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송씨 최초의 족보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9호
여산송씨 족보는 1653년(효종 4) 송희업이 간행하였다.
여산송씨 족보는 1606년에 송언신(1542-1612)이 처음으로 편찬하여 1610년에 송일이 청주에서 1책으로 간행하였고, 그 뒤에 이를 송희업이 보완, 상하 2책, 226장으로 편찬하여 1653년에 간행한 것이다.간행 당시 여산의 월봉사에 약간을 내려 보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1653년에 간행된 족보가 또 있을 가능성이 많다,
현전하는 족보 중 17세기 이전 족보가 별로없는 상태라는 것을 고려하면 1600년대에 간행된 이 족보는 희귀본 으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시조 송유익 이하 19세까지 기록하고있고, 본편 외에 추록(追錄) 2권이 추가 되어있다. 한 면을 세로로 6칸으로 추가되어 있고, 적서(嫡庶)는 구분하지만 남녀는 구분하지 않은 채 출생순서에 의해 기록하고 있으며 다른 성씨의 경우(딸의 후손) 4대까지 기록하고 있다. 14세까지는 양자 입양 사실이 거의 보이지 않고 14세 이후에야 양자 입양이 기록되고 있다.
기재양식의 이러한 특징은 당시 여산송씨 문중의 가족제도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출생순서에 의한 기록은 조선 초기 족보에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17세기 중엽까지도 장자상속제도가 완전하게 정착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와 함께 딸의 후손을 4대까지 기록하는 것 역시 18세기 이후의 족보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남녀 차별이 덜 하였다는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족보를 통해 17세기 이후에야 양자제도가 생기기 시작하였다는 사실도 또한 알수있다.
본관의연관
시조 추밀원부사공 휘(諱) 유익(惟翊)의 묘
* 위치 : 전북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성씨는 비록 그형태는 다를지라도 동서양 어느 민족간에도 있기 마련이다,
특히 동양민족간의 성씨에는 모두 공통된 바가 있는데, 그중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성씨의 시초(始初)는 문헌상(文獻上) 중국(中國)에서 기원된 것으로 알려진다,
지금까지 밝혀진 한국성씨(姓氏)의 시조(始祖)의 출현 배경에는 몇가지 유형이있다,
첯째는 신화와 전설에 의한 시조(始祖)의 출현이요,
둘째는 원시부족사회 시대에 있어 부족을 다스리는 장(長)을 시조(始祖)로 하는 성씨요,
셋째는 중국(中國)에서 한반도로 귀화한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요,
넷째는 봉건 왕조시대에 국왕으로부터 사성(賜姓)을 받은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그것이다,
이중에 첯째 유형은 시조가 곧 그성씨의 기원이 되겠으나, 나머지는 모두 그성씨의 상계(上系)를 찿아보아야 그 기원을 알수있다, 문헌상으로 송씨는 중국 주무왕(周武王)이 미자(微子)를 송(宋)에 봉(封)하여 자성(子姓)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관성은 여산(礪山), 은진(恩津), 진천(鎭川), 연안(延安), 홍주(洪州), 신평(新平), 서산(瑞山), 야성(冶城), 청주(淸州) 등 제송씨(諸宋氏)이고,오늘날 고문헌등에 나타난 송씨(宋氏)의 관향은 무려 172본이나 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여기저기 흩허저 살면서 관적(貫籍)을 상실했거나, 또는 특수사정으로 인하여 현주지(現住地)를 관향으로 하고 그중에서 걸출한 인물을 관조(貫祖)로 삼는 예도있다,결론적으로 한국내에 현존하는 모든송씨(宋氏)중에서 남양송씨(南陽宋氏)를 제외한 여타(餘他)의 송씨는 중국당대(唐代)에 우리나라로 귀화한 것으로 보인다,우리 여산송씨(礪山宋氏)는 휘(諱) 유익(惟翊)을 시조(始祖)로하며, 휘(諱) 천익(千翊)의 후손에서 은진군(恩津君) 휘(諱) 대원(大原)을 시조로하는 은진송씨(恩津宋氏)가 있고,그외 서산(瑞山), 진천(鎭川), 야성(冶城), 신평(新平) 등 10여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여산(礪山), 은진(恩津), 진천(鎭川)송씨에서 분리되었다고 한다, 우리 여산송씨(礪山宋氏)의 시조(始祖) 휘(諱) 유익(惟翊)은 고려조의 진사(進士)로 상계와 자세한 세적은 전하지 않으며, 벼슬하기를 꺼려해서 고향에 은거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의아들 휘(諱) 숙문(淑文)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름으로써 공에게 추영(追榮)의 은전(恩典)이 내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追增)되었다, 본관은 공의 증손인 정렬공(貞烈公) 휘(諱) 송례(松禮)가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 여량은 지금의 여산)에 봉해짐으로써 3대(代)를 은청광록대부(銀靑光綠大夫)로 추봉(追封)하였다,
그러므로 휘(諱) 유익(惟翊)을 시조로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중흥하였다,
세거지와 변천
시조공(始祖公) 휘(諱) 유익(惟翊)의 묘소가 전북 익산(益山)에 있고, 3세 휘(諱) 희식(希植)아래로 개성 (開城), 장단(長端), 양주(楊州) 등 경기지역에 선산들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무렵부터 경기일원에 살았던것 같다,원윤공파(元尹公派)는 원유공 휘(諱) 운( )의 장남 휘(諱) 선(璿)이 태종비(太宗妃)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외조(外祖)로 삼중대광여량군(三重大匡礪良君)에 봉해졌고 그 후계(後系)가 대구(大邱)에 세거(世居)했다, 휘(諱) 선(璿)의 8세손인 휘(諱) 익필(翼弼)의 선대는 황해도 백천(白川)에 거주 한것으로 보인다,
공은 현 고양시(高陽市)에 살다가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피화시(被禍時)에 형제인 부필 (富弼). 한필(翰弼)을 잃고, 유배생활을 하다가 사면되어 당진군 당진읍 마양촌에 잠시 머물러 살았다, 뒤에 자손들이 점차 산거(散居)해 갔으며, 후손이 당진군송악면에 많이 살았다, 원유공 6세인 충강공(忠剛公) 휘(諱) 간(侃)은 단종 손위(端宗遜位) 때에 영월(寧越)에 복명(復命)하고 계룡산에서삼상(三喪)을 마친 후 흥양(지금의 고흥)으로 가 살았고, 공의 자손이 전국각지에 산거했다, 충강공의 아우 휘(諱) 시(시)는 형님과 더불어흥양에 가서 살았으므로 후손이 흥양에 거주하였으며, 충강공의 아우 휘(諱) 희(僖)도 흥양에 은거하였고 공의 자손은 강진(康津)에 세거하였다,
충강의 재종제(再從弟) 휘(諱) 경원(慶元)은 단종 손위(簞宗遜位) 때 임실(任實)에 잠적(잠적)하여 그 자손이 그곳에 자리잡았다, 원유공의 증손(曾孫) 충정공(忠靖公) 휘(諱) 거신(居信)은 태종(太宗)의 잠저(潛邸) 때 구명지공(救命之功)으로 대현(大顯)하고 그자손이 파주(坡州)와 고양(高陽), 단산(端山), 장흥(長興) 등지에 터를 굳혔다, 원유공의 손자 휘(諱) 빈(빈)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전북 부안에 예장(禮葬)되었으니, 그 자손이 부안(扶安), 제주 (濟州) 등지에 뿌리를 내렸다, 원유공의 5세손 휘(諱) 문(文)은 덕산군(德山君)에 봉(封)해지고 그 후 영남으로 가 터를 잡았으므로 그 자손이 영주(榮州), 봉화(奉化), 횡성(橫城)에 나누어 살았다, 원유공의 손자 동주공(東洲公) 휘(諱) 극명(克明)은 단종 손위시에 동래(東萊)로 퇴거하였으므로 그 자손이 동래(東萊), 부산(釜山)김해 등지에 세거하였다,
밀직공파(密直公派)는 밀직공 휘 방영(邦英)의 손자 휘 인수(仁壽)의 자손이 철원(鐵原)으로 옮겨갔으며 밀직공의 5세손 휘(諱) 승은(承殷)이 단종(1453)에 처자를 이끌고 남하하여 경남 김해군(金海郡) 하계면(下界面) 에 살기 시작했으므로 이들지역에 나뉘어 살았다, 그리고 밀직공의 9세손 휘(諱) 득길(得吉)이 지금의 청송군(靑松郡) 진보(眞寶)로 이거(移居) 했으므로 후손이 그곳에 살았다,
또한 소윤공파(少尹公派)는 소윤공 휘 원미(元美)의 6세손 휘(諱) 석종(錫宗)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을 피하여 고부(古阜)에서 화순군 동면 천운산(和順郡東面天雲山)에 들어가 살았다, 소윤공의 4세손인 증도승지공(贈都承旨公) 휘(諱) 륜(倫)과 공의 아들인 휘(諱) 극창(克昌), 득창(得昌)이 단종조계 유정난(癸酉靖難)을 목격하고 지금의 전북 김제시 금구면(全北金堤市金溝面)에 은거(隱居)한 이래 자손들이세거해 왔다, 휘(諱) 득창(得昌)의 후손 중에서, 소윤공 11세손 휘 설(薛)이 만년에 김제 (金提)에서 옥구(沃溝)로 이거한 뒤에 그곳을 세거의 터로 삼아 왔다, 또 소윤공의 14세손을 전후하여 평북 위원(渭原)에 정착한 자손들도 있었다, 한편, 시조의 5세손 문숙공(文肅公) 휘(諱) 염(琰)의 동생인 양의공(良毅公) 휘 분( )의 자손들 중에서 지신공파(知申公派)는 지신공 휘 (諱) 린(璘)의 차남인 수운공(睡雲公) 휘(諱) 교(郊)가 만년에 전북 정읍(井邑)에 속해있는 고부(古阜)로 퇴거한 이래 그곳에 많은 자손들이 살았고, 지신공파의 10세손 휘 천종(千種)의 대에 일부가 전남 무안(務安)으로 옮겨갔으므로 이들 지역에 나뉘어 살았다,
수운공 휘(諱) 교(郊)의 동생 휘(諱) 령(玲)은 여말(麗末)에 농보진(籠堡鎭)에 유배되었다가 고려가 망하자 그곳에 자리를 굳혔고, 3남 (諱) 정(程)에서 비롯된 자손들이 강원도 강릉(江陵), 경남 동래(東萊), 평북 평원(平原) 등지에 산거하였다, 정가공파(正嘉公派)는 정가공휘(諱) 서(瑞)의 9세손 휘(諱) 춘부(春富)의 후손이 수원(水原)에, 정가공의 7세손 휘(諱) 식(軾)의 후손은 충남 아산(牙山)에, 정가공의 11세손 휘(諱) 덕동(德東)의 후손은 연기(燕岐)의 전동(全東)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정가공의 10세손 휘(諱) 유경(惟敬)이 흥양(興陽)에서 살다가 영남지역으로 옮겨갔고 아들대부터 진주(晋州)에 정착했다, 정가공의 7세손 회양부사(淮陽府使) 휘(諱) 자강(自剛)이래로 일부 자손들이 경북 예천(醴泉)에 살다가 정가공의 10세손 휘 경승(敬勝)의 후손이 충남 당진(唐津)에 이거했고. 휘(諱) 흥려(興礪)가경주(慶州)에 살기 시작했다, 정가공의 12세손 휘(諱) 신량(愼良)은 제주(濟州)로 유배되어 그곳에 자손이 세거하게 되었다,
정가공의 6세손인 휘(諱) 세휘(洗輝)는 연산 정란(政亂) 때에 상주(尙州)로 피하여 자리를 잡았으며, 휘(諱) 철석(鐵石)은 연산(連山)에서 길주(吉州)로 이거한 후에 그곳에서도 자손들이 살았다, 그리하여 전남 고흥군(全南高興郡) 일원, 강원도 화천군(江原道華川郡) 일원,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慶畿道華城郡雨 汀面), 충남 부여군충화면(忠南扶餘郡忠化面), 전북 임실(全北任實), 정읍(井邑), 김제(金提) 일원, 경북 칠곡군 북산면(慶北漆谷郡北山面), 제주도 남제주군(濟州道南濟州郡), 평남 용강군(平南龍岡郡) 일원에 많은 자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관향의 연혁
무릇 인간은 환경적 소산(所産)이요 역사적 산물이다,
전해오는 고어(古語)에 [인걸(人傑)은 땅의 영기(영기)로 태어나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우리역사상 여상송씨(礪山宋氏)는 어느송씨 못지않게 많은 현신(賢臣)과 석학(碩學)을 배출하였다,
특히 고려 후기 원종대(元宗代)의 정렬공(貞烈公) 휘(諱) 송례(宋禮) 때에 가문이 성장하기 시작하여 조선조에만 상신(相臣) 2명, 왕비 1명, 청백리 1명, 공신 5명, 문과 급제 104명을 배출하는 등 지금에 이르기까지 숱한 고관, 대작들을 배출한 대성(大性)이다, 따라서 우리송씨 세거지(世居地)요, 문화유산의 집단지인 여산(礪山)은 누대(累代)로 많은 명현달사(明賢達士)를 배출하고 충(忠).효(孝).열(烈)과 선비 정신의 기운이 가득한 자랑스러운 우리의 관향이다,여산의 연혁을 살펴보면 본래 마한의 지역으로 백제 때는 지량초현(只良肖縣)이라하였고, 통일 신라시대에는 여량현(礪良縣)으로 개칭되어 덕은군(德殷郡)에 속하였다, 고려 1012년(현종 3)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이 나주로 파천(播遷)할 때 여량을 거쳐 남행했다, 이 지방은 지방 교통의 중심지로써 전공주도(全公州道)에 속한 많은 역참(驛站)이 산재하여 있었다,
1018년(현종 9) 전주(全州)의 속현이 되었고. 1391년(공양왕 3) 감무(監務)를 두어 낭산(朗山). 공촌부곡(公村部曲). 피제부곡(皮堤部曲)을 병합하였다, 조선 1400년(정종 2) 여량과낭산을 합하였으며, 1402년 (태종 2) 여산향교가 창건되었고, 1404년(태종 4) 여산현(礪山縣)으로 개칭 되었다, 1436년(세종 18) 태종의 비(妃)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의 외향(外鄕)이라하여 군(郡)으로 승격 되었다가, 1699년(숙종 25)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본관이라 하여 부(府)로 승격되어 도호부사(都護府使)가 임명되었다,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이곳 여산에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고 정홍명(鄭弘溟)을 호소사(號召使)로 임명하여 많은의병을 모아 청주, 과천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운 (漕運)의 거점지로 중시되어 옹포(옹浦)에 덕성창(德成倉), 성당포(聖堂浦)에 성당창(聖堂倉)이 있었으며, 남해에서 서울로 연락되는 함열(咸열)의 소방봉 봉수대(所方烽峰燧臺)와 용안의 광두원 봉수대(廣頭院烽燧臺)가 있는 등 군사상으로 중시되던 지역의 하나였다, 1985년 전주부 여산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북도 여산군이 되었다, 일제시대인 1914년 군면 통폐합시 여산군, 천동면, 천서면, 군내면이통합되어 여산면이 되었다,
여산면은 익산시(益山市)의 동부에 있으며 면적은 36,64㎢이다,북부에 단제산, 동쪽으로 완주군(完州郡)과의 경계에 천호산, 서남쪽으로 금마면(金馬面)과의 경계에 용화산이 솟아 있는 등 지역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저 있는 반면에 충적평야는 북부의 여산천 유역에 약간 형성되어 있을뿐이다, 주산업은 농업이며 천호산에는 석회암이 매장되어 있다, 교통은 호남 고속도로가 면의 중앙을 통과하고 있으며, 면의 중심부인 여산리는 호남고속도로에 인접하여 있고, 강경- 연무간의 교통의 요지로써 이리-논산간의 국도가 통과하고 있다, 호산리에 천년기념물인 천호동굴이 있고 여산리에 여산향교가 있다, 여산을 관향으로하는 우리 후손의 정신속에는 선현(선현)들의 효열의 성품, 나라가 어려울때 백성과 함께 의연히 나서서 나라를 구한 충정, 벼슬에 연연치 않았던 청렴한 선비정신이 한민족의 역사 속에 저류가 되어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송씨의 본관 연혁
우리나라 송씨의본관(本貫)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여산(礪山),은진(恩津),진천(鎭川),김해
(金海),신평(新平),연안(延安),서산(瑞山),야로(冶爐),남양(南陽),태인(泰仁),옥구(沃溝),청주(淸州),쌍부(雙阜),덕산(德山),안산(安山),죽산(竹山),강음 (江陰),복흥(福興),견주(見州),강화(江華),하음(河陰),광주(光州),여흥(驪興),사천(沙川),풍양(豊壤),파산(坡山),수원(水原),용성(龍城),사량(沙梁),주석(株石), 공이(工二),이천(利川),풍덕(豊德),덕수(德水),임진(臨津),인천(仁川),장서(長瑞),송림(松林),삭녕(朔寧), 고봉(高峯),마전(마田),영평(永平),양천(陽川),용인(龍仁),진위(振威),연천(連川),충주(忠州),공주(公州), 양화(良化)여양(驪陽),청풍(淸風),단양(丹陽),안읍(安邑),화변(화邊),한산(韓山),천안(天安),온양(溫陽), 대흥(大興),문의(文義),이성(이城),음성(陰城),정산(定山),채운(彩雲),연산(連山),청양(靑陽),직산(직山), 연풍(延豊),회덕(懷德),회인(懷仁),예산(禮山),전의(全義),전주(全州),나주(羅州),반남(潘南),압해(押海), 능주(凌州),남원(南原),순천(順川),담양(潭陽),익산(益山),화변(禾邊),우일(雨日),금산(金山),안성(安城), 영광(靈光),적성(赤城),대안(大安),진량(陣량),유등(柳等),임피(臨陂),회미(澮尾),운제(雲梯),인의(仁義), 고창(高敞),흥덕(興德),남평(南平),흥양(興陽),남양(南陽),마령(馬靈),옥과(玉果),해남(海南),죽산(竹山), 사라(紗羅),보안(보安),경주(慶州),비안곡(比安谷),안동(安東),상주(尙州),진주(晉州),성주(星州),창원(昌原),대구(大丘),하빈(河濱),동래(東萊),밀양(密陽),선산(善山),청송(靑松),순흥 (順興),하청(河淸),협천(협川),영천(永川),함양(咸陽),유실(有實),경산(慶山),의성(義城),문경(聞慶),가을산(加乙山),단성(丹城),단계(丹溪),하양(下陽),용궁(龍宮),칠원(漆原),함창(咸昌),령(高靈),현풍(玄豊),영산(靈山),창녕(昌寧),능천(能川),강릉(江陵),원주(原州),철원(鐵原),사탄(史呑), 회양(淮陽),영월(寧越),이천(伊川),낭천(狼川),금화(金化),평강(平康),사정(史丁),해주(海州),평산(平山),풍천(豊川),수안(遂安),백천(白川), 신계(新溪)청송(靑松),함흥(咸興),영흥(永興),등주(登州),복영(福靈),평양(平壤),정주(定州),덕천(德川),벽동(碧潼), 강서(江西),양덕(陽德),여산(礪山 : 二下邑屬未 ),진원(鎭原),청천(靑川),월곡(月谷),단성(丹城),제주(濟州)등 172개 본이나 전해지고 있으나, 여산(礪山),은진(恩津),진천(鎭川),남양(南陽),김해(金海),덕산(德山),문경(聞慶),신평(新平),야성(冶城),양주(陽州),연안(延安),용성(龍城),철원(鐵原),청주(淸州),홍주(洪州) 등 20여 본관 만이 현존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중에서도 여산(礪山),은진(恩津),진천(鎭川)등 세 송씨가 전체의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밖의 송씨는 거의가 여산이나 은진에서 분파되었다고한다,
여산송씨의 분파현항
여산 송씨는 시조(始祖) 유익(維翊)의 4세손 여량부원군 송례(松禮)의 장남 염(琰)의 아들 대(代)에서 3개파, 차남 분(분)의 아들대(代)에서 2개파, 총 5개파로 나뉘여진다,
파조(派祖)와 파명(派名)은 다음과같다,
○ 휘(諱) 염(琰)의 후손
송운(宋운) : 원윤공파(元尹公派)
송방영(宋邦英) : 밀직공파(密直公派)
송원미(宋元美) : 소윤공파(小尹公派)
○ 휘(諱) 분(분)의 후손
송린(宋璘) : 지신공파(知申公派)
송서(宋瑞) : 정가공파(正嘉公派) TEL 02) 733-8737
TEL 02) 733-6626
여산송씨 분파별 항렬표
정가공파