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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4. 13(목)
4월 첫 순례다. 오늘 찾을 곳은 세 곳. 울산군 언양읍에 있는 언양 성당, 그리고 인근 울주군 상북면에 있는 살티 공소와 죽림굴이다. 비교적 경주에서 가까운 거리라 부담이 적지만 죽림굴은 산길 3.4km, 왕복 6.8km를 걸어야 하기에 국내 성지 중 힘이 많이 드는 곳의 하나이기도 하다. 참여 일행은 나 이외에 장 라파엘, 이 에릭, 문 베드로, 이 안토니오. 5명이라 승용차 한 대로는 좀 불편하지만 가까운 거리라 그리 문제되지는 않는다. 8시 30분 성당에 모여 마당의 성모님께 〈순례를 떠나면서 바치는 기도〉를 합송하고 8시 40분 출발. 운전은 이 에릭 형제님. 근간 건강이 좋지 못하여 지난번 3차 때는 참여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동참하게 되어 운전까지 맡아주어 고마운 마음이다. 고속도로 아닌 국도를 택하여 약 50분 만에 성당 도착.
언양 성당 -영남 지역 성소의 못자리 |
언양 성당은 부산교구 소속 본당으로 경남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구교동 1길 11(송대리 422)에 소재한다. 1926년 12월 5일 부산(현 범일) 본당으로부터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그리스도 왕이시다.
초기 교우촌 시대
영남알프스의 간월산, 신불산 등 험준한 산세의 울주군 상북면, 그리고 두서면, 두동면에는 초기부터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다. 그 거점이 언양이라고 볼 수 있다.
성당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천주교인은 1790년 서울로 올라가 세례를 받은 해주 오씨 문중의 오한우(베드로)와 그의 사촌 처남인 경주 김씨 김교희(일명 재권, 프란치스코)다. 이 중 오한우는 신유박해(1801) 관헌에게 체포되어 백지사(白紙死)를 당했다고 하며, 김교희는 일가족을 이끌고 내간월산 불당골((佛堂谷, 현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로 피신하였는데 이로 인해 언양 지역의 첫 신앙공동체(뒷날 간월공소)가 이루어진다.
이로 볼 때 언양 지역은 경남 부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가 전래된 곳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교우촌이 형성된 때는 1815년 을해 박해, 1939년 기해 박해, 1845년 병오 박해를 거치면서 타 지역 신자가 모여들고 1850년대 선교사들과 사제들이 본격적으로 방문했을 때였다고 볼 수 있다.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와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주교가 방문했던 1850년대 말에는 언양 일대가 신자들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 변모되었다. 간월리 교우촌에 이어 강이문(姜以文)이라는 신자는 유배지 탑곡(울주군 두서면 내와리)에서 신자촌을 형성하고, 그의 영향으로 신자가 된 예씨(芮氏) 청년은 상선필(예씨네골,두서면 인보리)에 신자촌을 만든다. 그밖에 죽림(대재, 죽령), 살티, 진목정 등지에 공소 수준의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공소 시대
1870년대까지 이어지던 박해가 1880년대가 들어서자 신앙의 자유를 되찾게 되어 박해 받던 교우촌이 일제히 재건되기 시작했다. 1882년 대구(현 계산동) 본당의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경상도 지역 담당으로 임명되어 1883년에 살티 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 때의 신자 수는 38명이었다고 한다. 언양 공소는 이듬해인 1884년에 설립되었다.
1890년 초 조조(M. Jozeau, 趙得夏) 신부가 부산 본당(정식 명칭은 초량)을 설립하게 되면서 그 본당에 소속이 되었다. 그 후 1898년 1월경 명례 임시 본당(현 밀양 본당)으로 잠시 소속되었다가 1901년에 부산 본당(교구) 관할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1904년 6대 주임 르 장드르(L. Le Gendre, 崔昌根) 신부 때에는 살티 공소, 언양 공소 외에 순정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이 세 공소의 신자 수는 153명에 달하였다.
본당의 설립과 발전
지역 신자들의 본당 설립의 준비는 이미 1880년대 말에 있어 왔다. 그 결과 박우양(朴遇陽, 가브리엘), 김문익(金文益, 안드레아)을 비롯한 이 지역 신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1926년 12월5일 언양 본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보드뱅(E. Beaudevin, 丁道平) 신부가 부임하였다.
본당에 부임한 보드뱅 신부는 부임 즉시 성당 및 사제관 신축을 계획하였다. 1929년 봄 공사에 착수하여 1936년 10월 25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고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성당 신축은 보드뱅 신부가 직접 설계를 맡고, 명동 성당을 지었던 중국인 기술자들과 6년에 걸친 신자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건립되었다. 성당 뒷산에서 채취한 화강암으로 벽을 구성하여 고딕식 형태로 지었는데 부산교구의 유일한 고딕식 석조 건물이라는 역사성을 지녔다. 그리하여 성당과 사제관(지금의 신앙유물전시관)은 2004년 9월 4일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발전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40. 10. 성가대 조직
1952. 8. 성모회 조직
1954. 1. ‘소화 유치원’을 개원
1956. 4. 울산(현 복산) 본당 분리 356명의 교적을 이관
1957. 강당 신축
1962. 성모상 건립. 7월, 삼정 · 유촌 · 중리 · 소호 공소 강당 신축.
1974. 8. ‘안나 유치원’(옛 소화 유치원) 건물을 완공
1976. 11. 구 수녀원을 완공
1979. 11. 세 명의 동정녀가 기증한 부지에 기증자의 이름을 따 ‘안나 데레사 회관’ 건립
1981.5. 신용 협동조합 창립
1986.11. 죽림굴 성지 발견
1989. 7. 새 사제관 건립
1990. 12. 구사제관에 ‘신앙유물 전시관’ 개관
요컨대 언양 지역은 영남지방의 신앙의 온상이자 사제 35명, 수녀 33명과 많은 수도자를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이며 지금도 순교자 후손들이 기도와 희생으로 본당 공동체를 떠받치고 있다.
오늘의 성당
네비게이션을 따라 성당 정문을 통하지 않고 성당 마당 옆으로 들어갔다. 그러다보니 가장 먼저 관리실 맞은편 마당 오른쪽에는 성모동굴과 오상문 순교자 묘소로 가는 순례길 입구가 있고 조금 안쪽으로는 아름다운 정원 돌담 방안에 성모님이 반겨주신다. 멀리 마당 정면에는 교육관 큰 건물이 보이고 그 오른쪽 옆에는 구수녀원과 현 사제관 건물이 있고 그 앞 언덕에는 벚나무 고목이 푸른 잎을 드리우고 있다. 고딕식 첨탑이 있는 성전은 마당 왼쪽에 솟아 있고 그 옆에 바로 유물전시관(구 사제관)이 있다. 그 사이에 초대 주임 보드뱅 정도평(丁道平) 신부의 흉상과 강성산 신부의 묘비가 있고 교육관 아래에 수녀원이 있다.
교육관 오른쪽에는 1층 지붕에 2층방이 돌출된 특이한 건물이 있는데 원래 이 건물은 예수성심전교수녀회 수련장이었다. 예수성심전교수녀회는 독일 뮌스터에 본부가 있는 국제수녀회로 1965년 당시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에 의해 부산에 왔고, 1974년 언양 성당에 정식으로 파견되어 성당 사목을 도왔다. 1976년에 이 건물을 짓고 줄곧 운영되다가 1983년 부산 본원으로 옮겨가고 건물은 남았다. 남은 건물은 수녀원으로 활용되다가 새 수녀원 건물을 짓자 현재는 역사 자료실로 활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독일식 수녀원의 구조와 생활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2층 경당에는 소박한 스테인드 글라스도 남아 있어 건축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있다.
성전 - 부산교구 유일의 고딕식 석조 건물
성전 입구 머릿돌에는 이 성전을 지은 사람과 연대(年代), 그리고 “구세주 그리스도 왕이시여 친미와 영광과 흠숭함이 네게 있어지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1926년 본당 신부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대구교구의 드망즈 안 주교를 방문한 당시 언양 천주공교협회 초대 회장은 거기서 보드뱅 신부(한국명 정도평 1897-1976)를 보고 반하여 “저기 저 달덩이 같이 훤하게 잘생긴 신부님을 우리 본당에 모셨으면 좋겠습니다.”하고 간청했는데 그 소원이 받아들여져 1927년 5월, 실제 보드뱅 신부를 맞이하게 되었다. 보드뱅 신부는 직접 성전 건축 설계를 하고 성전 건물을 완공하자 당시 울산 사람들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이곳까지 걸어와서 뾰족탑 솟은 돌집을 구경했다고 한다.
성전 옆에는 지금은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구 사제관이 있고 성전과 구 사제관사이에 초대 주임신부 보드뱅의 흉상이 있다.
부근에 까맣게 변한 강성삼 신부 묘비가 있다. 안내판이 없으면 지나칠 정도로 작다.
강성삼 신부님(라우렌시오 1866-1903)은 1896년 서울 약현 성당에서 강도영 신부와 함께 우리나라 사람으로 세 번째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첫째다. 신부님은 1898년 대구, 부산, 가실(왜관)에 이어 경상도에서 네 번째 본당인 경남 밀양 명례리에 있는 명례본당에 부임함으로 부산경남지역의 첫 한국인 사제로 기록되었다.
명례본당에 부임 이후 신부님은 본당사목과 전교활동 뿐만 아니라 낙동강 제방을 쌓는 사업계획안을 입안, 농토를 늘이는데도 관심을 가져 지역사회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신부님의 불꽃같은 삶은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 재학 당시 얻은 풍토병의 후유증으로 인해 결국 1903년 9월 19일 38살의 꽃다운 나이로 명례본당에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언양 성당 표지석이 있는 정문쪽에서 올라오면 왼편 언덕, 신앙유물관 뒤편 언덕에 옛 종탑과 성 요셉상이 반기고 계시고 조금 더 오르다 보면 예수성심상이 내방객을 환영하고 서 계신다.
신앙유물 전시관 - 천주교 200년 유물의 보고
이 건물은 성당 건립 당시는 사제관이었다. 본당과 같이 건축하면서 같은 형태로 지은 석조 슬레이트 건물이며 경사지에 지어져 반지하층을 가지게 되었고, 그 곳은 현재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지붕에는 3개의 돌출 창과 굴뚝이 있다. 출입은 뒤쪽으로부터 앞으로 돌아서 진입하게 되어 있으며 내부는 큰 보수 없이 건축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당시에는 지상 1층은 주방, 2층은 신부님의 개인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그 당시에는 예법이 엄격해서 식복사와 직접 만나는 것을 피하여, 물건이나 식사의 연결은 필요할 때마다 작은 종을 울려 의사표시를 하고 도르래를 움직여 1층과 2층간에 물건이 전달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언양 지역의 200주년 천주교 신앙 역사를 보여주는 신앙유물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건물 안팎이 건립 당시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서 종교적,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큰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전시관에는 신앙유물과 민속유물 등 총 700여 점이 전시되어 있고, 신앙유물은 교황청에 등록된 귀중한 자료들이다.
1층에는 신앙유물들이다. 특히 중요한 유물로는 언양 천주공교협회 등 본당 단체들이 남긴 기록 장부들, 박해시기의 성모상, 초기 천주교 포교 서적, 교리서, 성가책, 미사와 전례에 사용했던 제의와 제구, 독특한 형식의 십자가 등이 있다.
2층에는 민속유물로 선조들이 생활필수품으로 사용했던 물레, 절구통, 구유, 은비녀 등의 민속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가장 먼저 주목을 끄는 것은 두 점의 성모상인데 하나는 천상의 모후상 다른 하나는 은혜의 모후상이다. 둘 다 언양 성당 인근 순정 공소에서 나왔다. 순정 공소가 패쇄 되기 전이므로 1980년대 초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박해시대에 교우들은 이 성물을 보존하려 얼마나 노력했을까? 여러 차례 땅속에 묻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문화재 불상에 비유하면 그 가치가 보물급이 아닐까 한다.
성광(聖光)은 성체강복(聖體降福)이나 성체현시(聖體顯示), 성체행렬 때 성체를 신자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사용되는 성구(聖具)이다.
성작 수건은 미사의 영성체 후 성작과 사제의 입과 손을 닦은 작은 수건인데 아마포로 만들었다.
1900년에 사제품을 받은 김문옥 신부,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둘째 줄 첫째 인물), 초대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둘째 줄 둘째 인물), 김동언 김동철 형제 신부, 안달원 신부, 이종창 신부, 박문선 박주선 형제 신부, 김두완 김두윤 형제 신부 등의 사진이 서품 순서대로 나란히 걸려있다. 모두 언양 지역에서 배출한 사제들이다
1986년 죽림굴을 탐사할 때 구유조각과 나무 지팡이 같은 것이 나왔다. 교우들이 몇 달 간 합숙하면서 연기를 내어 밥을 짓지 못하고 이 구유에 생살을 불려 먹고 버티었다. 물론 외국 선교사나 최양업 신부도 같은 생활을 했다.
“성찬 기도 중 성변화된 성혈에 벌레나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성작을 덮는 덮개”라고 설명되어 있다. 성체의 신비를 확신하는 듯한 표현이다.
자색 제의는 죄에 대한 통회와 보속의 표현으로 구세주 대림시기와 사순시기에 사용한다. 흑색 제의는 슬픔과 죽음을 상징하며 성금요일과 장례미사에 사용한다. 녹색은 희열과 희망을 표현하므로 예수 공현 후 주일부터 사순절까지, 성신강림 후 주일부터 대림시기 전까지 연중 주일에 사용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2층은 민속품 전시실이다. 우리가 아렸을 때 익히 보아오던 물건들이다.
전시실을 관람하고 밖으로 나와 순교자 오상선 묘를 향하는데 순례길 안내가 있다.
순례길은 3코스로 안내되어 있다.
제1코스 인보 성당-하선필 공소-상선필 공소-탑곡 공소(8.04km)
제2코스 언양 성당-길천 공소-순정 공소-살티 공소-살티 순교자묘소(12.11km)
제3코스 배내골(이천리)-죽림굴(3..22km)
오늘 우리는 언양 성당과 이어서 살티 공소를 순례하고 오후에는 제3코스를 택하여 죽림굴까지 도보 순례를 한다.
순교자 오상선 묘
오상선은 병인박해 순교자이며 이 지역 가장 이른 시기의 신자의 한 사람인 오한우의 증손자이다. 묘소 가는 길은 대형 십자가가 서 있는 아래에 입구가 있다. 이따끔 짝을 지어 운동 겸 왕복 걷기 하는 분들도 볼 수 있다. 춥도 덥지도 않은 시기 그야말로 걷기에는 안성맞춤의 날씨이다. 딱히 성지가 아니더라도 저절로 세속의 번뇌를 날려버리고 복잡한 감정을 순화하여 정신적 힐링이 되는 것 같다. 약 400-500m 걸었을까 하나의 묘소가 나타난다.
오상선의 증조부 오한우(吳漢佑)[1760~1801]는 1760년(영조 36)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어음리에서 출생하였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때 밀양으로 귀양 온 김범우(金範禹)[1751~1786, 최초의 천주교 희생자]를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서울을 왕래하며 오몽상, 권일신(權日身), 정약용(丁若鏞) 등과 교분을 쌓고 《천주실의(天主實義)》와 교리 서적을 통해 신앙을 키웠다. 1790년 사촌 매제(妹弟)인 김교희(金喬喜 프란치스코)와 함께 서울에서 세례 성사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울산 지역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 활동하다가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백지사(白紙死)에 의해 죽었다고 전해진다. 오한우의 손자 오치문과 증손자 오상선(吳象善)(1840~1867)도 천주교를 받아들여 순교했다.
묘비에는 오성선 순교자는 해주오씨 문경공파로 향리를 지내던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선대인 오한우가 1790년 경 서울을 내왕하면서 받아들인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그는 병인박해 중 언양 옥에서 백지사(白紙死)를 당하였으며 어음리 고무재에 있던 묘를 1991년 5월 15일에 후손과 교우들이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새겨져 있다. 백지사란 손을 묶고 얼굴에 물 묻힌 백지를 붙여 질식사시키는 야만적인 형벌이다.
여기서 안내 십자가의 길 14처 표지석을 따라 약 700m화장산(花藏山) 정상 부근에 오르면 언양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성모동굴이 있다. 시간 관계로 오르지 못하고 사진 자료 하나를 올린다.
성모동굴 조성 사업은 성당 개설 초기부터 의견이 있어왔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언양 성당이 순례 성당으로 지정되어 서정웅 지도 신부의 노력으로 각 공소 보수사업, 죽림굴 환경 미화 사업, 성모 동굴 조성사업 등에 전 교우들이 참가하여 과감하게 실천에 옮겨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살티 공소 - 박해 이후 공소 시대를 처음 열다 |
언양 성당 순례를 끝내니 10시 40분. 살티 공소까지는 12km, 20여분 소요. 석남사 입구 가까운 곳에 있다. 주소는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살티길 11
살티는 경상북도 청도군, 경상남도 밀양시, 울산시 울주군의 경계 지점에 있는 가지산(1,241m)의 중턱에 위치하며 경주시 산내면과도 가까운 곳이다. 원래 이곳은 예로부터 화살을 만들었던 곳이라 해서 살티, 한자어로 시현(矢峴)으로도 불리었다. 그러다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간월과 언양 지방에 살던 신자들이 호랑이 등 맹수가 많아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워 숨어 지내기 좋다는 이유로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살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곳에 오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터’이라서 살틔 또는 살티라고 했다는 설이 신앙적으로는 더 설득력이 있다. 실제 관헌들이 교우촌을 찾아 석남사 입구까지 왔다가 이곳은 보지 못하고 와항을 거쳐 경주로 가곤 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대원군이 실각하여(1873년) 박해가 사라지고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1883년 살티 공소는 이 지역 첫 공소로 세워지게 되었다. 이는 언양 공소가 생기기 1년 전이었다.
당시 이곳에 정착한 교우 집안들로서는 간월 공소에서 살았던 김영제 베드로의 집안과 서울에서 양반으로 살던 남의선 안드레아 가정, 최재선 주교의 주부인 최일문 베드로 가정, 1884년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유학 가서 신부가 된 김문옥(金紋玉, 1873~1941, 요셉) 신부의 조부 김경두 가정 등이다.
후손들에 의해 순교자들의 신앙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살티는 최재선 주교, 김문옥, 이종창, 김윤근 신부 등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성소(聖召)의 온상지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살티는 1893년경만 하더라도 농사를 짓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숯을 굽고 살았다. 이곳의 신앙 공동체는 처음 병인박해 때 안살티에 있었으나 그후 부근의 사기점으로 옮겼으며, 다시 박해가 끝날 무렵에 현재의 살티 공소로 옮겨왔었다. 현재의 공소건물은 1982년 교구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건립,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많은 신자들이 농촌을 버리고 이사를 갔지만 순교자의 후손을 비롯하여 대대로 내려오는 신자16세대 60여명이 이곳 살티를 지키고 있다.
공소건물은 1980년대에 다시 지은 건물이라 예스러움은 느낄 수 없어 아쉽지만 흰색으로 말끔히 단장을 하여 정결한 느낌을 준다. 공소 입구에는 오른쪽에 붉은색 글씨로 天主敎堂이라고 새긴 돌이 서있고 왼쪽에는 역시 붉은색 잔글씨가 빽빽한 돌비석이 서있다.
돌비석에는 살티 마을이 형성된 유래가 설명되어 있는데 읽어나가다 보니 끔찍한 내용이 있다. 호랑이에게 피해를 당한 사례를 들었는데, 이곳에서 출행하여 사제가 된 김문옥 요셉 신부의 아버지가 대구로 판공성사를 보러 가다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어 머리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머리를 수습하여 묻은 묘가 공소 남쪽 300m 지점에 있다고 했다. 지역민들은 이 묘를 ‘범찌꺼기묘’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로 볼 때 맹수가 득실거려서 오히려 박해로부터 자유로웠다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말해주는 근거가 된다.
성전 내부는 오히려 허전한 느낌을 준다. 제대 벽면에 예수성심상 십자가 좌우에 성모님과 요셉성인이 공중에 떠 있듯이 붙어 있고 그 앞에 제대가 있다. 그냥 평범한 유리창 위에 14처가 그림 액자형으로 배치되었다.
성전 출입문 안쪽 벽에는 세 천사의 그림이 있다. 이는 구약성서(창세기 1, 18)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느님의 모습이다. 곧 세 천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나타내는 삼위일체 아이콘을 그린 그림이다. 천사 위쪽에는 하느님의 집과 나무와 산이 있다.
이 성화는 15세기에 러시아의 화가인 안드레이 루블로프 Andrei Rublev 가 그린 것에서 시작되었다. 정교회적인 기풍이 물씬 풍긴다.
다시 밖을 나와 마을 풍경을 보니 당시 촌락의 모습은 볼 수 없고 드문드문 개량 주택들이 차지하고 있다. 먼 산에는 꼭대기 부분 이외에는 모두 푸른색에 점령이 되어 있다. 김영제 베드로와 김 아가다 남매의 묘소(살티 성지)를 찾아나섰다.
살티 성지 - 순교자 남매가 잠들다
원래 이곳에는 김영제 베드로의 묘가 버려진 채 있었는데 1981년 11월 언양 본당 신자들이 말끔하게 단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묘지 주변은 후손들이 1984년과 그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중장비를 동원해 정지 작업을 해 둔 채 보존하여 오다가 1994년 4월 2일 부산 교회사 연구소의 주관으로 서북쪽으로 약 18미터 지점인 현재의 위치(울주군 상북면 덕현 산 219-1번지)로 이장했다. 그리고 순교자의 5대손인 김윤근 베드로 신부가 울산 본당 신자들의 후원금을 모아 분묘를 단장하고 순교비를 건립하는 동시에 십자가, 제대, 예수 성심상 그리고 성모상 및 성지 표지석을 세워 묘역을 다듬었다. 1994. 9.30 부산교구장 이갑수(가브리엘) 주교 축성했다.
그후 2008년 간월리에 있는 김영제 베드로의 누이동생 김 아가다의 묘를 오빠 묘 옆에 옮겼다.
살티김영제 묘지석 순교성지의 주인공이라라고 할 수 있는 김영제 베드로와 김 아가다의 사적은 묘소 앞 묘지석을 옮겨 적음으로 대신한다.
순교자 김영제(김영제) 베드로(1827. 6.17 -1876.1.24.)
김영제 베드로는 경주김씨 태사공파로 언양에 정착한 근룡의 11세손이다. 그는 1827년 언양의 첫 신자인 조부 김교희(프란치스코)가 이룬 간월마을에서 상은(야고보)과 경주 최씨(마리아)의 2남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교난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뒤 바로 5년 동안 피난을 다녀야 했다. 1932년 간월마을로 다시 돌아와 불당골(간월마을)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기도와 교리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며 한의학에도 열중하였다. 1856년 월성 이씨(루시아)와 혼인하여 종백(바오로) 장백(이냐시오) 두 아들을 두었다. 최양업 신부가 사목하던 1858년 간월공소를 크게 지었으나, 1860년 여름 경신교난에 의하여 공소는 불태워지고 부친을 비롯한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수개월 뒤 교난이 그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가족은 흩어져 버렸고 함께 잡혀간 누이동생 아다가(첫 동정녀)는 먼저 풀려나 최양업 신부가 피신한 죽림굴에서 열병으로 죽었다.
1868년 7월 무진박해를 맞아 다시 체포되었고 이때 많은 신자들이 잡혀가고 대재공소는 해체되었다. 경주 감옥에서 허인백 등 울산지역 순교자 세 사람을 만나 순교를 결의했으나 3인은 울산으로 이송되어 순교했고 그는 중죄인으로 판결 받아 서울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9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배교를 강요 받았으며 선교사와 교인들의 소재지를 추궁 당했다. 이때 받았던 심한 고문에 의하여 종지뼈가 떨어져 나간 불구의 몸이 되었다.
1869년 봄 국가의 경사를 맞이하여 특별사면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후 의령 남씨등이 피신한 안살티에 정착하면서 살티 공소를 설립(1869)하여 회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고문으로 인한 장독이 악화되어 겨울에도 피고름이 흘러 한쪽 바지를 걷어 올린 채 고통 중에 살다가 1876년 1월 24일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죽기 전에 장독이 온 몸에 퍼졌지만 얼굴은 평안하고 기쁨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한다. 이른바 장하순교(杖下殉敎)를 한 것이다.
그는 양반 중심인 조선사회에서 좋은 신분이었지만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위대한 순교자가 되었기에 그의 죽음은 더욱 값진 것이라 하겠다. 김영제가 이곳 외롭고 깊은 산속에서 겪은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의 신앙을 기리기 위하여 이 비석을 새운다.
동정녀 김 아가다(1836-1860)
김 아가다는 김영제(베드로)의 누이동생으로 1936년 간월마을에서 상은(야고보)과 경주 최씨(마리아)의 2남2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최양업 신부의 열아홉 번째 편지와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아가다는 24세의 동정녀로 교리에 밝고 신앙심이 특출하여 모든 교우들 중에 뛰어나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왔다고 한다. 아가다는 간월마을에 살면서 이웃의 두 처녀를 지도하여 교리를 가르쳐 왔다.
그가 하느님을 위해 순교하기를 원하던 중 경신박해(1860)가 일어나 아버지와 오빠가 체포될 때에도 같이 감옥에 끌려가기를 자청하여 포졸들 주변을 맴돌면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결국 다른 교우들의 만류로 이웃집으로 피신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지도하던 처녀들과 함께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포졸들이 그들을 관가로 데려가지 않고 농락하려 하자 포졸들에게 놓아달라고 애원하여 무사히 풀려났다.
아버지와 오빠가 박해로 감옥에 갇혀 있었기에 의지할 데가 없어진 그는 숱한 위험을 겪으며 이리저리 헤매 다니다가 신자들이 은신해 있던 죽림굴로 갔다. 그는 사목방문차 들렀다가 박해가 극심해져 죽림굴에 3개월여 머물게 된 최양업 신부님을 도우며 살았는데 그 동안 먹을 것이 떨어지면 신부님이 손수 만드신 짚신을 언양 등지에 나가 팔아서 식량을 마련하기도 하고 때로는 등억, 화천 등 가까운 마을에 나가 구결도 하면서 외부와 소식을 주고받는 역할도 하였다.
어느 때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죽림굴로 돌아오는데 산기슭 입구에서부터 등불이 나타나 길을 인도하여 무사히 돌아온 기이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아가다는 이러한 고초 속에서 생명을 불태우며 아름다운 신심을 이루던 것과는 반대로 육체는 나날이 쇠약해졌다.
그는 끝내 심한 영양실조와 열병으로 병석에 누워 최양업 신부의 도움을 받으며 죽림굴에서 임종을 맞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께 순명하는 태도로 병자성사를 지극히 평안하고 행복하게 받아 임종을 지키던 여러 교우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아가다는 임종경의 마지막기도문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숨을 거두었다. 오직 주님을 위해 순교하기를 바라며 자신의 전부를 오롯이 봉헌한 동정녀 아가다의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을 기리며 이 비석을 세운다.
김영제 김아가다 묘역 오른쪽에는 가족 묘원이 있다. 표지석을 보면 경주 김씨 태사공 24세(상촌공 16세, 입향조 근룡 9세)손 교희(일명 재권, 프란치스코)의 후손 가족묘원이라고 안내되어 있다. 김교희는 이 지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다.
이 지역 출신인 최재선(崔在善1912~2008, 요한) 주교는 초대 부산교구장으로 1932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 중등과·철학과를 거쳐 1938년 6월 11일 신학과 졸업과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뒤 전북 수류 본당 주임 신부를 비롯 여러 본당을 거쳐, 1957년 부산교구가 대구교구로부터 분할, 창설되자 초대 부산교구장에 임명되어 이해 5월 30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그 뒤 1973년 교구장직을 사임할 때까지 15년 동안 초대 부산교구장으로서 부산교구의 교세 신장에 주력, 36개의 성당을 신축하고 부산교구 발전의 초석을 다져놓았다.
그럭저럭 12시가 다 됐다. 일단 점심은 오후 일정 목적지인 죽림굴 가까이 가기로 하고 언양성당을 떠날 때 성당 사무실에서 추천해준 교우의 식당을 이용하기로 했다.
언양 하면 ‘언양 불고기’가 유명하지만 한 달 전 병영성지 왔을 때 먹었고 무엇보다 다시 언양 읍내에 들어가서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없어서다.
살티를 떠나면서 이 지역을 두고 쓴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숨어서 살 만한 터' 였나요
석남사 물소리 넘어오는 곳 살티
햇살은 아침 안개들을 잘게 부수고
바람소리 드맑아
눈물 아리게 피어납니다
참으로 멀리에서
놀 안고 돌아오는 흰 구름들은
죽어서 산 이의 미소로 나를 깨웁니다
해야 할 사랑 나의 꿈은 아득한데
언제 쯤 나의 서툰 노래에도
물소리 푸르게 묻어날까요
목숨 아슬히 밝히는 별빛 어릴까요
절망이나 설움도 알고 보면
사랑을 덮고 있는 시린 바람입니까
내 작은 가슴 위에도
눈물 범벅으로 무지개 뜨는 날 있기를
해야 할 사랑 나의 꿈은 -살티에서 / 김영수
상호도 아름다운 선혜미가(울주군 상북면 상북로)에서 친철한 주인이 해주는 돌솥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반찬 솜씨가 있다면서 일행 중에는 따로 언근 졸임 등을 포장 구입하기도 했다. 좀 휴식을 취한 뒤 죽림굴로 향했다. 네비게이션에 차가 들어갈 수 있는 마지막 주차장인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배내로(이천리) 1245번지를 찍었다. 도착한 곳은 사설 주차장.
죽림굴 - 박해시대 한국의 카타콤바 |
죽림굴의 위치는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배내로(이천리) 산2번지. 왕방골 꼭대기 간월재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 동굴인데 천주교 박해시대의 피난처이다.
왕방골은 예전부터 철을 채굴하여 울산으로 운반한 철의 이동로 였다고 하는데 철을 빼낸 쇠부리터와 숯가마터가 상당수 있었으며 그 흔적이 현재도 여러 곳에 남아있다고 한다. 배내골에서 간월재(왕방재)를 넘어가는 임도가 일제 시대에 개설되었으며 한국전쟁 후에는 빨치산이 저항했던 곳이라는 설도 잇다.
천주교 신앙 성지 죽림굴은 일명 대재 공소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공소라기 보다는 이 일대 움막 신자촌 신자들의 일시적 은신처 였다. 폭 7m, 높이 1.2m 규모로 그리 넓지는 않으나 산죽(山竹)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굴속에 들어가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아 피난하기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이 죽림굴이 천주교도들의 피난처가 된 것은 기해박해(1839년) 이후였다. 당시 충청도 일원과 영남 각처에서 피난 온 교우들과, 먼저 형성된 간월 공소의 교우들이 보다 안전한 곳을 찾다가 이곳에서 정착한 것으로 짐작된다. 곧 이 부근에서 거주지를 마련하여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다가 간월재(왕방재) 넘어 간월 마을 쪽에서 포졸들의 움직임이 보이면 100여명의 신자들은 한꺼번에 넓은 굴속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곤 했던 것이다. 이는 마치 기독교 초기 박해시대 로마의 지하 교회인 카타콤베(Catacombae)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840년부터 1860년 사이에는 다블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 사목을 담당하고 방문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였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경신박해(1860년) 때 이곳에서 약 3개월간 은신하며 교우들과 함께 생쌀을 불려 먹으며 박해를 피했고, 미사를 집전하며 프랑스 선교사에게 보낸 그의 열 아홉 번째 마지막 편지(1860년 9월 3일자)을 썼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곳도 안전하지 못했으니 1860년 경신박해 때 이 지방에서 교우 20여 명이 체포되었고, 뒤이은 병인박해(1866년)의 여파로 1868년에 교우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100여 명이 넘었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대재 공소는 폐쇄되고 말았다.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울산 병영 장대에서 순교하고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대재 공소 회장 이양등 베드로와 허인백 야고보, 그리고 김종륜 루카도 한때 이곳에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죽림굴과 관련된 순교자 중에는 24세의 나이로 순교한 김 아가타가 있다. 그녀는 부산 지방의 첫 신자로 기록되고 있는 김교희 프란치스코(일명 재권, 1775-1834년)의 손녀이자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장하치명’(杖下致命)한 김영제 베드로의 누이동생이기도 하다.
그녀는 경신박해 때 아버지 김상은 야고보와 오빠 김영제 베드로가 체포되자 그 뒤를 따르고자 김 아가타는 17세, 18세의 다른 두 처녀와 함께 자진해서 잡혀가기를 청했다. 압송되다가 이들을 능욕하려드는 포졸들을 피해 간신히 도망친 김 아가타는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을 알고 방황하다가 마침내 최양업 신부가 숨어 있던 동굴, 즉 죽림굴로 찾아 들었다. 극심한 고생으로 인해 탈진한 그녀는 죽림굴에 도착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병석에 누웠다. 그녀는 3개월간 이곳에 머물며 전교에 여념이 없던 최양업 신부에 의해 임종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24세를 일기로 최양업 신부의 임종경을 들으며 숨을 거둔 김 아가타의 유해는 간월 공소 뒷산에 안치되었다. 하지만 간월 공소는 1860년 경신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2008년 3월 4일 부산교구는 간월에 있던 김 아가타의 묘를 살티에 있는 오빠 김영제 베드로의 묘 옆으로 이장했다.
1986년 10월 29일, 당시 언양 성당의 김영곤 신부와 평신도 11명이 죽림굴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그 해 11월 9일 평신도 4명이 재시도하여 대나무와 풀로 뒤덮인 굴을 발견하였다. 당시 굴 안에서 구유조각과 나무지팡이 등이 발견되었고, 지금은 언양 성당 신앙유물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언양 성당 신앙유물 전시관 참조) 1996년 2월에는 죽림굴 주변을 정리하면서 안내석을 새로 세우고 입구에 계단도 만들었다.
사설 주차장에 도착하여 주차를 하고 (주차료 5,000원) 길 건너편 임도를 오르기 위해 입구에 도착하니 안내 표지판이 나타난다. 우리가 오르는 이 길은 언양 성당에서 순례길 3가지 중에 셋째에 해당한다. 배내골에서 죽림굴까자 3,22km라고 안내되어 있다.
산길따라 오르면 군데군데 통행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어 아예 차량을 봉쇄하고 있다. 봄의 산색을 즐기면서 오른다고 하지만 막상 오르막에는 숨이 가쁘다. 거기다 묵주기도를 일행과 번갈아 염송하다보니 숨이 차서 겨우 ‘빛의 신비 5단’을 겨우 끝내고 잠자코 오르기만 하였다. 약 90분을 오르니 죽림굴 표지석이 나타났다. 이제 다 오른 것이다.
겉으로 보아서는입구가 매우 좁은데 이 안에 넓은 터가 나타날 것 같지가 않는데 막상 엎드려 들어가니 이외도 상당히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100명 정도의 인원이 오래도록 생활하기는 어려워도 일시적으로 피신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어둡기가 칠흑 같은데 성모상이 단정한 돌 재단위에 모셔져 있다.
스탬프를 찍고 밖으로 나와 계곡과 먼 산을 바라보니 기막힌 경치다. 번지는 녹색빛에 피로가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마지막 편지
최양업 토마스(1821.3 - 1861.6) 신부는 1821년 3월 충남 청양의 다락골 인근의 새터 교우촌에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순교자의 장남으로 내어났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최양업은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던 부친을 따라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에 있는 수리산으로 이주하였다.
1835년 말 조선에 입국하여 전국을 순회하던 모방 신부에 의해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은 1836년 2월, 모방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았으며 그해 12월 동료 신학생인 김대건(안드레아)과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1837년 6월에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하여 그곳에 설립된 임시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였고 마카오에 민란이 일어나자 필리핀에 가서 수업을 받기도 했다.
1844년 12월 그는 수업을 마치고 김대건(안드레아)와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이후 1848년까지 입국을 준비하고 잇던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상해 서가회(徐家匯) 성당에서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후 12월, 조선의 밀사 신자들을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최 신부는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000여리를 걸어 3,815명의 신자를 방문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사목활동은 11년 6개월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으며, 그 외에도 최 신부는 휴식시간을 이용, 한문 교리서와 주요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글로 된 천주가사를 작성하거나 기존에 있던 가사들을 정리하여 신자들에게 보급하였다. 또한 그는 방인 사제 양성을 위해 다블뤼 신부가 세운 충북 진천의 베티 신학교에서 세 명의 학생을 가르치다가 그들을 말레이시아의 페낭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 하나 최 신부는 그동안 순회 사목활동을 마카오 신학교 때 스승 르그레즈와, 리브와 신부에게 보고하는 편지를 총 19통이나 썼다. 1860년 경신박해 당시 그는 경상도 죽림굴에서 그 마지막 편지를 썼다. 죽림굴을 떠나 다시 사목활동에 복귀한 최 신부는 결국 육신의 힘이 고갈되어 과로에다가 장티푸스까지 겹쳐 1861년 6월, 40세의 나이로 선종했고 그의 유해는 제천 배론 신학교에 모셔졌다.
언양 성당 신앙 유물 전시관에 있는 최양업 신부님의 필사본 서간문 복사본의 내용을 좀 길지만 여기에 전재한다. 이런 기록을 통해 당시의 천주교 박해과정을 생생하게 알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기록은 후세에 시성, 시복의 결정적 근거 자료가 된다. 비록 전해 내려오는 신앙담 수십 편보다 이러한 편지 한 장이 더 중요한 것이다.
예수 마리아 요셉, 리브와 신부님과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고 경애하올 신부님들, 먼저 두 분 신부님께 공동편지를 보내드리는 것에 대하여 용서를 청합니다. 이 작은 편지를, 두 분만이 아니라 모든 경애하올 신부님들께 한꺼번에 보내드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저는 박해의 폭풍을 피해 조선의 맨 구석 한 모퉁이에 갇혀서 교우들과 아무런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달 주교님과 다른 선교사 신부님들과도 소식이 끊겨, 그분들이 아직 살아계신지 어떤지 알지 못합니다. 이 편지도 중국까지 전달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그 박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끝날 기미가 아직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체포된 신자들은 많지 않고 감금된 여인들도 거의 없습니다.
포졸이 사방으로 파견되어 선교사 신부님들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할구역에서 열일곱 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남자가 열네 명이고 여자가 세 명이라는 소식이 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 밖의 교우들도 특히 이 도道의 신자들은 거의 모두 자기 마을에서 쫓겨났고, 집과 전답과 생활필수품을 전부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을 데도 없고 몸 붙여 지낼 곳도 없이 극도로 처참하게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교우들이 감옥으로 끌려간 마을에서는 포졸들이 모든 것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친척이나 친구들을 피신시켜주어 신자와 같은 운명을 당한 외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의 주민들은 같은 고장에서 함께 살아가는 천주교 신자들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대책을 세웠습니다. 곧 천주교 신자들이 마을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몰아내기로 한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신자들의 수는 대단히 많다고 추정됩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모조리 잡아서 감옥에 가둬둘 수도 없고, 일일이 재판에 회부할 수도 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깊은 산골짜기마다 꼭꼭 숨어사는 신자들을 몽땅 체포할 뜻은 없어 보입니다. 그 대신에 포졸들을 여기저기 사방에 파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든 천주교 신자들을 혼란케 하고 또 주민들을 선동하여 신자들을 핍박하도록 충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박해 방법이 저희에게는 훨씬 더 가옥하고 훨씬 더 치명적입니다.
체포된 열일곱 명 중 세 명은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왜 석방되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마 배교한 것 같습니다. 두 명은 왕도로 압송되었고, 한 명은 이 도의 수도인 대구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요즈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도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그 도시에 아주 열심한 노파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노파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리를 설명하여 많은 신자로 이루어진 교우촌을 세웠고 철저한 교리교육과 신심의 모범으로 그 교우촌을 지탱해 왔습니다. 노파는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을 때 그리스도를 용맹히 증거한 후 혹독한 매를 맞고 그 상처 때문에 순교하였습니다.
열 명이 경주 감옥에 갇혀있는데 그들은 세 차례나 문초를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문초를 당할 때마다 용감히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였고, 지금까지 감옥에서 고초와 굶주림과 병고로 처참하게 고생하면서도 신앙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 중 열여섯 살 된 소년이 있는데, 아버지와 같이 형장에 나가게 해달라고 옥사장에게 애원하였습니다. 그 소년은 다른 누구보다 더 굳세어서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으며 비신자들조차 탄복하였습니다.
스물네 살쯤 된 동정녀가 있었는데, 교리에 밝고 열심이 특출하여 모든 교우들 중에서 뛰어나므로 일반의 존경과 흠모를 받았습니다. 항상 천주님을 위하여 순교하기를 원하고 감옥에 끌려가기를 간절히 자청하였습니다. 아버지와 다른 교우들이 체포될 때 그는 포졸들 주변을 맴돌면서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친과 다른 교우들의 강요에 따라 마지못해 이웃집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두 처녀들과 함께 포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두 처녀는 하나는 열일곱 살이고 하나는 열여덟 살이었는데, 이 동정녀가 선생처럼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생활을 지도하던 처녀들이었습니다.
포졸들이 오자 그녀는 자기도 아버지와 오빠와 같은 종교를 믿고 있으니 함께 잡아가 달라고 자원했습니다. 이때 두 처녀도 동정녀를 본받아 같이 잡혀가기를 자청하였습니다.
포졸들이 세 처녀의 엄지손가락을 묶어서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없었으므로 포졸들은 그 처녀들을 관가로 데려가지 않고 농락하거나 다른 데 팔아먹으려 하였습니다. 포졸들의 속셈을 알아차린 세 처녀는 포졸들에게 자기들을 놓아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천주님께서 포졸들의 짐승 같은 욕정을 진정시키셔서 무사히 풀려났습니다.
그들 중 큰 동정녀의 이름이 아가다였습니다. 아가다는 아버지와 오빠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돌봐주는 이나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숱한 위험을 겪으면서 이리저리 헤매다니다가 결국 저에게로 피신해 왔습니다. 그녀는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탈진했고 병석에 누워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사를 신심 깊게 받은 아가다는 둘러있던 교우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임종경의 마지막 경문을 끝내자 아가다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박해 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인기가 상승하여 사방의 많은 외교인 중에서 예비자들이 속출하므로 우리는 큰 위안을 받고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저의 관할구역에서만도 세례받을 준비가 된 등록된 예비자가 거의 천 명에 이르렀을 정도입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주민 전체가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얼마나 열성적으로 배우는지 서로 경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박해로 모든 외교인이 천주교를 박멸하기 위해 무장하게 되었고, 마을마다 천주교의 인기는 뚝 떨어지고, 아직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자들은 실망하여, 많은 이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냉담자로 보입니다.
오늘까지 굳세고 용맹하게 신앙을 지킨 교우들까지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마음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나이 어린 과부나 처녀들은 더욱 큰 위험에 놓여있습니다. 벌써 한 과부 교우가 외인한테 겁탈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감옥에 갇힌 젊은 부인 한 명과 처녀 한 명도 겁탈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주님의 도우심으로 그 여자들은 순결을 보존한 채 풀려났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교우 처녀들을 어쩔 수 없이 외인들에게 정혼 시켜버렸습니다. 모든 희망을 잃고 이미 외인들과 정혼한 처녀도 많습니다. 납치와 능욕의 위험이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아가다에게 다음과 같이 허락할 수 있다고 여겼을 정도였습니다. 곧 저는 비록 기적이 없이는 굶어 죽을 것이 뻔하지만, 어떤 동굴에 숨어서 천주님의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라고 아가다에게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아가다는 이 허락을 받고서도 죽을병에 걸리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그 피난처에서 또다시 추방된 다음 저와 떨어져서 다른 구원의 피난처 없이 떠돌아다니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조씨 성을 가진 양반이요, 학자요, 상당히 부자인 한 가족이 자기 가문의 여러 후손들과 더불어 입교하기로 결심하고, 가옥과 모든 것을 팔고 나서 출생지인 고향을 떠나 십여 일 전에 교우촌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포졸들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고, 또 포졸들이 집에 불을 질러버렸습니다.
열여섯 식구가 거의 알몸으로 쫓겨나 어떤 빈집에 들어갔습니다. 이 집은 교우 가족이 살다가 포졸들의 등살에 못 이겨 버리고 떠난 집이었습니다. 조씨는 이 집에서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당분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세간살이를 장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집에서도 쫓겨나면서 모든 것을 빼앗겼고 다른 데로 피신할 수밖에 없어서 친구들에게 구걸하며 처참하게 겨우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아쉬움 없이 풍족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 착한 예비교우들은 자기의 영광스러운 불행한 신세에 대해 크게 한탄하거나 원통해 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박해의 북새통에 아직 세례받지 못한 것만이 유일한 고통이랍니다. 이 집안 식구가 열네 명인데 집에 선교사 신부님을 모셔다가 세례받을 날만 고대하고 있습니다.
조선 조정과 온 백성들은 천주교 신자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무슨 음모나 꾸미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합니다. 저들은 다음과 같이 추리합니다. "자기네 종교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좋은 종교이고, 또 천주교의 외양은 그럴듯하고 멋있게 보이는데, 그 외양 아래 흉측한 음모가 숨어있지 않다면 왜 비밀리에 전도하는가? 특히 선교사들이 남의 나라에 몰래 들어와 은밀하게 교리를 전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들의 나라가 매우 강력하다고 떠벌리나 겁낼 것이 아무것도 없을 터이다. 그들의 교리에서는 모든 이가 구원받기 위해 그 종교가 절대로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니 그들의 군주들이 그 종교의 신봉자로서 포교를 힘껏 뒷받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즉 그들 신봉자들인 군주들의 보호 아래 그 종교의 확장을 위해 조선 사람들에게 억지로라도 강요하고 밀어붙여야 한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가) 왜 합법적으로 행하지 아니하는가? (프랑스 선교사들이) 왜 공개적으로 오지 않는가? 왜 정부끼리 우호적이고 합법적으로 행하지 아니하는가? 왜 몰래 입국하여 모든 것을 비밀리에 행하다가 그다지도 처참한 지경을 당하는가?
그들의 행동방식을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반드시 무슨 흉계가 숨어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론으로 조선 조정과 백성들은 신자들과 서양 함선에 대하여 큰 경멸과 증오와 적개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자주 나타나는 서양 함선들이 천주교 신자들인 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서양 함선들을 무서워했고, 그 함선들에 굉장한 무엇이 있는 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러 해 전부터 서양 함선이 자주 나타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이제는 해적으로 여깁니다.
조선 백성들은 자기들끼리 이렇게 수군거립니다.
"저 큰 함선들은 틀림없이 해적선이거나 범죄자들의 선박이다. 만일 그 함선들이 합법적인 어떤 국가에 속한다면 어떻게 공공권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이유 없이 남의 나라에 이처럼 자주 침범할 수 있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이유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서 그 집 주인에게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나간다면 어찌되는가? 예의를 모르는 야만인이거나 강도질을 할 기회를 엿보는 도둑임이 틀림없이 않겠는가?"
모든 이가, 일반 서민이거나 시골 농사꾼들까지도 이와 같이 추리하고 이러한 의견에 모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정이나 백성이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최대의 적개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2년 안에 프랑스 함선들한테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천주교 신자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이 나라에서 말살시키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마소서. 저희 눈이 모두 당신의 자비에 쏠려있습니다. 저희의 모든 희망이 당신 자비에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천주님, 저희의 잘못과 죄과를 기억하지 마시고, 저희의 죄악대로 저희를 벌하지 마소서!
저희는 죄를 지었고 너무나 많은 불의를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저희의 불의를 헤아리신다면 누가 감히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즉 저희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옛 자비를 기억하시어, 저희와 당신의 모든 성인들의 기도를 어여삐 들어 허락하소서.
저희를 재난에서 구원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 유산을 파멸하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높은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해 전능하신 천주님과 성모님께로부터 도움을 얻어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금년에 저의 사목 순회 도중 중단된 성무집행의 연말 보고를 드립니다. 1,622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어른 203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신자들이 어른 임종자 13명에게 대세를 주었고, 예비자 398명이 등록하였습니다.
지극히 비천하고 순종하는 종, 조선 포교지 탁덕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정말 후세 신자들의 가슴을 울리는 내용이다. 요원의 불길처럼 퍼진 천주교 신자의 폭등으로 잡아 가둘 감옥이 부족하여 결국 주민을 선동하여 마을에 발을 못 붙이게 하는 이간책을 썼다. 신자로서는 관청으로부터 받는 고통보다 이웃과 동족으로부터 버림받고 눈총 받는 것이 견디기 어렵다고 호소하고 있다.
내용 중 눈에 띄는 것은 1815년 을해 박해 시 경주관아에서 행해진 박해 이야기가 있어 경주 관아가 성지로 지정되는데 일정 부분 근거가 되었고, 김 아가다의 순교사실이 나타나 있어 김 아가다가 시성되는데 결정적이 근거로 작용했다.
마지막 부분은 이 편지가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 활동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교회당국에 대해서 지칠 줄 모르는 애덕을 거듭 부탁하고 있다.
최 신부는 실제 이 편지를 쓴 이듬해 1861년 6월에 선종하게 된다. 이러한 생애로 인하여 김대건 신부를 ‘피의 순교자’라 부르고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로 부른다.
마치며
언양 성당 성전은 굳이 부산교구 유일한 고딕 석조 건물이라는 평가가 아니더라도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걸작품이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 받은 소명으로 그는 이러한 훌륭한 건축물을 만들어 후세에 전했다. 예술을 만드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다. 한 사람의 창의적 의지가 이렇게 의미 있는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언양 성당의 훌륭한 점은 이러한 외형적 건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 신앙의 중추로서 200년 교회 역사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소장품을 갖추어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는 점이 또한 돋보인다. 어떤 유적지에 가든 역사적 향기가 묻어나는 유물이 없는 곳은 공허하다. 훌륭한 성지는 이런 곳이다. 경주박물관이 없는 경주 유적지는 생각할 수가 없듯, 지난 3월에 갔던 성지 중 나바위 성당의 역사관이 그렇고, 천호성지의 성물박물관이 그렇다. 따라서 언양 성당 신앙유물 전시관은 언양 성당의 보물이다. 유물이라고 해서 무슨 거창한 것만은 아니다. 전시품 중 정성스럽게 한땀 한땀 수놓은 성작 덮개나 성작 모시 수건은 교우들의 순수한 신심이 착색된 유물로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살티 공소는 언양 지역 공소 중에서도 가장 많은 성소자를 낸 공소로 1980년대에 지은 공소 건물이라서 전통이 사라진 점이 아쉬운 느낌이 든다. 공소 건물의 복원은 진목 공소처럼 예스러운 기풍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목조 한옥의 형태는 유지했으면 한다. 초가지붕 위에 낮닭이 울어 먼 산의 산꿩 울음소리와 화음을 맞추는 한적한 정취가 그 아니 좋을까?
뭐니뭐니 해도 이번 순례에서 성취적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곳은 땀을 요구하는 죽림굴 순례였지 않나 생각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기가 쉽지 않았지만 순교자의 고행와 고통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왕도를 걷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런 마음으로 순례길을 끝까지 갔다. 농지 하나 없는 산속에서 숯 굽고 옹기 굽고 목재 도구 만들어 왕방재 험한 고개를 오르내리던 초기 교우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다. 그들의 고통스런 삶과 오늘 우리의 편안한 삶을 어떻게 연계 지어야 할지가 문제다.
이번 성지순례는 경남의 서북부, 속칭 영남 알프스 산간 지역이다.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 부산교구 초대교구장 최재선 주교 같은 교회의 큰 인물을 배출한 곳이며 70명 가까운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그야말로 성소의 못자리라고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
복음 전래 초기, 세상에 가진 것 다 내놓고 하느님을 향한 열망 하나만으로 무장하고 신심을 키워 온 곳, 신앙이니 복음이나 천국이니 하는 말들은 너무 사치스러워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도대체 산간 오지의 이러한 척박한 환경이 오히려 성소의 못자리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순교자의 피’를 빼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탑곡, 상선필, 하선필, 궁근정, 순정, 길천, 간월, 직동, 대재, 살티, 내와 등 17개나 되는 공소들, 지금 운영되는 곳만도 8곳이라는데 이들 중 겨우 세 곳을 가 보았을 뿐이다. 기회가 있으면 다 다녀보고 싶은 마음이다. 처음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지정된 성지 167곳이 수록된 책자를 보고 이 167곳만 돌아보면 국내성지 순례는 완결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완결이 아니라 시작임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 완성이라는 것은 없나 보다.
문명에 지친 도시인이 산수 자연에게 에너지를 받고 힐링을 하듯, 매너리즘에 빠진 신앙생활의 활력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도, 그리고 메마른 영성에 에너지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도 이런 산간오지 선조들의 신앙 유적을 순례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순례는 성공적이다.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