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39. 불교문화 寶庫- 간다라
‘인간 모습의 부처님상’ 1세기 후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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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우리안 사원지의 불상> |
사진설명: 파키스탄 탁실라에 있는 죠우리안 사원지에는 많은 불교유적들이 남아 있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불상을 보노라면 마음이 저절로 평안해진다. |
‘동서문화의 교차로’이자 ‘불상의 탄생지’로 유명한 ‘간다라 지방’은 불교가 인도를 벗어나 북서쪽으로 전파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관문(關門)이다. 오늘날 파키스탄 폐샤와르 지방에 해당되는 ‘간다라’는 본래 인도서북부 지역을 일컫는 오래된 명칭이자, 카불강과 스와트강이 만나 인더스강으로 유입되는 부근을 말한다. 인더스강 서쪽의,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인 동서 100km·남북 70km에 이르는 분지가 바로 그 곳이다.
‘간다라 지역’이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마우리아 왕조 아쇼카왕 때다. 호불(好佛)군주 아쇼카왕이 불교에 이바지한 공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각지에 전법사를 파견한 점. 물론 이것은 주로 남전(南傳)의 기록으로, 북전불교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다.〈마하밤사〉등에 의하면 목갈리풋타 팃사 존자는 아쇼카왕에게 말해 84,000개의 탑을 건조하게 했다. 특히 마우리아 왕조 수도 파탈리푸트라(현재 인도 파트나)의 쿡쿠다 아라마(한역 鷄園) 상가에 많은 외도 이단자가 들어와 정법(正法)을 손상시키자, 팃사 스님은 1000명의 비구들을 모아 이설을 배척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세웠다. 이것이 소위 ‘제3차 결집’이며, 이때 저술된 것이 ‘논사’(論事)라 한다.
정법을 회복시킨 목갈리풋타 팃사 장로는 아쇼카왕에게 권해 9개 지방에 전법사를 파견했다. 캐시미르와 간다라 지방(북서 인도)에는 맛잔티카(한역 末田地), 요나(그리스인이 거주하는 지방)에는 마하락키타, 히말라야 지방에는 캇사파고타와 맛자마 등 5인, 싱할라(스리랑카)에는 마힌다 이외 4인 등을 보내 부처님 가르침을 전했다. 이 때가 기원전 2세기 중반 무렵이었다.
그리스인 등 이민족 문화 융합 발전
당시 간다라 지역에 전파된 불교는 설일체유부 계통일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한다.〈불교사 1-인도·동남아시아〉(민족사에서 ‘인도불교’로 번역)의 저자 나라 야스아키(奈良康明)교수에 의하면 부처님 입적과 바이샬리에서의 제2결집(기원전 3세기 전반) 이후 불교는 서북인도로 전파됐다. 마투라 등 서북지역을 관할했던 부파(部派)가 바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때문에 마투라에서 캐시미르·간다라 등 서북인도로 전파된 불교는 ‘설일체유부 계통’으로 추정된다.
캐시미르·간다라로 전파된 설일체유부는 시간이 흐르고 교단이 발전하자, 변화를 겪는다. ‘마투라 설일체유부’와는 또 다른 ‘캐시미르 설일체유부’와 ‘간다라 설일체유부’의 성립이 그것. 캐시미르 설일체유부는 쿠샨왕조 시대 큰 발전을 이루며, 이 때가 되자 ‘캐시미르 설일체유부’는 마투라 등 중 인도에 남아있던 설일체유부 및 간다라 지역에 있던 설일체유부 그룹과는 일종의 경쟁의식을 갖게 된다. 이에 마투라 등 중인도에 남아있던 설일체유부는 본가(本家)임을 의식해 스스로를 ‘근본 설일체유부’로 명명하게 됐을 것으로 학자들은 파악한다.
인도 서북지역 불교가 이런 내적 발전을 겪고 있는 사이 서력기원 40년경 ‘쿠줄라 카드피세스’가 ‘쿠샨왕조’를 건립하고, 파르티아를 공격하여 카불, 캐시미르 지방, 간다라 지방, 남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다. 중국 측 자료엔 쿠샨이 대월지(大月氏)로 나오는데, 월지족은 원래 중앙아시아 돈황과 기련산맥 사이에 있었다. 기원전 3세기 진(秦)나라 시황제의 서호(西湖)정책에 의해 서방으로 추방된 그들은 아랄해 근방에 자리 잡고 있던 사카족(스키타이족)을 좇아, 카불(아프가니스탄 수도)에서 간다라지방으로 들어왔다.
파르티아를 공격한 쿠줄라 카드피세스에 이어 2대 ‘비마 카드피세스’도 정복을 계속해 펀잡지방과 마투라 등 서북인도까지 손에 넣었다. 중앙아시아 호탄에서 태어나 쿠샨왕조 3대 왕으로 등극한 카니쉬카는 선왕(先王)들의 유업(遺業)을 이어 파키스탄 폐샤와르에서 남으로는 인도 산치, 동으로는 바라나시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국경 내엔 인도인·그리스인·사카인·파르티아인 등 많은 이민족들이 뒤섞여 살았고, 아쇼카왕 이후 인도대륙에 출현한 최대의 왕국으로 성장한 것. 특히 당시 쿠샨왕조가 차지한 지역은 중국·로마·인도 교역의 요충지였고, 쿠샨왕조 등장 이전에 이미 그리스인을 비롯한 많은 이민족이 거주하고 있었기에, 쿠샨왕조의 번성과 함께 이들 이민족의 문화가 간다라 지역에서 점차 새로운 문화로 융합 성숙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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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탁실라 모란모라두 사원지에 있는 탑. |
‘설일체유부’에서 시작된 간다라 지역 불교도 쿠샨왕조 시대엔 벌써 대승불교로 발전한 상태였다. 게다가 불교는 그리스문화나 그레코·로마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건축이나 조각 등에 새로운 양식이 출현했다. 이른바 ‘간다라 예술’이 그것인데, 사원 건축에 있어서는 코린트식 기둥머리(柱頭)의 등장, 건축 장식에 그리스 문화의 영향이 현저하게 나타난 것 등이 대표적이다. 더구나 이 시대에 불상이 출현했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사실 불교건축이나 인물상 등에 있어서 그리스·로마미술의 영향은 이미 파르티아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1세기 후반. 안식국)에도 보인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파르티아를 살펴보자. 파르티아인들도 불교에 귀의했다. 중국에 불교를 전한 스님 가운데 안식국(安息國) 출신이 많았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안세고(安世高)스님. 안식국의 왕자였던 스님은 출가해 소승불교를 공부하고, 후한 환제(재위 146~167) 때 중국에 도착해〈아함경〉등을 번역했다. 안식국 출신의 안현(安玄)도 후한 영제(재위 168~189) 시대 중국에 들어와 많은 경전을 역출했다.
헬레니즘 문화 영향으로 불상 조성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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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탁실라 박물관에 있는 사색하는 듯한 부처님상. |
그러나 파르티아가 간다라 지역의 패자(覇者)일 무렵엔 불상이 등장하지 않았다.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간다라에서 불상(佛像) 조각이 등장한 것은 기원후 1세기 후반 경이다. 쿠샨왕조 전기에 해당되는데, 이후 2세기 동안 간다라 지역에선 수많은 불상들이 조성됐다. 주지하다시피 인도 산치대탑 등에는 부처님 없는 ‘부처님 전생이야기’(불전도) 등이 조각됐다. 위대한 분을 감히 인간의 모습으로 구체화 시킬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던 것이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거의 동시에 ‘인간의 형태’로 부처님이 묘사되기 시작했다.
탄생된 불상은 불전도(佛傳圖)에서 벗어나 점차 독립되기 시작했다. 부처님 모습이 크게 부각됐으며, 마침내는 부처님 단독상이 제작되는 것으로까지 발전했다. ‘단독의 부처님상’은 예배대상이 되는 것이기에, 불전도 속에 표현된 것과는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이전의 주된 예배대상이 불탑이었다면 불상의 탄생 이후엔 서서히 불상으로 주된 예배대상이 변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불전도 속에 불상이 등장한 것이 ‘그리스 등에서 온 조각가의 착상’(헬레니즘 문화 영향설)에서 유래하는 것인지, 부처님의 구제를 원하는 재가자의 신앙 등 ‘교리 발전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간다라 토착설)인지는 아직까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여하튼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들을 조형화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헬레니즘 세계의 사고방식이 간다라 지방에 먼저 불상조성의 금기(禁忌)를 깨트리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했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간다라 초기불상에 보이는 치렁치렁한 머리칼 묘사 등에 그리스적인 표현의 기미가 있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처럼 불상이 탄생되고, 대승불교가 흥기한 간다라는 불교문화사나 불교사에서 ‘대단한 의미’를 가진 지역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 간다라 지방의 중심 축 가운데 한 곳인 파키스탄 탁실라에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이 2002년 4월20일 도착한 것이다. (탁실라 유적 소개는 다음 호부터).
파키스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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