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산책]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③
숨 잘 쉬면 자비-무상도리 따라온다
‘아나파나사티’라고 불리는 관법은 불교의 독특한 정신이 들어있고, 그 효과나 방법도 누구나 다같이 할 수 있는 뛰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관법에 대해서 불교도들은 너무도 소중히 간직해오면서 이것을 보다 세밀히 분석하여 열여섯 가지로 세분하여 철저히 실천했다. 그리하여 그것을 다시 16특승법(十六特勝法)이라고 이름하여 전해오고 있다. 오늘날 남방불교도들이 위파사나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6종으로 설한 것을 16종으로 보다 자세히 나누어 설하고, 다시 37종으로 설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바가 없고, 실제 수행에 임해서는 16특승법 또는 37도품으로 가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면 이러한 불교의 수행법의 대표가 되는 ‘아나파나사티’의 위대한 공덕을 간단히 보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사물의 근본을 알게 된다.
우리는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자연히 들어오고 나가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이것은 너무도 신비하고 너무도 오묘하며, 너무도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대생명의 뜻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숨을 쉬지 못하면 살지 못한다. 그래서 숨이 끊어지면 죽고만다. 그렇다면 숨의 출입은 깊은 철학적 종교적 뜻이 있다.
숨이 그저 물리적인 생체현상이라고 과학적으로는 말하겠지만, 과학 이상의 뜻이 있고, 과학이나 학문이나 사고를 넘어선 불가사의하고 위대한 뜻이 담겨있다.
숨이 들어오는 것을 통해서 생명이 유지되니, 입식(入息)은 삶 자체이다. 생명의 시작이요, 생명의 힘이 바로 숨이 들어오는데 있다. 그리고 숨이 나가는 것은 몸 안에 있는 나쁜 요소를 밖으로 내보내는 것 이상으로 큰 뜻이 있다. 모든 생명체의 죽음은 숨이 나가서 들어오지 않고 끊어짐과 동시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숨이 나가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죽음 자체다. 숨을 쉬고 있는 우리는 삶과 죽음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 살고 있다는 이 사실 속에는 삶과 죽음이 같이 하고 있지 않은가? 진실로 삶이란 죽음을 동반한 것이며, 죽음이란 삶을 통해서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숨이 들어올 때 내가 살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숨이 나갈 때 나는 죽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사람은 삶이 곧 죽음이요, 죽임이 곧 삶이라는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생사가 따로 없는 생사일여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정신이 집중되어 숨이 나가면 ‘숨이 나간다’고 느끼고, 숨이 들어오면 ‘숨이 들어온다’고 느끼면서, 그 숨이 또한 덧없고 실체가 없으며, 숨에 따라서 느끼는 감각적인 감수작용 또한 그것이 나를 괴롭히고, 그것은 실체가 없이 인연에 따라 있게 된 것임을 알면, 이 들고나는 숨에 집착함이 없이 고요히 숨이 끊어진 듯이 들고나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이 때에 숨의 들고나는 것에 대한 근본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어찌 숨만에 국한되랴.
둘째는 마음에 집착이 없어진다.
숨이 들어오고 또는 나가는 것에 정신을 집중하여 극치에 이르면 숨의 출입에 대한 느낌까지 없어진다. 이것이 무념무상의 상태다.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모든 감각기능이 밖으로 달려나가지 않고 안에서 고요히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뇌의 활동이나 모든 신체기능이 가장 조화롭고 안정된 상태에 있게 되므로 마음의 움직임도 고요히 정지된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거울에 그림자가 비추듯이 관조하고 있을 뿐이다.
집착이란 우리의 감각기능이 밖의 대상에 끌려서 자기자신을 잃은 상태이므로, 호흡이 있으면서도 없는 상태에서는 모든 감각기능도 밖의 대상에 끌리지 않고, 의식도 없으면서 있는 무의식의 상태에 있을 뿐이다. 이 때에는 밖의 어떤 대상에도 집착함이 없이 오직 자기자신에 안주하고 밖의 대상을 관조할 뿐이다.
마음에 집착이 없으니 밖으로부터의 자극이 없고, 마음 안에 고요히 머물고 있으니, 뜻대로 오고감에 걸림이 없다. 이것이 집착 없는 자기다.
이와같이 자기자신의 근본 상태로 돌아와서 객관세계를 보면 나의 아픔이 남의 아픔이요, 남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며, 남의 고락이 나의 고락이다. 여기에서 진실로 자비심이 있게 된다.
정태혁
동국대 명예교수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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