어가며 군대해산 조칙을 받아내었지.
정미칠적, 친일매국노 이병무
1907년 8월 1일,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관저에 대한제국군 지휘관들이
소집되고 그 자리에서 대한제국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1864~1926)가 군대해산
조서를 읽었다.
아들아. 한 나라의 국방장관이란 자가 낯짝도 두껍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느냐.
천하의 역적(逆賊), 매국노, 벼락맞을 인간.
최소한의 부끄러움도 못느끼는 금수(禽獸)만도 못한 자.
과연 이 자가 사람이 맞는 것인가?
군대해산과 의병진압작전을 위해 투입된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병력들
사실 군대해산 실행 며칠전 조선주둔 일본군은 크게 보강되었단다.
일본 애들이 그 얼마나 치밀한데.. 그만한 준비 안하고 덤볐을리 없지 않느냐.
일본 본토에서 보병 14연대 병력이 왔고, 이들의 임무는 대한제국군 군대해산과
의병토벌이었지.
참담한 군대해산의 조서를..대한제국군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그 조서를 받들 수 없었다. 박승환(朴昇煥.1869~1907)참령은 군대해산은 곧 망국임을 알고
있었고, 그는 그 수치를 감당할 수 없었다.
대한제국군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
군대해산식이 거행되는 그 순간..그는 유서(遺書)를 쓰고 있었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번을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유서를 쓰고 난 후..그는 권총을 빼어들고 그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박승환 참령의 순국
박승환 참령의 마지막 총성 한발, 그 유서는 자신의 육신을 죽여 휘하 장병들에게
일본군과 싸울 전의를 높이고, 망국의 조서를 거부하고 나가 싸우라는 최후의 명령을
내린 것이었단다.
총성이 울리고..시위대 1연대 1대대원들이 박승환 참령의 죽음을 알게되고..
그 유서를 발견하여 격분한 시위대원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되찾은
다음 무장하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시위대 1연대 1대대 뿐만아니라
2대대 장병들도 군대해산을 거부하고 함께 전투를 벌였다.
대한제국 시위대 장병들은 부대 병영 담장과 곳곳을 엄폐물로 삼아 일본군에게
조준 사격을 퍼부으며 선전했지.
일본군들은 대한제국군을 가볍게 보고 힘으로 제압하려 했는데 실패하고
의외로 거센 저항에 피해가 늘자 잠시 대치하다가 일본군의 증원병력이 오고..
시위대 병영과 후방의 숭례문 성루
시위대 병영 바로 옆 숭례문 성벽과 성루에 일본군이 기관총을 거치하고
맹렬히 사격을 해오면서 응사하며 맞서던 대한제국군도 피해가 늘어만 가고..
또 결정적으로 총탄이 떨어지면서 결국은 힘이 다해 대한제국군 시위대 병영이
모두 점령 당했단다.
1907년 8월 1일, 시위대 병영을 점령한 일본군
그리고 그날 시위대 병영과 한성 시내에서 벌어진 시가전에서 대한제국 시위대는
68명 전사, 그리고 수많은 부상자들과 포로들이 발생했으며..
그날 수많은 전사자들의 시신이 흥인지문 밖에 버려졌고 시신을 찾으러 온 가족들의
애끓는 오열이 이어졌단다..
군대해산에 저항하다가 죽은 대한제국군 시신
아들아, 1907년 8월 1일..오전 9시경부터 오전 11시50분경까지 서울 시내 한복판..
대한제국군 군대해산에 반발해 벌어진 남대문 전투, 그 시가전의 전말이 이러했다.
물론..대한제국군 장병들도 일제가 던져준 그 알량한 은사금을 받고 그대로 귀가한
사람도 많았다.
대한제국군 장교, 지휘관이란 자들이 일제에 동조하여 군대해산에 앞장서고
두려워서 도망친 자들도 많았다.
이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군인으로서 용기도 기백도 없는 자들을 믿고 나라를 맡긴 이들이 불쌍하고 허무하구나.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대의를 위해, 군인답게 죽음으로 저항한
대한제국군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1869~1907)참령이 있었고,
박승환 참령의 뜻을 이어받아 대한제국군 장병들을 지휘하며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대한제국군 시위대 제2연대 1대대 남상덕(南相悳,1881~1907) 참위
대한제국군 시위대 제2연대 1대대 이준영(李峻永, 1879~1907) 참위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대한제국군 시위대 대원들..
이들이 있어 대한제국의 마지막이..그 망국사(亡國史)가 초라하지 만은 않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 아니겠느냐.
대한제국군이 일본군 정규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것이다..
그 사실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지.
결코 우리가 나라를 스스로 넘긴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니까 말이다.
군대해산 후 이어진 시가지 전투를 그린 프랑스 신문의 삽화
그리고 아들아..대한제국군의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한 전투는 끝이 아니었단다.
아니..이게 시작이었어.
강화와 원주 진위대가 봉기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타격을 가했고..
진주 진위대는 대장이 일제의 유인책에 속아 체포되며 봉기가 좌절되었으나..
저항은 이어졌다.
살아남아 일제에 투항하기를 거부한 대한제국군은 전국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였지.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대일항쟁을 이어가는 대한제국군(오른쪽에서 네번째 인물)
사실 의병부대들의 가장 큰 고민은 열세인 무기와 제대로 훈련 받지 못한 병력들인데..
의병이 보유한 화승총보다 더 뛰어난 소총으로 무장하고 군사훈련을 받은 이들이
합류해서 다른 의병들을 훈련시키고 의병부대의 화력이 강화되었으니..
아들아, 의병부대에게 이들이야 말로..그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느냐.
그렇게 1907년..정미의병전쟁은 대한제국군의 가세로 더욱 불붙게 되었단다.
아들아,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대한제국군이 있다.
그것을 기억해라.
대한제국군의 마지막 이야기는..정미의병전쟁에 가세한 대한제국군의 활약상과
중심인물 들 그리고 뒤이어 무장항일독립전쟁에 이르기까지..
대한제국군이 남긴 거대한 발자취의 이야기를 네게 담아주려 한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