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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 <7> 각묵 스님 “근본적으로 같아… 서로 적극 보완을”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라는 주제로 진행된 본지의 쟁정토론은 이번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토론에는 모두 일곱분이 참㈖� 좋은 의견을 개진해 주셨습니다. 교리 문제에 대한 새로운 토론문화 정착을 위해 문제제기 해준 동국대 강사 조준호 선생(2012호. 3월9일자)을 비롯해, 좋은 원고를 보내준 선상담연구원장 인경스님(2014호. 3월16일자), 경전연구소 김재성 소장(2016호. 3월23일자), 동국대 강사 마성스님(2018호. 3월30일자), 동국대 연구교수 임승택씨(2020호. 4월6일자), 무심선원장 김태완씨(2022호. 4월13일자), 초기불전연구원 각묵스님에게 독자들과 함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직관의 간화선, 분석의 위빠사나… 귀결점은 양측 모두 ‘직관’
첫째, 간화선(看話禪)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남송 대 대혜종고 스님(1089∼1163)에 의해 주창된 수행법이다. 그러면 육조스님에서 비롯된 남종 돈오선이 왜 대해종고에 의해 간화선으로 정착이 되었는가. 학자들은 무사선, 문자선, 묵조선의 폐풍을 극복하기 위해서 간화선이 등장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① 돈오선을 잘 못 이해하여 본래성불, 본자청정, 본무생사, 즉심시불, 본무번뇌 등의 명제에 함몰되어 번뇌의 때가 새까맣게 끼어있으면서도 깨달을 것도 닦을 것도 본래 없다고 자기가 이미 깨달은 양 착각하여 날뛰는 악성적인 무사선(無事禪)과 ② 미혹인지 깨달음인지 분간도 못하면서도 묵묵히 근본을 반조하여 본래부처임을 드러낸다며 앉아있는 묵조선(默照禪)과 ③ 불입문자를 표방하면서도 온갖 훈고학적 문자놀음을 일삼는 문자선(文字禪)의 폐풍을 극복하고 오직 실참실구로 본자청정을 구현하기 위해 간화선은 출현했다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한편 법의 무상.고.무아를 여실지견하는 것을 반야(지혜)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위빠사나는 무상.고.무아라는 제법의 실상을 드러내는 지혜(般若) 그 자체라고 주석서는 말한다. 그러므로 위빠사나는 바로 반야를 뜻하지 선정이나 삼매가 아니다.
〈육조단경〉의 ‘유론견성 불론선정해탈(有論見性 不論禪定解脫)’은 중국 남종선의 전통이 견성이라는 지혜를 실현하는 체계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으며 단경이나 서장 등의 어록에서도 이는 자명하다.
필자도 선정을 통해서 이 둘의 같은 점을 찾으려는 시도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선정은 화두참구와 위빠사나를 제대로 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긴 하겠지만 선정만으로는 견성이나 해탈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초기불교와 남.북의 양 전통에서 분명하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궁극의 자아(아뜨만)나 브라흐마를 설정하고 거기에 몰입하고 그것과 합일하려는 초월적인 접근을 하는 힌두수행과는 출발부터 다르다. 일체의 전제를 부정하는 근원적 의문과 의정을 출발점으로 삼는 간화선의 입장은 직관적(intuitive)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위빠사나는 분석을 철저히 하고 그 분석의 바탕위에 물.심의 제법이 무상.고.무아임을 직관하는 분석을 통한 직관을 중시한다. 물론 이런 삼특상(三特相)을 꿰뚫어 아는 최후의 경지는 직관적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결국 깨달음의 시점에는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공히 무상이나 무아인 법의 성품을 통찰하는 직관이라는 같은 귀결점을 가진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에서 온(蘊).처(處).계(界)로 대표되는 제법을 강조하는 궁극적 목적은 개념적 존재를 해체하면 드러나는 이러한 모든 법들의 무상.고.무아를 철견(徹見)하려는 데 있지, 인(人)으로 대표되는 개념적 존재의 무상.고.무아를 설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인무아니 법무아니 아공법유니 하는 주장명제들은 애초 아비담마의 정교한 교학체계를 부정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대승에서 만들어낸 자의적인 슬로건일 뿐이다. 이것은 ‘내 일기장에 너는 나쁜 놈이라고 적혀 있으므로 너는 나쁜 놈’이라는 억지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
염화두를 10년 들기보다는 몇 순간일지라도 앞뒤가 끊어진(前後際斷) 의정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법은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바로 지금 여기 이 찰나이다. 찰나란 불가득이고 언어의 길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찰나라고 언설로 표현하는 순간에 이미 수천의 심찰나가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찰나를 직면하면 마음의 길이 끊어지고 언어의 길이 끊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전후제단의 간화의 입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수행에 제대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시대에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을 통해 이미 초기불교에서 선종의 근원을 찾지 않으셨던가. 이런 의미에서 조계종 기본선원 교과과정에 ‘근본불교와 선’을 포함시킨 구참 스님들의 혜안에 감사드린다.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라는 물음은 이 둘의 차이점은 분명 인정해야하겠지만 불교수행법인 이상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로 귀결될 수밖에 없고, 그 ‘다르지 않음’은 부처님 원음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은 문제제기를 해준 조준호님께 인사드린다. 각묵/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출처 : 불교신문 2024호/ 4월20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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