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뎐의📌짧은 생각(43)
2007년에
‘빈자(貧者)의 성녀(聖女)’로 불리던
테레사 수녀의
공개되지 않았던 편지와
개인적 기록이
공개됐습니다.
당시에는
큰 이슈였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편지와 글에서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버리신
저는 누구입니까.
당신의 사랑이었던
저는 지금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저의 신앙은
어디에 있습니까.’
심지어
이런 말도 던졌습니다.
‘하느님의 부름에
맹종한 저는
진정 실수를 한 것일까요?’
사실 테레사 수녀의
아주 개인적인 편지였습니다.
테레사 수녀 사후에
가톨릭 교황청에서
편지 공개를 결정하자
비판적인 여론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이걸 두고
혹자는 “테레사 수녀가 신을 부정했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이는
“절망감 속에서도
신과 함께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
테레사 수녀가 위선적”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정말 그랬을까요.
저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봅니다.
테레사 수녀가
자신의 생애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와 함께했다’고 말한다면
그게 오히려 ‘위선’이지 않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저는 테레사 수녀의 신앙과
그가 베풀었던 사랑을
믿지 않을 겁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좁아졌다, 넓어졌다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나와 하느님 사이의 간격’을
끌어안은 채
신에게 한 발짝씩
다가설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들었던
신의 음성도
밤이 되면
안 들릴 수 있습니다.
가슴 밑바닥에서 느꼈던
하느님의 숨결도
돌아서면 잊힐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신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험난한 길’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여, 당신이 버린 저는 누구입니까?’라는
테레사 수녀의
가슴 절절한 절규에서
저는 다른 걸 읽습니다.
그건
주 안에 늘 거하고자 하는,
그렇게 하나 되고자 하는
테레사 수녀의 열망입니다.
그런
강렬한 열망이 있기에
강렬한 절규도 나오는
법입니다.
그 절규는
다름 아닌
신과 하나 되는 순간을 놓쳤을 때
쏟아져 나오는 절규입니다.
이런 절규는
역설적으로
테레사 수녀가
얼마나 치열한 수도자였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하느님,
그 사이의 간격을
테레사 수녀는 늘
묵상하며
살았을 테니까요.
[출처:중앙일보]백성호:종교전문기자
(43) 주여, 당신이 버린 저는 누구입니까!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골고타 언덕에는 교회가 서 있다.
성묘교회다. 세계 각국에서 순례객들이 찾아온다.
그리스도교 성지 중의 성지다.
교회 안으로 들어선 순례객들은 십자가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예수가 처형을 당했다고 전해지는 자리에 세워진 십자가상이다.
실제 야트막한 언덕처럼 높다란 곳에 있었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가방에 있는 조그만 성경을 꺼내 펼쳤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던 시각은 오전 아홉 시였다.
마르코 복음서(15장 25절)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라고
정확한 시각이 기록되어 있다.
십자가 처형은 고통스럽다. 우선 손과 발에 못이 박힌다.
그런 뒤에 땅바닥에 뉘어 놓았던 십자가를 똑바로 세운다.
그 순간 사형수의 체중으로 인해 몸이 아래로 축 늘어진다.
그때 박힌 못이 손과 발의 뼈를 짓누른다. 때로는 뼈가 부러지기도 한다.
십자가형을 받는 이의 고통은 수십 배, 수백 배로 증폭된다.
그런 고통을 겪으며 일주일씩 십자가에 매달려 있기도 한다.
그렇다고 쉬이 죽지도 못한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은 날은 안식일 하루 전날이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보낸다.
안식일 당일에 십자가에 시신이 매달려 있는 것은 부정 타는 일이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가 일찍 숨을 거두도록 다리를 부러뜨리기도 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지 무려 여섯 시간이 흘렀다.
오후 세 시쯤이었다. 예수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엘로이 엘로이레마사박타니!”
예수가 아람어로 외쳤다.
성경에는 이 대목이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이는 구약의 시편 22편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예수는 시편을 줄줄 외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그 대목을 읊었을까.
어째서 절규하듯이 큰소리로 외쳤을까. 혹자는 거기서 ‘원망’을 읽는다.
하늘을 향해 예수가 원망을 토해낸 것이라 말한다.
과연 그럴까. 나는 오히려 거기서 ‘신을 품은 인간’을 본다.
그러한 ‘인간 예수’를 본다. 그런 절규는 비단 예수의 것만이 아니다.
우리도 하루에 수십 번씩 내뱉는 외침이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마더 테레사 수녀도 그랬다.
그녀가 생전에 썼던 편지에는
“주여, 당신이 버리신 저는 누구입니까?”
“당신의 사랑이었던 저는 지금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저의 신앙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의 부름에 맹종한 저는 진정 실수를 한 것일까요”라는 구절이 담겨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테레사 수녀가 신을 부정했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주여, 당신이 버리신 저는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은
신의 속성과 하나 됨을 체험한 이들이 내뱉는 고백이다.
그런 하나 됨이 지속하지 않을 때 토해내는 아쉬움이다.
뒤집어 말하면,
마더 테레사가 그만큼 신의 속성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는 방증이다.
하나 됨에서 버림받음, 다시 버림받음에서 하나 됨을 되풀이하는 수도자.
그런 이들이 쏟아내는 일종의 절규이자 찬사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런 절규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일까. 그렇진 않다.
대신 그런 절규에서 벗어나려면 깨달음이 필요하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는
예수의 메시지에 담긴 깊은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걸 통해 내가 당신 안에, 또 당신이 내 안에 이미 거하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달라진다.
그때는 굳이 하나 되는 순간을 붙들지 않아도 좋다.
원래부터 거해져 있음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은 해도 쉽진 않다.
그래서 예수가 내민 솔루션이 ‘자기 십자가’다.
나라는 에고로 인해 하느님이 내 안에 거할 수가 없으니,
자기 십자가를 통해 에고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그렇게 에고의 속성이 무너지면 신의 속성만 남을 테니 말이다.
예수의 외침을 듣고서 유대인들은 말했다.
“저것 봐! 엘리야를 부르네.”(마르코 복음서 15장 35절)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 예수에게 마시게 했다.
옆에 있던 사람은 그 순간에도 예수를 시험했다.
“가만,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주나 봅시다.”(마태오 복음서 27장 49절)
신 포도주를 마신 예수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던졌다.
지상에서 육신을 가진 예수가 던진 마지막 한 마디였다.
“다 이루어졌다.”(요한복음서 19장 30절)
이 말끝에 예수의 고개는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출처:중앙일보]백성호: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